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46)화 (46/164)
  • 46화. 괴물의 아이

    2020.08.10.

    "실망시키지 않을게."

    "실망시키셔도 괜찮아요. 사람은 항상 실수를 하고 그걸 통해 성장하는 걸요."

    "……."

    "아가씨. 제가 실망할까 두려워하지 마세요. 중요한 건 제 평가가 아니라, 아가씨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랍니다."

    "……나 스스로?"

    "누가 멋대로 평가하고, 간섭한다고 한들 결국 아가씨의 삶이잖아요. 아가씨께서 주도권을 가지시는 게 맞죠."

    알리시아는 머뭇거리다가 손끝만 꼼지락거렸다. 모르코 부인은 말없이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좀 더 제 품에 안고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자랄 수 있게끔 돕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사정이 좋지 않았다. 모르코 부인은 빠르게 심호흡을 한 후, 곧장 알리시아의 손을 꽉 잡았다.

    "아가씨."

    "응."

    "시간이 많지 않으니, 본론만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괜찮을까요?"

    "물론, 괜찮아."

    흔들리는 알리시아의 고개짓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모르코 부인은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한 후,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아가씨께선 현재 임신 중이십니다."

    "아, 그건……."

    "설마, 이미 알고 계셨나요?"

    "응, 어쩌다 보니까."

    알리시아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괜찮으신가요?"

    "뭐가?"

    "아이를 원치 않으셨잖아요."

    모르코 부인이 조심스럽게 알리시아의 눈치를 살폈다. 아이를 탐탁지 않아했던 건 알리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는 그랬지만, 이제는 아니야."

    알리시아는 습관처럼 배를 어루만졌다. 아이가 듣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말 하나도 조심스러웠다.

    "여전히 좋은 부모가 되어줄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아이가 날 많이 좋아하거든."

    "아가씨를 좋아한다고요?"

    "꿈을 꿨거든."

    아주 예쁜 아이가 나오는 꿈을. 비밀을 말하듯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하는 알리시아에 모르코 부인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무슨 꿈을 꾼 건지는 모르나, 알리시아는 아이 이야기를 하며 자연스럽게 웃고 있었다. 가냘팠던 여자는 어느덧, 엄마가 되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슬펐다. 알리시아가 아이를 사랑하면 할수록 마주하게 될 상처 역시 클 수밖에 없을 테니까.

    "……아가씨께서는 아이를 지키고 싶으시겠죠?"

    "지킨다는 말이 어색하긴 하지만, 그럴 수 있다면 그러고 싶어."

    알리시아는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꿈속의 아이는 무척 예뻤지만, 반대로 너무 작아서 걱정이 됐다. 할 수만 있다면 제 옆을 내어주고 보듬어주고 싶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제가 하는 말씀을 잘 들으셔야 합니다."

    "……혹시, 아이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아이가 아니라, 전하입니다."

    "전하?"

    "전하께서는 아이를 원치 않고 계십니다."

    "그럴 리가. 그때 분명……."

    기억을 더듬던 알리시아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이미 카벨레누스는 제게 거짓말을 했다. 그때 했던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단정지을 순 없었다.

    "아가씨의 몸이 회복된 후에 이야기 드리고 싶었지만 지금 상황이 썩 좋지 않습니다."

    "제대로 말해줘."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나, 전하께서는 아이를 혐오하고 계십니다."

    "단지 싫은 것도 아니고, 혐오라고?"

    "네. 혐오입니다."

    모르코 부인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가 그렇게 쓰러지신 후, 전하께서는 아가씨만을 위했습니다."

    "나만을 위했다고?"

    "아가씨를 치료할 수만 있다면, 태아에게 해가 되는 약물도 상관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혹시……."

    알리시아의 낯이 창백하게 질렸다. 아이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태아에게 해가 되는 약물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제가 막았으니까요."

    "다행……."

    아니, 그게 정말로 다행인 걸까. 알리시아는 굳은 표정의 모르코 부인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라고 믿고 싶었지만, 찰나의 순간 스쳐지나간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전하께선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아이를 해할 수 있는 분입니다."

    "……."

    "전하께 아가씨는 특별한 분입니다. 어쩌면, 아가씨께서 전하의 마음을 되돌릴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내가 돌리지 못하면?"

    알리시아의 초점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질문하긴 했지만, 이미 그녀는 답을 알고 있었다.

    "아이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예상했음에도 직접 들은 모르코 부인의 선고에 알리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할 수 있다면, 아이가 아무것도 듣지 못하게 귀를 막아주고 싶었다.

