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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47)화 (47/164)

47화. 무너져가는

2020.08.13.

"미안해. 진작 말하지 않아서. 하지만 혹시나 했어. 단 하룻밤이었고, 설마 태아 때부터 그 괴물이 힘을 쓸 수 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자신의 고백에 알리시아가 저를 혐오한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마물의 피를 이어받은 괴물의 존재가 달가울 사람은 누구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의 냉대를 감수하면서도 아이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었다. 더는 알리시아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히고 싶지 않았다. 냉정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알리시아가 깨어나지 못한 날이 길어질수록 카벨레누스는 지옥을 살았다. 모든 것을 망가트리고 싶음과 동시에, 무기력감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알리시아를 특별하게 생각한다 해도 선을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이미 선을 넘고 있었다.

"이번 일로 분명해졌어. 그건 괴물이야. 지금이야 숨 죽이고 있지만, 언제 다시 그대를 해칠지 몰라."

카벨레누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알리시아는 일그러진 사내의 얼굴을 보며 입술만 달싹거렸다. 누구보다 완벽하게 보였던 사내가 보인 틈에 입안이 바싹 말랐다. 미세하지만 카벨레누스의 시선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알리시아는 그 시선의 의미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아이 같은 건 필요 없어. 내겐 그대만 있으면 돼."

"전하……."

"혼란스러울 거라는 거 알고 있어. 그렇지만 급한 일이야. 한시라도 빨리-."

"뭐가 그렇게 두려우신 거예요?"

알리시아는 고집스럽게 눈에 힘을 주고 카벨레누스를 바라봤다. 카벨레누스의 시선은 처음보다 더 흔들리고 있었다.

"……그대."

그대가 두려워. 한껏 가라앉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웅웅 귓가를 울렸다.

"그대는 너무 연약해서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아. 분명 손에 쥐고 있다고 생각했다가도 어느 순간부턴 눈을 떼고 나면 영영 보이지 않을 것만 같아. 그게 두려운 거야. 내가 아무리 발악해도 그대를 잡을 수 없는 순간이 올까 봐."

"……."

"그날 이후, 평생 한 가지만 보고 살아왔어. 그 목표만 이룰 수 있다면, 뭘 희생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조금이라도 더 빠른 길을 선택하고, 이득을 볼 수 있는 선택을 해왔어. 한번도 후회 한 적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셈이었어."

카벨레누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불게 묽든 눈매 사이로 이색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지금도 이런 판단을 내린 스스로를 정말로 어리석다고 생각해."

"……."

"머리로는 여전히 내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

"그대를 잃고 싶지 않아."

오랫동안 검을 잡아 변형되어 울퉁불퉁하고 거친 사내의 손이 여자의 손을 전부 제 안으로 감췄다. 혹시라도 빠져나갈까, 집요하다싶을 정도로 단단히 쥐고 옭아매었다.

"더는 거짓말 하지 않을게."

"……."

"그대가 바라는 건 뭐든 들어줄게."

"……."

"원한다면, 크리스티 왕녀와의 약혼도 진행하지 않을게."

그 괴물만 포기하면. 사냥감을 노리는 짐승의 눈에 알리시아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꽉 잡힌 손은 그녀가 도망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알리시아의 잇새로 가냘픈 숨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이내, 알리시아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괴물이 아니에요."

"그대는 아직 그 괴물이 어떤 건지 몰라서 그래."

"모르지 않아요."

"아니. 그대는 아무것도 몰라."

"제가 뭘 모른다는 거죠?"

"그 괴물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하염없이 강해 보였던 사내가 그 순간은 너무도 약해 보여 알리시아는 순간 말을 잃었다. 위로를 하고 싶었는데 그의 상처를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맞아요. 저는 전하가 말하는 괴물이 얼마나 끔찍한 건지 몰라요. 하지만 저희 아이는 달라요."

"다르지 않아. 그건 아이의 탈을 쓴 괴물일 뿐이야."

"한 번도 보신 적 없잖아요."

알리시아가 간절하게 목소리를 짜냈다. 카벨레누스는 단지 몰라서 그러는 것이었다. 그 어여쁜 아이를 실제로 본다면 저렇게 잔인하게 말할 수 있을 리 없을 테니까.

"보지 않아도 뻔해."

"그렇지 않아요. 저희 아이는-."

