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43)화 (43/164)
  • 43화. 임신

    2020.07.30.

    "그 화가일 거다."

    "화가말입니까?"

    "그자 외에는 알리시아에게 괜한 소리를 할 사람이 없잖나. 가장 의심갈 만한 놈이지."

    처음부터 거슬리더니. 제임스를 떠올리며 카벨레누스는 입술을 비틀었다.

    "어떻게 처리할까요."

    "쓸데없는 말을 흘리고 다닌 데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해줘야지."

    "아가씨께서 찾으실지도 모릅니다."

    "찾아?"

    "어쨌든 그 동안 아가씨께 그림을 가르쳐오던 사람이니까요. 게다가 지금 아가씨께서는 심리적으로……."

    가제프는 상관의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카벨레누스와 알리시아, 두 사람은 현재 냉전 상태였다.

    "그런 건 상관없어, 아니. 상관 없진 않겠군."

    카벨레누스는 한숨을 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비루한 화가따위 금세 치워버리면 그만이었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알리시아가 제임스를 처리하고 나면 그의 행방을 물었을 때, 카벨레누스는 할 말이 없었다. 지금의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를 신뢰하지 않았다. 제임스가 말도 없이 사라진다면, 곧장 카벨레누스부터 의심할 것이었다. 그런 건 좋지 않았다. 알리시아에게 냉대를 받는 건 지금으로도 버겨웠다. 누구와의 만남도 허락하지 않은 채 굳게 닫힌 알리시아의 방문을 마주할 때마다 카벨레누스는 몇 번이고 방문을 부수고 들어가고 싶다는 충동을 억눌러야만 했다.

    "어떻게서든 그자의 입에서 먼저 떠난다는 말을 나오게 해. 처리는 그 후에도 늦지 않으니까."

    "그자의 입에서 말입니까?"

    "내가 신뢰를 잃은 만큼, 그는 신뢰를 얻어냈을 테니까."

    카벨레누스는 치미는 짜증을 억누르며 이를 꽉 물었다. 가제프는 상관의 심기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정말로 이대로 약혼을 진행하실 셈이십니까?"

    "그건 왜 물어보지?"

    차가운 시선에 가제프는 마른 침을 삼켰다. 카벨레누스를 오랫동안 봐왔던 보좌관은 그것이 경고라는 걸 알아차렸지만, 무조건 수긍하기에는 걸리는 사람이 있었다. 가제프는 잠시 고민하다가 겨우 입을 뗐다.

    "월권이라는 걸 알지만, 아가씨께서-"

    "월권이라는 걸 알면 말하지 말아야지."

    "……."

    "가제프 클라우드.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감정적이었지?"

    카벨레누스는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무심하게 크라바트를 매만졌다. 가제프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하나를 위해 다수의 이익을 포기하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지금껏 그렇게 생각해왔으면서 판단력이 흐려졌다.

    "……아가씨는 특별한 분이시지 않습니까."

    "특별?"

    "전하께서 처음으로 원하셨던 분이시지 않습니까."

    가제프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성적인 판단을 하려해도 감정이 섞이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알리시아는 낯선 타인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그에 맞는 자리를 주려는 거지."

    "하지만, 아가씨께서는 지금……."

    "어쩔 수 없지. 더러운 정치 놀음을 이해하기엔 그녀는 너무 순수하니까."

    표정 없던 카벨레누스의 입매가 미세하게 떨렸다. 덤덤한 태도와 달리, 정작 그의 속은 터지기 직전의 화산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알리시아와 그렇게 헤어진 후, 벌써 며칠째였다. 그녀는 아직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저 그녀가 방 안에서 칩거하고 있다는 이야기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상처 입지 않길 바랐지만, 상황이 꼬여버린 건 어쩔 수 없어. 그저 그녀가 받아들일 수 있게 기다릴 뿐이지."

    "아가씨께서 이해하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녀는 이성적인 사람이기도 하니까."

    알리시아는 자신의 입장을 잊는 법이 없었다. 정해진 입장에 맞춰서 언제나 몸을 맞추고 순응하고자 했다. 사내는 항상 그 사실이 거슬렸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그는 거기에 기대고 있었다.

    "결국 받아들이겠지. 그리고 점점 이해하게 될 거야. 지배자의 입장이라는 게 어떤 건지."

    "……."

    "그녀는 촌부의 아낙이 아니야. 그렇게 될 수도 없고."

    카벨레누스의 턱근육이 꿈틀거렸다. 이제 알리시아는 완연한 귀족처럼 보였고 그 모습이 잘 어울렸다. 그 이전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이렇게 된 김에 준비하고 있는 일을 앞당기도록 하지."

