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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28)화 (28/164)

28화. 부모라고 부르기엔

2020.06.08.

"파티는 마음에 드십니까."

"글쎄요. 제법 구색은 갖춘 것 같지만……."

벨로아는 감흥 없는 시선으로 무도회장을 살폈지만, 부채로 가린 그녀의 양 입술 끝은 올라가 있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만족스러운 파티였다. 눈부신 샹들리에도, 북적거리는 손님들도, 그리고 저를 에스코트를 하는 사내까지. 전부.

"부족한 점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말씀드린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나요."

"전 같은 실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습니다."

"그건 좀 마음에 드네요."

벨로아의 미소가 좀 더 진해졌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북부의 젊은 대공은 그녀의 생각 이상으로 부유했다. 그리고, 자신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고 있었다. 벨로아는 그 사실이 퍽 마음에 들었다. 부왕의 총애가 가르쳐준 건 누군가를 제 밑에 두는 것이 즐겁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이 남들이 우러러보고 부러워하는 권력자라면, 더더욱.

"저는 솔직히 전하의 소문을 다 믿지 않아요."

"무슨 소문을 말씀하시는지."

"전하께서 피에 미친 괴물이라는 그 소문이요."

"……."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상관 없다는 쪽이 옳을까요?"

벨로아가 부채를 살짝 아래로 내렸다. 그녀는 불빛 아래에서 빛나는 제 눈동자가 제 목에 걸린 사파이어 목걸이보다 영롱하고 아름답다는 걸 알고 있었다. 노예에게 빠질 정도로 수준 낮은 심미안을 가진 사내를 꼬여내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제 뭘 믿고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비루한 땅을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땅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솔직히 감흥이 없었어요. 그런 건 얼마든지 과장할 수 있는 이야기잖아요. 마정석은 비싸고 원하는 이들도 많으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군요. 지금 슈바르한이 누리고 있는 부는 전부 마정석에서 온 것이니까요."

"우연한 부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죠. 그렇지만 그걸 어떻게 쓰느냐는 다른 문제죠."

벨로아가 여유롭게 부채를 팔랑거렸다. 블랑셰의 차기 황제. 그것만으로도 카벨레누스는 충분히 좋은 조건의 사내였지만, 이왕이면 그 이상이길 바라는 게 사람의 마음이었다. 단순히 혈통만이 아닌,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면 더욱 나쁠 게 없었다.

"슈바르한에 와서 솔직히 실망했어요. 대단한 부를 누리고 있다는 슈바르한 대공의 땅은 성만 거대하지, 볼거리는 딱히 없었거든요. 전하의 부유함이 부풀어 보이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했죠."

"소문이라는 게 다 그런 것이니까요."

"오히려 소문이 축소된 건 아니고요?"

벨로아의 눈매가 유려하게 휘어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슈바르한은 파티 문화도 어설픈 곳이죠. 심지어 제 요구도 갑작스러웠고요.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문제 없이 그럴싸한 파티를 흉내내셨죠. 그렇다면, 그 다음은 뻔한 거 아니겠어요?"

"……."

"부는 곧 권력. 과시하고 싶어하는 건 당연하죠. 그런데, 전하께서는 그러시지 않으셨죠. 그런 경우에는 보통 둘 중 하나거든요."

권력에 욕심이 없거나, 혹은 무슨 꿍꿍이가 있던가. 벨로아가 느긋하게 웃었다.

"저는 야심 있는 사람이 좋아요. 위를 바라봐야지, 그 자리에 서는 법이 아니겠어요?"

"재미있는 말을 하시는군요."

"더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려드릴 수 있답니다. 물론 전하와 제 관계가 보다 분명해지면요."

살짝 눈을 위로 떴을 뿐인데도 벨로아는 하나의 예술품이라 해도 손색없이 아름다웠다. 벨로아가 무도회장에 모습을 드러낸 후부터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린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벨로아는 제게 꽂히는 시선에 흡족해하며 카벨레누스를 올려다봤다.

"전하께서는 춤을 잘 추세요?"

"썩 잘 추진 못합니다."

"그래도 저와 함께 춤춰주실 순 있으시겠죠?"

벨로아의 손끝이 카벨레누스의 손목 안쪽을 살짝 스쳤다. 장갑을 끼고 있어 직접적으로 살이 닿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불쾌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카벨레누스는 입매를 다문 채, 저보다 한참 작은 벨로아를 내려다봤다. 이국의 공주는 도도한 얼굴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자신만만하다 못해 오만한 눈빛까지는 감추지 못했다.

'도무지 무슨 속셈인지 알 수 없군.'

카벨레누스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며칠 간 벨로아를 살펴봤지만 그녀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본인이 뭐라도 된 양 제 멋에 취한 공주는 속내가 너무 빤히 보였지만, 그저 어린 공주라고 그녀를 정의내리기에는 많은 것들이 의심스러웠다.

