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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30)화 (30/164)
  • 30화. 좋아

    2020.06.15.

    알리시아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풍성한 속눈썹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연신 팔랑거릴 때마다 잿빛 눈동자가 모습을 보였다가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푹 잔 것 같은 것 같은데, 여전히 몸이 무거웠다.

    '역시, 꿈이었나봐.'

    알리시아는 침대에 누운 채, 텅 빈 옆자리에 손을 뻗었다. 이불 시트에는 구김이 있었지만 온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어제의 꿈은 너무도 생생해서 혹시 밤새 카벨레누스가 다녀간 게 아닐까 생각하게 했으니까. 알리시아는 한참 빈 자리를 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몸도 몸이지만, 어제 울다가 잠든 탓인지 눈이 뻐근했다.

    '꿈을 꾸니까, 더 보고 싶어졌어.'

    알리시아는 손바닥으로 부은 눈을 꾹꾹 눌렀다. 기분 좋은 꿈이었는데, 그래서 더 허무해졌다. 꿈과 현실의 괴리가 뚜렷할수록 카벨레누스의 빈 자리가 크게 느껴졌기에.

    "아직도 더 잘 셈인가."

    등 뒤에서 들린 익숙한 목소리에 알리시아의 두 눈이 커졌다. 알리시아는 느리게 눈을 껌벅거리다가 이내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착각이 아니었다. 카벨레누스였다.

    "왜, 전하께서……."

    "오래간만에 같이 식사를 하고 싶어서."

    "……."

    "싫은가."

    카벨레누스가 고개를 까닥거렸다.

    "아, 아뇨. 그럴 리가요!"

    알리시아가 황급히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얼마나 당황했던지, 손을 흔들다가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조심해야지."

    "네, 네."

    알리시아가 얼굴을 붉힌 채, 입술을 꽉 깨물었다. 침대 위라서 다치진 않았지만 절 보는 사내의 시선에 괜히 부끄러워졌다.

    "오셨으면 티라도 내시지……."

    "그러기엔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

    제가 자는 모습을 계속 보고 있었다는 걸까. 후끈거리는 뺨을 두 손으로 꾹꾹 누르던 알리시아의 시선이 카벨레누스가 입고 있는 옷에 닿았다. 그는 평소 입는 제복이 아닌, 가벼운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순간, 알리시아의 매끄러운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혹시, 새벽에 오신 거예요?"

    "일이 늦게 끝나서. 일찍 온다고 왔음에도 그 시간이더군."

    "그, 그럼……."

    "푹 자는 것 같아서 일부러 깨우진 않았어."

    제가 꾼 꿈이 정말로 꿈이었을까. 알리시아의 시선이 불안해졌다. 흔들리는 눈동자는 이미 사내를 곁눈질하기 바빴다. 하지만 표정 변화가 없는 사내의 얼굴에선 의중을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왜. 할 말이라도 있나."

    "어제, 제가 실수한 건 없는 거죠?"

    알리시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꿈을 핑계로 온갖 말들을 쏟아냈던 기억이 선명했다.

    "실수라 할 건 딱히 없는데."

    "그, 그런가요……."

    긴장으로 굳었던 입매가 살짝 허물어졌다. 카벨레누스는 생각이 빤히 보이는 낯을 보며 턱을 괬다. 손가락으로 슬쩍 가린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다만, 우리 사이의 거래에 대해선 좀 더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어 보이지만."

    "네?"

    기껏 풀어졌던 입매에 도로 힘이 들어갔다. 카벨레누스는 빠르게 뒤바뀌는 표정을 구경하며 모른 척 입술을 뗐다.

    "참고로 나는 꽤 값이 나가는 사내거든. 제대로 값을 치러주지 않으면 곤란해."

    알리시아의 속눈썹이 눈에 띄게 떨렸다. 그녀는 가려진 손 너머로 카벨레누스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는 걸 몰랐다.

    "그, 그게 무슨……."

    "나를 갖고 싶다면서."

    카벨레누스의 눈이 짓궂게 휘어졌다. 스스로가 유치한 인간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저런 얼굴을 보고 있자면 놀리고 싶어진다.

    "그대가 그런 걸 바랄 줄은 몰랐는데."

    "……놀리지 마세요."

    알리시아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카벨레누스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배부른 짐승처럼 느긋한 걸음이었다.

    "얼마나 줄 거지?"

    "……뭘 줘야 살 수 있는데요?"

    물론 그 여유는 절 올려다보는 말간 시선에 무너지고야 말았지만. 카벨레누스는 걸음을 멈춘 채 알리시아를 내려봤다. 여자는 항상 사내의 예상에서 어긋났다. 카벨레누스는 짧게 숨을 뱉었다. 저 눈에서 생기만 맴돌아도 만족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욕망 어린 여자의 눈동자는 사내가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그 눈."

