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죽음과 죽음, 그리고 죽음
2020.08.24.
"언제부터였니?"
"저희들의 주인은 처음부터 한 분이셨습니다."
"그럼, 그날 우리의 첫만남도 우연이 아니었나보구나."
"죄송합니다. 부인의 신뢰를 얻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습니다."
덤덤하게 이어진 고백에 모르코 부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배신당했음에도 아이들을 향해 차마 검을 겨눌 자신이 없었다. 무심히 잘라내기에는 행복했던 기억이 너무도 많았다.
'하지만…….'
모르코 부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황제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여기서 자신이 멈춘다면 알리시아의 목숨은 장담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홑몸도 아니었다. 모르코 부인은 치미는 핏물을 꿀꺽 삼켰다.
"황제! 황제가, 아니 황제 폐하께서 보낸 거지!? 나도 폐하의 사람이야! 그러니 어서 이 여자를 치워!"
벨로아가 신이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시린은 대답 대신, 지팡이를 버리고 검을 뽑았다.
"이럴 거면 진작에 나서지 그랬어. 그 신분이면 노예를 처리하는 것도 간단했잖아."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니까요."
"그게 무슨…… 아아아악!"
벨로아가 고통 어린 비명을 내지르며 눈밭에 데굴데굴 굴렀다. 시린의 검 끝에는 미처 닦지 못한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아악! 아파! 아프다고! 감히 내게 이런 짓을 하고도 네게 살아남을 수 있을, 아흑!"
"너무 원망하진 마세요. 저는 그저 명을 따를 뿐입니다."
시린의 검이 벨로아를 향해 다시 휘둘러진 순간, 일렁이는 검기가 날카롭게 허공을 갈랐다.
"크읏!"
"무리하시는 건 좋지 않습니다. 부인."
여유롭게 모르코 부인의 공격을 쳐낸 시린이 짧게 혀를 찼다. 그녀의 검에도 검기가 서려 있었다.
"실력을 숨기고 있었구나."
"눈에 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누구의 명령이냐? 정말로 폐하의 사람이냐?"
"부인께서는 모르셔도 됩니다."
죽은 자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으니까요. 시린의 한쪽 입술 끝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모르코 부인!"
알리시아가 다급하게 비명을 내질렀다. 모르코 부인은 시린의 검을 겨우 막아냈지만 이어진 다음 공격은 막지 못했다. 시린의 검은 이번에도 모르코 부인의 몸을 관통했고 붉은 피가 또 한 번 눈 위로 수놓아졌다.
"놔! 당장 놓으라고!"
"안 됩니다. 지금 끼어드시면 위험합니다."
"위험? 그게 지금 할 소리야? 너희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데!"
알리시아가 절 잡고 있는 시즈나를 밀어내려 애쓰며 거칠게 외쳤다. 피가 섞이지만 않았을 뿐이지, 친자식과 진배없이 쌍둥이를 아꼈던 모르코 부인이었다. 모르코 부인에게만큼은 함부로 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저희는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나는 그딴 명령 용납 못 해! 부인이 너희들을 얼마나 아꼈는데!"
"반항하지 마세요. 어차피 아가씨의 가는 팔로는 절 이길 수 없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의 안위만큼은 지켜드릴 겁니다."
"내 안위를 지켜? 네가?"
"아가씨께서는 귀한 씨를 품고 계시지 않습니까."
일순간, 알리시아의 시선이 흔들렸다. 저들의 목적은 자신이 아닌 아이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 얼음물을 뒤집어쓴 양 정신이 확 들었다.
"꿈도 꾸지 마. 감히 누굴 건드려."
알리시아가 핏발 선 눈으로 으르렁거렸지만 시즈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든, 방긋방긋 잘 웃어주던 어린 하녀는 이젠 없었다.
"아가씨를 만나고 싶어하는 분이 계십니다. 저와 함께 가시죠."
"싫어. 내가 왜 널 따라가."
"그럼, 부인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거니?"
알리시아가 짧게 조소했다.
"부인께서는 치명상을 입으셨습니다. 빨리 치료하지 않으시면 정말로 위험하실 겁니다."
시즈나가 턱 끝으로 모르코 부인을 가리켰다. 피투성이가 된 와중에도 모르코 부인은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나 싸웠다. 알리시아는 차마 참혹한 광경을 보지 못하고 거친 숨을 토해냈다.
"처음부터 살려줄 생각이 있기나 했어?"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가씨께서 순순히 따라오신다고 하면 혹시 모르죠."
시즈나가 알리시아를 잡고 있는 팔을 당겼다. 힘을 많이 쓰지 않았는데도 쉽게 딸려가는 몸은 명백한 힘 차이를 보여줬다.
"얼마든지 강제로 끌고 갈 수도 있지만, 귀한 씨를 품고 계신 분께 함부로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가씨께서 조금만 협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이왕 이렇게 된 거, 사람 목숨 하나 살리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
"물론, 모르코 부인이 죽어도 상관없다면 반항하셔도 되지만요."
