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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34)화 (34/164)
  • 34화. 좋아해요

    2020.06.29.

    "요즘은 새콤달콤한 게 맛있어서."

    알리시아가 어설프게 웃었다.

    "과일을 더 들이라고 해야겠군."

    "지금도 부족함 없이 먹고 있는 걸요."

    "과일 말고 뭘 더 좋아하지?"

    "음식이요?"

    "다른 것도 상관없어."

    카벨레누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누군가의 취향을 외울 필요가 없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알리시아의 취향은 알고 싶었다, 아니. 그보다는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으면 했다.

    "그게……."

    집요한 시선에 알리시아는 짧게 심호흡을 했다. 갑작스러운 질문이 당혹스러웠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좋아하면 그냥 좋아하는 거지, 좋아하는 것 같다니. 알리시아는 자신이 뱉은 애매모호한 표현에 살짝 미간을 찡그렸지만 카벨레누스는 딱히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리고?"

    "산책하는 거랑, 수업도 좋아하고……."

    "또?"

    "음……."

    알리시아는 좋아하는 것들을 세어보다가 잠시 말을 멈췄다. 생각해보니 사내를 모르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왜 그러지? 말하기 싫은가?"

    "아뇨."

    알리시아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전하는요?"

    알리시아가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카벨레누스를 바라봤다.

    "나?"

    "전하는 뭘 좋아하세요?"

    "그런 건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그런 게 궁금하나?"

    "전하께서는 제게 왜, 좋아하는 걸 물으신 거예요?"

    겁에 질렸던 여자는 이제 고개를 똑바로 들고 반문할 줄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이 퍽 마음에 들어 카벨레누스는 옅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그대에 대해 알고 싶으니까."

    "저도 그런 거예요."

    "……."

    물론, 그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지만. 카벨레누스는 손이 나갈 뻔한 걸 겨우 참아냈다. 여자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사내를 자극하는 법을 알았다. 그러면 이쪽도 똑같이 도발해줄 수밖에. 금색 눈동자에 얼핏 장난기가 감돌았다.

    "그대인 것 같은데."

    "……저, 저요?"

    "좋아하는 것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지만 최근 들어 가장 신경 쓰이는 걸 고르자면, 그대밖에 없거든."

    "……."

    "좋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 역시 그대일 거고."

    "……."

    제르페누스가 이 모습을 봤다면, 가장 먼저 욕부터 했을지도 모르겠다. 저보다 한참 작은 여자 눈치를 살피며, 말을 고르는 제 꼴이 스스로도 우스웠으니까. 하지만 그런 꼴을 감내해낼 정도로 카벨레누스는 어쩔 줄 몰라하는 알리시아의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가볍게 던진 말 하나에도 파문이 이는 얼굴을 보고 있자면, 그녀에게 자신이 어떤 의미인지 빤히 보였기에.

    "그대는?"

    "네, 네?"

    "그대가 좋아하는 것에 나도 포함되나?"

    "저는……."

    알리시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참아야지 하면서도 사내의 눈을 보면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솔직한 걸 좋아했다. 그가 싫어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날 좋아하지 않나보지?"

    "아뇨! 그, 그게……."

    "그러면, 나는 어느 쪽이지?"

    아니, 사실 그런 건 핑계였다. 좀 더 솔직하게 굴자면, 말하고 싶었다. 좋아한다는 말을 뱉었을 때, 저 오만한 사내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좋아해요."

    알리시아의 얼굴이 더는 달아오를 수 없을 정도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눈동자의 초점은 쉴 새 없이 불안하게 흔들렸고 잔뜩 긴장한 몸은 뻣뻣하기 그지없었다. 그럼에도 알리시아는 끝까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대신, 카벨레누스의 반응을 좇고, 그의 모든 것들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당황한 듯,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시선을 피하는 사내의 눈동자. 자세히 봐야 겨우 티 날 정도로 옅지만, 분명하게 붉게 물든 귓불. 꽉 다물린 잇새로 어색하게 뱉어진 낮고 뜨거운 숨. 그리고, 끝이 올라간 입술 끝까지. 전부. 알리시아의 손이 반사적으로 꼼지락거렸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저 모습 그대로, 영원히 기억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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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해요."

    "……."

    "정말로, 좋아해요."

    더는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을 꾹꾹 눌러담은 말은 뱉는 것조차 버거웠다. 하지만, 그래서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한 번 뱉은 말은 마치 신호탄 같아 그동안 열심히 쌓아올린 인내의 벽에 틈새를 만들어버렸다.

