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48)화 (48/164)
  • 48화. 칼끝이 향한 곳

    2020.08.17.

    "크리스티 왕국의 1왕자 측과는 연락해봤나."

    "다행히 저희 측 제안을 반갑게 받아들이더군요. 문제 없이 진행될 겁니다."

    "다행은 아니지. 그와의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건 거의 없을 테니 말이야."

    카벨레누스의 입매가 삐뚜름해졌다. 최대한 손해를 줄이기 위해 벨로아의 큰오빠까지 찾았지만, 역시나 제대로 된 이득을 보기엔 어려웠다. 왕자는 벨로아와 카벨레누스의 약혼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지만, 정말로 그뿐이었다. 약혼 파기를 대가로 1왕자가 건넨 조건은 벨로아가 내민 조건에 비하면 턱 없이 부족했다.

    "어쩔 수 없지요. 왕국을 다스리게 될 자와 떠나게 될 자의 입장은 다르니까요."

    가제프가 멋쩍게 웃었다. 애당초 차기 국왕으로 유력시되고 있는 1왕자는 크게 아쉬울 게 없는 입장이었다. 카벨레누스가 실제로 벨로아와 약혼을 진행했다 해도 1왕자는 여동생을 비싼 값을 주고 팔지 못했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했을 뿐 다른 행동을 하진 않았을 것이었다.

    "잔소리꾼을 수월하게 치우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 하는 거겠지."

    카벨레누스는 짧은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약혼을 취소하자는 말에 떼 쓰는 아이처럼 목소리를 빽빽 내질렀던 벨로아를 떠올리자, 다시금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그러고보니, 왕녀 측께서 만남을 요청해오긴 했습니다."

    "거절해. 이미 정리된 사안이야."

    "그러실 것 같아 일단 제 선에서 거절해두었습니다. 하지만 왕녀 측에선 여전히 전하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군요."

    "처음부터 모든 게 제 것인 양 의기양양하던 공주님이신데, 당연히 그러겠지."

    갑작스러운 번복에 벨로아가 불쾌한 건 당연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녀의 반발을 들어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애당초 귀족의 결혼이란, 실제로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상황에 따라 시시때때로 변하는 것이었다. 열댓 번은 약혼이 깨져봐야 진짜 귀족이라는 말이 우스갯소리도 있을 정도였다. 구두로 나누던 약혼이 깨졌다 해도 문제 삼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벨로아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었다.

    "목소리를 크게 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걸 알아서 더 저러는 거지. 적당히 무시하고 잘 떠날 수 있게 도와주도록 해. 1왕자 측과의 거래가 좋게 끝나려면 몸은 성하게 있어야지."

    카벨레누스는 다리를 꼰 채, 무심히 서류를 넘겼다. 가제프는 서류를 정리하는 척하며 상관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카벨레누스가 눈에 빤히 보이는 이득을 포기하면서까지 결정을 번복한 건 정말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불가능한 희망사항이라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솔직히 저는 전하께서 이런 선택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몰랐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감정에 눈이 멀어서 뻔히 보이는 멍청한 선택을 하다니 말이야."

    "……그래서 후회하십니까?"

    "아니."

    의외로 망설임 없는 대답이다. 가제프는 좀 더 용기를 내 입을 뗐다.

    "이번 일로 전하의 계획이 늦춰졌음에도 말입니까?"

    "……."

    "오랫동안 준비해오신 일이지 않습니까."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말이 많았는지 모르겠군."

    "죄, 죄송합니다!"

    카벨레누스는 가제프를 빤히 바라보다가 결국 펜을 내려놓았다. 그냥 무시해도 그만이지만 침묵만 하기엔 속이 답답했다.

    "아이를 건드린다면, 자기 목숨도 장담할 수 없을 거라고 하더군."

    "……아가씨께서말입니까?"

    "그래.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가 그랬지."

    카벨레누스는 한숨을 길게 내쉰 후, 이마를 짚었다. 금방 순응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리시아의 반대가 생각 이상으로 거셌다. 아무리 설득하려 해도 고집스러운 눈은 꺾일 줄 몰랐다.

    "괴물에 대한 애착이 점점 깊어지고 있어. 한시라도 빨리 떼어놓아야 해."

    "……좀 더 지켜보는 건 어떨까요?"

    "지켜봐? 무엇을?"

    카벨레누스가 짧게 헛웃음을 뱉었다.

    "괴물인지 확실하게 판명된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럴수도 있겠지."

    "그러면-."

    "혹시나 하는 가능성 때문에 그녀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카벨레누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차갑게 식은 눈동자가 보였다.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 있어. 그때도 괴물이 태아 상태에서 힘을 쓰기 시작했고, 그 여파로 산모는 결국 죽었지."

    간단히 만들어진 힘이 아니었다. 한 번의 성공을 위해 무수히 많은 실패가 반복되었다. 인위적인 힘을 얻기 위해 실험은 계속 되었고, 실험이 끝날 때마다 그만큼의 기록들이 남았다.