"제 손을 계속 부끄럽게 두실 건가요?"

"아닙니다. 함께 한 곡 추시죠."

그럼에도 카벨레누스는 제게 뻗어진 벨로아의 손을 잡았다. 이복형제가 품고 있는 속내가 무엇이든, 제 이득을 얻어내면 그만이었으니까. 일순간, 사내의 눈동자가 어둠 속 빛나는 짐승의 눈처럼 번뜩였다. 벨로아는 카벨레누스가 제 요청을 들어줬다고 착각했지만 그 반대였다. 카벨레누스는 벨로아를 위해서가 아닌, 자신을 위해 파티를 열었을 뿐이었다. 알리시아의 자리가 완전해지기 전까지, 주변의 시선을 끌어줄 가림막 역할을 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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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괜찮으십니까."

"오래간만에 수도로 돌아간 기분이었지."

카벨레누스는 집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장갑을 벗어 곧장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욕망으로 점철된 손길은 원치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일러두겠습니다."

"그보다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되었지?"

제르페누스의 속셈을 오롯이 알기 전까지는 광대 놀음은 끝나지 않는다. 카벨레누스는 제게 묻은 향수 향을 억지로 참으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벨로아 왕녀의 소지품 중 통신 거울을 확인했습니다."

"마도구는 크리스티 왕국의 특산품이니, 통신 거울 하나쯤은 이상하진 않을 텐데."

"크리스티 왕국의 통신 거울과 비교했을 때 디자인이 다릅니다. 제국에서 만들어진 통신거울이었습니다."

"지금도 연락하고 있을지 모르겠군."

카벨레누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래서 따로 사람을 붙여놓았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습니다."

"소리를 차단하는 마도구인가."

"그럴 확률이 큽니다. 일부러 벽이 얇은 방을 골라두었는데도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는 건, 마도구의 개입이 아니고서야 앞뒤가 맞지 않으니까요."

"의외로 그런 부분에선 철저하군."

카벨레누스가 혀를 찼다.

"폐하께서 지시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정작 폐하와 내통한다는 게 빤히 보이는 통신거울은 감추지 않으면서 말이지."

"오히려 의심을 사게 하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의심?"

"전하께서 폐하를 잘 알고 계신 것처럼 폐하도 그러시니까요. 어쩌면, 폐하의 계획은 생각보다 얕은 수일지도 모릅니다."

가제프는 턱을 괸 채로 중얼거렸다. 그가 경험한 제르페누스는 교활한 뱀과도 같은 사내였다. 아군으로 두면 든든하지만, 적으로 두면 그 누구보다 골치 아픈 상대였다.

"그와 반대일 수도 있지. 이렇게 생각할 걸 알고 깊은 수를 짰을 수도 있어."

"복잡하군요."

가제프의 매끄러운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상대가 상대니까. 쉽게 걸려주진 않겠지."

카벨레누스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후우, 일단 전 크리스티 왕국 쪽을 좀 더 캐보겠습니다. 국왕이 유독 싸고도는 공주라서 정보가 적긴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쪽에 기대를 걸어볼 수밖에요."

"나도 공주 쪽을 좀 더 캐보도록 하지."

"그래 주시면 감사하나……."

가제프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떠오른 얼굴 하나에 멈칫했다.

"왜 그러지?"

"그게……."

"말해."

날카로운 시선에 가제프의 목울대가 울렸다. 지금의 상관은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괜히 입을 잘못 놀렸다가 얼마든지 불똥이 튈 수 있었다.

"……아가씨께선 괜찮으신가 해서 말입니다."

"알리시아가, 왜."

날카롭던 시선에 더욱 날이 섰다. 가제프는 겨우 숨을 내쉬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오랫동안 카벨레누스를 겪어왔지만, 제 상관이 저런 눈을 할 때면 여전히 등골이 오싹했다.

"월권이라는 건 알지만, 이모님께 들은 바가 있어서요."

"뭘 들었다는 거지."

"우울해하시는 것 같다고 들었습니다."

"우울?"

카벨레누스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아무래도 최근 들어 전하께서 아가씨를 찾지 않으시니까요. 그런데, 전하께서 벨로아 왕녀와 가까이 지내신다는 것까지 알게 되면 아가씨 입장에서는 조금……."

"찾지 않는다 하기엔 어제도 얼굴을 보고 왔는데."

카벨레누스는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까닥거렸다. 슈바르한 성에는 비밀 통로가 많았다. 통로를 쓴다면, 얼마든지 주변의 눈을 피해 알리시아에게 갈 수 있었다.

"아가씨께서는 모르시지 않습니까."

"알면 기다릴 테니까."

카벨레누스가 살짝 눈을 찡그렸다. 벨로아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과도 같아 그녀에게 맞추다 보면 매번 일정이 꼬이거나, 번번이 늦어졌다. 예전처럼 규칙적으로 알리시아와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아가씨께서 기다리시면 안 되는 겁니까?"

