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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29)화 (29/164)
  • 29화. 갖고 싶어요

    2020.06.11.

    방 안으로 들어선 카벨레누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방에 있는 건, 알리시아뿐만이 아니었다.

    "아직 있었나."

    "이제야 오셨군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던 모르코 부인이 일어나 카벨레누스에 간략하게 예를 갖췄다. 카벨레누스는 대충 고개를 까닥거리고는 침대로 걸어갔다. 알리시아의 얼굴부터 확인하고 싶었다.

    "이만 가봐도 좋아."

    "괜찮으시면, 잠시 저와 이야기 나누실 수 있으신가요."

    "급하지 않은 거라면, 나중에 하지."

    "급한 일입니다."

    모르코 부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카벨레누스는 모르코 부인을 가만히 보다가 이내 짧막한 한숨을 토했다.

    "아가씨의 일이기도 하고요."

    "……나가서 하지. 괜히 그녀가 깨면 안 되니까."

    "물론입니다."

    모르코 부인은 기다렸다는 듯, 먼저 방을 나섰다. 카벨레누스는 침대를 한 번 돌아보고 모르코 부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길게 끌지 말고 바로 이야기하지."

    복도로 나오기가 무섭게 카벨레누스가 재촉했다.

    "저도 길게 이야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모르코 부인은 태연히 카벨레누스를 올려다봤다.

    "아가씨께서 많이 우셨습니다."

    전하 때문에요. 모르코 부인은 타박 대신, 그저 카벨레누스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카벨레누스의 입매가 미세하게 떨렸다.

    "……울었다고?"

    "아가씨께서는 스스로를 꽃이라 생각하고 계시더군요."

    "꽃?"

    "정부 말입니다."

    "누가 함부로 입을 놀린 거지."

    카벨레누스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아가씨께선 바보가 아닙니다.“

    모르코 부인은 덤덤히 고개를 저었다. 말을 꺼낸 건 제임스였지만, 알리시아가 흔들린 건 그녀 역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생각이 많으시고 눈치도 많이 보시죠."

    "그녀는 원체 겁이 많으니까."

    "아뇨. 그보단 불안하셔서 그런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요."

    모르코 부인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분명 카벨레누스가 알리시아에게 보이는 태도는 특별했다. 하지만 정작 알리시아에게 필요한 건 주지 못하고 있었다.

    "예전에 개를 철장에 넣고 기르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거의 움직일 수도 없을 만큼 좁은 데다가 오물을 제대로 치우지도 않아 더러운 공간이었지만, 개는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주인이 주는 음식물 찌꺼기나 받아먹으며 철장에 웅크린 채 시간을 보낼 뿐이었죠."

    "……."

    "저는 그 모습을 가여워 돈을 주고 개를 샀습니다. 그리고 곧장 철장 문을 열어주었죠. 하지만 개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개에게는 그 좁고 더러운 철장만이 제 세계라서, 그게 당연해서 나올 줄 몰랐거든요."

    카벨레누스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모르코 부인이 말하는 개가 누굴 비유하는지는 뻔했다.

    "개를 철장 밖으로 나오게 하는 데에만 거의 한 달이 족히 걸렸습니다. 하지만 철장 밖을 빠져나왔음에도 개는 여전히 걷지 못했습니다. 늙은 사냥꾼의 말을 들어보니, 쓰지 않은 근육이 퇴화된 거라 하더군요."

    "……."

    "평생 걷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개가 처음으로 걸을 수 있었던 건 제가 그 아이를 들인 지, 일 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보통의 개처럼 걸을 수 있었던 건 그로부터 2년이 더 지난 후였고요."

    "……그래서, 내게 뭘 말하고 싶은 거지? 미래의 대공비를 개에 비유하는 무례까지 범하면서?"

    카벨레누스의 금안이 흉흉하게 빛났다.

    "말 못 하는 짐승도 다시 일어서기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아낌없는 애정과 정성이 필요하고요. 그런데,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모르코 부인은 한치도 물러서지 않은 채 카벨레누스와 대적했다. 그녀의 주인은 이제 알리시아였다. 주인을 지키기는 것이야말로 그녀의 역할이었다.

    "나를 가르치기라도 할 셈인가?"

    "전하께서 제 주인을 정해주셨으니 전 그 뜻에 따를 뿐입니다."

    "……그대는 못 이기겠군."

    카벨레누스가 혀를 차며 눈에 힘을 풀었다.

    "이래 보여도 전하의 배 이상의 세월을 살아왔으니까요."

    노부인의 입가에 노련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거지?"

    "아가씨께 확신을 주셨으면 합니다."

    "확신?"

    카벨레누스의 입매가 삐뚜름해졌다.

    "아가씨는 나약하지 않으십니다. 겁이 많으신 것도 아닙니다. 그저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계신 것뿐입니다."

    "그래서?"

