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52)화 (52/164)

52화. 8년 후

2020.08.31.

8년 후 부우우우-. 뿔나팔 소리가 허공을 찢을 듯이 거세게 울리고 승전보를 알리는 깃발이 바람결에 펄럭거렸다. 끝없이 이어진 행진에 땅이 진동할 때마다 지지 않겠다는 듯 그들을 환영하는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나의 영웅이여."

상석에 앉은 제르페누스가 두 팔을 벌리며 돌아온 영웅을 찬양했다. 그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득했다. 선봉에 선 영웅은 빤히 황제를 올려다보다가 투구를 벗었다. 그리고 드러난 사내의 얼굴과 함께, 주변이 한 순간에 조용해졌다. 햇살 아래에서도 변치 않는 새까만 머리카락과 그 사이로 엿보이는 선명한 금안. 그것만으로도 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사내에게는 현 황제가 갖지 못한 적통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사내가 대중 앞에서 그 사실을 드러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적막 속, 카벨레누스는 가만히 제르페누스를 바라봤다. 선명하게 빛나는 금안에는 감추지 않는 적대감이 그득했다. 제르페누스는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끼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드디어 오셨군요."

등 뒤로 들린 목소리에 애써 유지해오던 제르페누스의 미소가 무너졌다. 그의 시선 끝에는 새하얀 사제복을 차려입은 신관들을 대동한 대신관, 헤르만이 서 있었다.

"……대신관께서 이 시간에 웬일이십니까."

"미천한 신의 종이 감히 거룩한 분의 뜻을 전하러 왔습니다."

헤르만이 턱수염을 매만지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주름진 눈매로 보이는 고목을 닮은 눈동자에서는 감추지 않는 탐욕이 엿보였다.

"이곳은 대신관께서 나설 자리가 아닙니다."

제르페누스가 목소리를 낮추며 경고했다.

"신의 뜻을 전하기 위해 가지 못할 곳은 없습니다."

헤르만은 느긋하게 걸음을 떼 단상에 위치한 확성 구슬 앞에 섰다. 단상 아래에선 무수히 많은 눈들이 보였다.

"미천한 신의 종, 헤르만. 위대한 업적을 세우고 돌아온 슈바르한 대공을 축복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저는 대공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리고 인사하는 헤르만에 금세 주의가 시끌시끌해졌다. 황실과 신전의 대립은 유명한 이야기였고 카벨레누스는 그중에서 대표적인 황실파였다. 그 증거로 대신관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카벨레누스의 개선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제와서 카벨레누스를 축복하는 건 여러모로 어색했다.

"최근 미천한 종들의 기도에 드디어 신께서 계시를 주셨습니다. 현재 제국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재앙의 징조는 신의 뜻에 반하는 자가 있기 때문이라고요."

헤르만은 제르페누스를 바라봤다가 아무렇지 않게 군중을 향해 손을 흔드는 제르페누스를 보며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당황할 법도 한데, 아무렇지 않게 구는 모습을 보니 분명 난 놈은 난 놈이었지만, 그의 배 이상을 살아온 헤르만의 눈에는 아직도 어린애처럼 보일 뿐이었다.

"감히 신의 뜻을 거스르고, 어울리지도 않은 자리를 차지한 괘씸한 자. 저희 교단은 그자의 죄를 물고, 이제라도 제대로 된 주인을 자리에 앉히고자 합니다."

헤르만은 카벨레누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행동에 카벨레누스는 웃었고, 제르페누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것이 신의 뜻이니까요."

정확하게 상대를 지칭하지 않아도 보여주기는 그 정도로 충분했다. 누구를 노리고 있는지 빤히 보이게 해주기만 해도 여기에 있는 모두가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충분히 퍼트려줄 테니까. 헤르만은 더할 나위 없이 애정 어린 눈으로 군중들을 훑어봤다. 기대와 호기심, 그리고 두려움 섞인 시선들은 언제나 사랑스러웠다. * * *

"이게 무슨 짓이지?"

