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33)화 (33/164)

33화. 이상한

2020.06.25.

"어떻게 오신 거예요?"

카벨레누스를 발견한 알리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깐 들린 것뿐이야. 다시 가봐야 해."

"바쁘시면 굳이 오지 않으셔도 되는데……."

알리시아는 말을 하다가 멈추고 이맛살을 구겼다. 바쁜 카벨레누스가 이 시간에 온 이유는 뻔했다.

"……혹시, 소식 들으신 거예요?"

"……그래."

카벨레누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리시아는 그런 사내를 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돌이켜보면, 제 아이였던 것만은 아니었다. 모르코 부인이 말했던 것처럼 두 사람의 아이였다. 카벨레누스도 아이에게 감정을 품을 수 있었고, 그가 느낀 감정은 알리시아가 느낀 것과 충분히 다를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애초부터 있지도 않은 아이였는데도 어쩐지 카벨레누스에게 몹쓸 짓을 한 기분이었다.

"괜찮은 건가?"

카벨레누스가 조심스럽게 알리시아의 뺨을 감쌌다. 선명하게 걱정이 묻어난 시선을 보자, 알리시아는 차마 자신은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고 말할 자신이 없어졌다.

"죄송해요."

"그대가 죄송할 일은 아니지."

카벨레누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를 보니 괜히 입안이 썼다. 그는 부관의 조언을 잊지 않고 있었다.

"아이는 천천히 가지면 돼. 급할 건 없어."

"위로해주지 않으셔도 돼요."

"위로로 느껴졌으면 그나마 다행이군. 이런 건 서툴러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거든."

카벨레누스가 짤막하게 웃었다. 알리시아는 어설프게 따라웃으며 커다란 손에 뺨을 댔다.

"위로 받을 만한 일도 아닌걸요. 잠깐 착오가 있었던 것뿐이잖아요."

"그대 탓이 아니야. 그대 말대로 착오가 있었던 것뿐이지."

"하지만 실망하셨을 거잖아요."

힘없이 중얼거리는 알리시아에 카벨레누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기대하지 않았기에 실망할 일도 없었지만, 그걸 알리시아에게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실망하지 않았어."

"정말이세요?"

"오히려 곤란한 참이었어. 시기가 좋지 않으니까."

"……."

"물론, 그대와의 아이가 싫다는 건 아니고."

카벨레누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언제부터 그렇게 혀를 잘 놀렸던 건지, 잘도 거짓을 지껄이는 스스로가 멍청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비로소 알리시아에게 닿아가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는 이상,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관계를 망가트리고 싶지 않았다. 알리시아가 원하는 모습을 흉내내고, 그녀에게 맞춰서라도 계속해서 지금의 관계를 지키고 싶었다.

"……그냥, 그대가 슬퍼하지 않았으면 했을 뿐이야."

그럼에도 그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카벨레누스는 쓰게 웃었다.

"슬프지 않아요."

"내 앞에서까지 강한 척할 필욘 없어."

"제가 슬플 거라고 생각하세요?"

"보통은 그러니까."

가제프가 했던 말을 따라하며 카벨레누스는 슬쩍 알리시아의 시선을 피했다. 적당히 지껄이고 있지만 정작 그는 보통의 기준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렇네요."

알리시아는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카벨레누스의 손이 멀어지자, 자연스럽게 온기도 사라졌다.

"당분간은 그냥 푹 쉬도록 해. 마음을 추스르는 게 먼저야."

"네, 그럴게요."

"식사는 아직이지? 그대가 좋아할 법한 것들을 챙겨와봤는데, 마음에 들진 모르겠군."

카벨레누스가 슬쩍 알리시아의 손을 잡았다.

"제가 좋아할 법 한 거요?"

알리시아는 손을 빼지 않은 채, 그를 바라봤다.

"이런 상황에서 공부하는 것도 우습고, 그렇다고 함께 산책하기엔 날씨가 좋지 않아서."

하나 더 떠올린 생각이 있었지만, 카벨레누스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알리시아를 다른 사내와 붙여놓는 건 수업 시간으로도 차고 넘쳤다. 굳이 제임스를 데려오거나,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그를 상기시킬 이유는 없었다.

"그대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어서 이것저것 생각해봤는데, 내 조악한 생각으로는 뭘 해줘야 할지 모르겠더군."

"……."

"그래서 그대가 잘 먹었던 음식이나 좀 챙겨주려고."

카벨레누스는 그 말을 하는 내내, 알리시아의 표정 변화를 꼼꼼히 살폈다. 고작 음식이나 챙겨와서 생색을 내는 스스로가 참 같잖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으니까.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저는 전하께서 신경 써주신 것만으로도 좋은 걸요."

"……."

"그래도 기껏 준비해주셨으니까 기쁘게 먹을게요."

"……그래."

