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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53)화 (53/164)
  • 53화. 지키고 싶은 사람

    2020.09.03.

    "치료비는 나중에 청구하시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죠."

    알리시아는 당황해하는 마렌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인 후, 일부러 큰 소리가 나게끔 문을 쿵 닫았다.

    "엄마, 어땠어?"

    문이 닫히자마자, 알리시아는 미카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이의 두 눈은 언제 기가 죽었냐는 듯 반짝거렸다.

    "완전 멋있어!"

    "그래?"

    "응, 엄마 최고!"

    미카엘이 꺄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알리시아에게 안겼다. 알리시아는 헝클어진 미카엘의 머리를 정돈하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대충 터는 걸로는 안 되겠다. 목욕해야겠어."

    "목욕은 아침에도 했잖아."

    미카엘은 슬쩍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알리시아의 손아귀에선 벗어나지 못했다. 알리시아는 키득거리며 미카엘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래도 어쩌겠어. 우리 아드님이 이렇게 엉망으로 돌아왔는데."

    "……."

    "왜, 그런 눈이야?"

    "엄마가 내가 싸운 거 알고 화낼 줄 알았거든."

    "싸움이 나쁜 일이라는 건 아는구나."

    "응……."

    제 딴에는 심각한 고민이라는 듯이 한껏 시무룩해진 얼굴이 귀여웠다. 알리시아는 미카엘의 어깨를 단단히 쥐고 눈을 맞췄다.

    "괜찮아. 그래도 이겼잖아."

    "……."

    "싸움을 권장하는 건 아니지만, 못된 말 들으면 가끔씩은 그래도 돼. 자꾸 참으면 사람들이 만만히 보거든."

    "엄마처럼?"

    미카엘의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엄마가 뭐?"

    "엄마는 맨날 싸우잖아."

    "엄마가 언제 싸웠다고."

    알리시아가 멋쩍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어제도 피터 아저씨랑 싸웠잖아."

    "그건 싸운 게 아니라 피터가 자꾸…… 아니.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고 얼른 씻자."

    "그냥 머리만 감으면 안 돼?"

    미카엘이 풀잎 붙은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렸다. 목욕을 하려면 물이 많이 필요했고, 그만큼 엄마가 집과 우물을 몇 번이고 왔다갔다 해야 했다.

    "안 돼. 씻고 약 발라야지."

    "치이……."

    "그러게, 누가 이렇게 꼬질이가 되어서 오래."

    알리시아가 키득거리며 미카엘의 코를 잡아 살짝 비틀었다. 미카엘은 입술만 삐죽거리다가 이내 좋은 생각이 났는지 두 팔을 번쩍 들었다.

    "그럼 나도 물 옮기는 거 도울래."

    "그러다가 또 넘어져서 양동이 깨먹으려고?"

    "그때는 실수한 거고 이번에는 잘할 수 있어!"

    "그래, 그래. 알았어. 미카엘이 엄마 좀 도와줘. 이번에는 무리하지 말고."

    "당연하지! 맡겨만 줘!"

    씩씩하게 양동이를 들고 뛰쳐나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알리시아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엄마, 얼른 와!"

    "알았으니까, 너무 뛰지 마. 그러다가 또 다칠라."

    "응! 응!"

    "대답은 늘 잘하지."

    알리시아는 미카엘이 뛰어간 자리를 따라 밟다가 일순간 거칠게 몰아친 바람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볕이 좋은 날들이 한창이었던 것 같은데, 슬슬 바람이 차게 느껴졌다. 어느덧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허공을 바라보는 알리시아의 동공이 흐릿해졌다. 잘 잊고 사는 것 같다가도 이상하게 겨울이 되면 가슴이 울렁거렸다. 언제나 겨울이었던 혹한의 땅. 그리고…….

    "엄마?"

    "……."

    "엄마!"

    "아, 미안해. 금방 갈게."

