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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38)화 (38/164)
  • 38화. 한 번만 더

    2020.07.13.

    "깨어 있었군."

    "전하께 묻고 싶은 말이 있어서 기다렸어요."

    "내게?"

    "네."

    기다렸다는 끄덕거리는 고개가 오뚝이 인형처럼 퍽 귀엽다. 카벨레누스는 슬쩍 입가에 미소를 비치며 슬쩍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녀가 힘들게 자신을 기다리지 않았으면 하면서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무슨 이야기길래, 그렇게 진지한 얼굴인 거지?"

    "중요한 이야기라서요."

    알리시아가 다짐하듯 반복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임스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모르코 부인이 있어서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모르코 부인 앞에서 괜한 이야기를 하면 제임스가 곤란해질 것이다. 그리고, 애당초 이건 자신과 카벨레누스의 문제였다. 제3자인 제임스에게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리 없었다.

    "무슨 이야기인진 모르나, 편히 이야기해. 그대가 하는 말이라면 다 들어줄 테니까."

    "그게……."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의 손길을 가만히 받으며 말을 골랐다. 처음에는 이런 말을 해도 되나 걱정이 앞섰지만,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손길 하나에도 묻어나는 애정에 나름대로 긴장이 풀렸다.

    "저 말고 다른 여자가 있으세요?"

    "……뭐?"

    카벨레누스의 매끄러운 이마 위로 선명하게 주름이 잡혔다. 알리시아는 구겨진 사내의 얼굴을 보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입으로 직접 진실을 듣고 싶었다.

    "그런 소리는 어디서 들은 거지?"

    "여자가 있으세요?"

    "……."

    "왜 말을 못 하세요? 진짜 다른 여자가 있으신 거예요?"

    이번에는 알리시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카벨레누스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다급히 알리시아의 어깨를 잡았다.

    "없어. 그런 거."

    "진짜요?"

    "그래."

    흘겨보는 시선에는 혹시나 하는 의심의 기색이 엿보여 카벨레누스는 헛웃음을 뱉었다. 잔뜩 눈에 힘을 준 모습이 제 딴에는 강해 보이려고 하는 것이겠지만, 사내에겐 무섭기보단 귀여울 뿐이었다.

    "그런데, 왜 망설이셨어요?"

    이젠 물을 줄도 아는 건가. 털을 바싹 세운 고양이 같은 알리시아에 카벨레누스는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왜 다들 작은 동물을 보고 좋아하는지 알 수 없었는데, 지금은 좀 알 것 같기도 했다.

    "왜 대답은 하지 않으시고 웃기만 하세요?"

    "그대가 그런 소리를 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해서."

    "솔직해지라고 하셨잖아요."

    "맞아. 내가 그랬지."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고 조금씩 달라지려고 애쓰는 여자의 모습은 항상 기껍다. 카벨레누스는 고개를 내려 알리시아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알리시아는 당황해 뺨을 붉혔지만, 대답을 포기할 생각은 없는지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런 얼굴 하지 않아도 나는 그대의 것이야."

    "정말이죠?"

    "어떻게 하면 내 말을 믿어줄 거지?"

    카벨레누스의 목소리가 한껏 부드러워졌다. 알리시아는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뺨에 닿은 카벨레누스의 손에 얼굴을 기댔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쓸어내린다 해도 굳은살이 단단히 박힌 손은 닿을 때마다 뺨이 쓸렸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그 단단한 손을 좋아했다. 남들보다 높은 체온도, 얼굴을 다 가릴 만큼 커다란 손도, 심지어 그의 손을 못나게 보이게 하는 굳은살조차 전부 좋아했다. 물론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건, 사내의 눈이었지만. 짐승의 것을 연상시키는 기묘한 눈동자는 오금을 저리할 정도로 위협적이었으나, 알리시아는 그 눈이 자신을 볼 때 얼마나 다정한 빛을 띠는지 알고 있었다.

    "모델이 되어주셨으면 해요."

    "모델? 그게 뭐지?"

    "그림 모델이요."

    "그건-."

    "전하를 그리고 싶어요."

    카벨레누스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알리시아가 선수를 쳤다. 그의 모습은 이미 수도 없이 그렸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좀 더 완벽하고, 제대로 사내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내고 싶었다.

    "나 같은 걸 그려봤자, 썩 재미는 없을 텐데."

    "그럴 리가요. 전하께서 얼마나 재미있으신데요."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평가에 카벨레누스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환심을 사려고 그냥 하는 말이라고 보기엔 알리시아는 지나치게 진심이었다.

    "……내가 재밌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보는데."

    "전하께선 충분히 재미있는 분이세요. 그리고……."