"그대를 닮은 평범한 아이라면 나도 보통의 부모 같은 마음을 가졌을지 모르지. 하지만 그런 건 불가능해."

"불가능하다고요?"

"괴물의 피를 이은 아이는 결국 괴물일 뿐이니까."

카벨레누스의 얼굴 위로 일그러진 미소가 지어졌다. 추악한 검은 털을 가진 짐승만 떠올리면 벌써부터 구역감이 치밀었다.

"전하는 괴물이 아니에요."

"그렇지 않은 척하고 있는 것뿐이야. 찌꺼기만 남은 자존심이라도 지키고 싶어서."

하지만 이제 그런 것도 의미없어졌지. 카벨레누스가 몸을 일으키면서 반동으로 자연스럽게 알리시아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알리시아는 제 위에 올라탄 사내를 보며 그대로 숨을 멈췄다. 카벨레누스의 손은 어느샌가 그녀의 배에 닿아 있었다.

"괴물의 존재는 내 바닥이야. 그대에겐 죽어도 보이고 싶지 않았던 바닥."

"……."

"나는 이제 바닥을 드러냈어."

잠긴 사내의 목소리는 짐승이 울부짖는 것처럼 들렸다. 알리시아는 여전히 숨을 멈춘 채, 한껏 날이 선 사내를 응시했다. 빛을 등지고 그늘 진 사내의 얼굴은 어두었지만, 금색 눈동자만큼은 어둠 속에서도 색을 잃지 않고 선명하게 빛났다.

"괴물을 죽여-."

"그만!"

"듣기 싫다 해도 들어야 해. 그건 아이가 아니야. 그저-."

"더는 말하지 마세요!"

알리시아가 급히 카벨레누스의 말을 가로챘다. 그녀의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

"알리시아."

"전하의 아이이기 전에 제 아이예요."

"……."

"한 번만 더 제 아이에게 함부로 말씀하시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그대가 불쾌할 거라는 거 알고 있어.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더 말씀하지 마시라고요."

알리시아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아이를 원한다면 입양을 하면 돼. 무슨 수를 쓰던 그대가 원하는 조건의 아이를 찾아줄 테니까."

"다른 아이는 필요 없어요."

"알리시아."

"전하께서 아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면, 이 아이는 그냥 제 아이일 뿐이에요."

이 마음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알 수 없었다. 아이에게서 받은 작은 위안에서인지, 아니면 절 닮은 아이에 대한 동정인지 아직은 정확히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지켜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제 안에서 움트는 작은 생명을 지키지 못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더는 제 아이에게 상처주지 마세요."

"그대의 아이? 상처?"

"다 듣고 있어요. 전부 다요."

"듣고 있다면 차라리 잘됐지. 그 괴물도 제 입장을 분명하게 알 필요가 있을 테니까."

"괴물 소리 좀 하지 마세요."

"그럼 그 끔찍한 걸,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거지?"

"전하께서 어떤 일을 경험하셨는지 저는 몰라요. 하지만 적어도 이것만은 알아요."

이 아이는 괴물이 아니에요.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거친 손바닥을 제 배로 밀착시키며 카벨레누스와 시선을 바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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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벌써부터 눈치를 많이 봐요. 소심하고, 겁도 많아요. 그러니, 이 이상으로 잔인한 말씀하지 마세요."

"……."

"아이가 절 많이 닮았어요."

"그대를 현혹시키려는 거야. 조금이라도 그대의 환심을 사서-."

"아이잖아요."

알리시아는 심호흡도 하지 않고 곧장 말을 이었다.

"아이가 사랑받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이상한 게 아니에요."

"평범한 아이가 아니잖아."

"그렇다 해도 제 아이예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만큼은 아이의 편이 되어줘야죠."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야."

"맞아요.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예요. 이제 막 싹을 틔우려는 작은 생명. 그런 아이가 뭐 그렇게 두렵나요?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벌써부터 못 들을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거예요?"

알리시아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그녀는 꾸역꾸역 울음을 참고 있었다.

"그건 태어나지 말아야 하는 아이니까."

'너 같은 건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야 했는데.'

