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닮은 사람들
2020.07.02.
어머니는 죄책감을 갖지 말라 했지만, 알리시아는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이 태어난 후, 어머니의 힘은 점차 줄어들어 어느 순간에는 마른 우물처럼 아예 사라져버렸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만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어머니의 삶이 그런 식으로 비참하게 끝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좋은 분이었을 것 같아요."
"……좋은 분이셨어."
알리시아의 입꼬리가 힘없이 처졌다.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기에 더 슬펐다.
"아가씨는 그분을 닮으신 거겠죠?"
모르코 부인이 다정하게 눈을 맞춰왔다. 알리시아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닮고 싶었는데, 많이 닮진 않았어."
"닮았을 거예요. 보통 부모와 자식은 서로의 거울이라고 하니까요. 자연스레 닮을 수밖에 없죠."
"그럴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건 제 자식조차 품을 자신이 없는 자신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알리시아는 습관처럼 아랫배를 매만졌다. 분명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데 자꾸만 손이 갔다.
"왜 그러세요."
"아냐, 아무것도."
알리시아는 황급히 배에서 손을 뗐다. 하지만 손에 닿았던 온기는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그 사실에 괜히 기분이 울적해졌다. 분명 아이 같은 거 원치 않았고, 그 감정은 아직도 변함없는데 자꾸만 속이 허했다.
"몸이 안 좋으시면 바로 말해주세요."
"지금은 괜찮아.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어머니의 수프를 재연해보고 싶은 걸."
"그밖에 더 기억나시는 게 있으신가요?"
"알 수 없는 풀과 물을 잔뜩 넣고 끓여서 양은 많았지만, 맛이 정말로 없었어. 배가 고팠는데도 먹고 싶은 생각이 없을 정도로 말이야."
알리시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곤궁한 삶이었지만, 그래도 어머니와 함께한 시간은 행복했었다.
"수프에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는 모르지만, 넝쿨이 심하고 가시가 많은 식물이 들어갔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 생각엔 험준한 지역에서 나는 식물인 것 같아"
"어째서요?"
"그게……."
알리시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모친의 수프는 먹자마자 뱉고 싶을 정도로 맛이 없었지만, 알리시아는 단 한 번도 투정해본 적이 없었다.
"대놓고 물어보진 못했지만, 그 수프를 끓이는 날이면 어머니의 손은 항상 엉망이 되었거든. 그래서 어렴풋이 그럴 거라고 생각했었어."
"……."
"아, 혹시 성에 식물 도감 같은 게 있을까? 이름은 몰라도 그림을 본다면 떠오를지 몰라."
"……."
"어려울까?"
자신을 올려다보는 동그란 눈에 모르코 부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뒤로 물러섰다.
"아닙니다. 내일 중으로 찾아놓겠습니다."
"고마워."
"그런데……."
모르코 부인이 잠시 알리시아를 응시했다. 가볍게 흘릴 말이 아닌데도 알리시아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쭉 느껴온 바지만, 그녀가 모시는 아가씨는 스스로의 상처에 지나치게 덤덤한 구석이 있었다. 상처에 무뎌진다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닌데.
"왜? 내게 할 말 있어?"
"아닙니다."
모르코 부인은 고개를 저었지만, 그녀의 눈은 여전히 알리시아를 향해 있었다.
'자넷을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알리시아를 처음 봤을 때, 모르코 부인은 당연하게 제 사냥개를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 보니 알리시아는 자넷이 아닌, 카벨레누스를 훨씬 많이 닮아 있었다. 슈바르한에 처음 왔을 당시의 어린 소년을.
'아가씨께서는 전하와 같은 길을 가지 않으셔야 할 텐데.'
모르코 부인은 어린 시절의 카벨레누스를 떠올리며 슬쩍 눈을 찡그렸다. 알리시아를 향한 눈동자는 침전물이 켜켜이 쌓인 양 어두웠다. * * *
"그래서, 제 제안은 생각해보셨나요?"
벨로아가 우아하게 턱 끝을 추켜세웠다.
"저희 약혼 말입니까?"
카벨레누스는 일말의 표정 변화 없이 벨로아를 응시했다.
"물론, 결혼까지 고려한 약혼이죠."
자신만만한 공주는 모두가 두려워하는 슈바르한의 늑대를 면전에 두고도 기가 죽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제가 우위를 점령했다는 듯, 의기양양한 시선은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왕녀께서는 제가 마음에 드셨나보군요."
"솔직한 대답을 원하시나요? 아니면, 적당히 그럴싸한 대답을 원하시나요?"
"솔직한 쪽으로 하죠."
그래야 얼른 지긋지긋한 눈치 싸움이 끝날 테니까. 카벨레누스는 무심한 표정 뒤에 속내를 감춘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온 신경은 이미 알리시아에게 향해 있었다.