둘만 남게 되자마자, 제르페누스가 거칠게 카벨레누스의 어깨를 쥐었다. 카벨레누스는 표정 변화 없이 무심하게 제 형을 내려다보았다.

"준비가 끝났으니 움직일 뿐입니다."

"그래서 날 치겠다고? 다른 누구도 아닌, 그 고약한 늙은이의 힘을 빌려? 네가 그 늙은이의 욕심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폐하의 제국을 무너트릴 수만 있다면 뭐든 상관없습니다."

"내 제국?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모든 걸 제 책임으로 돌리지 마십시오. 애당초 황위를 물려줄 생각 같은 건 없지 않으셨습니까?"

카벨레누스의 입매가 뒤틀렸다.

"무슨 소리냐, 나는 잠시 네 자리를 맡아놓고 있을-."

"그렇다면, 왜 여전히 실험을 계속하고 계신 겁니까."

선황제가 주도했던 실험은 그가 죽은 후 끝났지만, 실험실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건, 그저……."

"변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폐하께서 무엇을 노리는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카벨레누스는 제르페누스의 손을 밀어내며 뒤로 물러났다.

"알고 있는데, 그렇게 태연하다고?"

"앞으로 폐하께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실 테니까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폐하의 바람은 항상 제 손에서 망가질 테니까요."

화려한 조명 아래, 금안이 번들거렸다. 잔잔하게 가라앉은 듯한 시선 속에는 감추지 못한 광기가 짙게 서려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건 너다. 네 목숨을 잡고 있는 게 누구인데."

"그놈의 목숨줄을 언제까지 잡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뭐?"

"제가 드디어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카벨레누스는 대답 대신, 검을 뽑아 형의 목에 겨눴다.

"내게 아무런 상처도 입힐 수 없으면서."

"족쇄는 결국 풀라고 있는 법 아닙니까."

카벨레누스의 미소에 제르페누스는 미간을 찡그렸다. 목줄기를 타고 흐르는 액체의 감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무슨 짓을 한 거냐."

"저를 팔았습니다."

폐하께서 태어나지도 않았던 제 아이를 판 것처럼. 카벨레누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살갗을 누르는 날붙이의 감각에 제르페누스의 입매가 바들바들 떨렸다.

"폐하는 값을 치르지 못했지만 저는 충분한 값을 치렀죠. 그러기 위한 8년이었습니다."

"나를 치기 위해 원수와 손을 잡다니,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지금의 널 보면 무척 슬퍼하실 거다."

"누가 제 원수입니까."

"뭐?"

"저는 이제 모르겠습니다. 누가 제 원수인지, 아닌지. 어차피 절 이용해먹으려는 건 다들 매한가지인데."

"카벨레누스."

제르페누스가 다급히 동생을 불렀다. 하지만 카벨레누스의 표정은 그럴수록 차갑게 식을 뿐이었다.

"너는 아직도 그 계집한테 묶여 있구나."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고작 몇 달이었다. 그 짧은 시간이 뭐 대단하다고 아직도 매여 있어."

"폐하께서 그렇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죽음으로써 제 안에 그녀를 박제시켰죠."

카벨레누스가 조소했다. 그날 이후, 그는 매일 밤 꿈을 꾸고 있었다. 핏물을 뒤집어쓴 채 엉엉 울고 있는 여자와 아무리 발악해도 그녀에게 닿지 못한 채 절규하는 자신이 나오는 꿈을.

"폐하께서는 제게 늘 최고가 되라고 하셨지요? 네,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폐하의 앞에서 그 모든 것들을 전부 짓밟고 망가트려서 아무것도 남지 않게 만들어 드리죠. 그날이 폐하의 마지막 날이 될 겁니다."

"내가 가만 둘 성 싶으냐."

"가만히 두지 마십시오. 발악하고, 또 발악하면서 애써보십시오. 그걸 보기 위해 지금은 살려드리는 겁니다."

