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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39)화 (39/164)
  • 39화. 소문과 사실

    2020.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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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하?"

    "……."

    "전하."

    재차 불리고서야 카벨레누스는 시선을 돌렸다. 그의 맞은 편에는 벨로아가 불만 어린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절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신 모양이군요."

    벨로아는 미소를 머금은 채, 찻잔을 들었다. 은은히 퍼지는 차 향이 부드럽게 코끝을 맴돌았지만, 그녀의 심기는 한껏 뒤틀려 있었다. 카벨레누스는 제게 관심이 없었고, 제르페누스는 언제 자신이 다 내어줄 것처럼 굴었냐는 듯 슬슬 발을 빼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여러모로 곤란했다.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간다면, 다들 절 어떻게 생각할지 뻔했다. 특히나, 그렇게 오만하게 굴다간 큰 코 다칠 거라 말하던 언니라면 특히. 다른 사람이 절 하찮게 보는 것도 싫었지만, 바로 위에 있는 언니가 그런 시선을 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뭐 하나, 자신보다 나은 것 없는 주제에 매번 가르치려고 드는 꼴은 정말로 꼴불견이었으니까.

    "다른 게 아니라, 전하께서 원하는 걸 드리겠다고 말씀드린 거랍니다."

    "제가 원하는 것 말입니까?"

    "물론, 전하께서 제가 원하는 걸 내주신다는 조건이 있지만요."

    상황에 따라 적당히 발을 뺄 생각도 있었지만, 이젠 그런 건 의미없었다. 카벨레누스의 조건은 훌륭했다. 그 이상의 조건을 가진 사내는 찾기 어려울 것이었다. 어떤 수를 쓰든 간에 무조건 가져야 했다.

    "말씀해보십시오."

    "제게 청혼해주세요. 그것도 모두가 알 정도로 화려하고 성대하게."

    "그것뿐입니까?"

    "그리고, 결혼하기 전까지 제게 매주 꽃과 선물을 보내주시고, 종종 절 보러 오세요. 전하께서 제게 푹 빠져서 매달린다고 모두가 생각할 수 있게끔요. 제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에요."

    벨로아가 순진무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그것만 바라는 건 아니었지만, 아직은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카벨레누스와의 관계 자체가 제게 힘이 되어줄 테니까.

    "그럼, 그 대가로 제게 뭘 해주실 겁니까."

    "제 밑의 마법사들을 드리겠습니다."

    "마법사라고요?"

    "슈바르한에는 마정석만 있지, 그걸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부족하다고 들었습니다. 전하께서 제 제안을 받아주신다면, 제 밑의 마법사들을 보내 슈바르한의 마법사들에게 기술을 전수해드리겠습니다."

    "하실 수 있습니까?"

    카벨레누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 밑에 있는 마법사들은 열 다섯. 다들 충줄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니 전하께 충분히 도움이 될 겁니다."

    "……."

    "나쁜 조건은 아닐 텐데요."

    확실히 괜찮은 제안이었다. 마법사는 선천적으로 마나를 다루는 능력을 지니고 태어나야만 했기에 그 수가 많지 않았고, 재능에 따라 힘 차이가 크게 나기 때문에 마정석을 제대로 사용할 수준의 마법사를 구하기란 무척 어려웠다. 슈바르한에 있는 모든 마법사의 수를 세어봐도 열을 채우지 못했다.

    "왕녀의 부왕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텐데요."

    마법사가 귀한 만큼 마법 기술 역시, 철저하게 지켜졌다. 계속해서 크리스티 왕국의 마법 기술을 노려왔음에도 손에 넣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제르페누스가 어떻게 벨로아를 여기까지 끄집어냈는지부터 신기할 따름이었다.

    "허락 받을 필요도 없어요. 현재 부왕께서는 업무를 보실 수 없거든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부왕의 건강 상태가 썩 좋지 않으세요. 업무 보시는 것도 버거워하시죠."

    "그 말씀은?"

    "현재 크리스티 왕국은 왕위 계승을 놓고 싸우고 있고, 차기 국왕으로는 제 큰 오라버니가 유력시되고 있죠."

    "그런 걸 제게 알려주셔도 되는 겁니까?"

    "전하께서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지금 혼란한 시기가 아니면, 전하께서 원하는 걸 얻기 어려우니까요. 그건 전하께서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 않나요?"

    벨로아가 거만하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녀의 입가에는 이미 승리의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슈바르한이 항상 마법 기술에 목말라 있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였다.

    "저는 빙빙 돌려 말하는 건 질색이라 바로 말씀드릴게요."

    절 사랑하세요. 벨로아가 가슴 위에 손을 올린 채 싱긋 웃었다.

    "왕녀께서 그런 말씀을 입에 담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사랑이 별 건가요. 그 사람이 원하는 걸 주는 게 사랑이지."