    카벨레누스가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그 눈으로 계속 나를 봤으면 좋겠는데."

    "고작 그거요?"

    "지금 재잘거리는 입술이 들려주는 이야기도 듣고 싶고."

    한 걸음.

    "……그리고요?"

    "작은 몸을 안고도 싶고."

    또 한 걸음.

    "말랑거리는 살결에 입을 맞추고도 싶은데."

    그리고, 다시 한 걸음. 얼마 남지 않은 거리에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언제부터였을까. 배부른 짐승은 어느덧, 굶주린 짐승의 눈을 하고 있었다.

    "저는 전하께 드릴 수 있는 게 없어요."

    "알고 있어."

    "그럼에도 절 전하의 옆에 두실 건가요.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하실 텐데요."

    "그런 걸 따지기에는 너무 늦어버려서."

    걸음이 멈췄다. 알리시아는 기나긴 숨을 뱉었다.

    "후회하실지도 몰라요."

    "그래서 지금도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하고 있는 거지."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카벨레누스의 손이 알리시아의 얼굴을 감쌌다. 알리시아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번졌다. 카벨레누스가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얼, 얼른 일어나세요!"

    "이러니 얼추 시선이 맞는군."

    당황한 알리시아와 달리, 카벨레누스는 태연히 알리시아와 시선을 맞췄다. 알리시아는 애꿎은 입술만 뻐금거리며 울상을 지었다.

    "왜 그런 표정이지?"

    "전하께선 이러시면 안 되는 분이잖아요."

    "맞아. 나는 이러면 안 되는 사람이지. 그대만 제외하곤."

    "……."

    "그대가 내게 있어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어줄 테니까."

    알리시아는 초조하게 입술만 달싹거리다가 이내 주먹을 쥐었다. 내달린 것처럼 심장이 빠르게 쿵쿵 뛰었지만 사내의 시선을 모른 척하고 싶지 않았다. 욕심이 났고, 욕심내고 싶었다.

    "……지금의 저는 가진 게 없어서 값을 치를 수 없어요. 하지만 미래의 저는 아니죠."

    알리시아가 달달 떨리는 손으로 카벨레누스의 얼굴을 만졌다. 금방이라도 목덜미를 물어버릴 듯, 짐승의 눈을 하고 있으면서도 사내는 얌전히 알리시아의 손길을 받을 뿐이었다.

    "전하의 옆에 있을게요. 계속 옆에 있으면서 지금은 치를 수 없는 값을 치러나갈게요."

    "나를 사기 위해 미래를 걸겠다?"

    "전하에게 어울리는 대공비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요."

    한껏 몸을 움츠린 주제에 할 말은 다 한다. 카벨레누스는 불안과 자신감이 뒤섞인 모순적인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내게 어울리는 대공비가 되려면 많이 노력해야할 텐데."

    "할 수 있어요."

    "자신만만한 걸?"

    "전하께서도 그러시잖아요."

    알리시아의 손끝이 꼼지락거렸다. 사내의 뺨은 단단한 근육질 몸과 다르게 부드러워 닿아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이상했다.

    "그건 무슨 뜻이지."

    "전하께선 항상 자신만만하고 강하시니, 전하의 옆에 서는 사람도 그래야 어울리지 않겠어요?"

    알리시아의 두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이제야 제가 뭘 하고 싶은지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카벨레누스의 옆에 서도 초라하지 않은 사람. 그의 보호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꼭 강하지 않아도 되는데."

    "강해질 거예요."

    알리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고개짓은 여전히 가냘팠지만 단호한 결의가 분명하게 묻어났다. 꽉 쥔 손 안의 온기가 너무도 따뜻해 놓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알리시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렸다.

    "제 미래를 드릴게요. 대신, 제게 전하를 주세요."

    알리시아의 입술이 카벨레누스의 이마에 닿았다. 그 행동만으로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지만 손을 놓을 생각은 없었다.

    "욕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그래서 싫으세요?"

    "아니."

    좋아. 훅 다가온 입술에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커다란 손이 성급하게 알리시아의 머리카락을 파고 들었다. 알리시아는 기꺼이 숨을 삼키며 두 팔로 단단한 목을 안았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서로의 뜨거운 숨이 흘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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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음식이 입에 맞지 않나보군."

    머뭇거리는 알리시아의 포크에 카벨레누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알리시아는 멋쩍게 웃으며 애꿎은 양상추를 포크를 찍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요즘 들어 속이 좋지 않아서요."

    "의사를 불러야겠군."

    카벨레누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알리시아의 배를 향했다. 가능성을 보고받긴 했지만, 납작한 배만 봐서는 그녀의 배 속에 뭔가 있다는 걸 확신하기 어려웠다.

    "아뇨.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아무래도 혼자 식사를 하니까 입맛이 없어져서……."