카벨레누스는 도로 검집에 검을 집어넣었지만 제르페누스의 목에는 선명한 상처가 남았다.

"인심 한 번 아주 크게 쓰는구나."

"고작 목숨 하나로 모든 걸 마무리 짓기엔 아쉬울 뿐입니다. 썩은 뿌리는 완전히 도려내야 다음이라는 기회도 없는 법이지 않습니까."

"후회하게 될 거다. 그 늙은이의 탐욕에 제대로 당해봐야 내 울타리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다시금 뼈저리게 느끼게 될 거야."

"후회는 이미 실컷 했습니다. 더는 할 생각이 없습니다."

"……."

"승전식을 열어주신 것에 대한 답례로 조만간 선물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마침 제 성을 돌아다니던 쥐새끼들을 모두 소탕한 참이거든요. 카벨레누스는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제르페누스의 어깨를 쥐었다. 복수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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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괜찮으십니까?"

"이 정도는 문제없어."

카벨레누스는 거칠게 입가를 닦았다. 그의 손등에는 검붉은 피가 짙게 묻어 있었다.

"저주가 완전히 풀린 건 아니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다행인 거지. 저주가 완전했다면, 앞뒤 안 가리고 죽여버렸을지도 모르니까."

카벨레누스는 무심히 대답하며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고작 피 몇 방울을 냈다고 찾아온 반동은 언제 느껴도 기분을 더럽게 만들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가능성은 충분해. 다 늙어빠진 늙은이라도 힘은 여전히 건재한 모양이야."

예전이라면 제르페누스에게 손 하나 까딱할 수도 없었을 텐데, 이번에는 그에게 작게나마 상처를 낼 수 있었다.

"너무 의지해선 안 됩니다. 애당초 대신관은 저주를 온전하게 풀어줄 생각이 없을 겁니다."

"풀어주긴커녕, 주체를 폐하에서 자신으로 바꾸려고 하겠지. 그렇게 되어야만 말 잘 듣는 개를 손에 넣을 수 있으니까."

"그 전에 모든 것을 끝내야겠지요."

가제프는 미소와 함께 카벨레누스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대신관이 재앙을 조작했다는 증거는 모으고 있겠지?"

카벨레누스는 손수건으로 대충 묻어난 피를 닦아내며 가볍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네. 지금까지 모든 증거들을 모아두었습니다."

"앞으로 퍼질 폐하에 대한 소문들도 전부 조사해둬. 그 늙은이가 가장 잘하는 건, 신의 뜻을 운운하며 여론을 조작하는 것이니 말이야. 벌써 물밑 작업은 다 끝내두었을 거야."

"그 부분 역시, 전부 파악해두었습니다. 지금껏 준비한 자료들까지 더해진다면, 황실이 정리된 후에 곧장 신전까지 칠 수 있습니다."

"대신관이 약속한 대로, 신의 대리자 칭호를 내주면 바로 시작이다. 황실도, 신전도 전부 발밑에 놓는 거야."

카벨레누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오랫동안 바라던 염원이 코앞인데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결국 카벨레누스는 가던 걸음을 멈춘 채 두 눈을 감았다.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울던 여자의 얼굴은 여전히 선명하기만 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갈증이 치밀었다.

"……그래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아, 그러고보니 곧 기일이 다가오는군요."

가제프는 애써 웃었지만 가라앉은 분위기를 어쩔 순 없었다. 카벨레누스는 허공을 바라보다가 이내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루베르타인이라고 들어본 적 있나?"

"루베르타인요? 그게 뭐죠?"

"내가 갈 수 없는 땅."

카벨레누스는 피 묻은 손수건을 바라봤다. 알리시아가 말하던 루베르타인으로 가기엔 제 손에 묻은 피가 너무 많았지만,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 간절하게 빌면 마음이 약해진 신이 자신에게도 고귀한 땅을 한 번이라도 밟을 기회를 주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정작 신 같은 건 믿지도 않으면서.'

