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27)화 (27/164)
  • 27화. 기회가 남아 있었다

    2020.06.04.

    "피곤하십니까?"

    "미안해. 요즘 들어 자꾸 잠이 오네."

    알리시아는 멋쩍게 웃었다.

    "정 피곤하시면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할까요?"

    "그래도 돼?“

    "무리하게 수업해봤자 실력이 금방 느는 것도 아니니까요. 가끔은 이런 날도 필요하죠."

    제임스가 다정한 시선으로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미안하지만, 그게 좋을 것 같아."

    알리시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웬만하면 참고 싶었는데, 요즘 들어 부쩍 밀려오는 졸음을 참기 어려웠다.

    "오늘은 평소보다 수업이 일찍 끝났군요."

    좀 떨어져서 수업을 지켜보던 모르코 부인이 눈치껏 다가왔다.

    "제가 좀 피곤해서요."

    "요즘 들어 잠이 부쩍 느셨네요."

    모르코 부인이 우아하게 웃으며 뒤에 선 하녀들에게 손짓했다. 하녀들은 능숙하게 화구들을 정리하고 테이블에 다과를 차렸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봐요."

    "그렇게 슈바르한에 익숙해지시는 거죠."

    모르코 부인은 준비된 티포트 세트를 알리시아 앞에 놓았다. 이제 알리시아는 여느 귀부인들처럼 손님을 위한 차를 우릴 수 있었다.

    "멜가군요."

    은은하게 퍼지는 차향에 제임스가 옅게 웃었다.

    "차에 대해 잘 아나봐."

    "이리저리 돌아다니다보니 자연스레 얻어듣는 게 많거든요."

    "그러고보니, 여행을 자주 다녔다고 했지?"

    "네. 많은 곳을 다녀왔죠."

    "대단하네."

    알리시아가 갓 내린 차를 찻잔에 따라 제임스 쪽으로 내밀었다. 섬세한 문양이 돋보이는 도자기 찻잔은 얼핏 봐도 고급품이었다. 제임스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차향을 음미하는 알리시아는 처음과 달리, 이제는 제법 귀족처럼 보였다.

    "기회가 되신다면, 아가씨께서도 여러 곳을 여행 다녀보세요. 아가씨께서 경험한 모든 것들이 그림의 밑바탕이 되어줄 겁니다."

    "여행이라……."

    "세상은 생각 이상으로 넓고 다양해서 그만큼 볼거리도 많죠. 분명 아가씨께도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으레 한 말이었는데, 어쩐지 말을 하면 할수록 목소리가 빨라졌다. 제임스는 결국 말을 멈추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쓴 차가 아닌데, 어쩐지 입안이 떫게 느껴졌다.

    "책을 읽을 때면 궁금하긴 해. 내가 모르는 것들이 정말로 많다는 것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고."

    "그러신가요?"

    "하지만, 나는 이곳이 좋아."

    알리시아가 깍지를 낀 채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제임스는 다소 초조한 기분으로 찻잔 손잡이를 매만졌다. 크리스티 왕국의 공주가 성에 머물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건, 슈바르한에서 단 한 사람 뿐이었다. 카벨레누스가 공주를 위해 슈바르한에 어울리지도 않는 화려한 파티를 열고 있어도, 공주가 카벨레누스의 약혼녀가 되고 더 나아가 결국엔 슈바르한의 안주인이 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해도 알리시아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카벨레누스의 초상화를 매일 같이 연습하며 수줍게 웃을 뿐. 제임스를 갉아먹는 건, 그 간극이었다. 귀족 사내의 유흥이 사랑인 줄 알고 제 전부를 내어주던 평민 여자 이야기. 제임스는 그 흔하고도 뻔한 이야기의 결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가씨께서는 지금 생활이 좋으신가요?"

    "응. 좋아."

    한 치의 망설임 없는 대답. 제임스는 무의식적으로 제 목을 더듬었다. 그리고, 그 행동은 자연스럽게 알리시아의 시선을 끌었다.

    "그러고보니, 그 목걸이는 항상 하고 있는 것 같네."

    호기심 어린 알리시아의 눈동자를 마주하고서야 제임스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유품입니다."

    "유품? 아……. 미, 미안해. 혹시라도 내가 괜한 말을 했다면 사과할게. 말하지 않아도 돼. 불편하게 하려는 건 아니었어."

    "괜찮습니다. 다 지난 일입니다."

    손끝에 부드러운 가죽 끈이 걸렸다. 제임스는 끈을 따라 천천히 손을 내렸다. 옷 위로 불룩 튀어나온 펜던트의 흔적을 더듬듯 어루만졌다.

    "소중한 사람이었을 거잖아."

    "……."

    "완전히 똑같은 감정이라고 말할 순 없겠지만 나도 누군가를 잃어봤으니까. 누군가를 잃는 게 얼마나 슬픈 건지 알고 있어."