    "아가씨께서는 불안해하고 두려워하시는 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달라질 겁니다."

    모르코 부인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야."

    카벨레누스는 눈을 살짝 아래로 내리깔았다. 알리시아가 완벽한 대공비가 되는 모습을 보고 싶긴 했지만 그건 머나먼 일이었다. 지금의 알리시아는 강하지 않다. 강하긴커녕, 너무 연약하고 가냘플 뿐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해봤자, 쓸데없는 생각만 많아질 뿐이었다.

    "그녀는 너무 약해."

    "곱게 자란 온실 속 화초는 혹한을 이기지 못하는 법입니다."

    "굳이 혹한에 맞설 필요는 없지."

    "그렇다고 평생 보호만 받고 살 수도 없는 법이죠."

    "……."

    "저와 수업하시는 내내, 아가씨께선 모르는 것을 모르는 채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알려고 노력하고, 스스로 판단했으며 제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충분히 나아가실 수 있는 분입니다."

    모르코 부인은 두 손을 가지런하게 모은 채 연장자의 미소를 머금었다.

    "무조건 감추려고만 하지 마시고 이야기를 나눠보세요. 전하께서 생각하고 계신 걸 들려주시고, 아가씨가 생각하고 있는 걸 들어보세요. 결국 신뢰라는 건, 상대방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서부터 시작되니까요."

    "그녀가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작고 마른 몸으로? 카벨레누스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힘이 들어간 턱 근육이 도드라져 보였다.

    "제가 들려드린 건 전하께서 기르시는 렉스의 모견, 자넷의 이야기였습니다. 나이가 들어 은퇴하기 전까진 슈바르한에서 제일 가는 사냥개였던 녀석이죠."

    모르코 부인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카벨레누스를 대면했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슈바르한의 늑대라고 한들, 그녀의 눈에 비친 카벨레누스는 여전히 어린 소년 같을 뿐이었다. 앳된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전쟁 훈장을 주렁주렁 매단 채 슈바르한을 찾아왔던 소년이 처음부터 슈바르한의 늑대라 불렸던 것은 아니었기에.

    "제가 녀석을 샀을 때만 해도, 그 누더기 개가 용맹한 사냥개가 될 거라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자넷을 믿었고, 그 아이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제 자랑이 되었습니다. 현재 슈바르한 최고의 사냥개라 평가받는 렉스조차 자넷의 전성기에 미치지 못할 정도죠."

    모르코 부인은 미소를 머금은 채, 카벨레누스를 올려다봤다. 카벨레누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슈바르한의 주인은 같은 실수는 하지 않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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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어둠 속, 카벨레누스의 손가락이 천천히 알리시아의 얼굴 위를 훑었다. 원래 알리시아는 잠귀가 밝아 작은 움직임에도 잘 깨곤 했지만, 요즘 들어선 쉽게 깨지 않았다. 그럼에도 카벨레누스는 혹시나 알리시아가 깰까 신경쓰며 그녀의 옆에 누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가 옆에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쌕쌕 숨을 뱉으며 잘 뿐이었다.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의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떼어주었다.

    "……그대가 정말로 감당할 수 있을까."

    카벨레누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창문 너머로 희미하게 새어든 달빛이 내려앉은 여자는 여전히 약하게만 보였다. 차라리 지금처럼 쭉 눈과 귀를 가린 편이 낫다 생각될 만큼. 카벨레누스의 손이 살짝 알리시아의 뺨에 내려앉았다. 약한 것은 쥐어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막막해질 때가 있었다. 그 순간, 알리시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전하?"

    알리시아가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깬 건가 했지만, 몽롱한 두 눈은 여전히 잠에 취해 있었다. 카벨레누스는 대답 대신,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에게선 옅게나마 장미향이 났다.

    "보고 싶었는데……."

    알리시아는 제 뺨에 닿은 카벨레누스의 손을 감싸듯 쥔 채, 희미하게 웃었다. 눈앞의 사내가 진짜라곤 생각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카벨레누스는 잠자코 알리시아가 원하는대로 그녀에게 손을 맡겼다.

    "자주 오시지."

    "……매일 왔는데."

    카벨레누스의 목울대가 울렸다. 알리시아가 입술을 오물거릴 때마다 그녀의 숨결이 굳은 살을 박힌 손바닥을 지나 손목 안쪽을 쓸었다.

    "그야, 이건 제 꿈이니까."

    현실에서도 매일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알리시아가 작게 중얼거리며 반쯤 떴던 눈을 감았다. 계속 카벨레누스를 눈에 담고 싶었는데 그대로 있기엔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많이 보고 싶었나."

    "꿈에서조차 그릴 만큼요."

    알리시아는 웅얼거리면서 애교 부리는 고양이처럼 카벨레누스의 손에 뺨을 비볐다. 거친 손에 여린 살이 쓸릴까 봐 꼼짝도 못하는 카벨레누스와 달리, 알리시아의 입가에는 만족스런 미소가 걸려 있었다.

