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오만과 편견
2020.05.28.
"생각보다 사절단이 일찍 도착했군."
카벨레누스는 거울에 비친 옷차림을 확인한 후, 곧장 걸음을 옮겼다.
"새로 개발한 마차를 썼다고 하더군요."
가제프는 재빨리, 상관의 뒤를 쫓았다. 늦은 밤이었음에도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들에 성 내부는 환했다.
"마차?"
"크리스티 왕국의 마법은 탁월하니까요."
가제프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황제가 괜히 크리스티 왕국의 공주를 보낸 것이 아니다. 슈바르한에는 마정석이 있었지만 그것을 활용할 기술은 부족했다. 크리스티 왕국와 연을 맺는다면 더 먼 미래를 볼 수 있을 것이었다.
"어떻게 구슬릴 수 있을지가 관건이겠군."
카벨레누스의 눈이 빛났다. 제르페누스의 의도는 뻔했지만, 굳이 형의 의도대로 따라줄 필요는 없었다. 이번 기회를 크리스티 왕국과의 연을 맺을 수 있는 계기로 삼으면 그만이었다.
"일단은 크리스티 왕국에서 탐낼 조건들을 준비해놨습니다."
"그것으로 될 것이라면 진작 거래가 통했겠지."
"어쩔 수 없지요. 마법은 크리스티 왕국에게 있어선 무엇보다 중요하니까요. 웬만한 거래 조건이 아닌 이상, 쉽게 수락해주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지금은 배가 꽤나 부를 테니 더 그렇겠지."
크리스티 왕국은 항상 슈바르한의 제안을 거절해왔다. 그런 그들이 이제와서 슈바르한에 사절단을 보낸 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았을 확률이 컸다.
"각하께서 생각하신대로, 폐하께서 최근 이슬라 지역의 무역 조항을 수정하셨습니다. 바뀐 조항대로라면 크리스티 왕국에게 상당한 이득이 돌아가게 될 겁니다."
"이슬라 지역까지 내줄 정도면, 폐하께서는 기어코 이번 결혼 장사를 성사시키고 싶으신 모양이군."
카벨레누스가 짧게 혀를 찼다.
"성사된다면, 양측에 나쁠 것이 없으니까요. 크리스티 왕국의 기술력과 슈바르한의 자원이 더해지면, 블랑셰 제국은 더욱 강대한 국가가 될 겁니다."
"강건한 국가라. 폐하께서 좋아할 만한 주제지."
"폐하께서는 항상 완벽한 블랑셰를 만들고 싶어 하셨으니까요."
"'나를 위해서' 말이지."
카벨레누스는 짧게 조소했다. 저 멀리 굳게 닫힌 응접실 문이 보였다.
"오늘 이 시간부터 알리시아의 안전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할 거다."
"이모님께 아가씨의 존재가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 부탁드려두었습니다. 하지만, 숨긴다고 될 문제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드러낼 문제도 아니지. 감출 수 있는 한, 최대한 감추는 편이 나아."
카벨레누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설령 저쪽에서 알리시아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다고 해도 꼬투리 잡을 만한 것을 찾아내지 못하면 그만이었다.
"최대한 문제가 생길 만한 요소는 배제해두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알리시아는 끝까지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해."
"아가씨께서도 알고 계신 편이 좋지 않을까요?"
"아니. 모르게 해. 어차피 그녀가 안다고 해서 해결된 문제가 아니니까."
알리시아는 아직도 가끔씩 악몽을 꿨다. 잘 자는 것 같다가도 한 번씩 깨서 카벨레누스가 옆에 있는지 확인하고서야 겨우 잠들곤 했다. 괜한 고민거리를 안겨서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최대한 빠르게 정리하고, 그녀에게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카벨레누스는 망설임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가제프는 재빨리 응접실 앞을 지키는 경비병에게 손짓해 카벨레누스가 멈추지 않고 방 안으로 도착할 수 있게 도왔다.
"드디어 그 유명한 북부의 주인을 뵙는군요."
방에 들어서자마자,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카벨레누스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슈바르한 대공 전하. 저는 벨로아 크리스티. 크리스티 왕국의 제3왕녀입니다."
눈이 마주친 순간, 곧장 인사가 건네졌다.
"카벨레누스 폰 슈바르한 블랑셰. 슈바르한의 통치자입니다."
카벨레누스는 능숙하게 벨로아의 인사에 화답하며, 그녀를 따라 예의를 표하는 사절단과도 빠르게 인사를 나누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전하를 뵙는 건 처음이군요."
