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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54)화 (54/164)
  • 54화. 뜻밖의 재회

    2020.09.07.

    "와, 정말 신기해. 진짜 뭐가 있네. 그런데 너, 어떻게 안 거야? 진짜 소리가 들렸어?"

    "……."

    "미카엘?"

    크리스가 미카엘을 살짝 흔들었지만 미카엘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무엇에 홀린 양, 소년은 한 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미카엘!"

    "어? 어? 나 불렀어?"

    "뭔데, 그렇게 열심히 봐?"

    "그게, 그냥……."

    말끝을 흐리면서도 미카엘은 도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에는 검은 점 같았던 인영은 부쩍 가까워져 있었다.

    "말을 타고 있네? 누구지? 너희 삼촌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은 값이 비싸 마을 내에선 쉽게 볼 수 없었다. 가끔 찾아오는 제임스나 타고 올 뿐이었다.

    "촌장님께 알려야 하나? 어른들이 그랬잖아. 낯선 사람이 오면 알려야 한다고."

    "……."

    "미카엘!"

    "……."

    "야, 미카엘!"

    크리스가 다시금 미카엘을 흔들었다. 미카엘은 그제야 번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거칠게 저었다.

    "너, 오늘 진짜 이상하다?"

    "미안. 일단 촌장님한테 가자. 가서-."

    앞을 막아선 장애물에 아이들의 걸음이 그대로 멈췄다. 아이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제 앞을 막은 장애물을 올려다봤다. 태양을 등진 사내는 그늘져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동공이 가는 기묘한 눈동자만큼은 짐승의 그것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아무래도 마을에 사는 아이들 같습니다. 수상한 건……."

    뒤이어 따라온 갈색 머리 사내가 미카엘과 시선이 마주치곤 말끝을 흐렸다.

    "……너, 몇 살이지?"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크리스는 잔뜩 울상이 되어 미카엘 뒤에 숨었다. 미카엘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쥔 채로 금안의 사내를 올려다봤다.

    "그건 왜 물으시는데요?"

    "……내가 아는 사람과 많이 닮아서."

    사내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미카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미카엘은 마른 침을 삼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살피는 시선이 집요한데, 도무지 도망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이대로 등을 보이면 안 된다는 두려움에 심장만 쿵쿵 빠르게 뛰었을 뿐이다.

    "찾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찾고 있는 사람이요? 그게 누군데요?"

    애써 당당하게 가슴을 폈지만 떨리는 몸을 멈출 순 없었다. 별반 표정 없는 얼굴인데도 그냥 무서웠다. 금안의 사내를 둘러싼 공기만 서늘할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아이들입니다. 그렇게 위협적으로 말씀하시는 건……."

    "뭐가 위협적이라는 거지?"

    "……아닙니다."

    갈색 머리 사내는 멋쩍게 웃고는 말에서 내렸다. 그는 지금껏 미카엘이 만나본 사내 중에서 가장 컸다, 아니. 정확히는 방금 전까지만 그랬다. 갈색 머리 사내에 이어 말에서 내린 금안의 사내는 그보다 훨씬 커 절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놀라게 해서 미안한데, 괜찮다면 우리를 도와줄 수 있겠니? 사례는 섭섭하지 않게 하마."

    "사례가 뭔데요?"

    "음, 그게 말이다……."

    갈색 머리 사내가 미간을 찡그린 사이, 금안의 사내가 성큼 앞으로 나섰다. 그와 함께, 두 아이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가까이서 보면 볼수록 금안의 사내는 너무도 크고 위협적이었다.

    "사람을 찾는데 도움을 주면 이걸 주지."

    금안의 사내가 제 옷에 달린 장신구를 떼어 내밀었다. 미카엘은 사내가 내민 물건을 바라보다가 꿀꺽 침을 삼켰다. 태양 아래, 반짝이는 보석 브로치는 예뻤다. 엄마의 가슴팍에 달아주면 퍽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내가 원하는 사람을 찾으면 몇 개 더 주지."

    아이의 욕심을 알아차린 금안의 사내가 빠르게 덧붙였다. 미카엘은 제 옷을 당기는 크리스를 모른 척하며 조심스럽게 브로치를 집어들었다.

    "좋아요. 그 대신, 찾는 사람 찾으면 아저씨가 하고 있는 거 다 주시는 거예요?"

    "……."

    "꼬마야, 이분은 아저씨가 아니라-."

    "호칭 같은 건 됐어."

    금안의 사내가 무심히 고개를 저었다. 미카엘은 눈치를 슬쩍 보면서도 자꾸만 사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손에 쥔 브로치 때문일까, 어쩐지 방금 전보다 그가 무섭지 않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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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아저씨, 정말로 우리 엄마를 알아요? 어떻게 알아요?"