    벨로아의 손목에 걸린 다이아몬드 팔찌가 조명 아래 반짝거렸다. 알 굵은 다이아몬드를 한 알 한 알 엮어서 만든 팔찌는 무척 아름답다 못해 사람의 마음을 산란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저는 말로만 떠드는, 입 발린 사랑은 질색이에요. 눈에 보이는 사랑을 원해요."

    벨로아가 느긋하게 보석의 표면을 매만졌다. 어릴 적 유모가 동화를 읽어주며 순수한 사랑을 이야기했을 때도 그녀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온갖 아름답다는 수식어나, 달콤한 밀어들을 들어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세상에는 그보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것이 많았다. 벨로아는 처음으로 보석 목걸이를 했을 때의 기분을 잊지 못했다. 목이 기울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묵직한 목걸이는 모두의 시선을 앗았고 그녀를 질투와 부러움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날, 벨로아가 배운 건 아름다움과 권력이 그리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었다. 얼마나 큰 보석을 달았는지, 얼마나 유명한 디자이너의 드레스를 입었는지, 남들보다 월등하고 아름답게 치장하면 할수록 그것은 그녀를 뒷받침해주는 권력이 되었다.

    "전하께서 실제로 절 어떻게 여기든 상관없지만, 다른 이들은 전하께서 절 사랑한다고 생각해야 해요."

    "왕녀께서는 스스로가 대단하다고 생각하신가봅니다."

    "제가 그러지 못할 이유가 있나요?"

    벨로아가 떨떠름한 시선으로 카벨레누스를 흘겨봤다.

    "제가 알기론 왕녀께서는 형제들과 썩 사이가 좋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게 무슨 상관이죠?"

    "제가 알기론 보통 보기 싫은 혈육을 처리하는 방법은 두 가지거든요. 죽이거나, 혹은 이용하거나."

    "……."

    "그런데, 마침 왕녀께서는 젊고 아름다우셔서 구애가 끊이지 않으시니, 당연히 죽이는 것보다 이용하는 쪽을 택할 것 같은데."

    안 그렇습니까? 카벨레누스가 엄지로 천천히 턱 끝을 쓸었다. 벨로아가 말한 크리스티 왕국의 상황은 이미 조사를 통해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1왕자께서 왕위에 오르시면, 가장 먼저 왕녀의 결혼부터 추진할 겁니다. 가장 비싼 몸값을 치를 수 있는, 하지만 자신의 자리는 위협하지 않을 정도로 덜떨어진 그런 상대로 골라서 말입니다. 그래서 왕녀께서 위험을 무릅쓰고 제게 발걸음 하신 게 아니십니까."

    "그게 뭐 어떠세요?"

    "왕녀께서 처한 상황이 썩 좋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보통 위기에 빠진 사람은 거래에서 손해를 보기 마련이죠."

    카벨레누스는 벨로아의 등 뒤에 선 가제프를 흘끔 봤다. 시기적으로 봤을 때, 당연히 제르페누스가 벨로아에게 접근했다고 생각했다. 하나, 유능한 부관이 알려준 정보로는 먼저 접선을 취하려고 했던 건 벨로아 측이었다. 벨로아의 상황이 그만큼 좋지 않다는 걸 유추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제가 제시한 것보다 더 큰 걸 원하신다는 거군요?"

    "왕녀께서 제 구원자가 아닌, 그 반대의 상황이지 않습니까."

    "그건 제가 가진 마법사가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해 달라지겠죠."

    제 상황이 드러났으니 기가 죽을 만도 한데, 벨로아는 조금도 움츠려드는 기색이 없었다.

    "왕녀께서 그리 말씀하실 정도면 대단한 사람인가보군요."

    "당연히 대단하죠. 무려 5서클의 마법사인 걸요."

    카벨레누스의 눈빛이 일순간 달라졌다. 마법사의 수준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되는 서클은 숫자가 높을수록 실력이 뛰어나다는 반증으로, 서클의 숫자에 따라 실력이 월등히 차이가 났다. 서클의 마법사만 해도 대단한 실력으로 여겨지는데, 5서클의 마법사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마법에 관심이 많으신 전하께서 서클의 의미를 모르실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5서클 마법사라면 더욱 빼내오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어렵지 않아요. 그리고 전하께서만 괜찮으시다면 마법 기술뿐만 아니라, 그 마법사를 아예 내어드릴 수 있습니다."

    "……."

    "물론, 전하께서 제 요구 사안을 얼마나 잘 들어주시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요."

    카벨레누스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확실히 아까보다 훨씬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어설픈 마법사를 여럿 들이는 것보다 제대로 된 마법사를 영입하는 편이 낫다는 건,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슈바르한의 마법사들만 해도 중심이 되는 3서클 마법사 한 명을 나머지가 보조해주는 식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

    "너무 깊이 고민하지 마세요. 전하께서 아시는대로 제겐 시간이 얼마 없는 반면, 절 원하는 이들은 많으니까요. 전하의 옆자리가 탐나도 다른 자리를 꿰차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랍니다. 마법에 굶주려 있는 건 슈바르한만이 아니니까요."

