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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40)화 (40/164)
  • 40화. 균열

    2020.07.20.

    얼음물을 그대로 뒤집어쓴 것 같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는데, 정작 정신은 또렷해서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 너무도 잘 들렸다.

    "함부로 말하지 마."

    알리시아가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제임스라도 지켜야 하는 선이 있는 법이었다. 말도 안 되는 말로 더는 카벨레누스를 욕보이게 할 순 없었다.

    "아가씨."

    "전하께선 그러실 분이 아니야."

    "제 누이도 아가씨와 같은 말을 했습니다."

    "……."

    "모두가 만류했음에도 자신의 연인은 다른 귀족과 다르다고,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 말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돌아온 건, 냉대와 조롱뿐이었습니다."

    제임스는 차마 알리시아를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안 될 사이였다. 괴롭더라도 한시라도 빨리 끊어내고 현실로 돌아오는 편이 나았다. 알리시아가 어떻게하든 간에 그녀는 카벨레누스와 행복해질 수 없었다. 둘의 세계는 완전히 달랐다.

    "아냐. 전하께선 정말로 달라."

    힘이 들어간 목소리에 제임스는 다시 눈을 떴다. 당연히 무너질 거라고 생각했던 눈동자는 어느샌가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지금의 아가씨에겐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정하셔야 합니다."

    "뭘 인정하라는 거야?"

    "전하의 옆자리는 아가씨의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 아니면 누구 건데?"

    알리시아는 싸늘하게 제임스를 노려봤다.

    "잔인하다 해도 그게 현실입니다."

    "아냐."

    "아가씨."

    "전하께서 약속하셨어. 자신을 내게 주기로."

    알리시아가 이를 악 문 채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카벨레누스는 제 것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사내였다. 그 사실을 부정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제 장기라도 다 떼어줄 것처럼 굴 수도, 저 하늘의 별을 따주겠다고 말할 수도 있죠. 하지만 그건 정말로 말뿐입니다."

    "……."

    "저는 아가씨를 보면서 제 누이를 봅니다. 가문을 떠나 함께 도망가 살자던 사내를 맹목적으로 믿다가 결국 비참히 버려지고, 그 사내의 결혼식날 목을 매고 죽은 제 누이를요."

    제임스는 치미는 분을 참기 위해 깊게 심호흡을 했다. 오래 전의 일임에도 그날의 기억만 떠올리면 온몸의 피가 바싹 말라버리는 것 같았다.

    "나는……."

    "다르다고 말씀하실 거라는 거 압니다. 인정하기 싫고, 받아들이기 어려우시다는 것도요. 하지만 언젠간 마음이 정리되신다면, 한 번쯤은 절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제임스의 목소리는 어느샌가 물기가 섞여 있었다. 한 번쯤은 제게 다 털어놓고 위로라도 받았으면 좋았을 텐데, 누이는 그저 홀로 괴로워하다가 끝끝내 목을 매달고 죽었다. 충격이 너무도 컸던 걸까. 아니면, 한참 어린 동생이라서 의지가 되지 못했던 걸까. 누이를 떠나보낸 지금으로선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항상 제임스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때, 누이에게 조금이라도 쉴 수 있는 그늘이 있었다면 최악의 결말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하고.

    "비천한 화가에 불가하나, 아가씨를 도울 여력 정도는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어."

    "네. 그러셔도 됩니다."

    못된 말을 쏟아내고 싶었는데, 처연하다는 말밖엔 떠오르지 않는 흐릿한 미소를 보니 다른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알리시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결국 제임스에게서 휙 고개를 돌렸다. 치미는 감정을 모른 척하고 싶어 애써 손바닥으로 가슴을 꾹 눌렀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쿵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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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전하께서는 연락 없으시지?"

    "네. 당분간은 오시기 어려우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왜? 어째서? 설마 내가 들었던 이야기가 사실이라서? 알리시아는 차마 뱉지 못한 물음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고 싶었는데, 텅 빈 침대를 보니 카벨레누스의 부재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아가씨. 차라도 한 잔 올려드릴까요?"

    "아니. 됐어. 그냥 잘래."

    "네. 그럼 잠자리를 봐드리겠습니다."

    모르코 부인은 알리시아의 목끝까지 이불을 덮어준 후, 그녀의 숨소리가 고를 때까지 한참 기다리다가 자리를 떴다. 문이 닫히자마자, 잿빛 눈동자가 곧장 모습을 드러낼 거라곤 꿈에도 모른 채. 알리시아는 주변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커튼이 꼼꼼하게 쳐진 방 안에선 빛 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알리시아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최근 들어 스스로가 감정으로 변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제임스의 말이 잊히지 않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덤덤해지지 못한 자신이 있었다.