    알리시아는 애써 잡념을 털어내며 걸음을 재촉했다. 자신에게는 미카엘만 있으면 족했다. 이제 와서 다른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목욕 다 하고, 같이 장 보러 갈까? 내일 제임스 삼촌 온다고 했으니까, 오래간만에 맛있는 거라고 먹자."

    "진짜? 진짜로 삼촌 와?"

    "당연하지. 미카엘이 갖고 싶었던 선물 사가지고 온다고 했어."

    "으으, 어떡해. 나 벌써부터 너무 기대돼."

    미카엘이 발을 동동 구르며 알리시아의 치맛자락에 매달렸다. 알리시아는 미카엘의 동글동글한 머리를 매만지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삼촌이? 아니면, 선물이?"

    "둘 다!"

    "굳이 둘 중에 하나만 고르라면?"

    "당연히 삼촌이지!"

    "삼촌이 그렇게 좋아? 엄마, 섭섭해지려고 하네."

    "물론 엄마가 가장 좋아!"

    알리시아가 일부러 입술을 삐죽 내밀자, 미카엘은 당황해 두 팔을 붕붕 흔들며 변명했다.

    "정말?"

    "응. 나는 엄마가 제일 좋아. 하지만 삼촌도 좋아해. 다들 삼촌이 오면 꼼짝 못 하잖아."

    "삼촌이 오면 꼼짝 못 한다는 게 무슨 뜻이야?"

    "크리스가 그러는데 삼촌은 귀족이래. 엄청 대단한 사람이라고."

    귀족의 첩실이라는 소문 왜 났나 했더니, 말 많은 사람들이 종종 찾아오는 제임스를 보며 이상한 망상을 한 모양이었다. 알리시아는 소문을 듣고 어이없어할 제임스를 떠올리며 멋쩍게 웃었다. 사람 몇 안 되는 시골 마을은 말이 간단히 만들어지고 그만큼 쉽게 퍼졌다.

    "삼촌이 좀 귀족적으로 생기긴 했지."

    "엄마도 귀족적이야."

    "귀족적이라는 게 무슨 뜻인 줄 알고 말하는 거야?"

    "예쁜 거 아냐?"

    "응?"

    "삼촌도, 엄마도 다 예쁘잖아."

    총총 앞서 걸어가던 미카엘이 빙그르르 몸을 돌려 알리시아를 올려다봤다. 아이의 통통한 뺨은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엄마도 예뻐?"

    "나는 세상에서 엄마가 가장 예뻐. 크리스도 엄마가 제일 예쁘다고 그랬는 걸. 엄마보다 예쁜 사람 못 봤다고."

    "정말?"

    "엄마는 공주님 같아. 마을에서도 엄마가 제일 예쁜 걸. 그러니 나는 얼른 어른이 될 거야. 하루라도 빨리 강하고 멋진 어른이 되어서 엄마를 지켜줄 거야."

    갔던 길을 되돌아온 미카엘이 그대로 알리시아의 치맛단에 얼굴을 묻었다. 햇살에 바싹 마른 치맛자락에서는 포근한 향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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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설마 신관께서 직접 오실 줄 몰랐군요."

    "제가 신관 중에선 가장 아름답거든요."

    나탈리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애써 미소를 지으려고 했지만, 정작 그녀의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미인계입니까?"

    "대신관께서는 8년 전, 갖지 못한 핏줄을 여전히 갖고 싶어하시거든요. 거기에 바싹 약 오른 제르페누스가 제게 손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기도 하고요."

    카벨레누스는 피식 웃으며 잔에 질레를 따라 나탈리에게 내밀었다. 나탈리는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잔을 받아들었다. 독한 알코올 냄새가 벌써부터 코를 찔렀다.

    "현재 수도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제르페누스를 향한 여론이 나날이 나빠지고 있습니다. 선황제 폐하의 유언을 조작했다는 것부터 독살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어요."

    "나쁘지 않군요."

    "그런가요."

