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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45)화 (45/164)
  • 45화. 나의 어린 주인

    2020.08.06.

    "전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네."

    "그나마 너라도 정신머리가 똑바로 박혀 있어서 다행이구나."

    "……제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가제프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카벨레누스의 신하가 된 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의 뜻을 거슬러본 적이 없었는데, 자신이 이런 짓을 저지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죄책감 갖지 마렴. 너는 옳은 일을 한 거다."

    "충직한 개에 있어서 옳고 그른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판단하는 건 주인의 몫이지, 개의 것이 아닌걸요."

    "개를 흉내낸다 해도 너는 사람이니까."

    "……."

    "어렵게 생각할 이유는 없단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야. 그 작은 생명체가 뭐 두렵다고 배척한단 말이야."

    "전하께서는 그저 아이를 원하지 않으신 것뿐입니다."

    "네가 보기엔 그러니? 내 생각에는 그분께서는 아이를 두려워하시는 것 같은데."

    모르코 부인은 가제프가 건넨 반지를 꽉 쥐었다. 그 안에는 카벨레누스와 가제프가 나눈 대화 내용이 저장되어 있었다.

    "전하께선 두려움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야 모르지. 우리는 그분이 슈바르한에 오기 전까지 어떤 삶을 겪었는지 모르잖니."

    "……."

    "무엇보다 황제 폐하와 전하의 관계부터가 비정상적이지 않니. 그리고, 보통 그런 관계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고."

    모르코 부인이 긴 한숨을 뱉었다.

    "이모님께서는 앞으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지금으로선 아가씨가 하루 빨리 깨어나시길 바랄 뿐이지."

    "제가 묻는 건 그 이후입니다."

    "글쎄, 어떻게 해야 할까."

    "저는 더 이상 도와드릴 수 없을 겁니다."

    가제프는 힘없이 고개를 숙이며 모르코 부인의 시선을 피했다. 모르코 부인에게 정보를 넘긴 것만으로도 카벨레누스에 대한 배신이었다. 그 이상은 할 수 없었다.

    "이제 막 피가 마른 어린애의 도움이 필요할 리 없잖니."

    "이모님께서 강한 분인 걸 아시나, 너무 무리하진 않으셨으면 합니다."

    "나는 항상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란다. 그저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야."

    모르코 부인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쥐었다가 폈다. 기사 직위를 내려놓은 지 수십 년이었다. 그럼에도 오랜 세월동안 자리 잡은 습관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전하께서 마음을 돌리셨으면 좋겠지만, 그러기란 쉽지 않겠지.'

    오래된 것은 그런 것이었다. 그것이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간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당연해지고 굳건해져서 쉽게 바뀌지 않았다. 카벨레누스의 변화를 기대하는 건 사실상 희망사항에 가까웠다.

    "아무런 문제가 없이 조용히 넘어가면 좋겠지만, 폭설이 오기 전에는 항상 날이 좋았지."

    "……."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겠니. 그저 조금이라도 피해를 덜 입기 위해 대비할 뿐이란다."

    모르코 부인은 연륜 어린 미소 속, 무거워진 속내를 감추며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유난히도 날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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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날이 좋네."

    "기분이 좋으신 모양입니다."

    "당연하지. 드디어 내 입지가 분명해지는 거잖아?"

    벨로아는 거울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입술을 끌어올렸다. 오랫동안 치장한 시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거울에 비친 그녀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정말이지, 모든 게 만족스러워. 그리고 그건 앞으로 더 그렇겠지."

    단 한 가지만 제외하고 말이지. 여유롭던 벨로아의 미소가 한순간 뒤틀렸다.

    "우습지 않아? 하염없이 약혼녀를 혼자 두는 사내라니 말이야."

    "아무래도 바쁘신 분이니까요."

    "누구 때문에 바쁘냐에 따라 다르겠지."

    벨로아가 턱끝을 추켜올린 채 우아하게 부채를 집어들었다. 화려한 공작 깃털을 엮어 만든 부채는 왕국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최상품이었고, 그녀가 매일 받고 있는 선물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공이 보내준 선물은 다들 하나 같이 만족스러워."

    "공주님을 향한 전하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죠."

    "보통은 그렇겠지. 그런데, 내겐 왜 이것들이 이거나 갖고 조용히 있으라는 뜻처럼 느껴지는 걸까?"

    벨로아의 손 안을 벗어난 부채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벨로아는 느긋하게 부채를 구두굽으로 짓밟으며 또 다른 부채를 들었다. 부채 하나 망가졌다 해도 문제될 건 없었다. 망가진 부채를 대체할 만한 건 많았다.

    "그깟 노예 하나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꼴이라니. 사랑놀이도 적당히 해야지. 약혼을 치르기 전부터 이러면 나도 곤란해."

    "노예의 존재 자체는 여전히 드러나지 않고 있으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저희도 아무것도 몰랐더라면, 그 노예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 겁니다."