    "내 아이지만, 반은 전하의 아이이기도 해. 그런데, 어떻게 아이를 건드릴 생각을 할 수 있겠어."

    "전하께서는 이미 아이를 알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알고 계시다고?"

    "그리고, 아이를 괴물이라고 여기시는 것 같더군요. 아이가 아가씨를 망가트리고 있다고요."

    "그럴 리 없잖아. 아이는 그저 아이일뿐이야."

    알리시아가 황급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 애정 하나를 받기 위해 연신 눈치를 보던 아이가 자신을 망치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건 저희의 바람일 뿐이니까요."

    모르코 부인은 씁쓸한 표정으로 끼고 있던 반지를 벗었다. 가제프에게 받은 반지였다.

    "전하의 음성을 녹음한 마도구입니다. 일부러 횟수 제한이 있는 물건을 쓴 터라, 이제 한 번만 사용이 가능합니다."

    "……."

    "받아들이기 어려우시겠지만, 아이를 지키고 싶으시다면 강해지셔야 합니다."

    모르코 부인은 단호하게 알리시아의 손에 반지를 쥐어줬다. 카벨레누스를 위해 이야기를 적당히 포장할 수도 있었지만 모르코 부인은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카벨레누스에게서 아이를 지킬 수 있는 건, 결국 알리시아뿐이었으니까. 알리시아가 아이를 지키길 원한다면, 그녀는 상황을 모두 꿰뚫고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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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무사해서 다행이야."

    "……."

    "아직도 내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건가."

    "……보고 싶었어요."

    알리시아는 애써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카벨레누스를 바라봤다. 그 모든 게 혼란스러웠지만 그럼에도 확인하고 싶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귀로 들어서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고 싶었다.

    "……깨어나도 날 봐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와주셨다고 들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켜보는 것밖에 없으니까."

    부쩍 핼쑥해진 사내를 보며 마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하면 거짓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내를 보며 두려움을 느낀 것 역시. 알리시아는 손끝에 힘을 줬다. 사내를 마주했을 때, 반가운 마음만 들었던 게 아니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방어하듯 제 배를 감싸고 있었다.

    "소식 들으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무슨 소식?"

    "제가 임신했다는 거요."

    다가오던 카벨레누스의 걸음이 멈췄다. 알리시아는 가만히 선 사내를 응시했다. 카벨레누스를 마주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고민을 했다. 하지만 그 무엇도 뚜렷한 답안을 내놓을 수 없었다. 아이를 대하는 카벨레누스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악순환의 반복일 뿐이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되잖아."

    "나중이요?"

    "깨어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지금은 그대 몸을 챙기는 게 우선이야."

    카벨레누스가 다시 걸음을 뗐다. 알리시아는 다가오는 사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살폈다.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실제로 보니 더욱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기쁘지 않으세요?"

    "기뻐. 그래서 곧장 달려온 거야."

    "아뇨. 저 말고, 아이요."

    "……."

    "전하의 아이잖아요."

    감정을 실고 싶지 않으려 했음에도 반사적으로 감정이 실렸다. 절 보는 카벨레누스의 시선은 애정이 듬뿍 담겨 있는데, 아이의 존재를 언급할 때마다 그 빛이 사그러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겨웠다.

    "말했잖아. 지금은 그대의 몸부터 챙기는 게 우선이라고."

    "그리고, 제 아이이기도 해요."

    "……나는 아이를 썩 좋아하지 않아."

    "저희 아이잖아요."

    알리시아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부모의 마음은 본능적으로 생기지 않는다는 건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 끊임없이 아이의 존재를 확인하고 받아들이고서야 그런 마음이 들었다. 카벨레누스에게도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알리시아는 그 가능성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절 닮은 아이가 제가 겪은 삶을 살길 바라지 않았다. 아이에게만큼은 제대로 된 가정을 주고 싶었다.

    "저는 전하께서 좀 더 기뻐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럴 순 없어."

    "전하."

    "그대는 이제 내게 신뢰가 없다고 했지. 내가 한 거짓말이 우리 사이를 무너트렸다고."

    카벨레누스가 알리시아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알리시아는 절 올려다보는 사내를 바라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 거짓말 때문에 그대를 잃을 뻔했어. 그래서 이제는 거짓을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아."

    "……."

    "솔직하게 말할게. 나는 아이를 원하지 않아."