    "전하께서 그럴 리 없잖아."

    알리시아는 가볍게 제 뺨을 두들기며 상념을 쫓으려 애썼지만, 남은 의심을 완전히 지우진 못했다. 제임스의 이야기 속, 카벨레누스는 그녀가 기억하는 모습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하루가 멀다하고 온갖 좋은 것들을 품에 안겨주었고 그의 옆자리를 약속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알리시아는 초조했다. 그래서 카벨레누스에게 묻고 싶었고, 동시에 그러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절 차갑게 바라보는 카벨레누스를 마주하게 될까 봐.

    '아이가 있었으면 괜찮았을까?'

    알리시아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제대로 된 부모가 할 생각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아이가 카벨레누스를 잡을 수 있는 족쇄가 되어줄 거라면 있어도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나, 진짜 부모 자격이 없구나.'

    알리시아의 어깨가 아래로 축 처졌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자식을 도구 취급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결국, 제 피의 반쪽이 누구의 것인지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것만 같아 역겨웠다. 알리시아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평평한 배를 매만지는 건 어느덧 습관이 되어 있었다.

    "미안해, 아가."

    존재하지도 않는 아이라 할지라도,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한 게 못내 미안해서. 그리고, 가끔 이 안에 누군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해서. 알리시아는 울적해지는 기분을 꾹꾹 누르며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딱딱한 나무의 감각에 괜히 잊었던 기억이 떠올랐지만, 애써 모른 척하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예전에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 아이들은 태어나기 전에 자신의 부모가 될 존재들을 지켜본다고. 예전에는 그 이야기를 듣고 별 생각이 없었는데, 요즘 들어 자꾸만 그 이야기가 떠올라."

    혹시라도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서 네가 날 지켜보지 않을까 해서. 마른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도 부모가 될 자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아이가 상처 입지 않았으면 바랐다.

    "지금도 널 원하진 않아.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네가 미운 것도 아냐. 네 잘못은 하나도 없는 걸. 그저 내가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뿐이야. 그러니까……."

    배를 만지던 알리시아의 손이 멈췄다. 알리시아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아주 찰나였지만, 분명 익숙한 기운이었다.

    '혹시…….'

    알리시아는 다급히 제 몸을 살폈다. 방금 전 느꼈던 기운을 찾기 위해 몇 번이고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확인해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착각인 걸까?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힘이…….'

    달칵. 순간, 들린 문소리에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는 방문자의 얼굴을 곧장 확인할 수 없었음에도 그녀는 그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봤다.

    "……오시지 않을 줄 알았어요."

    "나야말로 그대가 잠든 줄 알았는데."

    "오실 거면서 왜 오지 않을 거라고 하신 거예요?"

    "언제 시간을 낼 수 있을지 몰랐던 터라, 하염없이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거든."

    "……."

    "화났나?"

    조심스럽게 던져진 질문에 알리시아의 입매가 떨렸다. 어울리지 않게 제 눈치를 살피는 사내를 보는 순간, 그렇게 절 괴롭히던 불안이 한순간에 우스울 정도로 간단히 녹아버렸다.

    "……제가 화난 것처럼 보이세요?"

    "목소리가 평소보다 날카롭게 들려. 그리고, 화난 표정을 하고 있기도 하고."

    "거기서 제 얼굴이 보일 리 없잖아요."

    "내겐 보여,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 그리고……."

    이러면 더 선명하게 보이지. 성큼성큼 다가온 카벨레누스가 알리시아의 얼굴을 쥐었다.

    "많이 기다렸나?"

    "아뇨."

    "그렇다고 하기엔 눈가가 젖었는데."

    "……."

    "미안. 그대가 우울해한다는 거 알고 있어서 조금의 시간이라도 나면 곧장 보러오려고 했는데."

    거친 손끝이 어울리지 않은 섬세한 손길로 눈가를 어루만진다. 알리시아는 시큰거리는 눈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카벨레누스를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요. 정말로."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어리광을 피우는 아이처럼 칭얼거렸다. 감정적으로 굴고 싶지 않은데, 왜 자꾸 순간의 기분에 휩쓸리게 되는지 모르겠다. 마치 누군가 절 조종하기라도 하는 것만 같았다.