    "아직도 저는 꿈을 꾸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언제라도 이 꿈에서 깰까 두렵고 초조해요. 그럼에도 좀 더 욕심내고 싶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아요."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전하라서요. 그 말을 하며 여자는 웃었다. 그리고, 그걸 들은 사내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자신의 감정인데, 카벨레누스는 그것이 무엇인지 정의 내릴 수 없었다. 알리시아는 '좋다'라고 표현했지만, 사내의 날 선 본능은 그것으로 끝이 아님을 알았다. 다 죽어갈 것처럼 창백한 낯을 한 주제에 수줍게 웃는 여자는 사내에게 있어서 분명 좋은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한 감이 있었다. 좀 더 짙고 분명하게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말이 필요했다. 하지만 사내의 머리로는 도무지 그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여자는 하나인데, 그녀를 볼 때마다 무수히 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치밀어 그것을 어떤 말로 표현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카벨레누스가 할 수 있는 건 품 안의 알리시아를 단단하게 끌어안고, 몇 번이고 그 온기를 곱씹는 것뿐이었다. * * *

    "몸은 어떠신가요. 괜찮으신가요."

    "응. 괜찮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알리시아와 달리, 모르코 부인의 표정은 어두웠다. 알리시아가 못 먹는 음식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이제 그녀가 먹는 거라곤 과일 정도였는데, 그것도 다 먹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종류에 상관없이 잘 먹던 과일도 과하게 시큼한 것이 아니면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했다.

    "이거라도 드셔보겠어요?"

    "이게 뭐야?"

    "레몬의 즙을 짜서 탄산수와 섞은 거랍니다. 아가씨께서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한 번 드셔보세요. 물론 정 못 드시겠으면 남기셔도 되고요."

    모르코 부인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알리시아를 안심시키며 잔을 건넸다. 알리시아는 영 먹기 싫은 기색이 역력해보였음에도 모르코 부인의 정성을 거절하지 못하고 순순히 음료를 마셨다.

    "……어?"

    알리시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괜찮으세요?"

    "응. 맛있어."

    두 손으로 잔을 꼭 쥔 채, 배시시 웃는 알리시아에 모르코 부인도 따라 웃었다. 하지만 모르코 부인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지켜봐도 그녀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알리시아가 보이는 증상들은 분명 임신부나 보일 법한 것들이었다. 레몬수만 하더라도 아무런 당분도 첨가되지 않아 별다른 맛이 없지만, 임신부들이 즐겨 마시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껏 찾아온 어떤 의사도 알리시아가 임신이라고 확진하지 못했다. 다들 짜기라도 한 것인 양, 증상은 의심되나 태기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할 뿐이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지.'

    모르코 부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음식을 먹지 못하면서 알리시아는 나날이 마르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먹지 못하는 일이 반복된다면 결국엔 쓰러질지도 몰랐다.

    "혹시 드시고 싶은 음식, 있으세요?"

    "먹고 싶은 거?"

    "뭐든 드셔야죠. 이러다가 아가씨께서 쓰러지시겠어요."

    오늘도 의사가 영양 주사를 맞춰주고 갔지만 매번 그럴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알리시아가 못 먹는 날이 늘수록 카벨레누스의 심기도 불편해져 슈바르한 성내 사람들은 다들 그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빴다. 이러다가 알리시아가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무슨 사달이라도 날 게 틀림없었다.

    "전하께는 식사를 잘했다고 말씀드리면 안 되겠지?"

    "그러기엔 이미 소식이 전해졌을 거예요."

    모르코 부인이 탄식에 가까운 숨을 뱉었다. 손님을 맞이하는 바쁜 와중에도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의 식사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는 알리시아가 오늘 하루 뭘 먹었는지 일일이 확인하는 건 물론, 그녀가 조금이라도 잘 먹은 게 있다 싶으면 과할 정도로 음식을 보냈다. 오늘 오후나, 내일이면 이제 별궁 내에 레몬과 탄산수가 그득해질 것이었다.

    "……미안해. 나 때문에 다들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

    "아가씨가 안 드시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잖아요."

    "하지만, 너무 폐를 끼는 것 같아서 미안한 걸."

    "괜찮아요. 그러니, 아가씨께서는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편히 가지세요."

    임신이 아니라면, 아마도 심리적인 것일 확률이 컸다. 모르코 부인은 보다 다정한 목소리를 내며 알리시아의 손을 감싸듯 쥐었다. 잡은 손은 예전보다 마른 티가 나서 안쓰러웠다.

    "혹시라도 드시고 싶으신 게 있다면 뭐든 말씀해주신다면 더 좋고요."