벨로아가 싱긋 웃으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가제프는 반사적으로 카벨레누스의 표정을 살폈다. 대륙 최고의 미녀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소문이 과장된 게 아닐까 싶었는데, 실제로보니 오히려 소문이 축소되었단 생각이 들 정도로 이국의 공주는 대단한 미인이었다. 하지만 가제프의 우려와 달리, 카벨레누스는 별다른 감흥이 없어 보일 뿐이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여기까지 오시는 데에 불편한 점은 없으셨습니까?"
"눈길이 익숙지 않아 저희가 예상했던 것보다 도착이 늦어지긴 했지만, 덕분에 색다른 실험 결과를 얻을 수 있어서 그것도 나름 운치가 있더군요."
무엇보다 전하를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얻었고요. 벨로아가 흥미 어린 눈으로 카벨레누스를 올려다봤다. 유려한 호선을 그린 붉은 입술 사이로 가지런한 치아가 하얗게 빛났다.
"솔직히 좀 놀랐어요. 설원의 땅이라 해서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는데, 이곳은 너무 훌륭하네요. 역시, 블랑셰의 황태제께서 다스리는 땅이라서 그런가요."
"저는 슈바르한을 다스리는 자일뿐입니다."
"고귀한 핏줄은 어디서나 티가 나는 법이죠. 마치 전하처럼요."
"……."
"제가 너무 직설적으로 말씀드렸나요?"
벨로아는 살짝 턱을 추켜세웠다. 카벨레누스의 악명은 익히 들었지만, 그런 걸 신경썼다면 애당초 사절단으로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그녀는 제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카벨레누스에게는 자신이 필요한 이상, 굳이 스스로를 낮출 필요도 없었다.
"아닙니다. 저 역시, 돌려말하는 건 그리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좀 더 편히 말씀 드릴 수 있겠군요."
벨로아의 미소가 좀 더 진해졌다.
"저는 전하와의 약혼을 전제로 이곳에 왔습니다."
"아직은 그런 이야기를 하긴 이른 것 같군요."
"물론이에요. 아무리 괜찮은 조건들을 주고 받는 결혼이라고 해도, 미래가 불확실하다면 투자할 이유가 없잖아요."
좋게 말하면 당돌하고, 나쁘게 말하면 무례하다. 가제프는 카벨레누스의 등 뒤에서 눈치껏 벨로아의 말과 행동을 살피며 그녀가 어떤 인물인지 파악했다. 벨로아는 사절단의 중심인물. 앞으로의 협상을 고려하면 그녀에 대해 확실하게 파악해두는 편이 좋았다.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군요."
카벨레누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전하를 시험하러 왔어요."
벨로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입술을 움직였다.
"시험이요?"
"블랑셰의 황제 폐하께서 그러시더군요. 전하께서는 대륙의 주인이 되실 몸이시라고."
"……그 이야기는 이 자리에서 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카벨레누스의 시선이 벨로아의 등 뒤로 보이는 사신들에게 닿았다. 그들 역시 벨로아의 돌발행동을 예상하지 못했던 건지, 다들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굳이 못할 이야기도 아니지 않나요? 전하께서 정말로 대륙의 주인이 되실 거라면 말이에요."
카벨레누스의 눈이 미세하게 가늘어졌지만, 벨로아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가제프는 주변 분위기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벨로아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녀는 아직 너무 어렸다.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준이 아니었다. 급하게 카벨레누스의 신붓감을 찾은 터라, 황제 측에서 실수한 모양이었다.
"저는 최고가 아니면 싫거든요. 전하께서 제게 최고를 주실 게 아니라면, 이 약혼은 하고 싶지 않아요."
고개를 빳빳하게 든 벨로아를 보며 가제프는 당돌함과 무례함의 저울 중, 후자로 추를 기울었다. 벨로아가 능숙한 협상가였다면, 슈바르한 대공의 면전에서 저런 무례를 저지를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었다. 카벨레누스는 크리스티 왕국을 무력적으로 못 건드리는 게 아니었다. 그저 안 건드리는 것뿐이었다. 승리를 자신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내실이 탄탄한 국가를 건드리는 건 꽤 손해가 컸으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벨로아에게 일깨워줄 필요는 없었다. 적의 어설픈 태도는 이득일 뿐이었다.
"어떤 식으로 절 시험할 셈이십니까."
카벨레누스는 태연히 벨로아의 장단에 맞춰 대답했다.
"그건 슈바르한에 머물면서 천천히 생각해볼까해요."
카벨레누스의 대답을 호감의 표시로 받아들인 벨로아의 입꼬리는 더욱 위를 향했다. 협상은 이제 막 시작이었다. * * *
"아가씨와 계속 수업할 수 있게 되어서 기쁘군요."
"맞아. 나도 기뻐."