    "많이 기다리게 했나보군."

    카벨레누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알리시아는 더욱 그의 품을 파고 들며 눈을 감았다.

    "나쁜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무슨 이야기지?"

    카벨레누스의 목소리에 탐탁지 않은 기색이 서렸다.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전하께서 크리스티 왕국의 공주와 약혼할 거라고 했어요."

    "……."

    순간, 등을 다독여주던 손이 멈췄지만 알리시아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혹시라도 제 품의 사내를 놓칠까, 팔에 힘을 주는데에만 급급했을 뿐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요."

    "……."

    "전하, 아니. 카벨레누스가 그럴 리 없는데."

    "……."

    "……카벨레누스?"

    침묵이 계속되고서야 알리시아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올려다본 사내의 얼굴은 어둠으로 뒤덮여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보이는 건, 금색 눈동자뿐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제 색을 잃지 않고 형형히 빛나는 금색 눈동자. 곧게만 보였던 그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침을 삼켰다. 고요 속 꼴깍, 침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아니죠?"

    "……."

    "아니잖아요."

    얼른 아니라고 말해줘요. 알리시아가 침묵을 참지 못하고 카벨레누스는 재촉했다. 카벨레누스는 간절한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손을 뻗어 알리시아의 어깨를 쥐었다.

    "……아니야."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알리시아는 유일하게 죄책감을 들게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모든 것을 말하기에는 너무도 말라버린 몸이 걸렸다. 지금의 알리시아는 다른 것보다 자신의 몸부터 우선적으로 챙겨야 했다.

    "아니라고요?"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이어지는 사내의 목소리는 처음보다 좀 더 힘이 들어갔다. 한 번 뱉은 거짓에 또 한 번의 거짓을 더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가요? 크리스티 왕국의 공주가 슈바르한 성에 머물고 있는 것도, 그녀와 전하가 약혼했다는 것도 전부요?"

    알리시아가 빤히 카벨레누스를 올려다봤다. 그 순간에도 그녀의 손은 카벨레누스를 손등 위로 핏줄이 튀어나올 만큼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많이 불안한 건가?"

    달래듯 알리시아의 손등을 쓰다듬었지만, 꽉 쥔 그녀의 손은 풀릴 줄 몰랐다.

    "과한 욕심을 부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

    "심지어 제가 기댈 수 있는 건 결국, 전하의 마음뿐인 걸요. 그리고 그 마음만 보면서 버틴다는 건, 반대로 말하면 전하의 마음이 바뀐다면 한 순간에 모든 게 끝날 수 있다는 뜻이죠."

    알리시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왜 이렇게 불안한지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의 저는 개와 크게 다를 바 없어요. 먹이 주는 이를 향해 하염없이 꼬리를 흔들며 따르고 있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말이 안 되지 않아요. 오히려 그게 객관적인 평가죠."

    알리시아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좋게 포장하려 해도 동등하기보다는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진 관계는 주도권이 어느 쪽에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줄 뿐이었다.

    "나와 어울리는 대공비가 될 거라면서."

    "그건 미래의 이야기지, 지금은 아니잖아요."

    "……."

    "저는 카벨레누스와의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 하고 싶고, 그럴 거예요. 하지만 그 미래에 도달하기 위해선 제겐 확신이 필요해요."

    알리시아가 다소 성급하게 카벨레누스 쪽으로 몸을 기울었다. 가까워진 숨결에 카벨레누스의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분명 카벨레누스는 그녀에게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자신이 이렇게 사내의 옆에 있을 수 있는 것도 그가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카벨레누스는 강제로라도 알리시아를 옆에 둘 수 있었지만, 알리시아는 그럴 수 없었다. 카벨레누스가 그녀를 버리면 아무리 발악해도 알리시아는 그의 옆에 있을 수 없었다. 결국 둘의 관계를 결정 짓는 건 카벨레누스였다. 그걸 알기에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버려지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순응하고 최선을 다하려 했을 뿐이었다. 알리시아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거 아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리고 지금껏 한 일은 당신을 기다리는 것뿐이었어요. 당신의 마음 하나만 바라보면서 끊임없이 기다리고 기다리는 것. 딱 그것뿐이요."

    "나는……."

    "괜찮아요. 당신 옆에 있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살 수 있어요. 하지만……."

    제 앞에서 거짓말만은 하지 말아요. 알리시아는 그 말을 뱉는 와중에도 웃었다. 물기 어린 두 눈에 오롯이 카벨레누스만을 담은 채,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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