    "그리고?"

    "예쁘시죠, 그것도 무척."

    "그것도 상당히 낯선 평가로군."

    예쁘다는 소리를 들어본 게 언제였더라. 카벨레누스는 이제는 떠오르지도 않는 기억을 되짚으며 인상을 썼다. 어려서는 좀 들어본 것 같긴 하지만, 본격적으로 전장을 떠돌기 시작한 후부터는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또, 굉장히 잘생기셨고요."

    "그건 좀 들어본 것 같긴 하다만."

    "좀이 아니라, 많이 들으셨을 것 같은데요?"

    "그런가?"

    카벨레누스는 곁눈질로 알리시아의 눈치를 살폈다. 이번에도 알리시아는 진심이었다. 그 사실이 예상 외로 좋았다. 외모는 큰 의미 없다고 생각했는데, 알리시아의 입에서 나오는 칭찬들은 기분 좋게만 들렸으니까.

    "그래서 곤란한 거예요."

    "왜 곤란하지?"

    "전하를 온전히 화폭에 담아내는 게 너무 힘들거든요."

    "그 말은 전에도 날 그렸다는 말로 들리는데?"

    "……화 안 내실 거죠?"

    할 말은 다 해놓고 이제 와서 슬쩍 발을 빼는 건 반칙이지 않나. 카벨레누스는 종잡을 수 없는 여자를 보며 어깨에 힘을 뺐다.

    "내가 왜 화를 내겠어."

    "……사실 전하를 그렸어요, 그것도 아주 많이."

    "왜?"

    "그야, 제가 가장 그리고 싶은 게 전하니까요."

    "……."

    카벨레누스의 목울대가 꿀꺽 울렸다.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그런 말을 들으니, 그대가 그린 그림을 보고 싶어져서."

    예술 따위 흥미가 없는데,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니 관심이 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카벨레누스는 배시시 웃는 어린 양을 보며 짓궂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건 좀……."

    "곤란한가?"

    카벨레누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리시아는 그 모습을 멍하니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역시, 카벨레누스의 모습을 몰래 기억했다가 그리는 것보다는 그 자리에서 직접 그리고 싶었다. 그의 찰나를 온통 화폭에 담아서 영영 기억하고 싶었다.

    "너무 부족한 실력이라서, 나중에 제대로 그려서 보여드릴게요."

    "나는 지금 보고 싶은데."

    슬쩍 카벨레누스가 다가섰다. 눈에 띄게 한쪽으로 기울어진 상체에도 알리시아는 딱히 경계심이 없었다.

    "부끄러운 걸요."

    "저번에 보니 잘 그리는 것 같던데."

    절 경계하지 않는 게 마음에 들지만, 반대로 그게 거슬리기도 하다. 카벨레누스는 모순되는 마음을 품은 채, 대놓고 알리시아의 얼굴을 쥐었다. 코가 맞닿을 정도로 거리가 좁혀지고서야 알리시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익었다.

    "그, 그건 닉슨이 도와줘서 그런 거고요."

    "닉슨이라……."

    "제임스의 성이에요. 전하께서 제임스의 이름을 부르는 게 불쾌하다고 하셔서……."

    "그랬지. 그런데……."

    실은 성을 부르는 것조차 기분 나쁘다고 하면 저를 속 좁은 사람으로 여길까. 카벨레누스는 잠시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제게 익숙해졌음에도 빤히 보는 시선에 얼굴을 붉히는 여자가 만족스러웠다.

    "내 기억으론 그때 다른 말도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다른 말이요?"

    "내 이름."

    계속해서 곤란케 만들어 자신이 그녀에게 미치는 영향을 자꾸만 확인하고 싶을 만큼.

    "그건……."

    "여전히 버거운 건가? 아니면, 전처럼 말을 높여야……."

    "하지 마세요!"

    카벨레누스의 의도를 알아차린 알리시아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입을 막았다. 하지만 한 번 발동 걸린 사내의 장난은 멈출 줄 몰랐다.

    "저, 전……!"

    손바닥에 닿은 말캉한 감촉에 알리시아는 하던 말도 다 뱉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더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진 그녀의 동공은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순간, 사내의 손이 알리시아의 손목을 감싸쥐었다. 가냘픈 손목은 사내의 한 손으로도 충분히 잡혔다.

    "제, 제가 실수를……, 흣."

    알리시아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입술을 깨물었다. 충분히 제 손을 떼어낼 수 있었음에도 카벨레누스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여린 살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알리시아는 불안한 시선으로 카벨레누스를 바라봤다. 무슨 말이라도 하면 좋은 텐데 그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알리시아의 손바닥에 기꺼이 입을 묻고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알리시아는 애꿎은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아무런 움직임 없이 손바닥에 입술만 누르고 있을 뿐인데도 괜히 입안이 바싹 말랐다. 입술이 닿은 자리를 시작으로 열감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놓, 놓아주세요."