    나탈리는 한숨과 함께, 술을 한 모금 홀짝거렸다. 신은 음주를 금했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술이 간절했다.

    "슈바르한의 술인가요? 맛있네요."

    "기일을 맞이해 특별히 준비한 질레입니다. 오늘이 그녀의 기일인 터라."

    "아직도 그녀의 기일을 챙기시는군요."

    "물론, 술 같은 건 신의 종에겐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지만요."

    "저는 신실한 종이 아니라서요."

    나탈리는 깨끗하게 비운 잔을 카벨레누스에게 내밀었다. 카벨레누스는 별다른 말 없이 그녀의 잔을 채워줬다. 나탈리는 앉은 자리에서 연거푸 잔을 두 번 더 비우고서야 다시 입을 뗐다.

    "이 말을 전해드리기 전까지 많은 고민을 했어요. 어쩌면 이대로 덮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고요."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만약, 8년 전 죽음이 조작되었고 그녀가 살아 있다면-."

    와그작-! 카벨레누스의 손아귀에서 으스러진 술잔 파편이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탈리는 술과 피로 젖은 카벨레누스의 손을 응시하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무너질 줄 모르던 무심한 사내의 얼굴은 한없이 일그러져있었다.

    "……무사합니까?"

    "제 말을 믿으시는 건가요?"

    "제겐 믿을 수밖에, 아니 믿어야만 하는 이야기니까요."

    카벨레누스가 이를 꽉 물었다. 퍽 가라앉은 목소리는 쇠를 긁는 듯 거칠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말씀해드린다면 제게 뭘 해주실 건가요?"

    "무엇이든."

    "제가 뭘 원할 줄 알고요."

    "뭘 원하든 상관없습니다. 제 모든 것, 아니 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앗아서라도 채워드리겠습니다."

    카벨레누스는 숨 한 번 쉬지 않은 채 빠르게 말을 토해냈다.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는 걸 알면서도 매달릴 수밖에 없을 뿐이었다.

    "같은 형제인데, 확실히 전하와 제르페누스는 다르네요."

    "……."

    "그렇기에 결심할 수 있었지만요."

    나탈리는 쓰게 웃었다. 그녀는 제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던 날, 절 외면하던 연인의 모습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8년 전, 매해 슈바르한에 나타났던 마물이 전부 사라진 사건을 기억하시나요?"

    "그게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겁니까?"

    "적어도 제르페누스는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더군요."

    "……."

    "제르페누스는 지금껏 그녀를 찾고 있었어요. 그리고, 최근 들어 대신관께서도 그 사실을 눈치채신 것 같더군요."

    나탈리는 두르고 있던 외투를 벗은 다음, 카벨레누스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사제복의 단추를 풀었다.

    "그들이 찾아낸 위치들을 몰래 빼돌렸습니다."

    얇은 내의만 걸친 채, 나탈리는 입고 있던 사제복을 카벨레누스에게 내밀었다. 카벨레누스는 나탈리의 눈짓에 조심스럽게 사제복의 바느질을 뜯었다. 사제복의 천 안쪽에는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의심되는 곳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한시라도 빨리 그들보다 먼저 그녀를 찾아야 합니다."

    "……."

    "힘든 싸움이 될 거예요. 전하께서는 지금껏 잃을 게 없어 무작정 달려오실 수 있었지만, 지킬 것이 생기면 그만큼 조심스러워질 테니까요."

    "저는 더는 후회할 일은 만들지 않을 겁니다."

    "그건 모를 일이죠."

    "……."

    "잊지 마세요. 그녀는 지금껏 돌아오지 않았어요. 어쩌면, 전하를 잊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고, 더 나아가 돌아오고 싶지 않을지도 몰라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나탈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권력자의 여자로서의 삶은 항상 텅 비어 있었다. 입버릇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이던 연인은 언제나 말뿐이었다. 연인을 외면할지언정, 제 손에 쥔 것을 놓지 못했다. 그 순간들이 쌓이고 쌓이면 결국 남는 건 까맣게 타버린 마음뿐이었다.

