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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36)화 (36/164)
  • 36화. 특별하다는 건

    2020.07.06.

    "그래서 성 내, 의사들이 계속해서 드나든다는 거지? 그 노예를 치료하기 위해서?"

    "네. 그렇습니다."

    "그럼 바로 안내해."

    "……."

    이어진 침묵에 느긋하게 부채를 펄럭이던 손이 멈췄다. 벨로아는 눕듯이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며 고운 미간을 구겼다.

    "왜 아무런 말도 못 하는 거지? 설마 아직도 그 계집이 어딨는지 모르는 거야?"

    "매수한 의사의 말로는 눈을 가린 채, 성으로 불려가 정확한 위치를 찾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못 찾았다는 거야?"

    "죄송합니다."

    호위가 눈치껏 재빨리 허리를 굽히며 굽신거렸지만 벨로아의 미간은 펴질 줄 몰랐다.

    "하여간, 무능하긴."

    벨로아는 새침하게 쏘아붙인 후,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럼 그년이 무슨 병에 걸렸는지 그 정도는 알아봤겠지? 자꾸 의사를 찾는 걸 보면 꽤나 지독한 병인 것 같은데."

    "의사의 말로는 처음 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처음 보는 병?"

    "그것이……."

    호위의 동공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는 제가 할 말이 벨로아의 분노를 살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말해."

    "굳이 표현하자면, 임신……."

    "임신? 그 더러운 게 아이까지 가졌다고?"

    일순간 벨로아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표독스러운 두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불길이 일듯했다.

    "아니, 아닙니다!"

    "그럼?"

    "임신 증상을 보이는데, 임신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 게 가능해?"

    벨로아가 살짝 눈을 찡그렸다. 천박한 노예가 몸을 굴리는 건 불쾌하지만 흔한 일이었다. 제 물건을 사용하는 것에까지 간섭할 이유는 없었다. 물론, 물건이 제 주제를 모르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만.

    "의사의 말로는 그랬습니다."

    "그 의사가 오진했을 수도 있잖아. 다른 의사들에겐 물어봤어?"

    "이곳 사람들은 워낙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이 많고, 슈바르한 대공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서 입을 열게 하는 게 도통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의사의 입도 겨우 열게 한 겁니다."

    "쓸모없는 것들이 핑계만 많지."

    벨로아는 신경질적으로 부채를 던지듯 내려놨다. 노예를 품는 것까지는 용납해줄 수 있지만, 아이는 아니었다. 사생아라는 오명을 쓰든, 노예를 어미로 두든 간에 결국, 그 아이의 반쪽은 카벨레누스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기에. 어설픈 혈육이라도 핏줄을 물려받은 이상, 끊임없이 걸림돌이 될 것이었다.

    "역시, 한시라도 빨리 그 노예 계집을 처리해야겠어."

    "하나, 지금으로선……."

    "지금이니까 치워야 하는 거야. 그 더러운 계집이 정말로 아이를 품게 되면 곤란하니까. 그 잘난 제국의 황제조차 비천한 어미를 뒀는데, 노예 어미 소생이라 해서 후계를 이을 가능성이 없다고 볼 순 없잖아."

    "공주님, 그런 말을 하시는 건……."

    호위가 다급하게 주변을 살폈지만 벨로아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뭐, 어때. 내가 없는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닌데. 황제가 다른 곳도 아닌, 로아킨의 무희 소생이라는 건 다들 아는 이야기잖아."

    "제국의 황제입니다. 없는 자리라 해도, 그분을 욕보이는 건……."

    "상관없어. 내가 황후가 되면, 그 더러운 핏줄부터 처리할 테니까."

    벨로아가 입술을 이죽거렸다. 현재 황좌에 앉아 있기에 예의를 갖추는 것일 뿐, 그녀는 제르페누스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공물로 바친 무희 어미를 둔 주제에 황제라며 의기양양한 꼴이 같잖기만 했을 뿐이었다. 어떤 짓을 한들, 야만인의 태생이 달라지질 리 없는데도.

    "공주님……."

    "황제 덕분에 천박한 야만인 어미를 둔 황제라는 선례가 생겨 내가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일이 생긴 거잖아."

    사생아의 후계권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인정되지 않았지만, 선례는 언제나 여지를 남기는 법이었다.

    "그런 눈 하지 마. 어쨌든 지금으로선 그의 도움이 필요하니까. 아, 그렇지. 이왕 이렇게 된 김에 그의 도움을 받아야겠어."

    "그 말씀은?"

    "제 혈통 때문에 평생 골머리를 앓아왔던 황제가 자신과 비슷한 아이가 생겼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꽤나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제르페누스는 좋은 형 흉내를 내는 데에 여념이 없었지만, 결국 그가 이복동생을 특별하게 여기는 건 카벨레누스의 혈통 때문이었다. 카벨레누스의 혈통이 더럽혀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가 보일 반응은 뻔했다.

