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당하고만 있기에는
2020.06.01.
"정말로 성 내 노예가 있는 게 맞을까요?"
"아무렴 블랑셰의 황제가 내게 거짓말을 했겠어? 다시 한 번 잘 찾아봐. 분명 어딘가에 쥐새끼처럼 숨어 있을 거야."
벨로아가 신경질적으로 테이블을 두들겼다. 그녀의 호위는 곤란한 표정으로 연신 그녀의 심기를 살폈다. 혹시나 했지만, 제 잘난 맛에 사는 공주는 슈바르한에 와서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제한된 행동반경에 예민해져 짜증을 토해내는 일이 잦아졌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선, 대공 측에서 먼저 손을 쓴 건 아닐지……."
"내 말에 한 번만 더 토를 달면 아버지께 전부 말씀드리겠어."
벨로아가 짜증스럽게 눈을 치켜 뜬 채로 으르렁거렸다. 본국에 있는 제 직속 시녀였다면, 입안의 혀처럼 열심히 비위를 맞춰주었을 텐데 부왕이 붙여준 호위는 그런 쪽으로는 영 쓸모가 없었다.
"……다시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하여간 두 번 말을 하게 만든다니까."
벨로아는 대놓고 혀를 쯧쯧 차며 콧방귀를 꼈다. 처음에는 끝없이 펼쳐진 설원도 제법 낭만 있게 느껴졌고, 웅장한 성도 마음에 쏙 들었는데 이제는 전부 다 지루했다. 슈바르한에는 파티가 없었다. 아무리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악세사리로 치장한들 자랑할 만한 곳도 없었다. 카벨레누스가 잘생긴 사내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이 말도 안 되게 지루한 땅을 떠났을 것이었다.
"그런데 노예를 찾아서 어떻게 하시려고요?"
"당연히 안주인으로서의 미덕을 보여줘야지."
벨로아는 가슴을 쭉 내민 채로 우아한 귀부인처럼 턱을 추켜올렸다.
"안주인이요? 하지만, 대공을 만나셨을 때에는 분명……."
"그거야 당연히 그냥 해본 소리지."
"네?"
"쉬운 여자는 재미없잖아?"
벨로아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녀가 눈을 깜박일 때마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나비가 날개짓하듯 팔랑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슈바르한의 늑대입니다. 괜히 그의 심기를 잘못 건드렸다간……."
"내 생각에는 악명이 과장된 것 같던데?"
"과장이라뇨. 그럴 리가요."
카벨레누스에게는 흉흉한 소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그 소문을 뒷받침해주는 무수히 많은 업적들이 있었다. 슈바르한의 늑대가 가진 악명은 쉽게 넘길 만한 게 아니었다. 물론 전쟁에 무지한 벨로아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냐. 과장된 게 틀림없어. 그렇게 예쁘장한 얼굴로 그런 짓을 저지르는 건 이상하잖아?"
제 손에 낀 반지를 매만지며 웃는 벨로아는 정말로 태연하고 여유가 넘쳤다. 그녀는 결핍을 몰랐고 굳이 알 생각도 없었다. 전쟁이니, 정치니 하는 것들은 전부 비현실적인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녀는 항상 제 또래 귀족들이 그러하듯 예쁜 걸 좋아했을 뿐이었고, 뭐든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굳이 복잡한 문제에 빠지지 않더라도 세상에는 즐길거리가 무척 많다는 걸,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슈바르한의 늑대가 예쁘다고요?"
"내가 지금껏 본 사내들 중 가장 잘생겼어. 키도 크고, 몸도 좋지."
솔직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소문으로만 듣던 슈바르한의 늑대는 예상외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사내였다. 자신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함께 서면 부끄럽진 않을 듯했다.
"더러운 취향만 아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많고 많은 여자들 중 하필 노예라니. 벨로아가 대놓고 혀를 찼다. 같은 고귀한 혈통을 가진 입장에선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공주님, 진심으로 슈바르한 대공과 결혼하실 생각이신 겁니까?"
"당연히 해야지. 내가 바보도 아니고, 천박한 노예 때문에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겠어?"
"이곳은 지루하시다면서요."
"지루해도 어쩌겠어. 미래를 위해선 참아야지."
벨로아가 교만한 미소를 머금은 채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녀는 꽝꽝 얼어붙은 땅의 안주인으로만 머물 생각은 없었다. 벨로아가 원하는 건, 그 이상이었다.
"결혼 한 번으로 저 거대한 블랑셰의 주인이 될 수 있는데, 당연히 남는 장사잖아?"