    "그녀가 정말로 그런 힘을 가졌는지 저는 알지 못해요. 하지만 전하는 그녀의 힘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그저 그녀가 필요할 뿐이지."

    "……."

    "아니, 그랬으면 좋겠어요. 적어도 카벨레누스, 당신만큼은 지옥 속에서 벗어나길 바라니까."

    술기운이 도는 모양인지, 목구멍부터 시작된 열기가 어느샌가 뱃속을 후끈후끈 달아오르게 하고 있었다. 나탈리는 이마 위로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올리다가 결국 치미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카벨레누스는 그녀를 가만히 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쳤다.

    "죄책감 가시질 필요는 없습니다."

    "……."

    "저는 당신만큼은 원망한 적은 없었습니다."

    누님. 스쳐지나가듯 짧게 덧붙여진 목소리에 나탈리는 고장 난 기계처럼 삐그덕 고개를 들었다. 카벨레누스를 고스란이 담아낸 그녀의 두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번에는 꼭 지켜."

    "물론입니다."

    "다행이야. 그 말을 듣고 싶었어."

    나탈리의 두 어깨가 힘없이 처졌다. 그녀의 두 눈에는 오랫동안 참아온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 * *

    "미안해."

    "몰라. 안 들려. 나는 앞으로 너랑은 안 놀 거야."

    크리스가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미카엘은 크리스를 보는 둥 마는 둥하며 팔짱을 낀 채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왜! 사과했잖아!"

    "우리 엄마가 사과는 받는 사람 마음이랬거든."

    "흥! 사과 받기 싫으면 받지 마라!"

    "안 받아! 죽어도 안 받아!"

    미카엘은 크게 외친 다음, 바로 다시 휙 고개를 돌렸다. 사람이 드문 마을에 같이 어울려서 놀 법한 친구는 크리스 하나였기에 서로가 아쉬운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이번만큼은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

    "내 사과 받아주면 내가 발견한 거 보여주려고 했는데."

    "……."

    "진짜 대단한 건데! 정말 멋진 거!"

    "……."

    크리스가 과장된 몸짓으로 두 팔을 붕붕 휘저을 때마다 미카엘의 고개가 조금씩 흔들렸다.

    "싫으면 나 혼자 보러 가고."

    "……뭔데."

    "그럼 나 용서해주는 거야?"

    미카엘의 반응에 크리스가 금세 배시시 웃었다.

    "아니."

    표정을 관리하려고 애썼지만 이미 미카엘의 표정은 반은 다 풀려 있었다.

    "그럼 나도 아무런 말 안 할래."

    "……네가 말한 대단한 게 뭔지 보고 생각해볼 순 있지."

    "진짜?"

    "대신, 진짜 대단한 거여야 해. 알지?"

    "당연하지!"

    미카엘이 새침하게 쏘아붙였지만, 크리스는 그마저도 좋다는 듯 잽싸게 미카엘의 팔에 매달렸다.

    "그래서 그 대단한 게 뭔데?"

    "어제 숲에서 토끼굴을 발견했어."

    "토끼굴?"

    "어때? 굉장하지? 보러 갈래?"

    "으음, 그렇게 대단한 것 같진 않지만 네 성의를 봐서 특별히 함께는 가줄게."

    "그럼 얼른 가자. 이러다가 형들에게 들키면 곤란하잖아."

    크리스가 미카엘의 손을 잡아끌었다. 미카엘은 싫은 척하면서도 몸에 힘을 빼며 친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고 했다.

    "왜 그래? 갑자기 가기 싫어?"

    "아니, 그게 아니라……. 어디서 소리가 들리지 않아?"

    "소리? 무슨 소리?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데."

    "저쪽에서 분명 소리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미카엘은 미간을 찡그렸다가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저 멀리서 무언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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