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끝과 시작
2020.08.27.
"왜, 타지 않으십니까."
"……."
"설마 이제와서 다른 생각을 하고 계신 건 아니죠?"
"……."
"시즈나가 그곳에 남아 있습니다. 자꾸 절 곤란케 하시면 모르코 부인의 목숨은 장담하지 못합니다."
시린이 알리시아의 등을 밀었다. 알리시아는 입술을 꽉 깨문 채, 주춤거리며 마차에 올라탔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마주친 하인들은 전부 시린에 의해 단칼에 목이 베였다.
'내 목숨은 상관없지만…….'
알리시아의 손이 조심스럽게 배를 감쌌다. 지금이야 시린이 예를 갖추고 있지만 언제 돌변할지 모를 노릇이었다.
"조만간 눈보라가 칠 것 같으니, 서둘러 떠나야겠습니다."
"……."
"이젠 저와는 이야기도 나누고 싶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시린은 피식 웃고는 알리시아의 옆에 앉았다. 알리시아는 좀 더 몸을 웅크리며 제 배만 끌어안았다. 덜컹거리며 움직이는 마차의 소음이 그 무엇보다 공포스러웠다.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한시라도 빨리 발견해주길.'
알리시아는 두 손을 모은 채, 간절하게 기도했다. 신 같은 건 믿지 않으면서, 이런 상황이 되니 우습게도 신부터 찾게 되었다. 몸이 넝마쪽처럼 엉망이었음에도 절 지키려던 모르코 부인의 모습이 도무지 잊히지 않았다.
"전하를 기다리셔도 소용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오시지 못하십니다."
"……."
"아니, 오시지 않는다는 말이 맞겠네요."
"……."
"전하께서는 아가씨를 버리셨거든요."
"헛소리하지마."
알리시아가 이를 악문 채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시린은 그 반응이 귀엽다는 둥 그저 웃을 뿐이었다.
"아가씨께선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하시겠지만, 전부 사실이랍니다. 전하께서는 제 주인과 거래하셨어요."
아가씨의 배 속에 있는 아이를 걸고요. 시린의 시선이 알리시아의 배에 닿았다. 현장은 완벽하게 조작해두었고, 남은 시즈나가 사건의 목격자가 되어 시간을 끌어줄 테니 걱정할 건 없었다. 이제 남은 건 좀 더 수월한 협조를 얻어내기 위해 알리시아를 뒤흔드는 것뿐이었다.
"……전하께서 모르코 부인을 그렇게 만들 리 없어."
"전하께서는 배신자를 용납하지 않으시죠. 그뿐이랍니다."
시린의 입가에 어울리지 않는 미소가 걸렸다.
"배신이라니, 모르코 부인은-."
"아가씨께서 떠나실 준비를 하셨잖아요. 그리고, 부인께서 그런 아가씨를 도우셨죠."
"……."
"외면하지 마세요. 결국 이 모든 건 아가씨 탓이에요."
시린이 얄궂게 웃으며 알리시아의 뺨을 어루만졌다. 알리시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꽉 깨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에도 전하께서는 아가씨를 사랑하시니까요."
"……사랑?"
잿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시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손에 힘을 줬다.
"아가씨의 배 속 괴물만 내어주신다면 얼마든지 전하와 다시 만날 수 있으실 거예요."
"내가 널 어떻게 믿지?"
"절 믿고, 안 믿고는 아가씨의 마음이죠. 강요하진 않는답니다."
시린은 별 아쉬움 없이 알리시아를 놓아주고는 싱긋 웃었다. 알리시아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배만 만졌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라고 여기고 싶었는데 그게 되지 않았다. 카벨레누스는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전하께서 정말로 그랬다면…….'
알리시아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이 모든 게 전부 카벨레누스가 벌인 짓이라면, 더는 그를 볼 자신이 없었다. 목표를 위해 뭐든 짓밟을 수 있는 사내는 악귀와 다를 바가 없었다.
'나 지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럴 리 없잖아. 전하께서는…….'
알리시아는 허탈하게 웃으며 몸에 힘을 뺐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무엇도 답할 수 없었다. 더는 카벨레누스를 믿을 수 없었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은 그대로인데, 동시에 두려웠다.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빤히 보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께서 협조만 잘 해주시면-."
"……안 해."
"네?"
"안 한다고, 협조."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시야는 과거 갇혔던 감옥의 창살을 연상시켰다. 알리시아는 헛웃음을 토해내다가 결국 거칠게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떠오르는 그날의 악몽에 반사적으로 몸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그때처럼 숨 죽이고 있을 순 없었다. 누구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다. 자신을, 그리고 아이를 지킬 수 있는 건 오롯이 저뿐이었다.
"아가씨께서 지금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
"내가 죽어도 아이는 안 뺏겨. 내 아이야. 내가 지켜."