    "그 말씀은?"

    "약혼식이 완벽하게 준비되기까지 얼마나 걸린다고 했지?"

    "한 달입니다."

    "일주일로 줄이지."

    "하, 하지만……."

    "형식만 제대로 맞춰주면 왕녀 측도 딱히 반대하지 않을 거야, 아니. 오히려 달가워하겠군. 그녀 입장에선 아비가 죽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나와의 관계를 공고히 하고 싶을 테니까."

    가제프의 시선이 흔들렸다. 카벨레누스는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지?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래도 되는 겁니까?"

    "뭐가."

    "아가씨께서 그 사실을 알게 되시면……."

    "그녀는 이미 알고 있잖나."

    "……."

    "알리시아는 불안해하고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칠 순 없는 노릇이야. 그렇다면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지."

    최대한 빨리 지금의 상황을 정리하는 것. 카벨레누스는 짧게 숨을 뱉고는 허리를 곧게 세웠다. 카벨레누스는 여전히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알리시아의 연인이기 전에 슈바르한의 주인이었다. 군주로서의 합리적인 선택을 해야 했다.

    "돈이 얼마나 들든 상관없어. 왕녀의 바람대로 가장 눈부시고 아름다운 날을 최대한 빨리 만들어주도록 해."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 두 번 말하지 않아."

    카벨레누스가 냉정하게 가제프의 말을 잘랐다.

    "……알겠습니다."

    가제프는 상관의 눈치를 살피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그가 카벨레누스의 부관으로 오래 남을 수 있었던 건 선을 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슈바르한은 최고가 되어야 해."

    "……."

    "잊지 않았겠지?"

    카벨레누스가 가만히 가제프를 내려다보았다. 가제프는 잠시 입을 벌린 채 서 있다가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카벨레누스의 오랜 바람을, 그리고 동시에 제 염원을.

    "죄송합니다. 잠시 제 본분을 잊고 흔들렸습니다."

    가제프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제 주인을 바라봤다. 의심하거나 불안해할 필요는 없었다. 카벨레누스는 항상 옳은 선택을 해왔고 항상 불가능을 가능케해오던 완벽한 승자였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었다. 그렇게 믿을 뿐이었다.

    "사냥감을 잡기 위해 덫에 미끼를 놓는 건 당연한 일이야."

    미끼 이상의 사냥감을 얻는 것도 당연한 일이어야 하고. 카벨레누스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금안에서는 그간 감춰두었던 탐욕이 보였다.

    "나는 지는 싸움은 하지 않아. 이기기 위해선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 그리고, 결국 이 일도 마찬가지야. 승리를 위해 더 많은 패를 구하는 일이지."

    알리시아라는 변수가 생겼다 해서 목표가 달라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알리시아를 선택한 만큼의 손해를 메꾸기 위해선 더욱 집요하게 승리의 패를 모아야 끝끝내 제 목표를 이뤄야만 했다. 그것이 '약속'이었다. 카벨레누스는 손으로 눈을 덮은 채 뜨거운 숨을 뱉었다. 그때였다.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가제프는 눈으로 카벨레누스에게 허락을 구하고 곧장 방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시종장뿐만 아니라, 익숙한 얼굴의 여자가 서 있었다. 가제프는 반사적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알리시아의 시중을 들고 있는 하녀 중 하나인 시즈나였다.

    "모르코 남작 부인께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이모님께서-."

    "들어오라고 해."

    가제프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카벨레누스가 말을 가로챘다. 시즈나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무슨 일이지?"

    "그, 그것이……."

    "말 더듬지 말고 제대로 말해. 그녀가 날 찾는 건가."

    날 선 시선에 시즈나는 놀라 히끅하고 숨을 삼켰다. 어린 하녀의 얼굴은 이미 희게 질려있었다.

    "왜 말을 못하는 거지?"

    "전하. 진정하십시오."

    상황을 보다 못한 가제프가 카벨레누스와 시즈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제야 시즈나는 겨우 참았던 숨을 뱉었다.

    "이모님께서 무슨 일로 연락했는지 말해주렴. 시즈나."

    "그게……."

    시즈나는 겁 먹은 얼굴로 카벨레누스의 눈치를 흘끔 살폈다. 앞으로 제가 전할 소식이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두려웠지만 그렇다고 소식을 전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결국 시즈나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서 쓰러지셨습니다!"

    "……방금 뭐라고 했지? 누가 쓰러져?"

    카벨레누스가 헛웃음을 뱉었다. 하녀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 아가씨께서 쓰러지셨습니다."

