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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37)화 (37/164)
  • 37화. 노골적이고도 선명한

    2020.07.09.

    "알리시아는."

    "지금 주무시고 계십니다."

    "오늘 식사는."

    "레몬수와 과일만 조금 드셨습니다."

    "과일을 좀 더 들이라고 해야겠군."

    카벨레누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나마 먹는 게 있다는 걸 다행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점차 말라가는 알리시아를 볼 때마다 누구에게 토해야 할지 알 수 없는 화만이 치솟을 뿐이었다.

    "과일은 부족하지 않게 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르코 부인은 카벨레누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카벨레누스는 노부인의 얼굴에 서린 근심을 발견하고 곧장 미간을 찡그렸다.

    "무슨 일 있나."

    "아가씨께서 돌아가신 모친의 수프를 드시고 싶다 해서 재료를 찾아봤는데……."

    "찾아봤는데?"

    모르코 부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벨레누스가 끼어들었다. 이제 희망을 걸어볼 만한 건 알리시아 모친의 수프 정도였다.

    "아직 다 찾은 건 아닙니다. 그런데……."

    "뭐지? 혹시 재료 수급에 문제가 있는 거라면……."

    "수프에 들어갔던 재료들이 대부분 독초였습니다."

    "뭐라고?"

    카벨레누스의 잇새로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거대한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굶주림에 모르고 독초를 먹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합니다."

    "왜지?"

    카벨레누스가 다소 초조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는 머릿속에 떠오른 가정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유명한 독초, 파타란의 뿌리가 들어 있었고, 심지어 또 다른 재료인 벡스의 꽃은 절벽에서만 자라 구하기 힘든 독초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한 이야기가 어떤 뜻인 줄 아나?"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가씨가 아닌, 전하께만 말씀 드리는 겁니다."

    모르코 부인이 길게 한숨을 뱉었다. 지금 알리시아는 몸도, 마음도 약해져 있었다. 그토록 따르던 모친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면 알리시아는 무너질 것이었다.

    "단지 착각했을 가능성은 없나? 식물들은 대부분 비슷하잖나."

    "파타란과 벡스, 둘 다 다른 것과 헷갈릴 만한 식물이 아닙니다. 특히, 벡스는 그런 식물이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고요. 벡스의 꽃이 필 시기를 알고 있을 정도면 식물에 능하지 않고선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모르코 부인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모친의 이야기를 할 때, 알리시아가 얼마나 행복해했는지 알기에 더욱 속이 쓰렸다.

    "……이 이야기는 알리시아에게 하지 마."

    "저 역시도 같은 생각입니다. 지금 아가씨께 필요한 건 심리적 안정이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다시 그림 수업을 시작해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그림 수업이라고?"

    그림이라는 말에 절로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카벨레누스는 잊을 만하다가도 불쑥 튀어나오는 젊은 화가를 떠올리며 짧게 숨을 뱉었다.

    "심리적인 요인이 크다고 했으니, 마음을 달랠 만한 일을 해보는 게 좋을 것 같거든요."

    "하지만……."

    "물론, 수업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진행할 겁니다. 제가 쭉 곁에서 지켜볼 예정이고요."

    "……도움이 될 것 같나."

    젊은 화가의 존재는 여전히 거슬렸지만, 지금으로선 알리시아의 회복이 우선이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결국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건 모르나, 지금으로선 할 수 있는 건 다 해볼 수밖에요."

    "……."

    "아가씨께선 계속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셨거든요."

    전하의 그림을요. 모르코 부인는 일부러 뒷말은 삼킨 채, 희미한 미소만 지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모친이 아니더라도 지금 알리시아에겐 카벨레누스가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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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정말로 오래간만이야."

    "……."

    "왜 그래?"

    "못 본 사이에 아가씨께서 많이 마르신 것 같아서요."

    애써 덤덤한 척 굴기 위해 애썼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것까진 막지 못했다. 제임스는 눈에 띄게 마른 알리시아를 보며 콧잔등을 살짝 찡그렸다. 못 본 사이에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나, 확실한 건 저 모습을 보는 순간 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동안 좀 아팠거든."

    "어디가 아프셨던 겁니까? 지금은 괜찮으신 건가요?"

    "괜찮아."

    전혀 괜찮은 얼굴이 아닌데도 알리시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괜찮다고 말한다. 그 모습이 싫어 제임스는 반사적으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제 입을 막지 않으면 괜한 소리가 나올 것만 같았다.

    "진짜 괜찮아. 점점 나아지고도 있고."