아무리 부친과 왕국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해도 왕위 계승 순서까지 달라지지 않았다. 크리스티 왕국의 차기 국왕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결국 그녀는 밑바닥에 깔릴 운명이었다. 하지만 벨로아는 그런 건 싫었다. 항상 그 어떤 누구보다 주목 받길 원했고 다들 절 우러러보는 게 좋았다. 카벨레누스의 아내 자리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에 훌륭한 조건이었다. 주제도 모르고 대공비 자리를 탐내고 있는 노예만 없다면.
"괜한 소리는 그만하고 최대한 빨리 노예를 찾도록 해. 성가신 건 조금이라도 빨리 치우는 편이 나으니까."
"그런데, 그 노예를 건드려도 괜찮은 걸까요?"
"괜찮냐고?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벨로아가 우스운 소리를 들은 양 깔깔 웃었다.
"노예는 물건이야. 아무리 애지중지한다고 해도 그깟 물건 하나 때문에 내게 화낼 순 없어. 내가 그 물건을 건드렸다 해도 내게 대공은 한 마디도 못할 걸?"
"하지만 이렇게까지 꽁꽁 숨겨놓은 걸 보니 좀 걱정되긴 합니다."
"그만큼 내게 감추고 싶다는 게 아니겠어? 대공 역시, 그 노예를 치부로 생각하는 거지."
치부로 생각하는 여자를 대공비로 삼겠다고 할까요? 호위는 그런 생각을 했지만, 굳이 그것을 입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그는 저 예쁘장한 얼굴이 화려한 독버섯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크리스티 국왕은 벨로아 왕녀에게만큼은 항상 너그러웠으니까. 사실 여부를 막론하고,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는 건 좋지 않았다.
"나는 벨로아야. 벨로아 크리스티. 나를 거부할 사내가 존재할 것 같아? 애당초 그깟 천박한 노예와 내가 비견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
"하지만……."
"헛소리할 시간이 남아 있다면 지금 당장 나가서 노예의 흔적이라도 찾든, 재미있는 일이라도 좀 만들어와. 일 년에 고작 두 번 파티를 여는 땅에 갇힌 덕분에 안 그래도 좀이 쑤셔서 죽을 지경이니까."
"그럼, 재봉사라도 부르는 건 어떨가요?"
"이딴 촌구석의 옷 수준이야 뻔하지. 굳이 드레스를 맞출 필요가 뭐 있겠어."
벨로아가 새침한 표정으로 호위를 노려봤다. 호위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러면, 보석상이나……."
"파티가 열리지도 않는데, 보석은 사서 어디다 쓰라는 거지?"
벨로아가 어이없다는 듯 대놓고 혀를 쯧쯧 찼다.
"그렇다면 광대라도 부를까요?"
"나보고 천것들 놀음을 즐기란 말이야?"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눈을 사납게 치켜뜬 채로 으르렁거리는 벨로아에 호위는 식은땀만 뻘뻘 흘렸다.
"아, 정말이지. 마음에 안 들어. 어쩜 이렇게 내 기분 하나를 못 맞추는지."
"아니면, 대공께 말해 작게나마 파티를 여는 건 어떨까요?"
"파티?"
"조촐하게나마 연다면-."
"나는 조촐한 건 싫어. 이왕 할 거라면 성대하게 열어야지."
벨로아는 턱을 괸 채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고운 미소를 지었다.
"지금 당장 펜과 종이를 가져와."
"종이요?"
"대공이 날 위해 어디까지 해줄 수 있는지 시험해봐야겠어."
벨로아는 거만하게 고개를 까닥거리며 호위가 가져온 펜을 쥐었다.
* * *
"축하연을 열어달라라. 그 공주가 생각할 법한 의견이군."
"본국에선 항상 파티를 즐겼다고 하니, 슈바르한 문화에 적응하기 어려웠겠죠. 물론, 그걸 감안해도 이건 다소 무리한 요구지만요."
가제프가 벨로아의 요구사항이 적힌 종이를 가볍게 펄럭였다.
"크리스티 왕국에서는 항상 이렇게 파티를 연다는데?"
카벨레누스가 가소롭다는 듯 조소했다.
"그럴 리가요. 말도 안 됩니다. 크리스티 왕국이 강국이라도 매번 이렇게 파티를 열면 국고가 남아나지 않을 겁니다."
크리스티 왕국의 재정 상태는 이미 훤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벨로아가 요구한 것에 맞춰서 성대한 축하연 같은 파티를 매번 여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럼?"
"명백하게 슈바르한을 깔보고 있는 겁니다. 결혼을 좌지우지하는 게 자신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거죠."
"생각이 너무 짧군."
카벨레누스는 짧게 혀를 찼다.
"아무래도 결핍이 없기 때문이겠죠."
"그건 무슨 뜻이지?"