    "그 노예 계집을 영영 그림자로 둘 거라면 상관없지만, 하는 꼴을 보아하니 꼭 그렇게만 둘 것 같진 않아서 말이야."

    "그래봤자, 노예 아닙니까."

    벨로아의 한쪽 눈썹이 위를 향해 삐죽 올라갔다. 그녀 역시, 단지 노예라고 정의내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황제가 그러던 걸. 대공이 그 잘난 자존심을 꺾고 대신관에게까지 도움을 청했다고."

    "그 노예를 위해서 말입니까?"

    "그래. 고작 그 노예 하나를 위해서 말이야."

    벨로아는 분은 참지 못하고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카벨레누스가 벌인 일은 그녀의 상식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황제 측과 연락하신 겁니까?"

    "그래. 연락을 했지."

    씩씩거리던 벨로아의 고개가 통신용 거울을 향했다. 통신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거울에는 아직 미약한 마나가 남아 있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사내입니다."

    "맞아. 교활한 사내지. 내가 그 노예가 어딨는지 위치를 찾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지금껏 모른 척해왔다니 말이야."

    벨로아는 이죽거리면서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둘 다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황제가 처음부터 그 노예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단 말입니까?"

    "그래. 다 알고서도 모른 척한 거야. 괘씸하게도 말이야."

    "도대체 왜 그랬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와 저희는 같은 편 아닙니까?"

    어쩌면 황제가 배신하려는 건 아닐까. 호위의 눈에 불안한 기색이 서렸다.

    "때를 기다렸다고 하던 걸?"

    "때요?"

    "그때는 시기가 일러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라고 변명하더라고."

    "뭔가 꿍꿍이가 있군요."

    "잡종 주제에 머리를 굴리는 꼴이라니, 하여간 비천한 것들은 어떻게서든 살려고 추악하게 발악한다니까."

    벨로아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고귀하지 못한 혈통은 항상 티가 나는 법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황제와는 척을 지시는 겁니까?"

    "아니."

    "하지만, 분명……."

    "벌써부터 내 기를 죽이려고 날 무시하는 꼴이 괘씸하긴 하지만, 황제를 버리는 건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 지금은 그 노예부터 처리하는 게 우선이야."

    노예를 선호하는 더러운 취향이라고 받아주기에는 카벨레누스는 선을 넘었다. 혹시 모를 아이의 존재도, 노예를 위한 과분한 희생도 전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사소하다고 해도 그것이 불씨가 될 가능성이 있다면, 불이 번지기 전에 처리해야만 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일단 황제의 장단에 어울려줄 거야."

    "그와는 될 수 있는 한, 엮이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호위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웬만하면 벨로아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지만 어린 공주가 감당하기엔 황제는 너무도 속이 시커멨다. 혹시라도 이용만 당하다가 버려지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건 당연했다.

    "엮이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건데? 이제와서 발을 빼라고?"

    "그렇지만……."

    "잔소리할 생각은 하지 마. 나는 이미 황제의 사람을 빌리기로 했으니까."

    벨로아는 성의없이 부채를 팔랑거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인내심도 슬슬 한계에 다다랐다. 애당초 그녀는 기다리는 걸 썩 좋아하지 않았다.

    "성내 외부인이 들어오면 눈길을 끌 겁니다."

    "걱정하지마. 성내 모든 일은 조용히 처리될 거니까. 우습게도 그 능구렁이 황제는 이미 성내 사람을 풀어놨거든. 그자들이 날 도울 거야."

    "사람을 풀어놨다고요?"

    "그자가 어떻게 그 노예 계집의 위치를 알았다고 생각한 거야? 황제 말이야. 제 동생을 아끼는 것처럼 굴더니, 오래 전부터 곳곳에 첩자를 심어둔 거였어. 좋은 형인 척 군 것도 결국 다 연기인 셈이지."

    벨로아는 대놓고 혀를 차며 양 입술을 끌어올렸다.

    "황위를 물려줄 정도로 사이가 돈독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보군요."

    "그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진 중요하지 않아. 무슨 속셈을 품고 있든 간에 나는 원하는 것만 얻어내면 그만이니까. 어쨌든, 속셈은 달라도 그자와 내 목표는 같잖아?"

    대공을 완벽한 황제로 만드는 것. 벨로아의 두 눈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노예 생각에 기분이 나빴다가도 마지막을 생각하면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내 약혼식은 예정대로, 아주 성대하게 치러질 거야. 하지만 조명이 화려하게 빛날수록 그림자는 짙어지는 법이지."

    "그 말씀은……."

    "내가 행복을 만끽하고 있는 날, 그 계집은 나락으로 떨어질 거야."