    아직도 못 먹는 음식이 태반이었지만, 다들 신경 써준 덕분인지 울렁거림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어머니의 수프는 결국 먹지 못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직도 알리시아는 모친의 수프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병인지 물어도 될까요?"

    "병이라고 할 만한 게 아니야. 의사의 말로는 그냥 심리적인 거랬어."

    "심리적이요?"

    "마음을 편하게 가지면 괜찮을 거래. 그래서 그림 수업도 다시 시작한 거야. 닉슨에게 그림을 배울 때면 확실히 마음이 편해지니까."

    "……."

    알리시아는 말을 아꼈지만 제임스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결국, 알리시아도 진실을 알고 만 것이었다. 카벨레누스가 권력을 앞세워 알리시아의 귀를 막는다 해도 슈바르한에는 이미 카벨레누스가 결혼을 전제로 약혼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파다했으니까.

    '제기랄.'

    제임스는 잘하지도 않는 욕을 곱씹으며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알리시아가 힘들 때, 옆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죄스럽게만 느껴져 자꾸만 가슴이 욱신거렸다.

    "아가씨."

    "응, 닉슨."

    혼란스러운 제임스의 마음과 별개로 알리시아는 그저 평온했지만, 그래서 제임스는 더욱 마음이 복잡해졌다. 죽은 사람처럼 감금된 채 사는 것도 모자라서, 사람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간섭 받고, 심지어 다른 여자와 혼인할 걸 뻔히 알면서도 덤덤해야 하는 여자는 한없이 가여울 뿐이었다. 비참하게 죽었던 제 누이가 그랬던 것처럼.

    "……정말로 괜찮으신 겁니까?"

    "정말로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 금방 좋아질 거야."

    알리시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증상이 계속될수록 알리시아야말로 불안했지만 그렇다고 괜찮지 않은 건 아니었다. 혼자서 버텨야했던 그때와는 전혀 달랐다. 다들 절 얼마나 신경써주고 있는지 알기에 알 수 없는 병이 겁이 나면서도 무작정 두렵진 않았다.

    "아가씨께서는……."

    "그런 얼굴 하지 마. 나는 정말 괜찮아."

    알리시아는 보란 듯 다시금 미소를 지었지만, 제임스의 눈에는 그저 처연해 보일 뿐이었다. 죽은 누이도 세상을 뜨기 전까진 저런 얼굴을 했으니까. 불행이 빤히 보이는데도 끝까지 자신이 사랑했던 사내를 믿으려고 애쓰며 괜찮다며 웃었다.

    "내가 안 괜찮다면 네가 선물해준 스케치북을 다 채울 리 없잖아."

    "벌써 다 채우셨군요."

    "어쩌다보니 시간이 많이 남아서."

    알리시아가 멋쩍게 웃었다. 먹은 것도 없어 몸이 축축 늘어지는 와중에도 그림을 그리는 건 문제없었다, 아니 오히려 열심히 집중하고 나면 잠시나마 울렁거리는 속이 멈추는 것 같아 틈틈이 펜을 들 수밖에 없었다.

    "……전하시군요."

    스케치북에는 풍경이나, 모르코 부인, 하녀의 그림도 있었지만, 그림의 대부분을 차지한 건 카벨레누스였다.

    "전하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다고 전에 말했잖아. 그래서 계속 연습해봤거든."

    알리시아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스스로도 실력이 늘었다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을 그릴 때는 제법 만족스러운 그림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카벨레누스를 그릴 때면 항상 아쉬웠다. 앞모습을 그리면 옆모습을 그리고 싶어졌고, 무표정한 표정을 그려내면 또 웃는 얼굴도 그리고 싶었다. 그냥 스치듯 보는 것과 달리, 그림을 그리고자 하니 사내의 얼굴, 표정, 심지어는 행동 하나하나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그럴수록 그리고 싶은 사내의 모습이 늘어났다.

    "어때? 괜찮아?"

    "네, 무척 잘 그리셨습니다."

    제임스는 웃었지만, 정작 그는 알리시아의 스케치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림은 마음을 담는 법이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알리시아가 카벨레누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고, 그래서 더욱 불안해졌다.

    "제 생각에는 이제 아가씨는 단순히 스케치로 끝낼 게 아니라, 제대로 그림을 그려도 될 같군요."

    "정말?"

    "괜찮으시다면, 오늘부턴 스케치로만 끝낼 게 아니라, 캔버스에 직접 그려보시는 게 어떨까요?"

    "아직 실력이 모자란 것 같은데, 괜찮을까?"

