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환영받지 못한
2020.08.03.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십니까, 신관님."
"……폐하."
"몰래 빠져나온 걸 신전 측에서 알게 되면 좋은 이야기는 못 들을 텐데요."
"그건 몰래 신전에 숨어든 제국의 주인이 할 말은 아닌 것 같군요."
나탈리가 가만히 제르페누스를 노려봤다. 제르페누스는 그 시선을 즐기기라도 하듯 싱글벙글 웃으며 나탈리 쪽으로 다가섰다.
"오래간만이야, 나탈리."
나탈리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핀 다음, 짧게 심호흡을 했다.
"……그래, 오래간만이네."
"어디 가는 거야?"
"내 일을 네게 보고할 의무는 없지."
"냉정하네. 섭섭하게."
"시답지 않은 소리는 그만하고 비켜."
나탈리는 제르페누스를 피해 옆으로 걸음을 뗐다. 제르페누스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저 멀어지는 나탈리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슈바르한으로 가는 거지?"
"……."
"그 노예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노예라니, 말조심해."
걸음을 멈춘 나탈리가 몸을 돌려 제르페누스를 흘겨봤다.
"뭐 어때서. 그 여자가 노예인 건 사실이잖아."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너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왜 안 되는데?"
"네가 그렇게 만든 거잖아."
나탈리는 짜증을 토해내며 이마를 짚었다.
"맞아. 내가 그렇게 만들었지. 하지만 어쩌겠어. 그들이 약해서 그렇게 된 걸 어쩌겠어."
"거짓말 하지 마. 내가 네 방식을 모를 것 같아?"
나무를 갉아먹는 흰개미처럼 티 나지 않게끔 조금씩 내부를 파고들어 무너트리는 건, 제르페누스의 특기였다.
"처음부터 내가 손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황폐해져 있던 땅이야. 내가 한 건 뿌리를 썩게 한 게 아니라, 썩은 뿌리를 뽑은 것뿐이지."
"여전히 말은 잘 하는구나. 변함없이 네 욕심을 잘도 포장해."
"그게 내 매력이잖아."
"착각도 정도껏 해. 너 같은 건, 조금도 매력 없으니까."
"한때 결혼까지 할 뻔했던 사이인데 너무 하네."
"그 약혼이 왜 깨졌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게 어때?"
나탈리의 시선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녀는 아직도 지난날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 네게 사과해야 하잖아."
제르페누스가 능글맞게 웃었다.
"사과할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으면서."
나탈리는 짜증을 감추지 못하고 말끝을 올렸다.
"네가 용서해준다고 말한다면 해볼 마음이 들지도 몰라."
"널 용서할 수 있었다면 진작했겠지."
나탈리가 대놓고 조소하며 입술을 이죽거렸다. 신의 종으로서 귀의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달라진 건 없었다. 절 향해 웃는 사내의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에선 과거의 망령이 보였다.
"누누이 말하지만, 내가 네게 해줄 수 있는 건 네 죄를 들어주는 것뿐이야. 그 이상을 바랄 거라면 다신 찾아오지 마."
"나의 신관님께서 오늘따라 유난히도 차갑네."
제르페누스가 쓰게 웃었다.
"네가 날 찾아올 땐, 항상 지저분한 일을 저지르고 온 후니까."
"귀신같군.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너는 못 속일 거야."
"그래서 무슨 짓을 저질렀어?"
나탈리가 성의 없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신을 믿지도 않으면서, 제르페누스는 죄를 지을 때마다 신전을 찾았다. 속죄 대신, 나탈리 앞에서 죄를 읊으며 자신 나름의 의식을 했다.
"카벨레누스를 위한 일."
제르페누스는 웃었고 나탈리는 차갑게 표정을 굳혔다. 불안한 기분이 착각이길 바랐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제르페누스를 잘 알고 있었다.
"……너, 그 아이에게 무슨 짓을 했어?"
"카벨레누스를 위한 일이라고 했잖아."
"네 동생 말고."
제르페누스가 카벨레누스를 해칠 리 없었다. 만약 제르페누스가 노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카벨레누스가 아닌 다른 사람일 것이었다. 예를 들면, 온몸이 흉터투성이였던 가련했던 그 여자 같은. 생각이 거기까지 도달하자, 나탈리는 거칠게 제르페누스의 옷깃을 잡았다.
"당장 취소해."
"대의를 위해선 희생이 필요한 법이야."
"네 욕심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고?"
나탈리의 두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항상 제르페누스의 죄를 묵인해왔다. 그의 죄가 쌓이면 쌓일수록 그녀에게는 복수가 되기에. 제르페누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신관의 의무를 저버리고 과거의 나탈리로서 그의 앞에 섰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적어도 카벨레누스는 건드려선 안 되는 것이었다.
