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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41)화 (41/164)
  • 41화. 각기 다른 시선

    2020.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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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로 모른 척할 수 있어요. 그냥 넘어갈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런다면 저는 계속 의심을 버리지 못하겠죠."

    "……."

    "저는 당신을 의심하고 싶지 않아요."

    힘없이 떨어진 고개를 따라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알리시아는 치맛자락을 쥔 채, 다시 고개를 들었다. 진실을 아는 것이 두려웠지만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그대를 지키기 위해서였어."

    "절 지키기 위해서요?"

    "지금 그대는 너무 약하잖아. 그래서 그대의 존재를 가릴 만한 가림막이 필요했을 뿐이야."

    "……단지 그것뿐인가요?"

    "그래."

    "거짓말."

    알리시아는 울음을 참아내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차라리 눈에 안 보였다면 모를 텐데, 이제는 너무 사내가 익숙해져 버렸다. 굳이 보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그의 거짓말이 눈에 빤히 보였다.

    "단지 가림막이 필요했다면, 굳이 크리스티 왕국의 공주일 필요는 없잖아요."

    "폐하께서 그녀와의 만남을 주선했어. 그리고, 그녀는……."

    "전하께서 원하는 걸 가지고 있었겠죠. 그분께는 마법이 있잖아요."

    알리시아가 쓰게 웃었다. 카벨레누스는 그녈 향해 손을 뻗고자 했지만, 차가운 시선에 이내 그의 손은 허공에서 멈춰야 했다.

    "전하께서는 슈바르한의 주인이시죠. 저도 그걸 모르지 않아요. 슈바르한을 위한 선택을 하는 게 당연하겠죠. 이 땅에는 분명 마법이 필요하니까요."

    알리시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슈바르한은 마법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그 사실을 알기에 카벨레누스에게 크리스티 왕국과의 관계가 남다르게 느껴질 거라는 것도 알았다. 카벨레누스는 슈바르한을 이끄는 수장이었고, 그가 슈바르한을 위한 선택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그대가 오해할 수 있다는 거 알아."

    "오해라고요? 그건 오해가 아니에요."

    기만이죠. 눈가가 새빨갛게 물들었지만 알리시아는 울지 않았다. 그저 카벨레누스를 노려볼 뿐이었다.

    "말하지 못한 건 미안해. 하지만 다른 뜻은 없었어. 그저 그대에게 괜한 걱정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카벨레누스가 몸을 낮춰 알리시아와 시선을 맞췄다. 알리시아는 그녀답지 않게 털을 바싹 세운 고양이처럼 카벨레누스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 사실에 사내는 내심 초조해졌다.

    "그대와의 약속은 달라지지 않을 거야."

    "저와의 약속이 뭔데요."

    "나는 그대를 아내로 맞을 거고, 그대가 슈바르한의 안주인이 될 거라는 약속."

    카벨레누스가 조심스럽게 알리시아의 손을 받치듯 쥐었다. 사내는 손을 잡으면 알리시아가 수줍게 웃어주었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결국 그 문제는 스쳐지나가는 일일 뿐이니까. 그대가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어떻게 그걸 신경 안 쓰죠?"

    "신경 쓴다고 해서 달라질 일이 아니잖아."

    "달라지지 않는다고요?"

    알리시아가 저도 모르게 헛숨을 뱉었다. 처음에는 카벨레누스의 눈에 비친 감정이 죄책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사내가 품은 감정은 죄책감이 아닌, 초조함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제가 미리 알았다 해도, 전하께서는 그분과 약혼하셨겠군요."

    "불쾌할 수 있다는 거 알아. 하지만 이건 감정적으로 굴 일이 아니야."

    카벨레누스의 엄지가 부드럽게 알리시아의 손등을 쓸었다. 그녀를 달래기 위한 행위였지만, 정작 알리시아는 그런 걸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다른 생각 할 필요 없어. 약혼은 형식적인 것일 뿐. 그대의 입장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달라지지 않을 리 없잖아요. 어떤 이유를 들든 간에 결국 전하께선 제게 거짓말을 하셨고, 그 거짓말 때문에 저는 더는 맹목적으로 전하를 믿을 수 없게 되어버렸는 걸요."

    알리시아의 몸이 눈에 띌 정도로 떨렸다. 그대로 심장을 도려낸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품고 있는 것조차 과분해서 어쩔 줄 몰랐던 마음이었는데, 그걸 망쳐버린 게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연인이라는 사실이 원망스러웠다.

    "살고 싶었던 것도, 행복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도 결국 전하 때문이었어요. 제 세상이 아무리 커진다한들, 결국 모든 시작은 전하라서 제겐 당신이 세계의 중심일 수밖에 없었어요."

