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배신자들
2020.08.20.
"한동안 날이 좋았던 것 같은데, 요즘은 계속 흐리기만 하네."
알리시아는 구름 낀 하늘을 바라보며 배를 어루만졌다. 겉으로 봐선 크게 티가 나지 않지만, 막상 만져보면 아이의 흔적이 느껴져 자꾸만 손이 갔다.
"이제 슬슬 사냥철 시즌이 돌아오려나 봅니다."
"사냥철?"
"다른 말로는 슈바르한의 겨울이라고도 부르죠."
모르코 부인은 웃으며 살짝 흘러내린 알리시아의 망토를 꼼꼼히 여며줬다.
"슈바르한은 항상 겨울이지 않아?"
"그래도 지금은 따뜻한 편이에요. 진짜 추위는 몇 차례의 폭설이 지난 후에 오죠."
"이제야 추위에 조금 익숙해졌는데, 지금보다 더 추울 거라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겁이 나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어차피 사냥철에는 돌아다닐 수도 없는 걸요."
"왜? 너무 추워서?"
"그런 이유도 있지만, 진짜 이유는 마물 때문이죠."
마물. 알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손끝을 꼼지락거렸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카벨레누스가 한 말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사내는 자신의 몸에 마물의 피가 흐른다고 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슈바르한에는 매해 일정한 시기가 되면 마물들이 나타납니다. 평소에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사냥철만 되면 귀신 같이 나타나 난동을 부리죠. 사냥철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그 때문이랍니다."
"……마물은 두려운 존재지?"
알리시아는 조심스럽게 모르코 부인의 눈치를 살폈다. 모르코 부인은 턱을 괸 채 살짝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슈바르한의 추위만큼이나 두려운 존재죠."
"……."
"모순적이게도 꼭 필요한 존재이기도 하지만요."
"꼭 필요한 존재?"
알리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슈바르한 사람들은 단지 안전을 위해 마물 사냥을 하는 건 아니랍니다."
"그럼?"
"마물은 슈바르한에선 없어서 안 되는 생물이에요. 모피는 추위를 이길 수 있는 옷이 되고, 뼈는 짐승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무기가 되어주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위험하지 않아?"
알리시아의 콧잔등에 주름이 잡혔다.
"추위보단 낫죠. 그래도 마물은 베어서 없애기라도 할 수 있으니까요."
"모르코 부인도 마물을 죽여본 적 있어?"
"물론이죠. 지금은 이렇지만 저는 꽤 실력 좋은 기사였답니다. 제가 현역일 때만 해도 사냥철의 주인공은 항상 저였죠."
"정말?"
"네. 물론이죠."
모르코 부인은 구겨진 알리시아의 콧잔등을 부드럽게 풀어주며 싱긋 웃었다.
"……그럼, 전하는?"
"전하께서는 항상 가장 많은 마물을 잡으시죠. 실제로 보면 혀를 내두를 실력이시랍니다."
모르코 부인은 웃었지만 알리시아는 그러지 못했다. 마물의 피를 가지고 있으면서 마물을 죽이는 사내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라서 부담스러우신가요?"
"아냐. 그것보다는 좀 생각할 게 있어서."
"생각이요?"
"그게……."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모르코 부인은 카벨레누스의 비밀에 대해 아는 눈치가 아니었다. 알리시아는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축였다.
"……부적을 생각했어."
"부적이요?"
"사냥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부적을 준다고 들었거든."
"전하께 드리려고요?"
"응. 계속 준비하고 있긴 해."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알리시아는 일부러 뒷말은 하지 않았다. 기분전환을 위해 나온 산책에서까지 우울한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아가씨께서 준비하신 거라면 뭐든 기쁘게 받으실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다."
알리시아는 바람결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웃었다. 그때였다. 무심코 돌린 고개에 시선이 마주치고야 말았다.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것 같은데. 저 멀리 나무 아래에서 절 보고 웃고 있는 여자에 알리시아는 눈만 껌벅거렸다.
"안녕."
당황한 알리시아를 보며 여자는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신기할 정도로 예쁜 여자였다. 살짝 새하얀 이를 보이며 웃는 게 얼마나 어여쁜지, 꿈을 꾸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여자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녀의 정체를 알 것만 같았다.
"사람이 말했으면 무슨 말이라도 해야하는 게 예의 아니니?"
알리시아의 몸에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여자의 얼굴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한눈에 알아봤다. 여자는 자신을 싫어한다.
"어떻게 오신 겁니까. 여긴 함부로 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모르코 부인이 알리시아의 앞을 막으며 표정을 굳혔다.