    바로 인정할 줄은 몰랐는데, 생각 이상으로 카벨레누스는 순순히 사실을 인정했다.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침을 삼켰다. 가까이서 본 사내의 눈은 무척이나 퀭했다. 그제야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가 그답지 않게 약해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의 존재가 낯설어서 그럴 수도 있어요. 애정을 가지고 시간을 들이다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예요."

    "그런 개념의 문제가 아니야."

    카벨레누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요?"

    "개인적인 문제야. 알아서 좋을 것도 없는 이야기고."

    "그래도 알고 싶어요. '우리 아이'의 일인 걸요."

    "우리라……."

    사내가 다 안다는 듯한 눈으로 알리시아를 응시했다. 알리시아는 주먹을 꽉 쥐면서고 카벨레누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의 곧은 눈에 결국 한숨을 토해냈다.

    "불쾌하게 들리겠지만, 그대의 배 속에 자리 잡은 건 괴물이야."

    괴물. 녹음된 마도구를 통해서도 들은 단어였지만, 들을 때마다 불쾌한 단어였다. 알리시아는 부디 아이가 그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길 간절하게 빌며 카벨레누스의 시선을 좇았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시는 거예요?"

    "모종의 이유로 내겐 특별한 힘이 흘러. 그리고, 그 힘을 준 자가 말하기를 핏줄을 통해 전염될 수도 있다고 했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특별한 힘이라뇨."

    알리시아가 입을 뻐끔거렸다. 핏줄로 이어지는 특별한 힘은 그녀에게 있어선 익숙한 것이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는 거 알고 있어. 하지만 사실이야."

    "……."

    알리시아는 흘끔 제 배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아이의 힘이 분명하게 보였지만, 카벨레누스의 힘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역시, 믿지 못하겠나?"

    "아뇨. 믿어요. 저도 비슷한 이야기를 알고 있으니까요."

    "아니. 내 힘은 그대가 생각한 것과는 사뭇 다를 거야."

    카벨레누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드러내지 않고 싶었던 과거였지만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알리시아의 배 속에 있는 괴물을 떼어내는 편이 더 급했다. 이미 한 번 제 어미를 해치려고 했던 괴물이었다. 또 다시 같은 짓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블랑셰 제국의 상징은 검은 늑대지. 그리고, 황족들에겐 대대로 늑대의 피가 흐른다고 전해져왔어. 어느 나라에나 있을 법한 전설이지."

    그 말도 안 되는 힘이 실존한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카벨레누스의 눈이 희번뜩하게 빛났다. 동공이 도드라지는 금안은 확실히 사람보다는 짐승의 것을 연상케했다.

    "내겐 짐승의 피가 흘러. 제국을 건국했다는 전설 속 늑대 말이야."

    "저는 그런 게 문제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 눈에 비친 전하는 짐승이 아닌, 사람인 걸요."

    "과연 그럴까?"

    "……."

    "내가 가진 힘은 원래 존재하지 않는 힘이었어. 전설 속에서만 남아 있어야 정상이었지. 욕심 내지 말았어야 하는 힘을 탐하는 자들만 없었더라면 말이야."

    카벨레누스의 손등 위로 핏줄이 불거졌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날의 기억은 선명했다. 모친을 살리기 위해 소년은 결단을 내려야 했고 그 대가는 참혹했다.

    "폐하께서는 내 힘을 제왕의 것이라 부르고, 신전 측에서는 신성한 힘이라고 불러. 하지만 그 무엇도 정답은 아니야. 다들 그럴싸한 이름을 붙여서 열심히 찬양하고 있을 뿐이지."

    "……."

    "정작 그 힘의 원천은 그들이 가장 혐오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말이지."

    "힘의 원천이요? 분명 그건 전설 속 늑대의……."

    "순수한 힘이라면 어떤 문제가 없었겠지."

    카벨레누스의 시선이 오롯이 알리시아의 배, 아니. 그 안에 숨은 괴물을 향했다. 오랫동안 신전과 오랫동안 반복해온 황가는 언제나 보다 강력한 권력을 원했다. 특별한 상징으로 신전이 주장하는 신성함을 짓밟길 바랐다.

    "전설 속 늑대 같은 건 없었어. 전설은 결국 황실의 특별함을 과시하는 장식품 같은 거니까. 무엇도 베지 못하는 무딘 장식용 칼처럼 제대로 된 게 아니었지."

    "그렇다면……."

    "마물."

    "……."

    "그 추악하고도 괴상한 괴물들. 내겐 그들의 피가 흘러."

    카벨레누스의 눈이 살기등등하게 번뜩였다. 제 모든 것을 망가트린 괴물의 피를 이어받은, 또 다른 괴물을 찾아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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