    "실제로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뭐 중요하다고."

    "황제에게 거짓말을 한 게 들통이라도 나면……."

    "핑계거리는 많지. 약한 것은 금방 죽어버리고, 무엇보다 의사도 확신하지 못하는 임신이잖아. 내가 착각했을 수도 있는 거지."

    물론, 그 김에 진짜 아이라도 발견하면 더 좋고. 벨로아는 한결 기분 나아진 표정으로 느긋하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넘겼다. 거슬리긴 해도 사실상 아이가 있든, 없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노예의 핏줄따위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그리고, 설령 거짓이라는 걸 알아도 어쩌겠어? 대공의 옆자리가 내 것인데, 결국 황제도 날 어쩌지 못할 걸?"

    나는 특별하니까. 벨로아의 입술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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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폐하. 벨로아 왕녀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이 시간에 연락이라. 그 말괄량이 공주님께서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물고 왔나보지?"

    슬슬 수확할 준비를 할 때가 다가오는 건가. 제르페누스는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은 채,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바로 연결할까요?"

    "아니. 지금은 거절하고, 한 시간 후쯤 먼저 연락해."

    "그 성격에 가만있지 않을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러라고 무시하는 거지. 더욱 불타오르라고."

    제르페누스가 느긋하게 웃으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연락을 거절당하고 분통을 터트릴 벨로아가 벌써부터 눈에 훤했다.

    "공주는 저희 쪽 사람인데, 굳이 건드릴 필요가 있는 겁니까?"

    시종, 한스가 미간을 찡그렸다.

    "지금은 그렇지."

    "버릴 생각이시군요."

    "처음부터 계속 둘 생각은 없었어. 그런 여자는 카벨레누스에게 어울리지 않거든."

    제르페누스는 웃고 있었지만, 휘어진 눈매 사이로 보이는 녹색 눈동자는 얼음장보다 차가웠다.

    "그렇다면, 왜 보내신 겁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분은 전하께서 선호할 만한 분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선호하긴커녕, 꺼릴 만한 인물이지. 하지만, 나는 벨로아 왕녀 같은 사람을 참 좋아해. 감정에 잘 휩쓸리고, 속이 훤히 보이고, 심지어 욕심도 많아서 입맛대로 휘두르기 참 좋거든. 뭐, 그녀의 조건만 생각하면 버리는 게 다소 아쉽긴 하지만 말이야."

    "벨로아 왕녀가 그렇게 대단합니까."

    "크리스티 국왕이 괜히 싸고도는 게 아니지. 본인은 그 힘을 감내할 능력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야."

    조금만 덜 멍청했으면 카벨레누스의 아내로서 한 번 정도는 더 생각해볼 법도 했는데. 아무리 대단한 힘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돼지 목에 진주를 건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여자는 카벨레누스와 어울리는 짝이 아니었다. 제르페누스는 아쉬움을 여과없이 드러내면서 쯧쯧 혀를 찼다.

    "폐하께서 무슨 생각인지 여쭤보아도 됩니까?"

    "사랑하는 아우를 위한 형님의 배려랄까."

    "배려요?"

    "그래. 배려."

    제르페누스는 깍지 낀 손을 배에 올린 채, 심호흡을 했다. 이번 일로 카벨레누스에게 꽤나 미움을 받을 거라는 걸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카벨레누스에게 수준 미달의 여자를 붙여놓는 것보단 미움 받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저는 여전히 폐하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꽤 오랫동안 나를 보좌했음에도 여전히 감을 잡지 못하다니 아직 미숙하군. 한스."

    "폐하께서는 아군도 속이시는 분이니까요. 저는 아직도 페탄 전투 때, 폐하께 당한 일을 잊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계속 날 보필하고 있잖나."

    "그야, 제가 아니면 능구렁이 같은 폐하를 감당할 시종이 없을 테니까요."

    한스의 투정에도 제르페누스는 웃기만 했다. 결국, 한스는 표정을 구기며 제 주인을 흘겨봤다.

    "시종 주제에 그런 얼굴이라니 무례하구나."

    "이 정도로 무례는 봐주시는 분이라는 걸 알고 있거든요."

    "하여간, 너는 선을 잘 알지."

    "황실 사람의 덕목이죠."

    한스는 덤덤하게 대꾸하며 제르페누스의 책상 위 흐트러진 서류를 정돈했다. 제르페누스가 말을 돌리는 건 전혀 계획을 공유해줄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참 우습지 않니. 한낱 시종인 너도 아는 선을 왜, 내 사랑스러운 아우님은 모르는 건지."

    "대공 전하께서 그럴 리가요."

    한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아는 카벨레누스는 단 한 번도 선을 넘은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고귀한 신분임에도 충직한 개의 노릇을 자처했고, 그건 지금도 다를 바 없었다. 제르페누스가 나름대로 권력을 쥐고 황제 노릇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그의 입장은 불안정했다. 냉정히 말해서 카벨레누스가 자신을 따르는 세력을 등에 업고 제르페누스를 치게 된다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었다.