"저 물건도 멋대로 돌아다니고 있는데, 내가 못 갈 리가."
"말 조심하십시오."
"조심? 그건 그쪽이 해야지. 내가 누군지 알고."
"왕녀께서는 여기 있으시면 안 됩니다."
"뭐야, 날 알면서도 그렇게 건방지게 군 거야?"
"차림새를 보면 뻔하지요."
모르코 부인은 뒤에선 하녀들에게 손짓하며 벨로아의 상태를 살폈다.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최고급품으로 차려입은 여자는 흔치 않을 뿐더러, 무엇보다 모르코 부인은 슈바르한의 귀족들은 전부 외우고 있었다. 침입자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정말이지, 이 땅의 것들은 마음에 들지가 않아. 무례한 주인을 닮아서 그 밑의 개들조차 아주 건방지네?"
"무례를 범하고 계신 건 왕녀이십니다."
"나는 당한 걸 갚아줄 뿐이야."
"전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아니라, 네 뒤에 쥐새끼처럼 숨은 그 물건을 말하는 거야."
벨로아가 사나운 얼굴로 알리시아를 찾았다. 모르코 부인이 가리고 있어 보이는 건 겨우 털망토 정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벨로아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기엔 충분했다. 노예 주제에 분수도 모르고 보호 받으며 귀족 영애인 척 굴고 있는 모습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이 이상으로 제 주인을 욕보이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 물건이 노예라는 건 알고 감싸는 거야?"
벨로아는 대놓고 혀를 차며 얼굴을 찌푸렸다.
"슈바르한에는 노예가 없습니다."
"그딴 말로 있던 노예가 사라지면 세상에 노예는 한 마리도 존재하지 않겠지."
"아무래도 왕녀께서는 예의범절 교육을 다시 받으셔야겠군요."
모르코 부인이 벨로아에게로 덤덤히 시선을 던졌다. 지팡이를 들고 있는 걸로 봐선 공주는 마법사일 것이었다. 그것도 이곳까지 몰래 숨어들 정도로 실력이 상당한.
'왕녀가 마법사라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었는데 곤란하게 되었군.'
모르코 부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기사 서임을 받은 이후로 누구에게도 져본 적 없었지만, 그때와 지금은 달랐다. 세월은 유능한 기사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갔다.
"윗사람을 몰라보는 게 누군데, 내게 예의범절을 운운하는 건지 모르겠네."
"윗사람이라 대우받길 바라셨다면 쥐새끼처럼 몰래 숨어드는 게 아니라, 정식으로 절차를 밟고 만남을 청하셨어야죠."
"누구 보고 쥐새끼라는 거야!"
"당한 걸 갚아주는 건 저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정말, 하나 같이 다 짜증 나네."
일그러진 벨로아의 표정과 별개로 모르코 부인의 양 입술 끝은 위를 향했다. 마법사는 상대하기 어려운 존재였지만, 다행히도 상대가 너무 어렸다. 제 힘을 너무도 잘 알고 의기양양한 시선은 틈 그 자체였다.
"지금이라도 조용히 돌아가시면 굳이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얼마든지 문제 삼아봐."
어디에서 내 이야기를 떠들 수 있다면 말이지. 벨로아의 미소와 함께, 허공에서 나타난 무수히 많은 날카로운 얼음 화살이 알리시아를 향해 날아들었다.
"모르코 부인!"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르코 부인은 뒤돌지 않은 채, 짧게 숨을 뱉었다. 그녀의 손에는 잘 벼려진 단검이 들려 있었다.
"이걸 버티다니. 입을 놀릴 실력 정도는 있나 보네?"
"이 정도는 눈 감고도 처리할 수 있습니다."
모르코 부인은 여유롭게 웃었지만 속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방금 전, 공격으로 드레스가 살짝 찢어졌다. 예전이라면 문제없이 쳐냈을 텐데, 어쩔 수 없이 이런 곳에선 세월이 티가 났다. 몇 번은 괜찮겠지만, 싸움이 길어질수록 불리한 건 자신이었다.
"시린. 시즈나."
"네. 부인."
"여긴 내가 상대할 테니, 아가씨를 안으로 모시도록 해."
세월은 많은 걸 앗아갔지만 노련함을 줬다. 모르코 부인은 빠르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리하며 검에 기를 불어넣었다. 검기가 덧입혀진 단검은 이제는 장검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가씨께서 없으셔야 제가 편히 싸울 수 있습니다."
"……."
알리시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모르코 부인만 두고 떠난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그녀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알았어. 기다리고 있을게."