    알리시아가 애써 웃으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고, 그와 동시에 제임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완전히 달라진 건 아니었다. 아직 알리시아에는 예전의 습관들이 남아 있었다. 제임스는 그 사실이 기뻤다. 자신이 간섭할 일이 아니라는 걸 빤히 알고 있음에도.

    "……누님의 물건입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굳이 할 필요 없는 이야기를 꺼낸 것은. 제임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옷 속에 감춰두었던 목걸이를 벗었다.

    "누님?"

    "제 위로 누님 한 분이 계셨거든요."

    제임스는 덤덤하게 중얼거리며 목걸이 펜던트를 돌리듯 비틀었다. 그러자, 펜던트가 열리면서 안쪽으로 작게 그려진 초상화 하나가 보였다.

    "미인이시네. 그것도 무척."

    알리시아가 옅게 웃었다. 제임스는 그녀를 따라 웃는 것 대신, 짧게 심호흡을 했다.

    "꽃처럼 아름다운 분이셨죠."

    "아가씨."

    모르코 부인이 급하게 끼어들었지만, 제임스의 시선은 곧장 알리시아에게 꽂혀 있었다.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침을 삼켰다. 테이블 아래로 숨긴 그녀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무리하지 마시고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모르코 부인이 짧게 제임스를 흘겨봤다. 제임스는 그제야 시선을 거두고 팬던트를 손 안으로 감췄다. 감정에 휩쓸려 성급했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간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던 생각들이 하나의 말이 되어 뱉어지는 순간, 확신하게 되었으니까. 자신은 알리시아를 외면할 수 없을 거라는 걸. 그녀는 제 누이와 달랐다. 그녀에게는 아직 기회가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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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꽃처럼 아름다운 분이셨죠.’

    알리시아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알리시아가 아무것도 모르길 바라는 눈치였기에 모른 척했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꽃'은 귀족의 정부를 지칭하는 일종의 은어였다. 제임스는 알리시아를 카벨레누스의 정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알리시아는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미 각오했던 일임에도 막상 절 정부로 여기는 시선을 마주한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타인의 눈에 비치는 자신은 카벨레누스의 숨겨둔 애첩으로 보이겠구나 싶어서. 하지만 그뿐이었다. 제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틀린 말이 아니라는 거 알고 있으니까.'

    알리시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까의 시선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욱신거렸지만 괜찮았다. 참을 수 있었다. 카벨레누스의 옆에 있을 수만 있다면, 이 정도 수치는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다.

    "아가씨. 오늘 전하께서 늦으신다고 하십니다. 먼저 식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

    "아가씨?"

    "미안해요. 잠시 다른 생각을 해서요. 뭐라고 했죠?"

    알리시아는 그동안 배운대로 귀부인다운 미소를 머금었다. 틈틈이 거울을 보면서 지어 보였던 덕분인지, 이제는 그녀의 미소는 퍽 자연스러웠다.

    "전하께서 늦으신다고 아가씨 먼저 식사를 하라 하셨습니다."

    "오늘도 늦으신대요?"

    "원체 바쁘신 분이니까요."

    "그렇긴 하죠."

    알리시아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다. 슈바르한에 오면, 카벨레누스와 쭉 함께 있을 줄만 알았다. 하지만 그녀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그는 바쁜 사람이었고 최근 들어선 더욱 그랬다. 당연하게 함께 해오던 식사도 이제는 거르는 날이 더 많았고, 얼굴 보는 일도 드물어졌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알리시아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 외에는 없었다. 대부분의 정부들이 그러하듯이. 알리시아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트렸다.

    "서운하세요?"

    "제가 어떻게 서운하겠어요."

    "아가씨 입장에선 서운하실 수 있죠."

    "괜한 소리를 해서 전하를 방해하고 싶지 않은 걸요."

    혹시라도 모르코 부인이 카벨레누스에게 다른 말을 할까, 알리시아는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모르코 부인은 그런 알리시아가 귀엽다는 듯 싱긋 웃었다.

    "오히려 좋아하실 수도 있죠. 전하를 좀 더 보고 싶으신 거잖아요."

    "저는……."

    "공과 사는 구분하는 게 좋다고 하지만, 젊은 연인들에게까지 빡빡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요."

    모르코 부인이 다정하게 알리시아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그녀를 위로했다. 하지만 한 번 축 처진 알리시아의 어깨는 다시 위를 향할 줄 몰랐다.

    "저 역시, 아가씨께 주어진 직책이 무겁다는 건 알고 있어요. 아가씨께선 아직 어리시니 더 그렇겠죠. 하지만 아가씨께서는 전하의 아랫사람이 아니잖아요. 너무 눈치 보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제가 전하의 아랫사람이 아니라고요?"

    "아가씨께서는 전하와 어깨를 나란히 하실 유일한 분이시죠."

    "무슨 오해가 있나봐요. 저는 그저……."

    설마 자신이 노예라는 걸 듣지 못한 걸까. 알리시아는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슈바르한에는 노예가 없다고 하지만, 노예의 개념을 모르진 않을 것이었다. 알리시아는 자신이 모시던 아가씨가 실은 노예였다는 걸 깨달은 모르코 부인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두려웠다.