    "그림도 완성해야 느는 법이니까요. 채색 연습을 하신다고 생각하시고 편히 그려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알리시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럴게. 대신, 닉슨이 많이 도와줘야 해. 알았지?"

    "물론입니다. 그럼, 모르코 부인. 필요한 도구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모르코 부인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제임스는 도구 준비를 명령하기 위해 멀어진 모르코 부인을 확인하고 재빨리 알리시아에게 말을 걸었다.

    "아가씨."

    "왜? 내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아가씨의 편이 되어드릴 겁니다."

    "어?"

    예상치 못한 맹세에 알리시아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제임스는 말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카벨레누스의 감시자를 피해 알리시아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가씨께서 전부 포기하고 싶으시다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단 소리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왜 포기를……."

    "제가 이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니라는 걸 압니다. 하지만 저는 아가씨께서 제 누이처럼 되는 걸 원치 않습니다."

    "아……."

    알리시아가 살짝 입을 벌렸다. 그러고 보니, 제임스는 자신과 카벨레누스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었다.

    "닉슨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대충 알겠지만, 전하와 내 관계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제가 뭘 상상했는지 알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나도 꽃이 뭘 뜻하는지 모르지 않거든."

    "……."

    "네게 나쁜 뜻이 없다는 걸 알아. 그래서 기분이 나쁘지도 않아. 다 날 생각해서 해준 말이라는 거 알거든."

    왜 저 여자는 이 와중에도 저렇게 웃는 걸까. 꾹 다물린 제임스의 입술이 떨렸다. 불쾌할 법한 이야기였는데도 알리시아는 그녀의 말대로 딱히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전하의 정부가 아니야."

    그저 확신 어린 눈빛을 한 채로 분명한 선을 그었을 뿐이었다.

    "아가씨."

    "나는 전하를 믿어. 그래서 계속 옆에 있는 거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불행해지실 겁니다."

    "그러지 않을 거야. 나는 지금 전하의 옆에 있어서 행복한 걸."

    예전이라면 불안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제 알리시아에겐 확신이 있었다.

    "그림자로 살아도 괜찮으시다는 겁니까."

    "나는 그림자가 아니야."

    알리시아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카벨레누스는 자신을 아내로 맞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흔들릴 이유는 없었다.

    "전하께선 크리스티 왕국의 공주와 혼인하실 겁니다."

    "오해가 있나본데, 전하께서는……."

    "설마 아직도 모르시는 겁니까?"

    제임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아직도 모르다니?"

    알리시아가 황망한 시선으로 제임스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럴수록 제임스의 얼굴은 더욱 구겨졌다.

    "그야, 당연히……."

    "아가씨, 부탁하신 도구들을 가져왔습니다."

    "……."

    "……."

    "왜 그러시죠?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미술 도구를 든 시종을 앞세운 모르코 부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리시아는 빠르게 심호흡을 한 후, 곧장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아가씨, 혹시 몸이 안 좋으시다면……."

    "그럴 리가. 그것보단 바로 캔버스를 설치해줄래? 바로 그림을 그리고 싶거든."

    모르코 부인이 눈치챌까, 긴장했지만 그녀는 알리시아의 건강을 걱정할 뿐이지 다른 의심은 없어 보였다. 모르코 부인이 가르쳐준 그럴싸한 미소는 이제 그녀를 속일 수준까지 도달해 있었다. 알리시아는 그 사실에 안도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펜을 잡았다. 하지만 아무리 집중하려 해도 제임스가 하지 못한 말이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크리스티 왕국의 공주……. 혹시, 그 막내 공주인 건가?'

    알리시아의 속눈썹이 바람결에 팔랑이는 꽃잎처럼 흔들렸다. 실제로 가본 적은 없지만, 크리스티 왕국의 이름 정도는 들어본 바가 있었다. 이복 언니들은 항상 입버릇처럼 크리스티 왕국의 막내 공주 이야기를 하며, 그녀의 소문이 부풀려진 것일 뿐 노이슈타인이 크리스티보다 강했다면 대륙 최고의 미인은 자신들이 됐을 거라고 투덜거리곤 했으니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알리시아는 더는 선을 그리지 못하고 펜을 내려놓았다. 카벨레누스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겪은 카벨레누스는 마음을 얻고자 거짓말을 하는 사내는 아니었으니까. 제임스가 오해한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속이 뒤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누가 뭐래도 카벨레누스는 제 것이었으니까. 이유가 어찌 되었든 간에 말만이라도 제 것을 빼앗기는 감각은 조금도 유쾌하지 않았다. 질투였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이고도 선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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