"말도 안 되게 추운 설원은 정말 최악이에요. 유행도 확실히 떨어지고, 파티 문화도 미흡하죠. 솔직히 썩 마음에 드는 곳은 아니에요. 괜히 죽음의 땅이라는 소리가 나오는 건 아니구나 싶을 정도였죠."
벨로아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살짝 찡그려진 미간은 슈바르한에 대한 혐오를 감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럼에도 저와 혼인하시겠다는 겁니까."
"네."
벨로아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대단한 이유는 없어요. 그저 전하께서 차기 황제가 될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죠."
파란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벨로아의 두 눈에는 탐욕이 그득했지만, 유리구슬처럼 어여쁜 눈동자는 그마저도 잘 어울렸다.
"재밌군요."
"제 이야기가 마음에 드시나봐요?"
"솔직한 사람을 싫어하진 않는 터라."
카벨레누스가 덤덤히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저희의 이야기가 쉬워지겠군요."
벨로아의 미소가 진해졌다.
"왕녀께서 제게 뭘 약속해주실 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요."
"제 가치를 확인하시겠다는 건가요?"
"왕녀께서도 확인하셨으니, 저 역시도 그래야죠."
"전하께서도 은근히 재미있는 구석이 있으시군요."
벨로아는 키득거리며 눈매를 유려하게 휘었다.
"그래서 싫으십니까?"
"아뇨. 만족스러워요. 제 앞에서 전하처럼 당당하게 말하는 사내들은 없던 터라, 제법 신선하기도 하고요."
벨로아가 보란 듯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미소 지었다. 카벨레누스의 눈매가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뻔한 유혹이었지만, 벨로아는 그 사실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 새하얀 목을 드러내며 웃음을 흘리는 모습에선 여유가 느껴졌다.
"그 말씀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전 생각 이상으로 전하가 마음에 들었으니, 당연히 긍정의 뜻이겠죠?"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카벨레누스의 고개가 짧게 까닥거려졌다. 벨로아와의 약혼 정도는 이미 고려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이익에 맞게 움직이는 만큼 귀족들의 약혼은 결혼 전까지 유동적으로 흘러갔고, 그만큼 상황에 따라 약혼을 파기하는 것도 그리 낯선 일만은 아니었다. 게다가 벨로아는 타국의 공주였다. 약혼이라는 이름으로 묶인다 해도 실질적으로 그녀를 볼 날은 드물었다. 벨로아를 가림막 삼아 적당히 알리시아의 존재를 가리고 있다가 적당한 시기에 약혼을 파기하면 그만이었다.
"전하께서도 저와 같은 마음이라니 다행이네요."
"그 전에 왕녀께서 가치를 증명해주셔야겠지만요."
카벨레누스가 느긋하게 턱을 쓸었다.
"그건 제 존재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요?"
"……."
"어떤 일이든 최고의 칭호를 가지란 쉽지 않죠. 그리고 그 칭호는 자연스럽게 권력이 되는 법이고요. 절 옆에 두는 것만으로도 전하께서는 이득일 거예요."
"아름다운 미인을 옆에 둔다는 건 부러움을 살만한 일이지만, 딱 그뿐입니다."
"뭐라고요?"
"세상에는 예쁜 얼굴만으로도 되지 않는 일이 있는 법이죠. 아름다움이라는 건 생각보다 허망해 쉽게 시들어버리거든요."
슬슬 이를 보여줄 때도 되었지. 카벨레누스는 감춰두었던 살기를 살짝 흘렸다.
"전하께서는 꽤나 무례하시네요."
"왕녀께서 보여주신 태도도 무척 무례했습니다만."
"제게 이러시면 전하께서는 원하는 걸 얻지 못하실 거예요."
"그렇게 된다면, 왕녀께서도 원하는 걸 얻게 되지 못하시겠죠."
카벨레누스가 나른하게 웃었다. 거만한 태도로 일관하던 벨로아의 낯은 어느덧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오랫동안 전장을 구른 짐승의 살기는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공주님이 감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잘 생각하세요, 전하. 제게 자꾸 이러시는 건 전하께도 좋지 않아요."
"좋을 일도 없지만, 나쁜 일도 없습니다."
"뭐라고요?"
"왕녀께서가 아니더라도, 더 나은 조건을 들고 올 이들은 많거든요."
카벨레누스는 살기를 도로 감추며 무심히 벨로아를 바라봤다. 고작 이 정도도 감내하지 못하면서 빽빽 목소리만 내는 꼴은 같잖아 보일 뿐이었다.
"그 말씀은 저 말고 다른 여자라도 상관없다는 건가요?"
벨로아는 눈을 치켜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고고한 자존심이 건드려진 모양이었지만, 카벨레누스로서는 나쁜 결과가 아니었다. 결핍이 없다는 건, 그만큼 포기하는 법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아예 완벽하게 손에 쥐여주는 것보단 손에 쥐어질 듯, 말 듯 아슬한 간격을 유지해 흥미를 끄는 편이 나았다.
"이건 귀족의 결혼입니다."
"……."