    "……."

    "왜 자꾸 제 말 무시해요? 제 말 안 들려요?"

    "……."

    "치이……."

    아무리 떠들어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으니 영 재미가 없다. 미카엘은 결국 떠는 걸 포기하고 고개를 들어 금안의 사내를 빤히 올려다봤다. 같이 말을 타고 있어 어쩔 수 없이 사내에게 기대게 되었지만 그 사실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단단하게 뒤를 받치고 있는 존재가 기꺼웠다.

    "다 왔어요. 저기 보이는 곳이 저희 집이에요."

    미카엘은 검지 끝으로 낡은 오두막을 가리키며 배시시 웃었다. 금안의 사내는 대답 대신,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고사리 같은 손이 나아가는 사내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뭐 하는 거지."

    "저도 내려주셔야죠."

    "……."

    금안의 사내는 잠시 이를 악물었다가 미카엘을 들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미카엘은 제 발이 땅에 닫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달려갔다.

    "엄마!"

    아이의 외침에 펄럭이는 빨래 사이에서 빼꼼히 적갈색 머리가 엿보였다. 금안의 사내, 카벨레누스는 그 자리에 우뚝 선 채로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봤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타고 시선을 옮기면 그 끝에는 꿈에도 그리던 얼굴이 있었다.

    "오늘은 일찍 왔네. 우리 아드님."

    여자가 웃고 있다, 그것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카벨레누스는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뜨거움을 이기지 못하고 이를 꽉 물었다. 아이를 향한 여자의 시선을, 손길을 눈으로 좇을 때마다 자꾸만 숨이 턱턱 막혔다. 이제야 비로소 그녀의 선택이 보였다. 그녀는 돌아오지 못한 게 아니었다. 돌아오지 않은 것이었다. 자신이 아닌, 아이를 선택했으니까. 지난 8년, 사내의 모든 시간에는 여자가 있었지만, 그녀의 시간에 사내의 자리는 없었다. 그 사실에 가슴이 철렁했다. 지금껏 우악스럽게 버텨오던 시간들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리는 것만 같았다.

    "엄마, 내가 오늘 뭘 얻었는지 봐봐!"

    "그게 뭘까? 엄마 주려고 예쁜 꽃이라도 따왔……, 이게 뭐야. 미카엘, 너 이런 게 어디서……."

    "저 아저씨가 줬어."

    "아저씨?"

    눈이 마주쳤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두 팔을 벌려 아이를 끌어안았다. 쿵쿵.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이 제 것인지, 뜀박질을 하다 온 아이의 것인지 그녀로선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아이를 안은 알리시아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역시 그대의 아이였나."

    사형선고처럼 떨어진 목소리에 알리시아는 일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땀방울의 감각이 유독 섬찟해 자꾸만 몸이 움츠러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무작정 달려서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하나, 제 품에는 아이가 있었다.

    "뭐, 상관없지."

    카벨레누스는 성큼성큼 알리시아를 향해 걸어갔다. 알리시아는 무의미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카벨레누스에게 보이지 않도록 어설프게 아이의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붉은 기가 감도는 갈색 머리와 잿빛 눈동자를 물려받았음에도 아이는 그녀가 아닌, 다른 이를 더 닮아 있었다. 사내가 그 사실을 알아차릴까 두려웠다. 그는 미카엘이 태어나기도 전에 아이를 죽이려고 했었다. 지금이라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알리시아."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도 두 뺨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 같아 알리시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과거의 알리시아는 사내가 저런 식으로 제 이름을 불러주는 걸 좋아했다. 그럴 때마다 무심한 사내의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미소가 감돈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제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더라도 웃어주지 않겠지만.

    "내 앞에서 고개 숙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단단한 손이 알리시아의 턱을 들어 올렸다. 피부에 닿은 타인의 체온에 알리시아는 괜히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눈가가 시큰거려 눈에 힘을 주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명령이 익숙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그녀에게 닿았던 사내의 손길은 예나, 지금에나 변함없이 조심스러웠다. 그 사실에 자꾸만 목이 메어왔다.

    "아이 앞이에요."

    이제 잊을 만도 하건만, 익숙해진 손길은 너무도 쉽게 과거의 기억을 되살린다. 알리시아는 억지로 사내의 손을 밀어냈다.

    "내가 뭘 했다고."

    진짜 하고 싶은 건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카벨레누스의 입매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돌아가세요. 이제 와서 달라질 건 없어요."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의 시선을 피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시선은 한 곳에 꽂혀 있었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녀는 더욱 목이 탔다.