    "희귀한 케이스였어. 아주 희박한 확률로 일어난 일이었지. 그래서 생각하지도 못했어. 설마 내 자식이라는 괴물이 그 확률을 뚫을 거라곤."

    실제 실험 때에는 한 줄로만 정리되었을 정도로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확률은 잔인했다. 알리시아의 배 속 아이는 실험 기록과 마찬가지로 태아 때부터 힘을 쓰고 있었다.

    "그래. 정말로 평범한 아이일지 몰라. 힘을 쓴 것도 별일이 아닐지 몰라. 그럼 그 반대의 가능성은? 그 산모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

    "그녀의 목숨을 걸고 도박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모든 것은 체스와도 같아서 상황에 따라 버리고, 취하면 그만이었다. 어떤 형태든 간에 체크메이트만 한다면,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알리시아만큼은 체스판의 말로 둘 수 없었다. 그녀는 특별했다.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항상. 카벨레누스의 엄지가 천천히 구겨진 미간을 매만졌다. 돌이켜보면, 기이할 정도로 쉽게 빠져들었다. 그녀에겐 당연하게 흔들렸고 약해졌다. 하지만 이제와서 그런 생각은 의미 없었다. 그는 이미 선택을 했다.

    "그 아이는 괴물이어야 해."

    그렇게 생각해야만 미련이 남지 않기에. 카벨레누스는 뒷말은 머릿속에서 지운 채 다시 펜을 집어들었다. 하지만 얼마 힘을 줬던지, 펜은 몇 번 쓰지 못하고 그대로 두 동강 났다. 펜에서 흘러나온 새카만 잉크가 손을 흥건하게 적셨다.

    '아이가 절 많이 닮았어요. 전하를 많이 좋아해요.'

    '전하가 아무리 못된 말을 하셔도 자꾸 보고 싶은가봐요.'

    '보는 순간, 아실 거예요. 우리 아이라는 걸.'

    이미 선택을 했음에도 자꾸만 알리시아의 말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왜 자꾸 그녀를 닮은 아이를 상상하게 되는 걸까. 카벨레누스는 눈매를 일그러트리며 도로 서류에 시선을 뒀지만 소용없었다. 잉크가 덕지덕지 묻은 서류는 확인이 어려울 만큼 온통 엉망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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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약혼 파기라니, 곤란한 일에 놓이셨군요.>

    "곤란이요? 제 입장이 얼마나 우스워졌는지 뻔히 아시면서 그런 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흥분한다고 해서 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폐하.“

    <어쩌겠습니까. 사람 마음은 힘으로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인 걸요.>

    통신 거울 너머의 제르페누스가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흥분해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벨로아와 달리, 제르페누스의 만면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결국 벨로아는 참지 못하고 거칠게 테이블을 내리쳤다.

    "지금 태평하게 그런 소리나 하실 때인가요!“

    <뭐 어떻습니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달라진 게 없다고요? 제가 이렇게 비참한 꼴을 당했는데?“

    <제 동생 녀석을 사로잡지 못한 건, 결국 왕녀의 역량 부족 아니겠습니까.>

    제르페누스가 넉살 좋게 웃으며 차 향을 음미했다.

    "절 모욕하시는 겁니까?"

    벨로아는 빠득빠득 이를 갈며 두 눈에 힘을 줬다.

    <그게 아니라, 저희 거래를 분명하게 하자는 겁니다.>

    "하…….“

    <왕녀께서 저희의 거래를 잊고 계신 것 같은데, 저희 거래는 왕녀께서 제 동생과 약혼을 하느냐, 못 하느냐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왕녀께서 제 동생에게서 그 노예 계집을 떼어내면, 그 빈자리를 내어드릴 거라는 것이었죠.>

    제르페누스는 차를 모두 마신 후에야 비로소 잔을 내려놓고 벨로아를 바라봤다. 제 동생과 노예를 떼어놓기 위해 사람까지 끌어들인 사람답지 않게 그는 지나칠 정도로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지금 저와 말장난하시자는 겁니까?“

    <저희의 거래 조건을 분명히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아무래도 왕녀께서 욕심이 앞서신 나머지, 거래 조건을 충족하지 않은 채 물건을 취하려고 하시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폐하께서는 이 사태를 방관하시겠다는 거군요?“

    <거래 조건을 맞추셔야 하는 건 왕녀지, 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제르페누스가 수려하게 웃었다. 하지만 휘어진 눈매 사이로 비치는 녹색 눈동자는 바닥을 알 수 없는 늪을 닮아 있었다.

    "……그래서 저 보고 알아서 하라?“

    <노예 하나 처리하지 못하는 황후가 어딨겠습니까.>

    "…….“

    <전에도 말씀드렸을 겁니다. 무슨 방법을 쓰든 상관없다고. 그저 그 노예만 떼어주면 그만이라고요.>

    떨리는 벨로아의 눈매를 보는 제르페누스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애당초 어렵게 생각할 문제도 아닌 걸요.>

    "간단?“

    <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은 하나죠.>

    "…….“

    <원인이 사라지면, 문제도 없어지는 법입니다.>

    왕녀께서는 이미 답을 알고 계시겠죠? 제르페누스가 은근한 시선을 보내자, 그제야 벨로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사람을 빌려주세요.“

    <그건 곤란할 것 같군요.>

    "뭐라고요?"