    "말씀드렸잖아요. 전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모르코 부인은 알리시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알리시아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아가씨가 성에 오신 날, 전하께서 제게 직접 말씀하셨죠."

    아가씨께서 슈바르한의 안주인이 되실 거라고. 모르코 부인의 손이 알리시아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알리시아의 초점이 흔들렸다. 알리시아는 모르코 부인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모르코 부인은 진심이었다.

    "……전하께서 정말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요?"

    알리시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카벨레누스의 옆에 당당하게 선 제 모습을 단 한 번도 떠올려본 적이 없었다. 불가능한 일에 희망을 품기에는 알리시아는 겁쟁이었다. 어설픈 희망 대신, 포기하는 것이 그나마 상처를 덜 입는 방법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알리시아는 지금 상황이 더욱 당황스러웠다.

    "설마, 아가씨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신 건가요?"

    "……."

    "맙소사."

    여자를 모르는 사내치곤 제법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보다. 모르코 부인이 짧게 혀를 찼다. 굳이 더 물을 필요도 없었다. 새빨갛게 물든 알리시아의 눈가는 그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해왔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혼약도 약속 받지 못한 채, 같은 침실을 쓰는 사이라고 하면 뻔하니까.

    "전하께서 잘못하셨군요."

    "전하께서 잘못하신 게 아니에요."

    "전하께서 잘못하신 게 맞습니다. 혼약은 혼자서 하는 게 아닌걸요. 당사자에게 일말의 언질도 없는 건 잘못된 행동입니다."

    "하지만……."

    "아가씨. 절 보세요."

    모르코 부인이 알리시아와 똑바로 시선을 맞췄다.

    "제가 지금 드리는 말씀은 아가씨의 시녀로서가 아닙니다. 좀 더 세상을 경험한 어른이자, 아가씨의 스승으로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

    "전하께서는 아가씨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하시지만, 그건 전하의 생각일 뿐 아가씨의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슈바르한에는 노예가 없습니다."

    다 안다는 듯, 웃는 모르코 부인에 말문이 턱 막혔다. 알리시아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여전히 알리시아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묻겠습니다. 아가씨께서는 전하와 이대로 혼인해도 괜찮으신가요? 그게 아가씨가 정말 원하시는 건가요?"

    모르코 부인이 다정하게, 그러나 포기를 모르는 시선으로 알리시아를 좇았다. 알리시아는 한참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결국 입술을 뗐다.

    "물론 저는 계속 전하 곁에 있고 싶어요. 하지만……."

    그래도 되는 걸까? 알리시아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뭐가 그렇게 두려우신가요?"

    "……제가 전하를 망칠 수도 있으니까요."

    "그것뿐인가요?"

    알리시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메여서 더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런 것이라면 그나마 다행이군요."

    순서가 어긋나서 걱정했는데, 그나마 둘의 마음이 엇나가지 않아 다행이었다. 모르코 부인은 속으로 안도하며 알리시아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슈바르한과는 어울리지 않는 가녀리고도 겁많은 아가씨. 처음에는 저 마른 몸으로 이곳에서 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걱정되면서도 한편으로 기대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잔뜩 움츠린 것 같아 보이면서도 가끔씩 보이는 눈빛은 제법 강단 있어서 잘만 가꾸면 제법 맹수다운 눈빛을 지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으니까.

    "아가씨께서 뭘 걱정하고 계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특별한 분이시고, 그만큼 그 옆자리는 가볍지 않으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한다면 하는 사람입니다."

    모르코 부인은 귀한 것을 쥐듯 알리시아의 손을 받쳐올리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를 보필하는 것 제 몫이니, 아가씨께서는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그러면 됩니다. 슈바르한의 전사들은 대대로 다들 그래왔으니까요. 슈바르한의 안주인이라고 다를 바는 없죠."

    "전 전사가 아닌 걸요."

    "꼭 무기를 들어야 전사가 되는 건 아니랍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맞서 싸울 수 있는 자는 모두 전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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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알리시아의 시선이 불안하게 떨렸다.

    "그건 아가씨께서 어떻게 하냐에 따라 다르겠죠. 아가씨께서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으니까요."

    한 번 해보세요, 그것이 뭐든. 모르코 부인의 양 입꼬리가 올라갔다. 알리시아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모르코 부인을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일부러 어려운 과제를 내줘도 결국엔 전부 해결했다. 그건 알리시아가 세기의 천재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를 바 없었고, 많이 배우지 못해 오히려 미숙했다. 그럼에도 알리시아가 모르코 부인의 과제들을 할 수 있었던 건 그녀가 집요했기 때문이었다. 알리시아는 같은 내용을 수십 번 반복해 필사하더라도 한 번 배운 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모르코 부인은 그 집요함이 좋았다. 그런 사람일수록 제 것을 잘 지키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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