    "달라질 게 없다?"

    카벨레누스가 웃었다.

    "하, 그래. 맞아,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지."

    사내의 양손이 알리시아의 어깨를 꽉 쥐었다. 알리시아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녀의 얼굴에 쏟아지는 시선이 지독하리만큼 집요했다.

    "그대만 돌아오면."

    카벨레누스의 입술이 그를 밀어내려는 알리시아의 손등에 닿았다. 알리시아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돌리려고 했으나, 소용없었다. 그녀는 그 입술이 선사했던 온기 또한, 여전히 잊질 못했다.

    "돌아가자, 알리시아."

    사내의 손이 알리시아의 뺨을 어루만졌다. 오랫동안 검을 잡아 검의 손잡이 모양대로 못 박힌 손은 그의 신분과 어울리지 않게 거칠었다.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쇠 냄새가 났다.

    "……아이가 있어요."

    "아이 따위가 신경 쓰였으면 이렇게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카벨레누스의 눈동자가 미카엘을 향했다. 서슬 퍼런 시선에 알리시아는 좀 더 아이를 제 쪽으로 끌어안았다.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저는 아이에게 부끄러운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아요. 전하께는 이미 부인이 있으실 테고……."

    "부인?"

    알리시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내가 이를 으드득 갈며 그녀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입술에 닿은 타인의 숨결에 일리시아는 반사적으로 숨을 삼켰다. 입술을 쓸어내리는 사내의 숨이 유난히도 뜨겁게 느껴졌다.

    "하! 그래. 오늘 부인이 생길 예정이긴 하지."

    사내는 입매를 일그러트린 채로 알리시아를 노려봤다.

    "가제프."

    "네, 주군."

    "아이를 데려가."

    알리시아가 카벨레누스의 말뜻을 이해하기 전에 그가 먼저 한 손을 올렸다.

    "엄마!"

    "미카엘!"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아이가 울먹거리며 어미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알리시아는 멀어지는 미카엘을 쫓으려 했지만, 이내 단단한 팔에 막혀야 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돌려줘요! 내 아이예요! 내 아들이라고요!"

    "걱정하지 마. 죽이진 않을 테니. 이제부터 고귀한 핏줄이 될 아이를 함부로 할 수 있나."

    "카벨레누스!"

    "……나는 이런 상황이 되어야만 그대에게 내 이름을 들을 수 있는 모양이군."

    사내는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삐딱하게 세웠다. 알리시아는 입술 꽉 깨문 채로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나는 결정을 번복하지 않아. 아이를 되찾고 싶으면 내 아내가 돼. 그대가 내게서 아이를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야."

    "……그 아이가 누군 줄 알고요?"

    "그딴 게 중요했으면 이렇게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카벨레누스."

    알리시아가 물기 어린 눈으로 사내의 팔을 잡았다. 그가 보내는 싸늘한 시선은 익숙하지 않았으나 아이를 생각하면 피할 수 없었다.

    "다른 사내의 아이라도 상관없어. 피가 섞이지 않았더라도, 설령 역적의 자식이라도 내 아이로 키워주지."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를 전하의 핏줄로 키우시겠다고요?"

    "그래."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 알리시아는 숨 쉬는 것도 잊고 눈앞 사내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 순간에도 그녀를 오롯이 담아낸 황금색 눈동자는 여전히 태양처럼 눈부셨다. 그 찬란함에 눈이 멀어버린 지난 세월처럼.

    "더는 아이 핑계를 대며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

    알리시아의 어깨를 움켜쥔 사내가 굶주린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나는 지금도 내게서 그대를 앗아간 저 작은 생명체를 으스러트리고 싶은 걸 겨우 참고 있으니까."

    알리시아는 밀려드는 울음을 삼켜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 굳은살이 징처럼 박힌 커다란 손에 잡힌 살갗이 델 듯 뜨거웠다.

    "내 아이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아무리 당신이라도 용서하지 않아요."

    "말했잖아. 다치게 하지 않는다고. 내 아이로 키워주겠다고."

    카벨레누스는 미소를 지으려고 애쓰다가 결국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8년만의 재회였음에도 반가움이 아닌, 서로를 향한 날 선 말들을 토해내고 있다는 사실이 끔찍했음에도 말을 멈출 수 없었다. 잠깐 보았음에도 한눈에 알아봤다. 알리시아의 말투, 행동, 그 모든 것에서 묻어나는 아이를 향한 애정을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알리시아의 전부는 자신이 아닌, 저 조그마한 아이였다. 자신은 무슨 짓을 해도 저 조그마한 생명체를 이길 수 없을 것이었다. 8년 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그 사실이 더할 나위 없이 비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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