알리시아는 이를 꽉 깨문 채, 시린을 노려봤다. 시린의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서 카벨레누스를 기다릴 수도, 그렇다고 시린의 손에 이대로 끌려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눈을 뜬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것 같나요?"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낫겠지."
알리시아가 표정 없는 얼굴로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시린은 반사적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살기 등등한 시선은 예전의 수줍은 아가씨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이곳은 슈바르한이에요. 이 땅에서 전하의 눈을 피해서 도망가는 건 불가능하죠."
"상관없어."
"상관없다고요?"
"빼앗길 바에는 함께 죽는 게 나으니까."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는데. 알리시아는 쓰게 웃었다.
"잔인한 말씀을 하시네요."
"세상엔 죽는 것보다 못한 삶도 있다는 걸 아니까."
이럴 거라면 조금만 더 빨리 마음을 다 잡을 걸. 알리시아는 자꾸만 떠오르는 모르코 부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배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떠오르는 생각을 완전히 지울 수 없었다.
"……소원을 빌게."
"이제와서 제게 빌기라도 하시려는 건가요?"
"저자를 망가트려줘, 아주 엉망으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시린은 비아냥거리다가 무언가 뺨을 타고 흐르는 감각에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것은 피였다, 붉디 붉은 피.
"이게 무슨…… 커어억!"
비명을 내지를 새도 없이 한 순간에 시린의 몸이 기이하게 뒤틀렸다. 몸 안의 피가 전부 밖으로 빠져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눈이며, 코, 뭐 하나 다를 것 없이 몸에 있는 모든 구멍에서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알리시아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떨어진 시린의 검을 집어들었다. 두 팔로 낑낑 들어야 할 정도로 무거운 검에 몸이 휘청거렸지만 검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움직이면 그대로 죽여버릴 거야."
너도 그랬잖아, 모르코 부인에게. 알리시아는 검을 시린의 목에 겨눴다. 한순간에 피투성이가 된 채 헐떡이는 시린은 겨우 숨만 붙이고 있는 상태였다.
"아, 아가, 씨께서는 이런 분이 아니, 셨잖……."
"제 새끼의 생명까지 깎아먹은 어미가 뭘 못 하겠어."
알리시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루베르타인에서 만나자던 모친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지만 끝은 제 손으로 봐야만 했다. 아이의 힘을 사용한 것도 모자라 살생까지는 시킬 순 없었다.
"많은 게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달라지지 않았어. 나는 여전히 너무 약해. 매번 소중한 것들을 잃고 나서야 후회해."
후회 같은 건 의미 없는 일인데. 알리시아는 짧게 조소하며 손에 힘을 줬다. 타인의 피부를 비집는 날붙이의 감각이 낯설다 못해 섬뜩했음에도 눈을 감지도, 손에 힘을 풀지도 않았다. 오히려 똑바로 마주하고자 애썼다.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선 결국 잡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아. 더는 잃는 것도, 후회도 하지 않을 거야. 그러기 위해선 뭐든 할 수 있어."
알리시아의 입가에 뒤틀린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그와 함께 굉음이 들렸다. 금방이라도 몸을 얼려버릴 듯 서늘한 공기가 느껴졌다.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올려다본 마차의 천장에는 거대한 구멍이 나있었다. 그리고 뚫린 천장 너머로 보이는 무수히 많은 눈동자들이 보였다. 북슬북슬한 털 사이로 빛나는 눈동자들은 옅은 색이긴 하나, 카벨레누스와 같은 금색이었다.
"마물……."
알리시아의 잇새로 한숨에 가까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마물들은 무자비한 침입자라고 하기엔 별다른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알리시아는 무엇에 홀린 것처럼 조심스럽게 마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마물들이 고개를 숙였다. 마치 예를 갖추기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알리시아는 우는지, 웃는지 모를 얼굴로 헛숨을 뱉었다. 풍성한 속눈썹이 물 먹은 나비의 날개처럼 불안하게 흔들렸다. 마물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센 눈보라가 치고 있었다.
* * * 히이이잉! 몰아치는 눈보라에 페튼이 앞발을 들며 발버둥을 쳤다. 카벨레누스는 신경질적으로 고삐를 반복해서 당기다가 아예 페튼에서 뛰어내렸다.
"전하!"
가제프는 다급히 카벨레누스를 따라 뛰어내렸다. 눈보라를 뚫는 짐승, 페튼조차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칠 정도로 거센 눈폭풍이었다. 제 아무리 카벨레누스라도 위험했다.
"눈발이 너무 거셉니다. 이대로 계속 무리하게 움직이면 위험합니다."
가제프가 뒤뚱거리며 겨우 카벨레누스의 옷깃을 잡았다. 쌓인 눈에 다리가 푹푹 박혀 몇 걸음 떼기도 어려웠지만, 카벨레누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앞만 볼 뿐이었다.