사람은 생각보다 아주 쉽게 죽는답니다. 덤덤히 말을 덧붙이는 시즈나를 보며 알리시아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눈에 뻔히 보이는 덫이었지만 외면할 순 없었다. * * *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카벨레누스는 짤막하게 대꾸한 다음, 도로 서류로 시선을 뒀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집중이 되지 않았다. 별 다를 게 없는 일상인데 이상하게 심장이 뛰었다. 마치 무언가를 경고하듯, 쿵쿵쿵. 카벨레누스는 결국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창문을 바라봤다. 한낮이었음에도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어둡기 짝이 없었다.
"눈이 올 것 같군."
"요즘 날씨를 보면, 올해 사냥철은 좀 이르게 찾아올 것 같습니다."
"그전까지 크리스티 왕녀 문제를 처리해야겠군. 괜히 폭설을 핑계로 머무르려고 하면 곤란해."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한시라도 빨리 떠날 채비를 할 수 있게 해야겠습니다."
가제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벨로아가 계속 슈바르한에 머무는 건, 그 역시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제 아무리 어설프다 해도 그녀 또한, 제르페누스의 사람이었다. 언제까지 벨로아가 제르페누스의 눈과 귀 노릇을 하게 둘 순 없었다.
"다만, 왕녀 측에선 저희가 뭘 하든 반발이 심할 테니, 이 부분은 1왕자와-."
"전하, 큰일 났습니다!"
갑작스럽게 끼어든 다급한 목소리가 가제프의 말을 가로챘다.
"무슨 일로 소란을 떠는 거지?"
가제프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 올렸다.
"모르코 남작 부인의 하녀가 왔습니다!"
"……."
"……."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방 안의 두 사내의 얼굴이 굳었다. 카벨레누스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닫힌 문을 활짝 열었다.
"하녀를 데려와."
"그, 그게, 그 아이는 지금 의사의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터라……."
시종장이 어설프게 웃으며 카벨레누스의 눈치를 살폈다. 모르코 부인의 연락이라면 무엇이든 바로 보고하라는 말을 충실히 따르고 있을 뿐인데도, 서슬 퍼런 주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감정 변화가 없는 주인은 모르코 부인 쪽에서 온 소식만 들을 때만, 하루에도 몇 번이고 표정이 뒤바뀌곤 했으니까.
"무슨 소리지. 치료라니."
"아무래도 습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
"하녀의 증언으로는 침입자가 나타나 모르코 부인께서 막고 있다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바로 전하께 보고를 드리고 병사를 보내려고-."
"그것뿐인가. 다른 건."
카벨레누스의 두 눈이 금방이라도 타오를 것처럼 거세게 일렁거렸다. 시종장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아, 그게 침입자가 마법사인 것 같다고 했습니다."
"마법사?"
"네. 그것도 분홍 머리를 가진 여자라고 하던데……."
"벨로아 크리스티."
카벨레누스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분홍 머리를 가진 여자라면 이 성에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분은 왕녀님 아니십니까. 그분께서 왜 모르코 남작 부인을……."
시종장의 말을 무시한 채, 카벨레누스는 곧장 내달렸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까부터 쿵쿵 요동치던 심장 박동이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 * *
"지금까지 확인된 시신은 총 네 구입니다. 그리고, 손상이 심해 알아보기가 어렵지만 여러 가지를 종합해보면 아무래도 시신의 주인은……."
가제프는 힘없이 중얼거리고는 이마를 짚었다. 감정을 삭이려고 했으나 치미는 공허함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자신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작은 정보가 비극을 불렀다는 자책을 피할 수 없었다.
"벨로아 왕녀, 하녀 시린, 모르코 남작 부인, 그리고……."
아가씨로 보입니다. 가제프의 잇새로 허탈한 숨이 튀어나왔다. 억지로 버티고 있었지만 자꾸만 눈가가 시큰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늘 의지해오던 혈육, 여동생처럼 함께해오던 하녀, 그리고 새 주인까지. 누구의 죽음도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도 괴로웠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욱해서 전하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절 죽이신다 해도 달게 받겠습니다."
결국 가제프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지금껏 성공 가도만을 달려오며 자신만만한 청년의 얼굴에는 이제 죄책감만이 그득했다.
"……죽지 않았어."
카벨레누스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가제프의 시선이 카벨레누스를 따라 움직였다. 붉은 머리를 제외하곤,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하게 손상된 시신은 분명 알리시아라고 단정하기 어려웠지만, 머리색이나, 체형, 시신이 입고 있는 옷 등을 보면 그녀라고 추정할 만한 것이 더 많았다.
"저딴 게 그녀일 리 없지. 그녀는 죽지 않았어. 저런 건 전부 눈속임에 불과해."
카벨레누스의 손이 허리춤에 찬 검을 쥐었다. 손잡이를 쥔 손등 위로 새파란 핏줄이 울룩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시신의 상태가 그리 오래되지 않으니, 이딴 짓을 벌인 놈들도 멀리 가지 못했을 거다. 지금 당장 성을 포함해서 슈바르한의 모든 국경을 폐쇄해. 쥐새끼 하나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
"……."
"나는 두 번 말하지 않는다."