"내가 올 때까지 식사를 미루다가 제때 식사도 못 하고, 내가 올 때까지 버티느라고 잠도 못 자겠지."

카벨레누스의 턱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자신을 기다리던 알리시아의 모습이 처음에는 예쁘기만 했지만, 그 이후가 썩 좋지 못했다. 알리시아는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고, 잠이 부족해 입맛까지 떨어졌는지 기껏 늘려놓은 식사량도 줄었다.

"아, 그럼 그게 이유인가 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이모님께서 말씀하시길, 아가씨께서 보이는 증상이 임신했을 때 보이는 것과 흡사하다 하셨거든요."

"임신?"

"전하께서는 의사의 진단 후, 보고 드릴 예정이었습니다. 확실한 건 아니니 굳이 소란 떨 이유도 없었고요. 뭐, 지금 보니 괜히 앞서 나간 것 같긴 하지만요."

가제프가 멋쩍게 웃었다. 진짜 임신이면 어떻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슈바르한의 후계자가 태어나는 건 기쁜 일이나, 지금은 시기가 썩 좋지 않았다. 정식으로 혼인을 올리기 전에 태어난 아이는 위치도 애매했고, 카벨레누스가 지켜야 하는 것이 하나 더 느는 셈이기도 했으니까.

"임신이 아니라고 확정난 건 아니지 않나."

"하지만 방금 전하께서……."

"결국 그것도 추측일 뿐이지."

카벨레누스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알리시아를 안았던 건, 단 하룻밤뿐이었다. 가능성은 희박했다.

"모르코 부인은 감이 좋은 편이기도 하고."

"이모님께서는 가능성을 말씀하신 것뿐입니다. 애당초 제 이모님은 의사도 아니신 걸요."

"가능성이 낮긴 해도, 혹시 모를 상황은 확인하고 가는 게 좋겠지."

카벨레누스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언젠가 후계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아이에 대해선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애당초 나약한 핏덩어리들은 슈바르한의 늑대가 관심을 둘 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알리시아가 품은 것만 아니라면. 금색 눈동자가 일순간 서늘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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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자는 필요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만약, 아이가 생긴 게 맞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가제프는 불안한 기색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카벨레누스의 눈치를 살폈다. 시기가 좋지 않다 해도 정말로 임신이 맞다면 카벨레누스에게는 자식이 생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카벨레누스가 보이는 반응은 아버지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그 모습은 부모라 부르기엔 지나치게 냉정하고 차가웠다.

"글쎄. 어떻게 해야 할까."

카벨레누스는 느릿하게 엄지로 턱 끝을 매만졌다.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아이의 얼굴을 그릴 수 없었다. 다만, 아이가 알리시아를 닮는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을 거란 생각은 들었다. 적갈색 머리에 잿빛 눈동자를 가진, 알리시아를 꼭 빼닮은 아이라면 품에 안아도 불쾌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제 몸에 흐르는 피가 블랑셰인 이상, 그런 건 불가능했다. 카벨레누스가 그랬고, 제르페누스가 그러하듯 블랑셰의 혈통은 대대로 검은 머리카락을 물려 받아왔다. 게다가……. 일순간 카벨레누스의 입매가 뒤틀렸다. 가제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고민하다가 겨우 입술을 뗐다.

"전하의 핏줄입니다."

"그게 아쉬운 거지. 내 피를 이은 김에 좀 더 늦게 태어났다면 일말의 가치라도 있었을 텐데."

카벨레누스의 검지가 톡톡 책상을 두들겼다. 알리시아가 대공비가 된 후에 태어났다면 후계자로서의 가치라도 있었다. 하지만 이르게 태어난 아이는 어떤 가치도 없었다. 그저 평생 제 어미의 명예를 깎아먹는 존재가 될 뿐이었다.

"아가씨의 핏줄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어느 곳도 그녀를 닮지 않겠지. 그 조막만한 얼굴을 아무리 뜯어봐도 그녀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을 거야. 그녀의 아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카벨레누스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가제프는 반사적으로 눈을 찡그렸다.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아이였다. 어떻게 생겼을지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카벨레누스는 당연하게 아이를 알고 있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받아들이지 않으실 겁니까?"

"나로 인해 태어난 아이니, 책임은 져야겠지."

"그렇다면……."

"다만, 그렇다고해서 굳이 알리시아에게 흠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나?"

덤덤히 대꾸하는 카벨레누스는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아니, 차라리 감흥이 없어 보이는 게 나았을지도.

"어차피 그딴 게 태어나봤자, 괴물에 불과할 텐데."

조소하는 사내의 얼굴은 결코 부모의 낯이 아니었기에. 가제프는 허리춤에 찬 검 손잡이를 매만지는 카벨레누스를 보며 침묵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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