카벨레누스는 자조하며 손으로 눈을 가렸다. 손 아래로 보이는 사내의 양 입꼬리는 처량하게 아래로 쳐져 있었다. * * *

"아니, 애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예요!"

"왜 그러세요, 부인. 혹시 저희 아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건가요?"

"눈이 있으면 빤히 보이지 않나요? 얘 얼굴 좀 봐요!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엉망이 된 두 아이를 보며 알리시아는 두 눈을 껌벅거렸다. 그나마 제 아이 쪽은 괜찮아 보였지만, 벌에 쏘이기라도 한 양 퉁퉁 부은 얼굴을 한 다른 아이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죄, 죄송해요."

"죄송? 죄송하다면 다예요? 됐고! 이거 어떻게 할 거예요?"

"치료비는 드릴게요."

"그건 당연한 거고!"

마렌이 두툼한 손으로 거칠게 미카엘의 등을 떠밀었다. 알리시아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런데, 얼굴이 엉망인 건 저희 아이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요."

"그쪽 애랑 우리 애가 같아? 딱 봐도 우리 애가 더 많이 다쳤는데!"

마렌이 이번에는 미카엘을 거칠게 흔들었다. 알리시아는 고개를 살짝 들어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네. 그러네요. 그런데, 이유는 물어보셨나요?"

"이유? 무슨 이유요!"

"아이들이 싸운 이유요."

"그딴 걸 물어봐서 뭐 하게요? 여기 안 보여요? 우리 애 얼굴이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었는데!"

"미카엘."

"……."

"이리와."

알리시아가 손을 뻗어 미카엘의 손목을 쥐었다. 절 닮은 잿빛 눈동자가 빤히 자신을 올려봤다.

"괜찮으니까, 얼른."

알리시아의 손짓에 미카엘이 조심스럽게 걸음을 뗐다. 알리시아는 기다렸다는 듯 제 아이를 품에 안으며 눈에 힘을 줬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일단 애부터 혼내야지!"

"저희 아이가 정말로 잘못했다면, 그때 혼내도 늦지 않으니까요."

"뭐라고요?"

"미카엘. 말해봐. 왜 싸운 거야?"

"……."

미카엘은 알리시아의 눈치를 보면서도 그녀의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알리시아는 생채기가 난 아이의 손을 다정히 감싸며, 미카엘을 좀 더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괜찮아. 엄마 믿고 이야기해."

"……크리스가 놀렸어."

"놀려? 뭐라고?"

"엄마가 도망친 첩년이래."

순간,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알리시아는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이마를 짚었다.

"미카엘, 그게 무슨 뜻인지나 알고 하는 소리야?"

"몰라. 그치만, 더러운 거라고 했어! 크리스가 자기네 엄마가 하는 소리 들었다고! 막 그랬단 말이야!"

"그래서 싸운 거야?"

"미안해."

"아니야. 미안해할 필요 없어. 죄송해야 하는 사람은 우리 아들이 아니거든."

알리시아는 싱긋 웃으며 마렌을 바라봤다. 마렌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부인께서는 남의 집 애 교육 운운하시기 전에 먼저 본인 입부터 단속하셔야겠네요."

"내, 내가 언제 그랬다고! 증거 있어?"

"부인의 귀한 아드님이 그 증거죠."

알리시아는 가만히 크리스를 바라봤다. 크리스는 알리시아의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푹 고개를 숙였다.

"부인께서 어떤 의도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자식이 벌써부터 그런 말을 옮기고 다니는 걸 보고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

"저는 단 한 번도 제 아이에게 부끄러운 짓은 해본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그러니 다신 그런 더러운 소리 입 밖으로 내지 마세요."

한 번만 더 그딴 소리가 아이들 입에서 나오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요. 매섭게 노려보는 알리시아의 시선에 마렌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분명 툭 건드리면 쓰러질 것처럼 야리야리하게 생긴 계집인데, 저런 눈으로 볼 때면 괜히 오금이 저릴 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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