"전하……."
가제프는 붉게 물든 눈으로 제 상관을 바라봤다. 얼핏봐도 카벨레누스는 지금 정상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화산처럼 이글이글 들끓고 있었다. * * *
"표정이 좋지 않네. 나탈리."
"너라면 표정이 좋겠어?"
"그런가. 나는 오래간만에 너와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은데."
제르페누스는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나탈리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나탈리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뱉었다.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어."
"괜찮아. 너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렇거든."
"……."
"끊임없이 내 진의를 확인하며 나를 의심하지."
"네가 그럴 만하게 행동하니까, 그런 거지."
"나는 그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행동할 뿐이야."
제르페누스는 제 몫의 차를 따른 후, 티포트를 내려놓았다. 은은하게 방 안을 채운 차 향기가 향기로웠다.
"역시, 네가 우려준 차보단 맛있지 않네."
"……."
"다음에는 네가 우려줄래?"
"쓸데없는 소리나 할 거라면-."
"크리스티 왕국의 1왕자는 어줍지 않은 힘만 믿고 본인이 황제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고 있어. 그자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스스로를 황제로 칭하며 블랑셰에 반기를 들 거야."
제르페누스는 찻물에 뜬 꽃잎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던 중, 벨로아 왕녀가 죽었지."
"……."
"벨로아 왕녀의 죽음은 그런 그에게 있어서 좋은 명분이 될 거야."
"명분? 설마, 너……."
"조만간 슈바르한과 크리스티 왕국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날 거야."
제르페누스는 아무렇지 않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정작 그의 얼굴은 일상 이야기를 나누듯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되면, 카벨레누스에게 어떤 오명이 씌어질 줄은 알고 하는 소리야?"
"약혼녀가 될 뻔한 여자를 죽이고, 그녀의 조국까지 멸망시킨 사내. 그 정도면 카벨레누스의 악명에 한 줄 추가되어도 나쁠 게 없는 이력, 아니겠어?"
"그게 동생에게 할 짓이야?"
"늘 해오던 일이었는데,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뭘."
제르페누스가 능글맞게 웃으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무엇보다 이래야만 내 동생은 움직이거든."
"……."
"전쟁이라는 건 무릇 적군이든, 아군이든 간에 피가 흘러야 재미있는 건데 카벨레누스는 아랫것들의 피를 너무 아껴. 승패가 아슬한 전쟁이라 해도 젊은 나이에 과감하게 도전해봐도 나쁠 게 없는데 말이야."
"너, 진짜……."
나탈리는 질색하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나탈리. 악명은 오명이 아니야. 힘의 상징이지."
"힘의 상징?"
"난 성군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야.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절대자가 필요한 거지."
품 안의 보석처럼 품고 있을 생각이라면 하루에도 수백 번 생사가 오고 가는 전장을 구르게 하지도 않았을 거다. 애당초 카벨레누스의 악명을 키워준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제르페누스는 엄지로 부드럽게 고개를 쓸었다.
"카벨레누스가 언제까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데."
"알아도 상관없어, 아니. 사실은 이미 알고 있을걸."
"뭐?"
"현명한 아이야. 내가 지금껏 벌여온 일을 모를 리 없지. 내가 그 아이를 잘 아는 것처럼, 그 아이도 나를 잘 아는걸."
아무리 흉내를 잘 낸다 해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 충직한 개를 흉내내며 잠자코 알맞은 사냥의 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생의 속셈을 모를 리 없었다.
"애당초 안다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사춘기가 왔다 해도 내 동생은 너무 착해서 내 말은 거절하지 못하거든."
"말은 바로해. 거절할 수 없는 거잖아."
"그 점이 귀여운 거야. 보통이라면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걸 알면 꼬리를 마는데, 그 아이는 어떻게든 이길 궁리를 하지."
"……."
"속으로는 날 끄집어내고 싶어 안달 난 주제에, 날 이기지 못하는 걸 알고 내 선을 넘지 않으려고 해. 오롯이 마지막 순간의 승리를 위해서 말이야."
단 하나, 그 여자와 관련된 일만 빼고. 제르페누스의 입가에 잠깐이지만 뒤틀린 미소가 걸쳐졌다.
"이상한 여자야. 별것도 아닌 버러지가 그 얌전하던 아이를 뒤흔들어놨어."
"이상한 건 너지."
나탈리는 얄궂게 비아냥거렸다.
"내가 하는 건 대의를 위한 숭고한 희생이야."
"너만의 대의겠지."
"화내고 싶으면 얼마든지 내. 그런다고 정해진 결말이 달라지진 않을 테니까."
"……."
"카벨레누스는 결국 검을 들 거야. 그 여자를 죽인 게 나인 걸 알면서도 내가 아닌, 크리스티 왕국에 분노를 토해낼 거야. 늘 그래왔던 것처럼 무수히 많은 것들을 짓밟고 취해가며 그 어떤 누구보다 완벽한 지배자가 되겠지."
나는 그 순간을 기다리는 것뿐이야. 제르페누스는 찻잔 손잡이를 어루만지며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