    방금 전 그 말은 투정하는 것처럼 보였을까. 알리시아가 슬쩍 카벨레누스를 곁눈질했다. 카벨레누스의 미간은 살짝 좁아져 있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만 마무리되면, 다시 같이 식사를 할 수 있을 거야."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전 혼자 먹어도 괜찮아요. 이제 많이 익숙해졌는걸요."

    "그것보단 내가 아쉬워서 그런 거지."

    "네?"

    알리시아의 눈이 커졌다.

    "내가 없어도 그대가 아무렇지 않아지면, 아쉬운 건 내 쪽이라서."

    카벨레누스의 눈매가 살짝 휘어졌다. 알리시아는 뺨을 붉힌 채 그를 바라봤다. 포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입술을 떼는 걸 멈추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을 리 없잖아요."

    "그런가?"

    짓궂은 기색이 묻어나는 미소였지만 좋았다. 알리시아는 한 번 더 마음을 다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하와 함께 식사하는 게 훨씬 좋아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지만, 그래도 식사는 잘 챙겨 먹도록 해."

    "전하께서는 잘 챙겨드시는 건가요?"

    "나는 둘째치고 그대가 잘 챙겨먹어야지."

    아직도 말라가지곤. 카벨레누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좋다는 건 다 먹이고 있음에도 그의 눈에 비치는 알리시아는 여전히 툭 건드리기만 해도 부러질 것 같았다.

    "사냥철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건 올해가 처음이군."

    "사냥철이요?"

    "매해, 슈바르한의 마지막 달은 사냥철이야. 그 시기가 되면, 마물들이 유독 들끓어 여러모로 피해가 심하거든."

    "위험하지 않나요?"

    알리시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일반 동물과 다른, 기이한 형태의 생명체.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책에서는 마물을 그렇게 정의내리고 있었다. 아주 위험한 존재라는 설명과 기묘한 그림까지 곁들여 설명하면서.

    "위험하지만 싸우지 않을 순 없지. 마물들은 그대로 둔다면 영지가 초토화될 테니까. 결국 누군가는 해야하는 일이야."

    "그렇다해도 위험한 일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알리시아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걱정해주는 건가?"

    "네."

    알리시아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카벨레누스가 강하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괜히 마음이 불안했다. 아무리 강해도 카벨레누스 역시,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죽는 법이었다. 알리시아는 누군가를 잃는 게 가장 두려웠다. 그것이 눈앞의 사내라면 더더욱.

    "걱정할 필요 없어. 어차피 올해도 가장 큰 발만은 내 몫이 될 테니까."

    "발만이 뭐죠?"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알리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슈바르한에 사는 마물들 중 가장 거대하고 흉폭한 마물이지."

    그와 동시에 제일 가는 보양식으로도 쓰이지만. 카벨레누스는 뒷말은 생략한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때론 알지 못하는 게 좋은 진실도 있는 법이었다.

    "그러면 정말 위험한 거잖아요."

    "매년 해오던 일이라서 익숙해. 게다가 올해는 좀 더 이유가 생기기도 했고."

    모습이 흉측하긴 해도, 발만의 심장은 수도에서도 인기 있는 보양식이었다. 제르페누스도 사냥철만 다가오면, 심장을 보낼 때까지 며칠 간 제 형제를 달달 볶을 정도였다. 올해부터는 수도로 진상될 발만의 심장은 하나도 없을 테지만. 벌써부터 제르페누스의 항의가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카벨레누스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보양식은 힘이 넘치는 이복형보다는 비쩍 마른 알리시아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정 하셔야 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래도 저는 전하께서 다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정 불안하면, 부적이라도 하나 선물해주지 그래?"

    "부적이요?"

    "슈바르한에선 전사들이 무사히 귀환할 수 있게끔 출정 전에 전사들에게 선물을 주는 풍습이 있거든."

    귀찮은 일이라 여겼던 풍습은 이제 괜찮은 핑계가 되었다. 카벨레누스는 턱을 괸 채,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반은 장난으로 한 소리였는데, 열의에 찬 눈동자가 보기 좋아 이제와서 말을 취소하고 싶지 않아졌다.

    "어떤 걸 드리면 되는데요?"

    "줄 건가?"

    "네. 제가 할 수 있는 건 뭐든요."

    가볍게 던진 질문에도 알리시아는 사뭇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거창하게 말하지 않아도 돼. 말이 부적이지, 대단한 물건일 필요는 없거든."

    "그러면 어떤 물건이어야 하는데요? 정해진 규칙 같은 게 있나요?"

    "정해져 있지 않아. 늘 지니고 있을 수 있고, 마음을 담은 것이면 다 되지."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생각해봐."

    카벨레누스가 피식 웃었다. 고심하는 알리시아의 표정이 퍽 마음에 들었다. 부적을 고르기 위해선 자연스레 제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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