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아이
2020.07.27.
'약혼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모든 게 슬펐지만, 결국 알리시아를 가장 괴롭힌 건 다름 아닌 그녀의 처지, 그 자체였다. 약혼하지 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어도 할 수 없었던 건 결국, 자신이 카벨레누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으니까.
'내게 힘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말할 수 있었을까.'
감긴 알리시아의 눈꺼풀이 떨렸다. 그녀의 속눈썹은 이미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혼자 있기로 선택한 건 그녀였지만 모순적이게도 누군가 옆에 있어줬으면 했다. 컴컴한 방 안에서 혼자 아픔을 삼키고 있으면, 자꾸만 잊고 있던 지옥 같던 시간이 떠올랐으니까. 알리시아는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을 억누르려고 애쓰며 몸을 더욱 둥글게 말았다. 그때였다. 배 안쪽에서 뭔가 움직이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알리시아는 그대로 굳어 있다가 더듬더듬 손을 내려 제 배를 감쌌다. 그 감각은 아주 잠시였을 뿐, 이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가볍게 넘기기에는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혹시…….'
알리시아는 배에 가만히 손을 올린 채, 마른 침을 삼켰다. 의사는 분명 임신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녀가 겪고 있는 증상은 임신이 아니고서야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금 전 느꼈던 힘은……. 알리시아의 고개가 조심스럽게 아래를 향했다. 혹시나 하는 가정을 했을 뿐인데도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아 알리시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단지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도 사람이 그리웠다.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그저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알리시아는 아이의 존재를 찾듯 배를 몇 번이고 어루만졌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화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왜, 대답해주지 않는 거야? 내가 널 원하지 않는다고 말해서? 그게 아니라면……."
배를 더듬던 알리시아의 손이 일순간 멈췄다. 만약, 아이가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아이에게 예전의 자신과 같은 힘이 있다면?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나 때문이구나."
알리시아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허탈한 숨을 뱉었다. 모든 것이 이제야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아이의 존재를 찾을 수 없었던 건, 자신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그저 알리시아의 소원을 들어줬을 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도무지 새어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배 속의 아이에게 뭔가를 인지하는 능력이 있을 리 없었다. 그저 아이는 제 어미의 바람대로 본능적으로 움직였을 뿐이었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는 세상을 알기도 전에 눈치부터 보고 있었다.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알리시아는 눈을 감은 채 몇 번이고 사과하고, 또 사과했다. 그리고 그 순간, 배 속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아……."
알리시아는 새어나오는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번에는 착각이라 여기지 못할 정도로 분명한 태동이었다. 아이였다. 제 안에 아이가 있었다. 알리시아는 치미는 울음을 어떻게해야 할지 몰라 그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이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존재가 너무도 거대하게 느껴졌다. 자신은 혼자가 아니었다.
"아가……."
아이를 찾는 알리시아의 목소리는 무척 떨렸지만, 동시에 어느 때보다 간절했다. 그리고 그에 화답하듯, 다시금 태동이 느껴졌다.
"네가, 보고 싶어. 내겐 네가 필요해, 정말로."
알리시아는 끌어안듯이 제 배를 두 팔로 감쌌다. 대답이라도 하듯 울리는 태동이 기꺼웠다. * * *
'여긴…….'
알리시아는 멍한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분명 침실에서 잠들었던 것 같은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끝없이 펼쳐진 설원만이 있을 뿐이었다. 알리시아는 연신 주변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쌓인 눈을 밟힐 때마다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고 숨을 뱉을 때마다 얼어붙은 입김이 새하얗게 부서졌다. 그럼에도 이상한 건 조금도 춥지 않았다는 거다.
'왜지?'
알리시아는 걸음을 멈추고 다시 주변을 살피다가 그대로 굳었다. 언제부터인지, 저 멀리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형체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알리시아는 잠시 형체를 보고 있다가 이내 그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뗐다. 뭐라고 말하기 꺼림칙한 형체였는데,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친근하게만 느껴졌다.
"……안녕?"
알리시아는 어설프게 인사를 건넸다가 무슨 말을 더 해야할지 몰라 그냥 웃어버렸다. 그 순간에도 검은 형체는 그녀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너 되게 작구나."