    "좋다, 정말로."

    말캉한 입술이 짧게나마 손바닥에 스쳤다. 또 한 번, 카벨레누스의 목울대가 울렸다. 짐승 같은 눈동자가 어떤 시선으로 절 노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배시시 웃는 여자는 더할나위 없이 순진무구했다.

    "무서웠는데."

    "……."

    작게 울린 여자의 목소리에 굶주린 짐승 같던 사내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이렇게라도 볼 수 있어서요."

    졸음 섞인 목소리는 아이의 투정 같다. 카벨레누스는 손아귀에 힘을 주지 않으려 애쓰며 좀 더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부쩍 가까워진 거리에 희미하던 장미향이 진해졌다. 꽃향기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알리시아에게서 나는 향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장미 오일과 온천수를 섞어 만든 화장품이 신기하다면서 재잘거리던 알리시아의 얼굴이 떠오른 탓일지도 몰랐다.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괜히 속을 끓이게 했군."

    "기다리지 않을 수 있을 리 없잖아요. 제겐 전하가 전분데."

    "……그런 말은 한 번도 해주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런 말을 어떻게 해요."

    알리시아가 힘없이 중얼거리며 손등 위로 깍지를 꼈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하라고 했을 텐데."

    "그래도 그 말은 할 수 없어요."

    "어째서?"

    "전하께서는 바쁘시잖아요. 그리고……."

    "그리고? 그 다음은 뭐지."

    카벨레누스가 달래듯 알리시아의 뺨을 어루만졌다. 알리시아는 가만히 그 손길을 느끼다가 이내 옅게 웃었다.

    "그러다가 전하께서 제게 질리시면 어떻게 해요."

    카벨레누스는 이를 꽉 다물었다. 가까이서 자세히 살펴본 알리시아의 눈가는 부어 있었다.

    "……그럴 리 없잖아."

    카벨레누스는 쓰게 웃었다.

    "나는 아직도 그대가 이대로 사라질까 봐 두려운데."

    카벨레누스의 잇새로 참았던 숨이 흘러나왔다. 확신할 수 없었던 건 그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함께할 미래를 떠올리는 그와 달리, 알리시아는 항상 끝을 바라봤으니까. 금방이라도 도망갈 사람처럼 한 걸음 물러나 겁 먹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전하께서도 그런 생각을 하시나요."

    "그래. 그것도 아주 많이."

    금안이 눈꺼풀 아래 모습을 감췄다가 도로 제 빛을 찾았다. 하지만 그 빛은 평소보다 옅었다.

    "거짓말."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전하께선 강하시잖아요."

    "……나도 두려운 게 있을 순 있지."

    알에서 깨어난 새는 처음 본 존재를 부모라 각인한다고 하지만, 그건 잠시일 뿐이다. 잠깐 착각할 순 있어도 결국 새끼는 금세 제가 봐야 하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차린다. 카벨레누스는 그것이 두려웠다. 제 뒤를 졸졸 좇던 알리시아의 시선이 전부 착각일까 봐.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알리시아를 보는 순간이 찾아올까 봐.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이 어떻게 변할지. 카벨레누스는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엄지로 알리시아의 눈가를 매만졌다. 정작 알리시아는 그 손길이 간지러운지, 키득거리다가 이내 카벨레누스의 품을 파고 들었다.

    "……거짓말한 게 맞아. 사실 일부러 말하지 않은 거야."

    "뭘요?"

    "그대가 거절하지 못하게끔 만들어두고 말해줄 셈이었거든. 우습게도 거절당하는 게 무서워서."

    제 꼴이 한심하다 싶으면서도 할 수 없다. 뜻대로 되지 않는 여자는 항상 사내를 불안케 했다.

    "거절하지 않았을 거예요."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어떤 말이든요."

    "……내가 그대를 아내로 맞고 싶다고 해도?"

    카벨레누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네. 기꺼이요."

    "……."

    "이런 이야기는 현실에서 듣고 싶었지만, 꿈에서라도 들을 수 있으니 좋네요."

    알리시아는 좀 더 깊숙이 카벨레누스의 품을 파고들었다. 이제는 익숙하게 절 안아주는 손길이 좋아서 괜히 가슴이 먹먹했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봐요. 그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만족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

    "생각 이상으로 전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나봐요. 아무리 생각해도 제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

    알리시아는 두 팔로 카벨레누스를 끌어안았다. 카벨레누스는 이번에도 순순히 그녀가 원하는 대로 끌려갔다. 혹시라도 사내를 놓칠까 봐 잔뜩 힘이 들어간 손은 그 무엇보다 힘이 셌다.

    "갖고 싶어요."

    "……."

    "전하를 욕심내고 싶어졌어요."

    꿈을 핑계 삼아 내뱉은 고백의 말이 그러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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