    "……."

    "정 고민되신다면 3일의 유예 기간을 드리죠.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전하께 마도구 제작법을 하루에 하나씩 알려드리겠습니다."

    "마도구 제작법을 그렇게 순순히 넘기셔도 되는 겁니까?"

    벨로아의 제안은 카벨레누스로선 손해볼 게 없었지만, 의심은 남아 있었다. 벨로아는 아무렇지 않게 제 치부를 드러냈으나, 아직도 그녀는 전부를 드러내지 않았다. 절대 굽히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제 할 말을 쏟아낼 수 있는 건 결국 숨 쉴 구멍이 있기 때문이었으니까. 저 작은 머릿속 제 딴에 열심히 숨겨놓은 꿍꿍이를 찾을 필요가 있었다.

    "상관없어요. 어차피 크리스티 왕국에선 흔히 쓰이는 제작법이고, 무엇보다 제겐 확신이 있거든요."

    "무슨 확신입니까."

    "전하께서는 일부만 먹고 끝낼 분이 아니실 테니까요."

    "……."

    "맛을 봤으면 끝까지 삼켜야죠. 그런 것도 하지 못한다면 제가 굳이 전하를 잡을 이유가 없지 않나요?"

    벨로아의 눈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좋은 형 노릇에 흠뻑 취해 있는 제르페누스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본 카벨레누스는 누군가의 밑에 있을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정말로 충직한 개일 뿐이었다면, 저런 눈으로 슈바르한에 목 멜 이유가 없었으니까.

    "저는 욕심이 많아요. 그리고, 그만큼 욕심 많은 사람을 좋아하죠."

    "……."

    "제가 전하의 욕심을 채워드릴 테니 전하께서도 그래주세요."

    카벨레누스에게 슈바르한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제게 언제나 무심했던 사내는 이 혹한의 땅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집착을 뒤져보면 결국 숨길 수 없는 욕심이 보였다. 그걸 알기에 벨로아는 카벨레누스가 퍽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단 한 번도 마음에 든 것을 가져보지 못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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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오늘따라 더 열심이시군요."

    "전하께서 모델이 되어주시기로 하셔서, 그 전까지 좀 더 연습해두려고."

    알리시아의 펜이 부드럽게 캔버스 위를 오고가며 선을 그렸다. 사각거리는 펜 소리가 익숙해진 것처럼 스케치를 완성하는 일은 더는 어렵지 않았다. 원하는 걸 그리고, 애정을 다해 완성해나가면 그만이었다.

    "지금은 바쁘셔서 무리겠지만, 조만간……."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신이 나 재잘거리다가 얼굴에 느껴지는 시선에 입을 꾹 닫았다. 아니라고 말했건만, 여전히 제임스는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제임스."

    "네, 아가씨."

    알리시아는 가만히 제임스를 응시했다. 둘의 일이라고 딱 자르기에는 절 보는 사내의 시선이 너무도 애틋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아닌 지키지 못한 누이를 향한 것이었다. 그 사실에 가슴이 콕콕 찔렸다. 제임스의 모습이 마치 모친을 지키지 못한 제 모습 같아서. 결국 알리시아는 참지 못하고 펜을 내려놨다.

    "모르코 부인."

    "네, 아가씨."

    "나, 과일이 먹고 싶은데 가져다줄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모르코 부인이 한껏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리시아가 먹을 것을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모르코 부인에겐 큰 기쁨이었다.

    "이제 편히 이야기해도 되겠다. 그치?"

    "……."

    "전에도 말했지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었어. 전하께서는 날 정식으로 아내로 맞기로 하셨고……."

    "현재 슈바르한 성에는 크리스티 왕국의 공주가 머물고 있습니다."

    알리시아의 말을 가로챈 제임스는 가만히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혹시나 했다. 귀족들의 생태를 빤히 알면서도 알리시아가 상처입지 않길 바랐다. 신뢰로 가득한 곧은 눈이 철저하게 무너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공주가 성에 머물고 있다고 해도 그게 문제가 되지 않아."

    알리시아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카벨레누스는 분명 자신 외의 여자는 없다고 했다. 그 말을 믿었다. 백 마디 말보다 그 다정한 시선이, 행동 하나하나가 진실했다는 걸 알고 있기에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전하께서는 그 공주를 위해 무수히 많은 보석과 드레스 등 온갖 사치품들을 사들이고 있다 해도요?"

    "뭔가 오해가 있겠지."

    "오해가 아닙니다."

    "소문은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어."

    "소문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사실?"

    알리시아의 눈에 힘이 들어갔지만 제임스는 말을 멈추기보다는 그녀를 똑바로 보고 말을 이었다.

    "어제, 전하와 공주의 약혼식을 예고하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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