순간,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기억에 알리시아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선 너무도 익숙한 말이었다. 노이슈타인의 국왕. 아버지라고도 부를 수 없는 그 작자. 알리시아는 부친과 처음 만난 날, 그가 했던 말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알리시아는 멍하니 카벨레누스를 응시했다. 카벨레누스와 부친을 비교하는 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는 일인데도 한 번 든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결국 알리시아는 더는 카벨레누스를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필요한데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다. 카벨레누스와 연인이 된 모습은 상상할 수 있는데, 그와 가족이 된 모습은 떠올릴 수 없었다. * * *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드세요."

"……고마워."

모르코 부인이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알리시아는 멍한 눈으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바라봤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온몸이 소금에 절여진 것처럼 무기력하기 짝이 없었다.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이제 시작인 걸요."

"시작이라고 하기엔 끝이 보이지 않아."

알리시아의 고개가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오늘도 카벨레누스와 대화를 했지만, 이야기는 항상 도돌이표였다. 카벨레누스는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 도무지 그 전제가 달라지지 않았다.

"아가씨."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전하께서 아이를 원치 않으셔."

"……."

"의사를 바꿀 생각도 없어 보이시고."

"원래 한 번 내린 결정은 번복하지 않던 분이셨어요."

"단지 그렇다고 보기엔……."

알리시아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카벨레누스는 자세하게 이야기해주지 않았지만, 그답지 않던 반응들이 마음에 걸렸다. 감춰진 모종의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카벨레누스가 가여웠다. 그를 꽉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알리시아는 습관처럼 제 배를 어루만졌다.

"너무 걱정하지마세요. 아직 시간은 남아 있는 걸요."

"……만약, 전하께서 영영 마음을 돌리지 않으면?"

"……."

"결국 아이를 죽이겠다고 일을 벌이시면 어떻게 해?"

알리시아의 손끝이 떨렸다. 카벨레누스는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아이를 해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하의 땅이야. 이곳에서 전하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을 리 없잖아."

지금이야 알리시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참고 있을 뿐이었다. 카벨레누스는 언제든, 얼마든지 아이를 해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지켜드릴 겁니다."

"……너무 무서워. 모두가 내 적 같아. 아이를 죽이기 위해 안달난 것처럼 느껴져."

"아가씨."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것 같아. 오늘은 내 이야기를 들어주실까 희망을 품다가도, 혹시나 마음이 바뀌셔서 무조건 아이를 없애려고 하지 않으실까 두려워."

모르코 부인이 말없이 알리시아를 끌어안았다. 알리시아는 눈을 감은 채 미약한 숨을 뱉었다.

"악몽을 꿨어, 아주 끔찍한 악몽을."

"꿈은 흔히들 현실과 반대라고들 하잖아요. 잘될 거예요."

"정말로 그런 거라면 좋을 텐데."

알리시아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눈꺼풀이 떨릴 때마다 메마른 속눈썹도 함께 떨렸다. 어느 순간부터는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저 버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전하께서 다른 여자와의 약혼을 취소하셨는데, 조금도 기쁘지 않아."

"……."

"날 입적시킬 적당한 가문들 목록도 보여주시며 원하는 가문을 고르라고 말하셨는데,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단 생각을 했어."

"……."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우리의 미래를 이야기하는데, 설레긴커녕 마음이 너무 아팠어."

원하던 삶이었다. 원래라면 달가워야 할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런 하루가 반복되면 될수록 알리시아는 괴로웠다. 카벨레누스가 보여주는 완벽한 세계에는 아이가 없다. 그 사실이 못내 견디기 어려웠다.

"전하의 말이, 행동 하나 하나가 전부 아이를 부정하고 있어. 분명 존재하는 아이인데, 없는 존재처럼 취급받고 있어."

"……많이 힘드시죠?"

모르코 부인이 알리시아의 마른 등을 토닥였다. 뭐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알리시아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해주는 것만이 전부였다.

"너무 힘들어. 그렇지만 가장 힘든 건 그런 게 아니야. 내가 정말로 힘든 건……."

알리시아는 차마 뱉지 못한 말을 속내로 꾹꾹 삼키며 눈을 질끈 감았다. 진짜로 두려운 건, 카벨레누스가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반복되는 상황에 지치다가 결국 사내가 들려주는 미래에 자신이 흔들릴까 봐. 그래서, 결국엔 해선 안 되는 생각을 하게 될까 봐.

"……부탁이 있어."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알리시아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모르코 부인의 옷깃을 쥔 손등 위로는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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