    알리시아는 울음을 삼켜내며 꾸역꾸역 말을 토해냈다. 뭐라도 말하지 않으면 그대로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아서. 그래서, 결국엔 치미는 슬픔에 영영 잡아먹혀버릴 것 같아서.

    "저는 전하께 드릴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래서, 전하께서 크리스티 왕국의 공주와 필요에 따른 관계를 맺는다 해도 뭐라고 할 입장이 아니죠. 전하께서 슈바르한의 주인인 이상 말이에요."

    "알리시아."

    "하지만, 적어도 이런 방식은 아니어야 했어요."

    알리시아는 탄식 섞인 숨을 뱉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크리스티 왕국의 공주와 뭔가를 해볼 생각은 없었어. 그대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 역시, 거짓이 아니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알리시아의 잇새로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럼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지?"

    "……전하께서는 아직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시는군요."

    알리시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차라리 몰랐으면 싶었는데 이번에도 그녀의 눈에는 카벨레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보였다. 그는 진심으로 알리시아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그대가 왜 이러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어."

    "이해하지 못하겠다고요?"

    되묻는 알리시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익만 놓고 본다면, 카벨레누스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애당초 이 문제는 단순히 이익을 따지는 걸로 정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두 사람의 관계에 관련된 문제였다. 적어도 알리시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대에게 거짓을 말한 건 잘못이지만,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런 척하는 것만으로 그대를 지키고, 원하는 것까지 얻을 수 있게 되었으니 오히려 이득이잖아. 나쁜 일은 아니야. 오히려 좋은 일이지."

    정작, 사내는 다른 생각을 한 모양이지만. 알리시아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분명 누구보다 익숙한 사내였는데, 이 순간만큼은 낯설게만 느껴져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이득만 따지실 거라면, 처음부터 절 선택하지 마셨어야죠, 아니. 지금이라도 제가 아닌, 다른 사람과-."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대로 어깨가 잡혔다. 알리시아는 금방이라도 절 잡아먹을 듯 흉흉한 시선을 바라보며 겨우 유지하던 미소를 일그려트렸다.

    "그 이상은 말하지 마."

    카벨레누스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치미는 분에 손에 쥔 어깨를 으스트러트리는 것보다 그러지 않게 참아내는 것이 더 어려웠다. 그럼에도 상처 입히고 싶진 않았다. 화가 머리 끝까지 솟는 와중에도 혹여나 스스로가 저 마른 몸을 망가트릴까 봐 이를 악 물게 될 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알리시아가 눈앞에 있기 때문에 참을 수 있는 것이었다. 카벨레누스의 눈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전하께선 절 잃는 게 두려우세요?"

    "그래."

    "그런데, 왜 그러셨어요?"

    알리시아는 제 어깨를 쥔 사내의 손을 무심히 밀어내고 그를 올려다봤다. 여자의 눈은 물기가 어려 있었지만,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곧았다.

    "전하께서 제게 그러셨죠. 제가 스스로 판단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정작 전하께서는 절 그렇게 대해주시지 않으셨네요."

    "……."

    "전하께서는 결혼을 전제로 한 약혼으로 원하는 걸 얻으셨을 테죠. 저를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원하는 것까지 얻으면 된다고 생각하셨을 거예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그 선택에는 제가 없었어요. 알리시아가 웃었다. 힘없이 올라간 입꼬리는 금방이라도 추락할 것처럼 위태로웠다.

    "그 선택을 하시면서 단 한 번이라도 제 마음이 어떨지 생각해보셨나요?"

    "……."

    "제겐 항상 솔직하라고 말씀하셨던 전하께서 저 몰래 다른 여자와 약혼하고, 심지어 제 앞에서 거짓을 말하는 모습을 마주하게 된 제 심정이 어떨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보셨나요?"

    말을 토해내고, 또 토해낼수록 감정은 더욱 선명해진다. 알리시아는 들끓는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모습을 드러낸 잿빛 눈동자는 날카롭게 갈린 칼날처럼 매세웠다.

    "한 번이라도 제게 이야기해주셨으면 좋았을 거예요, 아니. 적어도 제가 물었을 때, 거짓말을 하지 마셨어야 했어요."

    "그대를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어. 그대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진심이었어."

    "상대가 원하지 않는 물건을 억지로 쥐여주고 그게 선물이라고 말하면 그게 선물이 되는 건가요? 아뇨. 그렇지 않아요. 그건 선물이 아닌, 강요일 뿐이에요."