"모든 건 카벨레누스를 위한 일이야."
"그 아이가 단 한 번이라도 원한다고 말한 적 있어?"
"아직 어려서 뭘 모르는 것뿐이야."
"어리긴 무슨. 다 큰 성인이지. 슈바르한이라는 거대한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를 어리다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우습지 않아?"
나탈리가 대놓고 혀를 차며 눈을 찌푸렸다.
"나탈리. 카벨레누스는 특별해."
"그래. 특별하겠지. 걘 네 욕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잖아."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내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잖아?"
나탈리는 차갑게 쏘아붙인 후, 곧장 몸을 돌렸다. 잠깐 만났을 뿐이었지만 바로 알아봤다.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에게 특별한 사람이었다. 무슨 수를 쓰든 지켜야 하는 건 당연했다.
"어디가려고."
"네가 친 사고를 수습하려고."
"아니. 너는 못 가. 내가 오늘 널 만나러 온 건, 단순히 시간이 나서가 아니거든."
제르페누스는 나탈리의 앞을 막은 채, 싱긋 웃었다.
"그게 무슨-."
의문을 품기도 전에 갑자기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나탈리는 다급히 제르페누스를 밀어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이제 웃고 있지 않았다.
"대신관이 말하길, 별 하나가 새로이 보이기 시작했다더군."
"뭐?"
"그리고, 마침 내가 풀어놓은 사냥개 한 마리가 노예 여자가 임신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물어왔지."
이게 단지 우연일까? 제르페누스가 짐짓 모른 척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결국, 그 계집의 태에 귀한 씨가 들어선 거야."
"……무슨 생각이야."
"처음에는 그냥 죽일까 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결함이 많다 해도 반쪽은 카벨레누스의 것이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제법 쓸모가 있을 것 같더라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야."
"그래서 더 기대하고 있어. 눈에 보이지 않는 만큼 기대할 여지가 많잖아? 반쪽이라 해도 피가 워낙 좋으니 말이야."
물론 결함 있는 물건이니 적당히 이용하다가 처리해야겠지만.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말을 이어가는 제르페누스에 나탈리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제르페누스는 진심이었다.
"하지 마."
"너답지 않은 말이네. 평소엔 내가 뭘 하든 묵인했잖아."
"상대가 카벨레누스잖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아이는 건드려선 안 돼."
나탈리는 치미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이제는 잊힐 만도 한데, 과거의 족쇄는 도무지 벗겨질 줄을 몰랐다.
"안 되는 건 없어. 나탈리."
"……."
"그리고 이제 와서 포기하기에는 너무 많이 와버렸는 걸."
"그건 핑계지. 지금이라도 그만둘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뿐이야."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 마. 과거를 잊지 못하는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과거를 기억하냐, 못 하냐는 의미 없어. 과거는 끝나버린 이야기에 불과하니까. 되돌리는 건 불가능해."
너와 내 관계가 그러하듯. 나탈리는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삼키며 거칠게 노려봤다.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제르페누스 역시, 끝나버린 과거를 붙잡은 채 엉망으로 깨진 파편을 맞추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깨진 파편에 스스로가 피투성이가 되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완벽하게 되돌릴 순 없어도 비슷한 모양을 만들 수 있겠지."
"제르페누스."
"그런 눈으로 봐도 소용없어. 이미 씨앗은 뿌려놓았거든."
그리고 이제 슬슬 열매를 수확할 시간이지. 제르페누스의 손짓에 무장한 병사들이 나탈리를 빙 둘렀다.
"걱정하지 마, 내가 널 다치게 할 리 없잖아."
제르페누스가 다정하게 나탈리의 어깨를 감싸쥐었다. 나탈리는 거칠게 그의 손을 쳐내며 눈에 잔뜩 힘을 줬다.
"신전 내에서 신관을 건드려놓고 무사할 것 같아? 대신관께서 이 사실을 절대 묵과하지 않으실 거야."
"영감과는 진즉에 이야기를 나눴어."
"뭐?"
제르페누스가 산뜻하게 웃으며 흘러내린 나탈리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기뻐해, 나탈리. 욕심꾸러기 영감이 드디어 네 몸값을 책정했어."
"그게 무슨 소리야."
나탈리의 목소리가 확연하게 떨렸다. 치유의 힘은 큰돈이 된다. 그걸 알기에 신전에서 치유의 사제들을 철저하게 단속해왔다. 수년 간, 나탈리를 원하던 제르페누스의 요청에도 거절하던 대신관이 이제 와서 마음을 돌릴 리 없었다. 대신관은 제 배를 불리는 일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인간이었다.
"반쪽이라도 대신관은 좋아하더라고."
"너, 설마……."
"그러고 보면 참 재미있지. 쓸 데 없어 보이는 것에도 찾아보면 다 나름의 쓸모가 있거든."