역시, 음식만으로는 부족하겠지. 카벨레누스는 애써 웃어 보이는 알리시아를 보며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가제프를 닦달해서 정보를 얻어내고자 했지만 소용없었다. 알리시아는 대부분의 일에 무던한 편이라서, 뭐 하나 분명하게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손꼽혔다. 계속 옆에서 그녀를 보필해온 모르코 부인의 도움을 받아 그녀가 잘 먹었던 음식 정보나 얻어내는 게 전부였다.

"대신, 전하께서도 같이 식사해주세요."

"나도?"

"바쁘셔도 식사는 하셔야 하잖아요. 괜찮으시다면, 같이 드시고 가세요."

알리시아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카벨레누스와 손깍지를 꼈다. 손가락 사이 여린 살이 쓸리는 감각에 반사적으로 목덜미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지만 손을 놓진 않았다. 이런다고 위로가 될 수 있을진 몰라도 조금이라도 카벨레누스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위로해주고픈 사내가 정작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는 까맣게 모른 채. * * *

'배가 불러서 그런가?'

알리시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 점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슈바르한은 육류를 즐겨 먹는 편이라 식탁에는 자주 고기 요리가 올랐다. 오늘 메인 요리로 나온 으깬 감자를 곁들인 티본 스테이크도 접하기 어려운 메뉴는 아니었다. 처음 슈바르한에 왔을 때만 해도 알리시아는 그 맛에 감탄한 바가 있었다. 슈바르한의 요리는 처음에는 다소 밋밋하고 투박하게 느껴졌지만, 그만큼 재료 본연의 맛이 살아 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육즙이 가득한 스테이크가 맛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고기 특유의 잡내에 속이 부대낄 뿐이었다. 카벨레누스의 앞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씹고 있던 요리를 뱉었을지도 몰랐다. 알리시아는 물과 함께 입안의 고기를 겨우 목구멍으로 삼켜 넘긴 후, 흘끔 카벨레누스의 눈치를 살폈다. 최근 들어 속이 이상하다는 건 알았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라 적당히 넘겨왔는데, 이번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왜 그러지? 뭐가 이상한가?"

"아뇨. 너무 맛있어서요."

"많이 먹도록 해. 음식은 충분하니까."

"네. 잘 먹을게요."

카벨레누스의 재촉에 알리시아는 썰어놓은 스테이크 조각을 한 점 더 입에 넣었다. 그리고, 곧장 후회했다. 고기의 맛을 인지한 순간, 알리시아의 얼굴이 표정을 갈무리할 새도 없이 반사적으로 일그러졌다.

"왜 그러지? 별론가?"

방금 전까지 그렇게 심했던 것 같지 않았는데. 알리시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잔뜩 찡그린 얼굴로 입만 가리고 있었다. 뱉고 싶었는데 카벨레누스가 있어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못 먹겠으면 뱉어."

망설임없이 일어난 카벨레누스가 알리시아의 입에 냅킨을 댔다.

"아, 아뇨, 저는-"

"뱉어."

카벨레누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알리시아는 거절하려다가 고집스런 손길에 결국 항복했다. 아니, 웬만하면 그대로 삼킬 생각이었는데 도저히 삼킬 엄두가 안 났다.

"괜찮나?"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가 입안의 음식을 뱉고 나서야 손을 뗐다.

"네, 네."

알리시아는 냅킨을 대충 뭉쳐서 치우는 카벨레누스를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좋은 모습만 보여줘도 모자란데,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야 말았다.

"괜찮으신가요, 아가씨?"

모르코 부인이 눈치껏 알리시아의 손에 물잔을 쥐여줬다. 알리시아는 잔을 쥔 채로 연신 고개만 끄덕였다.

"음식에 문제가 있진 않은데."

접시에 남아 있는 스테이크를 집어먹은 카벨레누스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스테이크의 맛은 평소에 먹던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게, 제가 속이 좀 안 좋아서."

카벨레누스의 말에 알리시아는 도로 고개를 들었다. 물로 입안을 헹구니 그나마 나았지만, 한 번 역겨움을 느낀 탓인지 울렁거리는 속은 여전했다. 지독한 냄새가 자꾸만 후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저것들 당장 치워."

알리시아의 시선을 알아차린 카벨레누스가 거칠게 접시를 밀어냈다. 다음 음식을 내올 준비를 하고 있던 하인들은 당황해하면서도 서둘러 음식을 치웠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모르코 부인은 멀어진 음식에 미묘하게 달라진 알리시아의 표정을 확인하고 바로 창문을 열었다. 갑자기 들어닥친 찬바람에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지만, 오히려 표정은 나아졌다. 모르코 부인은 알리시아 못지 않게 얼굴을 찡그렸다. 음식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알리시아가 음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었다. 마치 임산부라면 으레 하는 입덧처럼.

"지금 당장 창문을 열고, 환기부터 해."