    환해졌던 벨로아의 낯이 도로 어두워졌다. 벨로아는 통신 거울 앞으로 고개를 길게 빼며 눈을 찡그렸다.

    <제 밥그릇 하나 지키지 못하는 모습에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물론, 왕녀께서 정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방도가 없는 것만은 아니지만요.>

    "절 아주 가지고 노시려고 하시는군요.“

    <동생 녀석이 화났을 걸 대비해 작은 선물을 준비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요.>

    "…….“

    <어떻습니까? 빌려드릴까요?>

    호선을 그린 제르페누스의 눈매가 마치 뱀의 꼬리를 연상케 한다. 벨로아는 주먹을 꽉 쥔 채, 억지로 분을 삼켰다. 이 와중에도 자신의 우위를 자랑하는 황제의 꼴이 너무도 괘씸했다.

    "아뇨. 필요 없습니다.“

    <굳이 무리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폐하께서 그러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깟 노예 하나 처리하지 못하면서 무슨 황후 자리를 노리냐고."

    끈적한 시선을 보고 있자면 늪에 빠진 기분을 지울 수 없지만, 돌아가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 벨로아는 불쾌함을 꾸역꾸역 삼켜내며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손으로 정돈했다.

    "저는 단 한 번도 제가 원하는 걸 놓쳐본 적이 없습니다.“

    <훌륭한 마음가짐이군요.>

    황후가 되면, 저 세 치 혀부터 잘라버리고 말 것이다. 벨로아는 생글생글 잘도 웃고 있는 제르페누스를 노려보다가 거칠게 통신을 끊었다.

    "……."

    "……공주님?"

    "대공 쪽은 어떻게 됐지?"

    "만남을 허해주시지 않으셨습-."

    와장창-! 꽃병이 바닥을 구르며 그대로 산산조각났다. 벨로아는 물을 뒤집어 쓴 호위를 신경질적으로 노려보다가 그의 가슴을 거칠게 밀었다.

    "방금 뭐라고 했는지 다시 말해봐."

    "그것이…… 대공께서는 공주님과는 더는 하실 말씀이 없다고-."

    "하! 지금 그딴 걸 소식이라도 내 앞에 들고 온 거야? 대공을 내 앞에 끌고 오지 않으면 죽여버릴 거라는 내 말이 우습게 들렸나보지?"

    "그럴 리 있겠습니까! 하지만 한낱 기사인 제가 슈바르한 대공을 억지로 모셔오기가 어려운 게 사실인 터라……."

    "변함없이 쓸모 없긴!"

    벨로아는 짜증스럽게 호위를 쏘아붙이며 신경질적으로 티테이블을 발로 찼다. 이미 방 안은 그녀의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엉망이 되어 있었다.

    "어떻게 하실 셈이십니까? 저희는 이대로 본국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아니. 그럴 수야 없지."

    "하지만, 이미 대공 측에서는 마음을……."

    "한 번 돌린 마음을 또 못 돌리겠어?"

    벨로아가 날 선 눈으로 호위를 흘겨보며 씩씩거렸다. 유모가 부탁해 특별히 받아주었건만, 눈치나 살살 살피느냐 정신 없는 호위는 쓸모라곤 눈꼽만큼도 없었다.

    "이 문제는 풀 필요도 없어. 그냥 간단하게 생각하면 돼."

    문제의 원인을 없애면 그만이지. 벨로아의 굽이 지그시 조각난 유리 파편을 밟았다. 유리 파편에 비친 그녀의 입가에는 광기 어린 미소가 서려 있었다.

    "그래. 내가 너무 많이 봐줬지."

    "……."

    "어차피 처리해야 하는 계집. 조금 더 일찍 처리한다고 생각하면 되는 건데."

    "그러다가 대공의 화를 사면 어떡합니까."

    "얼마든지 화내보라고 하지. 내가 아주 좋은 구경거리로 써먹어줄 테니 말이야."

    그 잘난 얼굴이 일그러지는 모습을 생각하자, 치밀었던 마음이 살짝 풀렸다. 벨로아는 길게 심호흡을 한 다음, 우아하게 턱끝을 추켜올렸다.

    "……직접 움직이실 겁니까?"

    "쓸모 없는 네 녀석을 부려먹는 것보단 내가 움직이는 게 확실하겠지."

    짜증나는 블랑셰 같으니라고. 벨로아는 신경질적으로 허공에 손을 휘둘렀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샌가 그녀의 키보다 훌쩍 큰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두고 보라지. 내 손을 직접 더럽히게 한 대가는 제대로 치르게 될 테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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