    이상한 일이었다. 가슴이 아플수록 머리가 차가워졌다. 알리시아는 거칠게 눈을 비비고 고개를 들었다. 맹목적으로 하나만 바라보고 그에 몸을 맞춰왔기에 그만큼 무너지는 건 쉬웠다. 결국, 그 하나만 무너지면 전부가 무너지는 셈이었으니까.

    "머리로는 전하의 입장이 이해가 돼요. 하지만 가슴으로는 그러지 못하겠어요. 필요에 따라 다른 여자를 선택하고, 제게 거짓말을 뱉는 당신을 알아버려서 자꾸만 좋지 않은 생각이 들곤 하니까요."

    "그런 생각 같은 거 할 필요 없어.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아."

    "소용없어요. 그런 말을 믿기엔 저희 사이에 신뢰가 무너져 버렸는 걸요."

    알리시아는 두 손으로 시큰거리는 눈시울을 꾹꾹 눌렀다. 지금 순간만큼은 죽어도 울고 싶지 않았다.

    "이만 돌아가주세요. 지금은 전하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말씀드렸잖아요. 지금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제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카벨레누스가 성급히 알리시아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녀는 더는 그를 보지 않았다.

    "크리스티 왕국은 경계가 심해서 그간 공을 들여왔음에도 원하는 걸 얻을 수 없었어. 만약, 이 기회를 놓치면 얼마의 시간이 더 필요할지 몰라."

    "……."

    "게다가 그대의 입장은 아직 불안전하잖아. 그래서 대공비 자리를 노리는 자들에게서 그대를 지키기 위해서는 최대한 그대를 노출시키지 않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

    "그것뿐이야. 그러니……."

    카벨레누스가 손을 뻗었지만, 알리시아는 여전히 그를 보지 않았다. 무심히 고개를 돌린 채,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 사실에 미칠 것만 같았다.

    "나중에 이야기해요."

    "안 돼. 지금 바로 이야기해."

    "지금 이야기 해봤자, 좋은 소리는 안 나올 거예요."

    "상관없어. 뭐든 내게 쏟아붙고, 날 원망해. 차라리 그게 나아."

    "저는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지금은 전하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요."

    알리시아가 냉정하게 카벨레누스의 손을 쳐냈다. 카벨레누스는 입을 꾹 다문 채, 그녀를 바라봤다. 지금껏 알리시아는 그의 손길을 거절 해본 적이 없었다. 카벨레누스가 손을 뻗으면 부끄러워하면서도 그의 손에 얼굴을 기대곤 했을 뿐이었다. 사내에게 있어서 여자의 거절은 무척 낯선 일이었다.

    "알리시아."

    "생각이 정리된 후, 연락 드릴 테니 지금은 돌아가세요."

    "지금 가게 되면, 다시 언제 얼굴을 볼 수 있을지 몰라."

    "잘됐네요."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구석이 있길 바랐는데. 카벨레누스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감정 애써 삼킨 채, 제게 등 돌린 여자를 한참 바라봤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끝까지 카벨레누스를 돌아보지 않았다. * * *

    "혼자 있게 해줘."

    "하지만 벌써 며칠째입니다. 이러다가 정말 쓰러지실 거예요."

    "상관없어."

    "아가씨."

    "더 말하고 싶지 않으니, 이제 그만 나가줘."

    내려진 축객령에 모르코 부인은 더는 토를 달지 못하고 방을 떠났다. 알리시아는 모두가 나간 후에도 여전히 이불 속에서 머물러 있었다.

    '……아파.'

    알리시아는 겨우 눈을 떴다가 무거운 눈꺼풀에 이내 도로 눈을 감았다. 정신을 차리려고 했음에도 몸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심호흡을 할 때마다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고, 도무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도 버거웠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고 싶지 않았다. 카벨레누스의 거짓말에 동참한 건 모르코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 누구도 달갑게 보이지 않았다. 알리시아는 치미는 울음을 삼키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통증에 정신까지 몽롱했지만, 차라리 아픈 게 나았다. 그래야 자신이 느끼는 통증이 몸에서 오는지, 마음에서 오는지 알 수 없으니까.

    '바보 같아.'

    알리시아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웅크리려다가 멈추고 숨을 뱉었다. 몸을 웅크리는 버릇은 이제 다 고쳤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알리시아는 짧게 조소하며 공벌레처럼 몸을 둥글게 말았다. 하늘을 떠다니는 것처럼 붕 뜬 기분이었는데,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져버렸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내가 제대로 된 공주였으면 괜찮았을까.'

    알리시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스스로를 탓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자신을 책망하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라도 카벨레누스를 조금이라도 덜 미워하고 싶었으니까. 알리시아는 감은 눈에 더욱 힘을 줬다. 이 순간에도 그녀는 카벨레누스가 좋았다. 그리고 그만큼 더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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