알리시아의 변화를 알아차린 건 모르코 부인만이 아니었다. 다시 내려진 카벨레누스의 명령에 금세 창문이 활짝 열렸다. 눈 섞인 바람이 거칠게 성 안으로 들이닥쳤다.

"덮을 것도 필요하겠군요."

모르코 부인의 말에 카벨레누스는 대답 대신, 제 외투를 벗어 알리시아에게 걸치게 했다. 그렇게 한참을 있고서야 알리시아는 겨우 가신 구역감을 억누르며 카벨레누스를 바라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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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나."

"네, 네. 괜찮아요."

"언제부터 이랬던 거지."

"의사는 별 문제는 없다고 했어요. 오늘 아침만 해도 이렇게까지 심하지도 않았고요."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알리시아는 서둘러 대답했다. 이런 일로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런 얼굴을 하고선 문제가 없다고?"

카벨레누스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알리시아는 다급히 카벨레누스의 옷자락을 잡았다.

"증상이 독특하긴 하지만, 몸 상태가 나쁜 건 아니랬어요."

이렇게까지 심한 증상을 보인 적은 처음이었지만, 울렁거리는 증상 자체가 낯선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속이 좋지 않은 정도로 시작했던 울렁임은 하루가 다르게 그 증상이 심해지고 있었다. 음식에 예민하지도, 편식을 하는 편도 아니었음에도 어느 순간부터 손이 가지 않는 음식들이 하나둘 늘 정도였다.

"증상? 무슨 증상?"

"그게……."

임신 이야기는 이제 꺼내고 싶지 않은데. 알리시아는 말끝을 흐리며 카벨레누스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집요한 사내는 포기를 몰랐다.

"모르코 부인."

"네, 전하."

"대신, 설명해."

카벨레누스가 이를 꽉 다문 채 명령했다. 번들거리는 눈동자는 애써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

"아가씨의 말씀대로입니다. 의사에게 몇 번이나 반복해서 진료하게 했지만 소견은 한결 같았습니다. 아가씨의 몸엔 별다른 문제는 없다고 했습니다."

"의사가 되어서 병명도 모른다는 건가?"

카벨레누스가 어이없다는 투로 혀를 찼다. 그의 목소리에는 짙은 짜증이 섞여 있었다.

"임신 초기에 보이는 증상과 유사하긴 하다는 소견만 있었을 뿐입니다."

"임신은 아니라고 했을 텐데."

"네. 의사도 그 점이 의아하다고 하더군요."

덤덤하게 대꾸했지만 사실 의아한 건 모르코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알리시아가 보이고 있는 증상들은 한결 같이 임신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의사의 진단이 오진이었을 확률은?"

"완벽하게 없다고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의사의 개인적인 진단뿐만 아니라, 임신을 확인하는 마도구까지 별다른 반응 보이지 않습니다. 오진 확률은 지극히 낮을 겁니다."

"다른 의사를 불러."

동공이 기다란 눈동자가 위협적으로 번뜩였다. 모르코 부인은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슈바르한에서 가장 뛰어난 의사입니다."

"내가 두 번 이상 말하게 둘 건가."

카벨레누스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모르코 부인은 더는 의견을 내지 않고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저희 가문의 의사를 부르겠습니다."

"그 역시, 병명을 확인하지 못하면 다른 의사를 불러."

"네, 알겠습니다."

모르코 부인은 이번에도 순순히 대답했다. 알리시아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은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전 괜찮아요."

알리시아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희미하게 웃었다. 카벨레누스의 손등이 부드럽게 알리시아의 뺨을 쓸었다.

"내가 괜찮지 않아."

카벨레누스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알리시아는 원체 하얀 탓에 조금만 핏기가 사라져도 창백해 보였다. 결국, 카벨레누스는 창백한 낯을 보다 못하고 알리시아를 품에 안았다.

"곧 괜찮아질 거예요."

"당연히 괜찮아져야지. 기껏 살찌워놨는데, 아무것도 못 먹고 비쩍 마른 꼴이 되면 곤란해."

카벨레누스는 조심스레 알리시아의 머리카락을 넘겼다.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사내의 손길은 이제 제법 능숙한 티가 났다.

"못 먹는다고 하기엔 너무 많이 먹었는걸요."

"그대가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제가 오늘 앉은 자리에서 오렌지를 몇 개나 먹어버렸는지 전하께선 까맣게 모르실걸요."

알리시아가 멋쩍게 웃었다. 카벨레누스를 안심시키기 위해 꺼낸 말이었으나 거짓은 아니었다. 그녀는 원체 양도 적고, 입도 짧은 편이라 음식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는데, 어쩐 일인지 오늘 먹은 오렌지는 정말 맛있어서 자꾸만 손이 갔다. 그녀를 위해 오렌지를 까주던 하녀들의 손이 연신 바쁠 지경이었다.

"과일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데."

카벨레누스가 빤히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돌이켜봐도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은 불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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