알리시아는 조심스럽게 다리를 굽혔다. 멀리서 볼 때는 못 느꼈는데, 가까이서 본 검은 형체는 무척 작았다. 한 손으로도 얼마든지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리와볼래?"
비현실적인 상황을 겪고 있어서일까. 깊게 생각하지 않고도 그냥 말이 튀어나왔다.
"무서워?"
검은 형체는 알리시아를 빤히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
"말을 못 하는 거야?"
검은 형체는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리시아는 그 모습이 마치 말 잘 듣는 강아지 같다고 생각했다. 그림자처럼 새카만 형태이긴 해도 어쨌든 검은 형체는 네 발 달린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굳이 종류를 나누자면, 강아지에 가까워보였다.
"그래도 내 말은 알아들을 수 있나 보네."
알리시아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자, 기다렸다는 듯 검은 형체가 그녀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마치 애교라도 부리는 모양새였다.
"너는 내가 좋아?"
끄덕-.
"우리 오늘 처음 봤는데."
절레절레-.
"처음이 아니야?"
끄덕-. 알리시아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고개짓만으로도 대화가 되고 있긴 해도 답답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너는 누구니?"
검은 형체는 반응 없이 빤히 알리시아를 올려다봤다. 마치 그녀가 절 알아봐주길 원하는 것처럼. 알리시아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제야 검은 형체의 눈동자가 제대로 보였다. 검은 형체의 눈동자는 잿빛이었다.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물려주고, 어머니가 제게 물려주었던 그 눈동자 색.
"설마……."
알리시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검은 형체는 눈치를 살살 살피면서 슬쩍 알리시아의 무릎에 앞발을 올렸다. 어쩐지 알리시아에게 바라는 게 있는 눈치였다. 알리시아는 어떻게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검은 형체를 안아올렸다. 얼떨결에 허공에 들린 검은 형체는 느릿하게 눈을 껌벅이다가 이내 풍성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저기……."
무슨 말을 해야하는 걸까. 알리시아는 절 향한 부담스러울 정도로 호감 어린 눈동자를 보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와중에도 검은 형체는 어설프게 절 안아올린 알리시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뺨을 비비며 기쁨을 표하기에 바쁠 뿐이었다. 격한 환영에 알리시아는 검은 형체를 안고 한참을 어쩔 줄 몰라하다가 한 번 더 침을 삼켰다. 검은 형체는 작았지만, 분명한 온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걸 확인하자, 처음보다 더 용기가 났다.
"……솔직히 지금 네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하지만, 계속 사과하고 싶었어."
검은 형체의 귀가 쫑긋거렸다. 알리시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검은 형체를 제 품으로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처음에는 어색했던 손길은 몇 번 반복하자 제법 익숙해졌다.
"미안해. 널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리고 고마워. 지금 내 옆에 있어줘서. 알리시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검은 형체는 눈치라도 보는 듯, 알리시아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그녀의 품을 파고 들었다. 알리시아의 말을 이해했다기보다는 그냥 무작정 좋다고 꼬리를 흔드는 모양새였다. 그걸 알면서도 알리시아는 검은 형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커먼 짐승은 딱히 호감이 가는 외형은 아니었지만, 작은 생명체가 어떻게서든 제 마음에 들고자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괜히 마음이 갔다. 얼핏 봐도 아이는 무언가를 알고 힘을 쓰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저 알리시아의 마음에 들기 위해 본능적으로 그녀가 원하는 걸 좇았을 뿐이었다. 알리시아는 손등으로 검은 형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이제는 모를래야 모를 수 없었다. 검은 형체에게선 익숙한 힘이 느껴지고 있었다. 지금 제 앞에 있는 건 미지의 존재가 아니었다. 그건 제 아이였다. 그걸 깨달은 순간, 검은 형체를 둘러싸고 있는 그림자 같은 막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아이가 똑바로 보였다.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숨을 삼켰다. 늑대였다, 잿빛 눈동자와 보송보송한 붉은 털을 가진 새끼 늑대.
"그게 진짜 네 모습이니?"
늑대는 동그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리시아는 그 모습을 보며 괜히 목이 멨다. 힘없이 꼬리를 축 내린 채, 알리시아의 반응을 살피는 데에 급급한 아이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을지 빤히 보였으니까.