제르페누스는 여유롭게 턱을 매만졌다. 그의 입가에는 보다 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그녀는? 예정대로라면 벌써 도착하고도 남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연락은 해봤나."
"네, 해봤지만 연락이 닿지 않습니다."
"닿지 않는다고?"
"혹시라도 폭설에 고립되셨을 걸 대비해 사람을 풀겠습니다만, 최악의 경우 신전 측에서 손을 썼을 것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가제프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나탈리가 아무리 남다르다 해도 신전 소속이었다. 대신관에게 꼬리가 잡혔다면 빠져나오는 게 쉽지 않을 것이었다.
"최악이군."
"그래도 지금으로선 기다리는 게 최선일 것 같습니다."
"너무 오래 기다릴 순 없어. 저토록 오랫동안 의식이 없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니까."
"……."
바득바득 이를 가는 카벨레누스에 가제프는 차마 속내를 밝히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더 말해봤자, 카벨레누스의 심기를 거스를 거라는 걸 알기에 침묵했지만 사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모순적이게도 알리시아의 상태는 쓰러지기 전보다 지금이 훨씬 좋아 보였다. 새하얗게 질렸던 낯은 온데간데없이 쓰러진 날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녀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고 그간 말랐던 몸도 점차 살이 붙으며 보기 좋은 모습이 되어가고 있었다. 의식 없이 쓰러져있다기보다는 그저 가벼운 선잠에 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가씨께서는 괜찮으실 겁니다."
"그건 그녀가 깨어나야 할 수 있는 말이지."
카벨레누스가 반쯤 눈을 감은 채, 길게 심호흡을 했다. 평소처럼 결단을 내리고 늘 그랬던 것처럼 행동했는데, 왜 자꾸 상황이 꼬이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알리시아는 그 존재 자체가 변수였다. 카벨레누스를 혼란케 하고 그만큼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정 안 되면, 대신관에게 연락하도록 해."
"대신관에게 말입니까?"
"그 늙은이의 욕심을 채워주는 일은 달갑지 않지만, 살릴 수 있다면 살려야지."
"그러다가 대신관 쪽에서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될 수도 있습니다."
프라임 신전은 황실에 비견될 정도로 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대대로 황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건 황족인 카벨레누스와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알았을지도 모르지."
"네?"
"혹시나 했는데, 그 괴물은 확실히 날 닮은 것 같더군."
카벨레누스가 쓰게 웃으며 제 손을 내려다봤다. 오랫동안 검을 잡아온 모난 손. 나탈리가 매번 상처와 흉터를 지워줬음에도 그것이 생겼던 순간의 기억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전투와 반복되는 생사의 갈림길 앞에서 그를 무뎌지게 만들었다. 처음 남을 상처 입히고 악몽으로 잠을 설쳤던 소년은 어느 순간부터 꿈을 꾸지 않았다, 아니. 꿀 수 없게 되었다.
"가제프."
"네, 전하."
"만들어진 괴물 쪽이 강할까, 아니면 태어날 때부터 괴물인 쪽이 강할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알리시아의 배 속에 있는 '그것'말이야."
제 아이라기보다는 물건을 칭하는 듯한 호칭이었다. 가제프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태어나기 전부터 힘을 쓰고 있어."
"……."
"그런 것만 봐도 약한 녀석이 아냐. 그런데, 왜 굳이 정체를 감추고 있었던 걸까. 뭘 위해서?"
"아이이지 않습니까. 다른 의미는 없었을 겁니다."
"아이라서 너무 얕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카벨레누스의 입매가 눈에 띄게 삐뚜름해졌다.
"예를 들면, 제 숙주의 몸에 숨어 때를 기다린다거나. 그런 것."
이런 걸 보면, 확실히 괴물의 피는 속일 수 없는 모양이야. 턱을 괸 채 덤덤히 말하고 있었지만 카벨레누스의 눈빛에는 살기가 등등했다.
"왜 그렇게 보지? 이해가 안 되나?"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전하께서는 이미 아이가 누구인지 알고 계신 것 같아서……."
"알고 있냐고? 당연히 알고 있지. 그 빌어먹을 혈통을 어떻게 잊겠어."
가제프의 눈이 커졌다. 카벨레누스가 대놓고 저속한 말을 뱉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저토록 직접적으로 혐오의 감정을 비치는 것 역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것'은 평범한 아이가 아니야. 그냥 괴물일 뿐이야. 그렇게 취급해."
"……네, 알겠습니다."
카벨레누스에게선 강한 확신이 느껴졌다. 설득할 만한 여지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가제프가 할 수 있는 건, 장갑 아래 감춘 반지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가제프는 등 돌린 제 주인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지만, 살갗을 누르는 감각만큼은 유독 선명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