    알리시아는 원체 입맛이 까다롭지 않고 두루 잘 먹는 편이었지만, 지금은 그 점이 변수가 되어버렸다. 뚜렷하게 좋아하는 게 없어 지금 같은 상황에서 더욱 식성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사실은……."

    한참 망설이던 알리시아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모르코 부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재빨리 입을 뗐다.

    "드시고 싶으신 게 있으신가요?"

    "있긴 하지만, 못 구할 거야."

    "아가씨께서 드시고 싶으신 거라면 제가 혹한을 넘어서라도 구해올 테니 말씀만 해주세요."

    알리시아가 마를수록 초조한 건 카벨레누스만이 아니었다. 모르코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먹지도 못할 과일이 가득 차도 카벨레누스에게 뭐라 하지 않은 건, 알리시아에게 한 입이라도 더 먹이고픈 마음이 컸던 탓이었다.

    "……수프가 먹고 싶어."

    "네?"

    "예전에 어머니께서 끓여주셨던 수프가 먹고 싶은데……."

    알리시아는 더 말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죽은 모친이 살아 돌아오지 않는 이상, 무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불현듯 어머니의 수프가 떠오를 때가 있었고 최근 들어선 더 그랬다. 못 먹는다고 생각하니 괜히 눈물이 치밀 정도였다.

    "제가 어떻게든 해볼테니 울지 마세요, 아가씨."

    "미안해, 정말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나는 그냥……."

    알리시아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어느새 흐른 눈물이 치맛자락을 적시고 있었다. 요즘 들어 스스로가 이상해졌다고 생각하면서도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싫다. 정말 싫어.'

    알리시아는 물 위로 비친 제 모습을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처음에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몸이 달라질 때마다 부쩍 겁이 났다.

    "내일 의사가 한 번 더 올 거예요."

    "그럼, 내일 그림 수업은?"

    "지금은 아가씨의 건강이 우선이니까요. 아쉬워도 이해해주세요."

    "응."

    이럴수록 더욱 그림 생각이 났지만 할 수 없었다. 알리시아는 아직 다 그리지 못한 카벨레누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손끝을 꼼지락거렸다.

    "그리고, 아가씨의 어머님께서 끓여주신 수프 말이에요. 어떤 것이었는지 아가씨께서 알고 계신 걸 제게 알려주실 수 있나요?"

    "그건 왜?"

    "제가 한 번 만들어보려고요."

    "그건 무리일 거야. 어머니는 한참 전에 돌아가셨는 걸."

    알리시아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안 되더라도 시도라도 해볼 순 있잖아요."

    "하지만……."

    알리시아는 습관처럼 안 된다고 말하려다가 자신감 넘치는 시선에 멈칫했다. 포기하는 것보다 시도하는 편이 낫다는 건, 모르코 부인이 누누이 말해오던 가르침이었다.

    "시도도 하지 않고 포기하는 건 아쉬운 일이죠."

    "……나도 아는 건 많이 없는데, 괜찮을까?"

    "괜찮아요. 조금이라도 알려주신다면, 재연해보는 데에 꽤 도움이 될 거예요."

    "그럼, 뭐든 최대한 생각해서 말해볼게."

    알리시아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도전해보고 싶었다. 다른 건 몰라도 모친의 더럽게 맛없던 수프만큼은 먹을 수 있다면 몇 그릇이든 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늦어도 좋으니 천천히 생각하고 말씀해주세요."

    "수프를 먹었던 건, 꽤 오래 전이라서 떠오르는 건 거의 없지만 몇 가지는 기억나."

    "기억나는 걸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어머니께서 날 가지셨을 때 그 수프를 자주 드셨다고 하셨어."

    알리시아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머니 생각을 하니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가씨를 가지셨을 때요?"

    "외할머니께서도 어머니를 가지셨을 때, 그걸 드셨고."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 같은 건가봐요."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어. 어머니는 가문이라고 말할 만한 집안사람이 아니셨거든."

    "……."

    "물,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가 이상한 사람이었던 건 아냐!"

    알리시아의 어깨가 반사적으로 움츠려 들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다들 어머니가 천한 여자라고 손가락질했다. 아무리 꾸며놓아도 더러운 야만족의 핏줄은 어쩔 수 없는 법이라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알리시아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천하지도, 더럽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강인한 사람이었다. 냉대와 핍박 속에서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자신의 신념을 지켜갔다.

    "……어머니는 그저, 날 지키고자 했을 뿐이었어. 정말로 그것뿐이야."

    모두가 어머니를 욕할지언정, 힘이 두려워 차마 손을 대지 못했다. 모친의 힘은 그녀를 권력의 도구로 전락시킨 동시에 그녈 지키는 방패였다. 그리고, 그 방패를 빼앗았던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딸인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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