"그리고, 두 나라 간의 결혼이기도 하죠."
"……."
"서로 간에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굳이 손해를 감내하면서까지 추진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뿐입니다."
카벨레누스는 그 말을 끝으로 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벨로아의 얼굴색은 몇 번이고 달라지기를 반복했다. 길어지는 침묵 속, 카벨레누스는 지금쯤 의사를 만나고 있을 알리시아를 떠올렸다. 슈바르한에서 유명하다는 의사들은 전부 불러왔건만, 아직도 알리시아의 병명을 제대로 진단내리는 이는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뭐 하나 제대로 먹지 못하고 삐쩍 말라가는 모습을 보는 게 전부였다. 그 사실에 더욱 초조해졌고 그만큼 카벨레누스는 지금 벌이고 있는 촌극이 성가셨다.
"그러면, 전하께서는 제게 무엇을 원하시는 거죠?"
"그건 왕녀께서 고심하셔야겠죠. 많고 많은 이들 중, 하필 크리스티 왕국의 공주를 선택한 건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요."
"……크리스티 왕국의 공주라고요?"
아예 멍청하진 않나보군. 카벨레누스는 눈치껏 제 말의 뜻을 깨닫고 얼굴을 찡그리는 벨로아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알아보니, 2왕녀께서도 미혼이시더군요."
"2왕녀가 저처럼 아름다울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어여쁜 얼굴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
카벨레누스는 치욕을 참아내듯 이를 앙 물고 파르르 몸을 떠는 어린 공주를 무심하게 바라봤다. 그 모습만 보더라도 벨로아가 보호만 받고 자란 공주님이라는 걸 쉽사리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제르페누스는 그녀를 선택했던 걸까. 카벨레누스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형제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지우며 팔짱을 풀었다. 제르페누스의 속내가 어쨌든 간에 지금은 원하는 걸 얻어낼 시간이었다.
"저는 왕녀를 만족시켜드렸고, 이제는 왕녀의 차례겠죠."
카벨레누스는 눈이 가늘어졌다. 벨로아의 무례를 지금까지 봐준 건, 결국 마법 때문이었다. 지금, 슈바르한의 마법 수준은 미래를 바라보기엔 한없이 부족했으니까. 매일 같이 혹한이 계속되는 잔혹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마법의 힘을 빌리지 않곤 버틸 수 없었다.
"제게 뭘 원하시나요."
"그야, 왕녀께서 무엇을 보여주시냐에 따라 다르겠죠."
이익은 많이 얻으면 얻을수록 좋다. 그러니 굳이 이쪽에서 먼저 기준을 정할 필요는 없었다. 상대에게 기준을 정하게 하는 편이 나았다. 벨로아처럼 지는 걸 싫어하고 자존심이 세다면 건드려놓은 만큼, 자신의 과시할 만한 것을 물어올 테니 말이다.
"절 이렇게 대하셔서 좋을 건 없을 텐데요."
"왕녀께서 스스로의 가치를 알고 계신 만큼, 저 역시도 그럴 뿐입니다. 제 옆자리는 한정되어 있지만 노리는 이들은 많으니까요. 어차피 해야 하는 결혼이라면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쪽을 선택하는 게 당연하죠"
무려 제국의 안주인 자리가 아닙니까. 덧붙여진 말에 벨로아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미래의 황후 자리를 포기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자존심이 무너진 건 잠시일 뿐, 결국엔 한 수 접고 들어올 것이었다.
"……며칠 더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부왕과 상의할 시간이라면 얼마든지요. 애당초 어린 공주께서 감당할 만한 일은 아니니 말입니다."
"부왕과 상의할 리가요. 저는 항상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왔는 걸요."
벨로아의 목소리에는 어느덧 짜증이 섞였다. 그녀의 모습은 어리다는 소리에 아이가 발끈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아, 그러시군요."
담백한 대답에 벨로아의 눈매가 떨렸다. 조금만 건드려도 파르르 떠는 모습은 몇 번이나 보아도 그녀가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준이 아니라는 걸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계속 긴장을 늦추지 않으려고 했음에도 이쯤 되니, 제르페누스가 정말로 꿍꿍이가 있는 것인지가 의심될 정도였다. 하지만 카벨레누스의 생각은 그리 길지 않았다. 지금은 그것보다 그의 신경을 잡아먹는 일이 있었다. 카벨레누스는 슬쩍 시계를 확인한 다음, 속으로 한숨을 뱉었다. 슬슬 의사가 진찰을 끝냈을 시간이었다. 사람을 보내 알리시아의 상태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직접 찾아가보는 것도 좋을 테고.
'오늘도 밤을 새워야겠군.'
카벨레누스는 턱을 괸 채, 숨을 뱉었다. 태연한 척 굴고 있지만 실은 속이 답답해 견딜 수 없었다. 뭐 하나 할 수 없이 그저 기다려야만 하는 막막한 상황이 자꾸만 무기력한 기분을 들게 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