    "누구보다 스스로를 낮추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 왜 그러시는 겁니까."

    "그럼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하는 거지? 그 여자와의 결혼을 허락해주고 축복까지 해줘야 하나?"

    비아냥거리는 어조에선 제르페누스답지 않게 노골적인 감정이 묻어났다. 한스는 다른 일에는 덤덤하면서, 이복동생 일만 나오면 다른 사람처럼 구는 제 주인을 보며 잠시 말을 골랐다.

    "잠깐의 흥미일 겁니다. 굳이 폐하께서 개입하지 않으셔도 금방 끝날 문제죠."

    한스는 최대한 제르페누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애썼다. 그는 두 형제의 사이가 나빠지는 걸 원치 않았다. 그들의 사이가 나빠지면 결국 타격을 입는 건 제르페누스 쪽이었다.

    "그건 내 바람일 뿐이지."

    제르페누스는 손으로 눈을 덮은 채, 한숨을 토했다.

    "왜 그렇게 확신하시는 겁니까?"

    카벨레누스가 노예를 아내로 들이겠다 해도 한스는 별 생각이 없었다. 한순간의 감정에 휩쓸리는 꼴이 카벨레누스답지 않다고 여겨도 실제 결혼으로 이루어질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잠시 그릇된 선택을 했지만, 이내 결혼 선언을 철회할 거라고 생각했다.

    "상대가 카벨레누스니까."

    손가락 사이로 녹색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오랫동안 봐왔던 동생이기에 잘 알았다. 카벨레누스는 단 한 번도 자신이 꺼낸 말을 지키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럴 것이었다.

    "떨떠름한 얼굴이군."

    "솔직히 저희로선 대공 전하의 심기를 거스르는 게 조심스럽습니다. 그리고, 더 솔직히 말하자면 전하께서 노예와 결혼해 스스로의 가치를 떨어트리신다면 달가운 일이죠."

    황제의 측근인 한스조차 카벨레누스의 정통성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의 모친이었던 선황후는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선황제의 아내이기 전에 귀족들의 수장인 멜타 공작 가의 외동딸이었다. 선황후가 이미 세상을 떴다해도 멜타 공작 가의 위세는 여전했다. 카벨레누스가 황위를 노린다면 멜타 공작은 기꺼이 하나뿐인 손자를 위해 모든 것을 걸 것이었다.

    "나는 그런 건 절대 용납 못 해."

    "도대체 폐하께서는 왜 그렇게 전하를 신경 쓰시는 겁니까."

    제르페누스가 카벨레누스를 남달리 여긴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이해되지 않는 관계였다. 두 사람의 입장만 본다면, 지금의 관계보다는 제르페누스가 카벨레누스를 견제해 슈바르한으로 쫓아냈다는 세간의 소문이 더 잘 어울렸다.

    "그 아이는 특별하니까."

    "정통성이라면……."

    "정통성?"

    제르페누스는 짧게 조소하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정통성을 떠나 카벨레누스는 특별했다.

    "누누이 말하지만, 나는 그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뿐. 다음 황제는 카벨레누스가 될 거다. 당연히 그래야하고, 그럴 거야."

    "하지만 전하께서는……."

    "카벨레누스는 황위에는 관심이 없지."

    제르페누스의 두 눈이 부쩍 어두워졌다. 선황제 부부의 권력 다툼은 많은 피를 불렀고, 패배한 황후는 치욕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건 황후 소생인 카벨레누스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동생은 제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목숨을 빌어야 했다.

    "아버지는 카벨레누스에게서 황태자 자리를 내려놓고 전장을 떠돌라 명했지."

    "그 약속이 언제까지 지켜질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생각할 필요도 없지. 카벨레누스는 지금도 그 약속을 지키고 있는 걸."

    제르페누스는 황위에 오른 후, 카벨레누스에게 황태제 자리를 내주고 수도 귀환 명령도 내렸다. 하지만 그 제안을 받은 카벨레누스는 수도로 돌아오는 대신, 혹한의 땅 슈바르한을 요구했다.

    "그런 아이야. 한 번 뱉은 말을 허투루 넘기는 적이 없는 아이."

    무심한 얼굴을 한 주제에 그런 점에선 왜 그렇게 집요한 건지. 제르페누스는 혀를 차며 엄지로 턱끝을 매만졌다.

    "카벨레누스가 그깟 대공 자리에만 머문다면, 노예와 어울리든 상관없어."

    "……."

    "하지만 그 아이는 황제가 될 거다. 그렇다면, 응당 그에 맞는 여자를 들이는 게 맞지 않겠어?"

    제르페누스의 두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길게 호선을 그렸다. 모든 일이 정리되면, 카벨레누스에 걸맞는 여자를 골라줄 것이었다. 제 동생에게 어울릴 법한 고귀한 혈통과 품위를 가진 여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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