"정보에 따르면, 크리스티 국왕은 벨로아 왕녀라면 사족을 못 쓴다고 하더군요. 그녀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었고, 심지어는 그녀가 죄를 지어도 조용히 넘어갔다고 합니다."
"죄?"
"마음에 들지 않은 교사를 죽게 했다고 합니다."
끝없는 오만함으로 가득찬 공주를 떠올리며 가제프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는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그가 생각한 슈바르한의 안주인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죽여?"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교사의 가방에 몰래 넣어 누명을 뒤집어씌웠다고 합니다. 공주가 생일 선물로 받을 정도로 아주 값비싼 물건이라 절도죄였음에도 사형 선고가 내려졌고요."
"맹랑한 짓을 했군."
"무려 열세 살 때, 저지른 짓이니 맹랑하다는 말로는 표현이 다 되지 않죠. 하지만, 문제는 그런 짓을 저질러도 공주가 받은 처벌은 없었다는 겁니다. 실제 그 일이 공주가 저지른 짓인지 모르는 이들이 대다수고요."
가제프가 쓰게 웃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저질렀다고 하기엔 공주는 교사를 사형대에 보낸 후에도 수도 없이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았다. 그리고, 그건 최근까지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자식 사랑이 각별한가보군."
"국왕이 가장 아끼던 왕비의 소생으로, 죽은 왕비를 무척 닮아 유독 각별하다고 하더군요."
"각별함은 독이 되는 법이지."
문득 떠오른 기억에 카벨레누스는 잠시 입을 꾹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 다 잊은 줄 알았는데, 가끔씩 그날의 일이 떠오를 때가 있었다.
"그래서, 이 연회 문제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글쎄……. 가제프, 네가 보기엔 크리스티 공주는 어떤 인물 같아 보였지?"
"딱히 대단해보이진 않았습니다. 딱 봐도 어리고 미숙합니다. 그리고, 그 부분은 따로 조사해본 부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
카벨레누스의 고개가 살짝 삐딱해졌다.
"네. 그래서 적당히 비위를 맞춰주면서 협상을 시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벨로아 왕녀를 보아하니, 아이를 구슬리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것 같으니까요.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문제가 풀릴 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제프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중요한 건 벨로아의 인성이 아니라, 그녀를 어떻게 이용할 수 있으냐였다. 상대가 어설프다는 걸 확인했으니 그 다음은 훨씬 수월할 것이었다.
"과연 그럴까."
카벨레누스는 턱을 매만지면서 중얼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가제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말대로 크리스티 공주는 확실히 어설프지. 그런데, 왜 하필 그녀였을까?"
"그야, 급하게 전하의 상대를 찾다보니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어찌 되었든 간에 크리스티 공주는 대륙 최고의 미인으로도 유명하니까요."
가제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벨레누스 앞에서 멋모르는 망아지처럼 구는 벨로아가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녀가 엄청난 미인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다소 앳된 감이 있지만, 벨로아는 지금껏 가제프가 본 여자 중 가장 아름다웠다.
"내가 아는 폐하는 그런 실수는 하지 않아."
"실수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미혼인 크리스티 공주는 한 명이 아니지 않나?"
"네. 벨로아 왕녀 바로 위, 제2왕녀가 미혼입니다. 미모는 벨로아 왕녀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들었지만요."
카벨레누스는 눈을 살짝 내리깐 채로 검지로 툭툭 턱끝을 건드렸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미모가 중요하지 않다는 건 폐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지. 게다가 폐하의 입장에선 조금이라도 계승권이 높은 제2왕녀 측을 선호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일부러 벨로아 왕녀가 선택되었을 가능성이 있겠군요."
"그럴 확률이 크겠지."
카벨레누스가 아는 제르페누스라면, 실수를 하기보다는 실수인 척할 것이었다. 어설픈 공주를 내세운 데에는 분명 꿍꿍이가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하필 벨로아 왕녀였을까요?"
"둘 중 하나겠지. 그녀가 일부러 연기를 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녀에게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
"제가 보기엔 연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제프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그건 모를 일이지."
"전하께서는 벨로아 왕녀가 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니."
의자에 상체를 기댄 채로 카벨레누스가 짧막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그가 보기에도 벨로아는 딱히 연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뒤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제르페누스가 있었다. 쉽게 생각해선 안 됐다.
"그럼에도 속단은 좋지 않지."
"그렇다면……."
"일단은 공주가 원하는 건 웬만한 건 다 들어주도록 해. 적당히 비위를 맞춰주면서 살살 구슬려. 대신, 그 무엇도 확신하지 마. 어떤 가능성도 놓치지 말고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마."
카벨레누스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잠자코 당하기만 있기에는 그는 타고난 포식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