"평소보다 눈보라가 치는 시기가 이릅니다. 어쩌면, 사냥철도 이르게 찾아왔을지도 모릅니다. 이러다가 마물이라도 나타나기라도 하면……."
"그럼 이대로 돌아가자고?"
"다급하신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두려워서 울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한시라도 빨리-."
"전하!"
가제프는 무릎을 꿇고 다급하게 카벨레누스의 다리에 매달렸다. 하지만 카벨레누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나아갈 뿐이었다.
"돌아가셨습니다!"
"……방금 뭐라고 했지?"
절 향한 살기 어린 시선에 가제프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 채, 거친 숨을 뱉었다. 멋대로 헝클어진 머리와 제멋대로 난 수염, 핏줄 터진 눈동자. 누구보다 완벽했던 제 주인은 더는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본능에 충실해 하염없이 울부짖고 있을 뿐이었다.
"아가씨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전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단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일어난 일이 없었던 것이 되진 않습니다."
"네가 정말로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차라리 절 죽이십시오."
"……."
카벨레누스의 굳게 다물린 입매가 떨렸다.
"그런 건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어. 알리시아는 살아 있어."
"……."
"눈보라에 발이 묶인 건 놈들도 다르지 않을 거야. 오히려 그들이 지체하고 있을 때 잡아야 해."
카벨레누스의 두 눈이 번뜩였다. 사내의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가제프는 차마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건, 전하뿐만이 아닙니다."
"……."
"그리고, 전하께는 아직 지켜야 하는 것들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지켜야 하는 것? 그 작은 여자 하나 지키지 못한 내가 지키긴 누굴 지키지?"
카벨레누스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끝을 알 수 없는 설원을 향해 있었다.
"범인들을 잡는다고 끝이 아닙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머리는 그 위에 있다는 거."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참으라고?"
"전하께서 그러시지 않으셨습니까. 마지막에 승리한 자가 진짜 승리자라고."
"……."
"지금껏 잘 버텨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번에도 그러시면 됩니다. 지금의 고통을 수백, 수천 번 곱씹고 가슴 속 깊이 넣는 겁니다. 썩을대로 썩어버린 감정이 상대를 죽이는 독이 될 때까지 말입니다."
"그래. 지금껏 계속 버텨왔지. 하지만, 그녀는 안 돼. 그녀와 관련된 일이라면 나는……."
카벨레누스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눈가가 시린 이유가 찬 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욕심을 부렸어. 평소답지 않게 조바심을 냈어."
"……."
"그동안 쌓아온 것들이 아쉬워서, 조금이라도 빨리 승부를 내고 싶어서. 그리고……."
우스웠다. 단 한 번도 두렵다고 느껴본 적이 없던 눈보라가 두려웠다. 눈보라의 끝에 도달하면 그녀가 이 세상에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 올까 봐. 하지만 그럼에도 멈출 순 없었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그 끝에 알리시아가 있다면 결국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함께하고 싶어서."
카벨레누스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의 두 눈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 지긋지긋한 굴레에서만 벗어나게 되면 그녀와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더 참고 조금이라도 빨리 모든 걸 끝내고 싶었어."
그 순간에도 그녀는 계속 옆에 있었는데.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고 싶은데 이상하게 우는 얼굴만이 떠올랐다. 마지막 순간까지 알리시아는 울고 있었다.
"이럴 거면, 그냥 옆에 있을 걸."
"……."
"그녀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고, 마음껏 웃게라도 해줄 걸."
"……."
"그랬다면, 적어도 웃는 얼굴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을 텐데."
지금껏 자신이 알리시아의 구원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녀는 자신과 함께 있으며 우는 날이 더 많아졌다. 약하지 않았던 여자를 약하게 만들었던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카벨레누스는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인영을 보며 허탈한 숨을 토해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답을 낼 수 없었다. 무엇이 잘못인지도 모를 정도로 모든 것이 엉킨 실타래처럼 전부 엉망이었다. 겨우 닿은 끝에서 마주한 부서진 마차가 그러하듯이. 카벨레누스는 떨리는 손으로 다급하게 내부를 확인했다. 붉게 물든 눈과 함께 얼어붙은 핏방울이 후두둑 떨어졌고 번들거리는 금안이 성급히 움직였다. 엉망으로 부서진 마차와 짐승이 뜯은 양 갈기갈기 난도질되어 있는 흔적. 그리고, 익숙한 천 조각. 카벨레누스의 몸이 위태하게 흔들렸다, 아니. 흔들린 건 몸이 아니었다. 그의 세계였다.
"하, 하, 하하핫……."
카벨레누스는 힘없이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그리고, 고개 숙인 채 한참을 웃다가 결국에는 울었다. 일부라고 생각했는데, 전부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날, 사내는 자신의 전부를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