알리시아가 수줍게 웃었다. 제임스는 그녀를 따라 웃으며, 준비해 온 화구들을 하나둘 꺼내놓았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내심 복잡했다. 대공의 비호 아래에 있는 알리시아는 평범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지만, 일부러 신경쓰지 않았다. 귀족의 문제에 껴서 좋은 건 없었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알리시아가 카벨레누스의 연인이라는 사실은 그에게 있어선 꽤 충격적이었다. 슈바르한의 대공은 언제나 소문의 중심에 서 있었지만, 여자 문제에서만큼은 그는 담백했다. 오죽했으면 젊은 대공의 취향이 일반적이지 않은 게 아니냐는 억측까지 나올 정도였다.
'……역시, 애첩인 걸일까?'
제임스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직업 특성상, 그는 눈썰미가 좋은 편이었다. 처음에는 슈바르한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을 뿐이라고 여겼지만, 알리시아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귀족이 아니었다.
'물론, 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지만.'
제임스는 애써 머릿속 잡념을 지우려 애썼지만, 자꾸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권력자가 별궁에 남몰래 가둬놓은 여자라면, 결국 입장이 뻔하지 않은가. 귀족들은 평민을 같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당장이야 좋은 것들을 안겨준다만, 적당히 즐기다가 흥미가 떨어지면 알리시아에게 주어질 삶은 뻔했다. 사랑 받지 못한 애첩은 철저하게 버려진다. 애당초 첩이라는 건 존재하긴 해도 인정받지 못하는 자들이었으니까. 부르기 쉽게 첩이라는 표현을 쓸 뿐이지, 단 한 명의 남편과 아내만을 부부로 인정하는 제국의 법률은 첩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숙제로 내드린 그림은 좀 그려보셨나요?"
제임스는 속내를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알리시아가 카벨레누스의 진짜 애첩이라 해도 그건 제임스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은 단지 알리시아에게 그림을 가르쳐주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려보긴 했는데, 그게 좀 부끄러워서……."
"그저 그림일 뿐인데요.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임스의 부드러운 미소에 알리시아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스케치북을 내밀었다. 예전에 제임스가 선물한 스케치북이었다.
"대공 전하군요."
스케치북에 그려진 스케치들을 확인한 제임스가 숨을 토해냈다.
"맞아. 전하셔."
스케치북을 바라보는 알리시아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제임스는 빤히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저 얼굴을 보면 그녀의 감정을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반짝이는 눈동자, 발갛게 물든 홍조, 자연스럽게 지어진 미소. 카벨레누스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좋다는 듯, 잔뜩 들뜬 얼굴은 누가 봐도 사랑이 빠진 사람의 것이었다. 사내는 그 사실이 못내 신경쓰이고 가엽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하지만 제임스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알리시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수줍게 웃을 뿐이었다.
"전에 그랬잖아. 그리고 싶은 걸 그려보라고."
"……."
"역시, 많이 부족하지?"
침묵을 오해한 알리시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순진무구한 여자의 눈에 제임스의 손에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저 여자는 아무것도 모르겠지. 귀족이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 버린 평민이 얼마나 많은지도. 그녀가 입고 있는 좋은 옷, 비싼 악세사리, 훌륭한 대접, 그 무엇도 그녀의 것이 아니라는 것도.
"그렇게 많이 부족한 솜씨야?"
"……아뇨. 잘 그리셨습니다. 특징이 잘 살아 있어요."
"정말?"
심장에 무거운 돌이라도 얹어진 기분이다. 제임스는 되도록이면 알리시아의 사정을 유추하지 않으려 애쓰며 스케치북을 넘겼다. 하지만 그건 실수였다. 짧은 시간동안에도 불구하고 꽤 쌓인 스케치는 알리시아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오히려 그를 찜찜하게 만들 뿐이었다. 결국 제임스는 참지 못하고 스케치북을 닫았다.
"캔버스에 옮겨서 제대로 그려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아냐. 그러지 않을래."
알리시아는 성급하게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제대로 그려보는 게 부담되시나요."
"아냐. 그게 아니라, 좀 더 연습하고 싶어서 그래."
알리시아가 눈에 바짝 힘을 줬다.
"무슨 연습이요?"
"제대로 그려서 선물하고 싶거든. 이번에는 다른 사람 손을 빌리지 않고, 내 손으로 직접. 온전하게."
"……."
"물론, 그러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지만. 그래도 열심히 배우다보면 괜찮지 않을까?"
카벨레누스에게 많은 걸 받았음에도 아무것도 보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해줄 건 없지만, 그의 초상화 정도는 제 손으로 그려줄 수 있었다. 드러낼 수 없는 마음이라 하더라도, 그림을 선물하는 것 정도는 괜찮을 테니까. 알리시아는 콩콩 뛰는 심장을 느끼며 미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