    그것도 아주 처참하고 잔혹하게. 벨로아는 우아한 손짓으로 부채를 고쳐잡았다. 그날만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 * * 방 안은 고요했다. 알리시아는 빛 한 점 들지 않은 어둠 속에서 본능적으로 제 배부터 감쌌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힘이 아이의 존재를 말하고 있었다. 이제는 그 사실이 너무도 달가웠다.

    '다행이다, 꿈이 아니라서.'

    알리시아는 눈을 감고 배 위로 온기를 느꼈다. 모든 것을 꿈으로 치부하기엔 품안 에 안았던 온기가 너무도 생생했다.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한 번 알아버린 온기를 잊을 수 없었다. 끼이익- 그렇게 얼마나 아이를 품고 있었을까. 문이 열리고 빛이 새어 들어왔다. 알리시아는 곧장 몸을 일으켜 방문객을 확인했다.

    "……아가씨?"

    "모르코 부인."

    "맙소사."

    모르코 부인이 그대로 달려와 알리시아를 와락 안았다. 알리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똑같이 모르코 부인을 끌어안았다. 모르코 부인의 몸은 떨리고 있었다.

    "무사히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아니. 그보다 지금 당장 의사를 부르죠. 일단 아가씨의 상태부터 확인한 후에 곧장 식사를……."

    "의사를 부를 필요는 없어. 내 몸은 내가 가장 잘 아는 걸."

    "아가씨."

    "아프지 않아. 오히려 힘이 넘치고 있어."

    알리시아의 말을 부정하기엔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얼굴은 좋아 보였다. 의식 없이 쓰러져 있었다는 게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정말로 괜찮으신 겁니까?"

    "그래."

    "그렇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저는 정말로……."

    모르코 부인이 치미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거칠게 손세수를 했다.

    "걱정끼쳐서 미안해."

    "아닙니다. 아가씨의 잘못이 아니었는 걸요. 오히려, 잘못한 것은……."

    모르코 부인은 말을 멈추고 크게 숨을 뱉었다. 알리시아가 깨어난 건 기쁜 일이었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전하께서는 어디 계셔?"

    알리시아가 어설프게 웃었다. 모르코 부인은 잠시 말을 고르며 그녀를 바라봤다. 아무렇지 않을 리 없을 텐데, 덤덤한 척 구는 알리시아의 모습에 가슴이 먹먹했다.

    "집무실에 계실 겁니다."

    "그렇다면 바로 연락을 넣어줘. 드릴 말씀이 있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마워."

    "……."

    "왜?"

    속내를 알 수 없는 알리시아를 바라보던 모르코 부인은 결국 다시 알리시아를 끌어안았다. 알리시아는 가만히 모르코 부인의 품에 안긴 채,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아가씨를 속여서 죄송했습니다."

    "……."

    "진심으로 아가씨를 속이려 했던 건 아니었어요. 두 분의 일이시니, 두 분께서 해결하실 수 있게끔 시간을 드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절대 아가씨를 기만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등을 다독이는 손길이 다정했다. 알리시아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모르코 부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배신감에 더는 곁을 주고 싶지 않았는데, 막상 안긴 품은 어머니의 것처럼 따뜻하고 포근해 도무지 미워할 수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 않으셔도 돼요. 고인 물이 썩어버리는 것처럼 감정도 참기만 하면 속이 썩어버리니까요. 슬프면 슬프다, 아프면 아프다 그냥 말하세요. 그러셔도 돼요."

    "……."

    "저는 전하의 사람이기도 하지만, 아가씨의 사람이기도 하니까요. 아가씨가 슈바르한에 온 후부터 아가씨께서 제 주인이셨어요."

    알리시아의 손아귀가 옹골지게 모르코 부인의 옷자락을 쥐었다. 그렇게 말해줄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 해도 결국 모르코 부인은 카벨레누스의 사람이니까, 당연히 그의 뜻에 따르라고만 할 줄 알았다. 그래서 일부러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굴었다. 카벨레누스에 이어서 그녀에게도 잔인한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모르코 부인은 마법사 같아."

    알리시아는 차오르는 눈물을 참아내며 허탈하게 웃었다. 제멋대로 엉킨 실타래처럼 절대 풀리지 않을 것 같던 감정이 다정한 말 한마디에 싹뚝 잘려나가버렸다.

    "제 말이 위로가 되셨다니 다행이네요. 저는 아가씨가 상처 입지 않으셨으면 했거든요. 소중한 사람이 아픈 걸 보고 싶은 사람은 없잖아요."

    "……."

    "하지만, 영영 상처 입지 않는 방법 같은 건 없겠죠. 세상은 늘 다정하지만은 않으니까요. 그러니, 저는 아가씨께서 강한 사람이 되셨으면 합니다. 상처 입었다 해도 그 순간을 두려워하기보단 그걸 밑바탕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셨으면 해요."

    나의 어린 주인이자, 사랑스러운 제자님. 모르코 부인의 손이 다정하게 알리시아의 뺨을 어루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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