    더는 참지 못한 알리시아가 슬쩍 손을 뒤로 뺐고 그 사이로 약간의 틈이 생겼다. 알리시아는 짧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물론, 그것은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놓고 싶지 않은데."

    부드럽게 살갗을 쓸어내리는 타인의 숨결에 알리시아는 바로 후회했다. 그렇지만 물러날 구석은 없었다. 딱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도무지 사내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러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알리시아는 미묘하게 휘어진 사내의 눈매 사이로 비치는 금안을 응시했다. 동공이 긴 눈동자는 포식자의 것을 확연히 닮아 있었다.

    "정 싫으면 밀어내도 좋지만."

    밀어내지 않았으면 하는데. 카벨레누스의 입술이 손목 안쪽 여린 살에 내려앉았다. 알리시아는 불안한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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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답지 않은 사내의 시선에 등골이 오싹하면서도 도무지 눈을 뗄 수 없었다. 먹잇감을 야금야금 삼켜내듯, 양 손목에 번갈아 입을 맞추며 점점 더 위를 노리는 사내의 탐욕이 퍽 마음에 든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으니까. 알리시아는 머뭇거리다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사내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로 입을 뗐다.

    "……카벨레누스."

    "……."

    부르라고 만들어진 이름을 부르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가슴이 빠르게 뛰는 걸까. 알리시아는 홧홧하게 달아오른 뺨을 모른 척하며, 굳어버린 입술을 겨우 움직여 다시금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카벨레누스."

    처음이 어려웠을 뿐, 다시 부른 이름은 처음보단 쉽게 나왔다. 알리시아는 좀 더 자신만만한 얼굴로 또 한 번 사내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대로 시야가 뒤바뀌었다.

    "……한 번만 더 불러줘."

    잡힌 손이 풀렸지만, 움직일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알리시아는 어느덧 올려보게 된 사내의 얼굴을 보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어느새, 등 뒤로는 푹신한 쿠션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제야 알리시아는 자신이 침대에 누워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 번만 더."

    카벨레누스가 조르는 아이처럼 알리시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가 말할 때마다 목을 간질거리는 숨결에 알리시아의 얼굴이 또 한 번 붉게 달아올랐다. 알리시아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뗐다.

    "카벨레누스……."

    그럼에도 품 안의 사내를 놓고 싶지 않았다. 부끄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것과 별개로 제게 매달리는 사내가 좋았다.

    "카벨레누스 폰 블랑셰 슈바르한."

    "……."

    "역시, 그 이름은 너무 길어서 부르기 어려워요."

    알리시아가 투정하듯 중얼거렸다. 긴 이름은 권력의 상징이기에 모두가 부러워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알리시아는 가끔씩 카벨레누스의 이름이 길지 않았으면 했다. 그는 좋은 것들이 잘 어울리는 사내였지만, 그럴수록 품에 안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그대가 편한 대로 불러."

    "그래도 되나요?"

    "그래."

    알리시아. 덧붙여진 나지막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귓가를 울렸다. 알리시아는 팔을 뻗어 카벨레누스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아무리 버거워도 놓고 싶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불러주는 이름 하나에도 행복한 기분이 들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 포기할 수 없었다. 아예 맛보지 않았다면 모를까, 레몬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입안에 침이 고이는 것처럼 이미 알게 된 맛을 잊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의 목을 두른 팔에 천천히 힘을 줬다. 사내의 얼굴이 서서히 가까워졌고 그대로 입술이 겹쳐졌다. 그리고, 그 순간 알리시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 잠깐……!"

    알리시아가 성마른 손으로 카벨레누스의 어깨를 밀어내다 못해 거칠게 두들겼다.

    "왜, 그러지? 또 몸이 안 좋은 건가?"

    그녀답지 않은 거친 행동에 카벨레누스가 곧장 몸을 일으켜 알리시아의 안색을 살폈다.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창백하게 질린 얼굴만 봐도 그녀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 아뇨……, 잠깐……."

    "증상을 제대로 말해, 아니.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오지."

    "저, 저는 괜찮, 우웁……!"

    참아보려 해도 치민 구역감을 참을 수 없었다. 속에 있는 걸 몽땅 개워내야만 울렁거리는 속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알리시아는 치미는 구역감을 참지 못하고 카벨레누스를 거칠게 밀어내고 그대로 도망치듯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결국 침실에 남은 건, 황망한 표정의 카벨레누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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