"걱정하지 마세요. 금방 처리하고 돌아가겠습니다."
"도망치려고? 그건 안 되지."
벨로아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땅이 갈라지며 알리시아의 앞을 막았다. 알리시아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시즈나와 시린, 누구 먼저 할 것 없이 검을 뽑아들며 알리시아를 보호했지만 도망치는 건 불가능했다. 땅이 갈라진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갈라진 틈으로 해골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죽은 자를 부리는 마법은 금기로 알고 있는데, 왕녀께서는 재주가 많으시군요."
"나는 특별하거든."
벨로아가 거만하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왕녀의 힘을 알게 된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지네요."
"궁금해할 필요 없어. 어차피 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을 테니까. 내 힘을 본 사람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아주 드물거든."
"그럼 제가 그 드문 사람이 되어드리죠."
"내 아이들이나 이기고나서 그런 소리를 하지 그래?"
벨로아가 한결 얄궂게 웃으며 지팡이에 몸을 기댔다. 모르코 부인은 달려드는 해골들은 베어내면서 알리시아 쪽을 확인했다. 다행히 두 하녀가 잘 버텨내주고 있었다.
'아니, 다행은 아닌 건가.'
모르코 부인은 거친 숨을 뱉어냈다. 벨로아가 만든 스켈레톤은 베어내도 잠깐일 뿐이었다. 뼈만 덩그러니 있는 스켈레톤은 몸이 부셔져도 금세 다시 일어나 덤벼들었다. 이런 식이라면 결국 지치는 건, 한쪽이었다. 그렇다면……. 모르코 부인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스켈레톤은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이대로 힘으로 밀어붙인다면 금방 뚫고 지나갈 수 있을 듯했다.
'지켜보지만 보지 말고 마법을 써도 될 텐데, 왜 그러지 않는 거지?"
아니면, 그러지 않은 게 아니라 그럴 수 없는 건가? 모르코 부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벨로아의 지팡이 끝에선 마법을 쓸 때처럼 빛이 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가능성은 충분했다. 모르코 부인은 검을 고쳐잡고 곧장 내달렸다.
"지, 지금 뭐 하는…… 꺄아악!"
"이런. 왕녀께서는 너무 빈틈이 많으시군요."
방심한 새, 모르코 부인에게 밀쳐진 벨로아가 그대로 눈밭을 굴렀다. 모르코 부인은 벨로아의 위에 앉아 그녀를 제압하고 목에 검을 겨눴다. 이미 스켈레톤은 사라져 있었다.
"왕녀께서는 실전을 경험해보신 적이 없으시죠?"
"헛소리 하지 말고 당장 저리 안 비켜!"
"힘이 대단하면 뭐 합니까.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인 걸요."
"지금 내게 훈계라도 하겠다는 거야? 너 따위가? 감히?"
벨로아가 두 눈을 치켜세우며 으르렁거렸지만, 이미 그녀의 지팡이는 저 멀리 던져져 있었다. 지팡이를 잃어버린 마법사는 일반인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단련된 전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벨로아가 할 수 있는 건 목소리를 빽빽 내는 것뿐이었다. 모르코는 철부지 아이와 다를 바 없는 공주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벨로아가 제대로 된 실력을 갖췄더라면 분명 위험했을 것이었다. 이대로 무사히 넘어갈 수 있는 건 천만다행이었다.
"괜찮으신가요, 부인?"
"아아, 그래. 시린. 나는 괜찮으니 나 대신, 왕녀를 붙잡고 있어 주겠니. 전하께 바로 소식을 알려야-."
푹-!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돌리던 모르코 부인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서늘한 무언가가 배 속을 관통한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통증보다는 이질적인 기분이 먼저 들었다. 모르코 부인은 녹슨 기계처럼 뻣뻣한 움직임으로 고개를 떨궜다. 배 부근은 이미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뒤에서부터 꽂힌 지팡이가 그녀의 복부를 정확하게 관통했다.
"죄송합니다. 부인."
머리 위에서 들린 목소리는 무심했다. 모르코 부인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절 찌른 범인을 찾았지만, 차마 검을 겨눌 수 없었다. 지팡이 끝에 서 있는 건 다름 아닌, 십여 년 간 제 손으로 키운 제자였다.
"네가 왜……."
모르코 부인의 목소리가 떨렸지만 시린은 표정 없는 얼굴로 지팡이를 뽑았다. 그 반동으로 핏방울이 사방으로 튀었음에도 어린 하녀의 얼굴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움직이지 마세요. 움직이시면 그대로 베어버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