"예뻐."
"……."
"충분히 예쁘니까, 그렇게 겁먹지 않아도 돼."
단지 웃어줬을 뿐인데, 축 처졌던 꼬리가 금세 스르르 위를 향했다. 알리시아는 너무도 빤히 보이는 아이의 감정을 보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그냥 긴 숨을 뱉었다. 사실 아이가 가진 힘이라면 얼마든지 완벽하게 숨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아이가 그러지 않은 건, 알리시아의 바람을 이루어주고 싶은 마음과 별개로, 그녀가 제 존재를 알아주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제 모습을 감추고서라도 알리시아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했던 것처럼.
"……너는 이와중에도 내 눈치를 보고 있었구나."
그런 건 아직 몰라도 되는 건데. 알리시아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내 눈치를 볼 필요 없어. 네가 왜 내 눈치를 봐."
알리시아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필요 이상으로 눈치를 살피는 건, 가장 싫어하는 자신의 습관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 습관을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아이에서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아니. 그보다는 슬펐다. 가슴이 천 갈래로 찢어지는 것처럼 괴로웠다.
"아가. 네가 나를 위해 더는 뭔가를 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어."
"……."
"날 위해 힘을 쓰는 것도 이제 그만하고."
알리시아는 새어나오려는 울음을 참아내며 아이를 바라봤다. 심지어 아이가 쓰고 있는 힘은 무한으로 나오는 게 아니었다. 힘은 언젠간 고갈되기 마련이고 그 후의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내겐 네 힘이 필요하지 않아."
"낑, 끼잉, 낑……."
알리시아의 말을 잘못 이해한 건지, 아이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알리시아의 품을 파고 들었다. 알리시아는 그제야 아이가 불안해하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네가 필요없다는 게 아니야. 그저 나는 네가……."
알리시아는 말을 하다가 멈췄다. 지나칠 정도로 맹목적인 시선을 볼 때마다 자꾸만 자신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끼이잉……."
알리시아의 대답이 늦어지자, 아이의 몸이 축 힘이 빠졌다. 알리시아는 당황해 어쩔 줄 몰라하면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 그게……!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뜻이었어!"
"……끼잉?"
아이의 눈에 금세 희망이 서렸다. 알리시아는 혹시라도 아이가 다시 기운을 잃을까,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 해. 날 위해서 무리하지 않아도 돼."
말간 눈이 절 빤히 바라본다. 알리시아는 그럴수록 더욱 환하게 웃었다. 연신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애정을 갈구하는 제 모습을 연상케해서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눈치보지 않아도 돼. 정말로 괜찮아.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나는 계속 널 좋아할 거야. 내가 널 미워하는 일은 절대 없어."
"……."
"미워하기엔 네가 너무 예쁘잖아."
알리시아가 달래듯 아이의 둥그스름한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아이는 여전히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알리시아의 눈에는 그저 제 아이로 보일 뿐이었다.
"네가 뭔가를 하지 않아도 나는 널 좋아할 거야. 그러니 앞으로는 더는 힘을 쓰지 마. 그건 어린 네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힘이거든."
알리시아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지 아이는 연신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알리시아는 더 설명해줘야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한들, 아이는 아이였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기보다는 그저 본능에 충실히 힘을 쓰고 있는 아이에게 힘에 대해 설명하는 것부터가 사실상 어려웠다.
'하지만…….'
아이를 바라보는 알리시아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해와는 별개로 계속 아이가 힘을 쓰게 둘 순 없었다. 아이에게 있어서 힘은 독과 다를 바가 없었다.
"힘을 쓰지 않는다면, 계속 예뻐해줄게. 어때? 할 수 있겠어?"
그 말은 알아들었는지 아이의 눈이 기대로 반짝반짝 빛났다. 알리시아는 그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아이를 위로하고 있었지만, 사실 위로 받고 있는 건 자신이었다. 아이가 주는 건 정말로 미약한 온기에 불과하지만, 자신을 향한 순진무구한 아이의 시선만 봐도 알 수 있었으니까. 저 아이만큼은 어떤 순간에서도 완벽한 제 편이 되어줄 거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