    시즈나의 목소리는 이제 아예 우는 것처럼 들렸다. 카벨레누스는 가만히 어린 하녀를 노려보다가 결국 거칠게 몸을 돌렸다.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하녀의 말을 제대로 인지한 순간, 몸이 먼저 나갔다.

    16638393547697.jpg

    * * *

    "전하, 오셨군요!"

    모르코 부인이 다급히 카벨레누스를 반겼다. 카벨레누스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하며 성큼성큼 침실 안으로 걸음을 뗐다. 안에선 의사들이 부산스럽게 알리시아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상태는."

    "의식이 없으십니다."

    "의식이 없다고? 그게 할 소리인가?"

    카벨레누스가 바드득 이를 갈았다. 침대에 누워 있는 알리시아는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 사실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최선? 저게 어딜 봐서 최선이지?"

    "최근 들어 너무 무리를 하신 터라, 체력이 받쳐주지 못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 더 살펴봤어야지. 사람이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방치해둔 건가."

    "아가씨께서 누구도 만나고자 하지 않으셔서……."

    모르코 부인이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의 손은 힘없이 떨리고 있었다. 쓰러진 알리시아를 처음으로 발견한 건 그녀였다.

    "성 내 의사를 모두 데려와."

    "그렇게 되면, 아가씨의 위치가 노출될 수도 있습니다."

    가제프가 급히 끼어들었다. 최대한 보안을 유지한다고 했음에도 의사 하나가 벨로아의 측근에게 노출되었다. 그리고, 의사를 가장해 알리시아에게 접근하고자 하는 첩자를 처리한 것도 벌써 몇 번이었다. 성 내 의사를 전부 부르며 소란을 떠는 건, 벨로아에게 빌미를 주는 것이었다.

    "그러면 저대로 그냥 두라고?"

    "지금 아가씨의 상태를 확인하는 의사들도 다들 실력 있는 자들입니다. 일단 지금은 지켜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카벨레누스의 손등 위로 핏줄이 선명하게 섰다. 이미 꽉 쥔 주먹에서는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어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전하, 손이……."

    "신경 쓰지 마. 지금 중요한 건 이딴 게 아니니까."

    카벨레누스가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후회 같은 건 하지 않을 거라고 여겼는데. 의식 없는 여자를 보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우습게도 죄책감이었다. 카벨레누스는 숨소리가 희미한 여자를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았음에도 한 번 각인된 여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카벨레누스가 거친 숨을 뱉으며 눈을 떴다. 쓰러진 알리시아의 모습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았지만 외면해선 안 됐다. 똑바로 바라보고 직시해야했다.

    "아가씨께서는 금방 회복하실 겁니다."

    가제프가 조심스럽게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카벨레누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의 신경은 온통 알리시아에게만 향해있었다.

    "……이제 속 시원하신가요, 전하?"

    "이모님."

    가제프가 급히 막으려 했지만, 모르코 부인을 이기진 못했다. 모르코 부인은 기어코 카벨레누스의 앞에 서서 핏발 선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감추는 건 좋지 않은 방법이었다고요."

    "……."

    "아가씨께서 가장 믿고 계신 분은 전하시라고요. 그런데, 왜……."

    "……."

    "가뜩이나, 홑몸도 아닌 분이신데……."

    모르코 부인은 결국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제 새끼를 지키기라도 하듯, 둥글게 몸을 말고 쓰러진 알리시아를 발견했을 때의 심정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홑몸이 아니라니."

    "오늘 의사가 확진했습니다. 아가씨께서 임신하셨다고요."

    "확실한 건가."

    카벨레누스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알리시아의 배 속에 아이가 있다. 그 사실을 확인한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 상황이 좋지 않게 되었습니다. 임산부에게 쓸 수 있는 약은 한계가 있어서-."

    "상관없어."

    "네?"

    "중요한 건 알리시아, 하나다."

    누가 괴물 아니랄까 봐, 태어나기 전부터 제 어미를 잡아먹으려 들고 있다. 카벨레누스는 흉흉한 표정으로 주먹에 더욱 힘을 줬다.

    "산모에게 피해가 가지만 않는다면 어떤 약이든 써도 상관없어. 아이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그녀부터 살려. 어떤 수를 쓰든 간에 무조건 일어나게 해."

    "전하!"

    모르코 부인이 다급하게 카벨레누스를 불렀지만, 그에겐 일말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서 느껴지는 건 짙은 혐오였다. 그리고, 그 혐오의 대상은……. 모르코 부인은 본능적으로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16638393547702.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