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24)화 (24/164)
  • 24화. 이름을 불러봐

    2020.05.25.

    "안녕하십니까. 대공 전하. 제임스 닉슨이라고 합니다."

    제임스가 재빨리 카벨레누스에게 예의를 갖췄다.

    "그래."

    카벨레누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인사를 받았다. 그 와중에도 카벨레누스의 손은 알리시아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더 수업할 거라면, 실내에서 하도록 하지."

    보다시피 알리시아는 추위를 잘 타서. 카벨레누스는 뒷말을 덧붙인 후, 속으로 혀를 찼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우스운 수컷의 어설픈 과시욕이었다. 예민한 사내는 이성보다 본능적으로 제 것을 바라보는 시선을 탐지하고 경계했다.

    "저는 괜찮아요."

    "어차피 슈바르한의 풍경은 다 거기서 거기인 걸. 그냥 안에 들어가서 해."

    체온을 재듯, 카벨레누스의 손등이 알리시아의 뺨에 닿았다. 그림 수업을 허락한 건, 알리시아가 지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지 그녀를 힘들게 하려는 게 아니었다.

    "실내에만 있으니 답답해서 제가 제안했어요."

    "……."

    답답하다는 별것 아닌 말에 어쩐지 심장이 서늘하다.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의 어깨를 감싼 손에 좀 더 힘을 줬다.

    "그리고, 언제까지 추위에 떨 순 없잖아요. 이젠 익숙해져야죠."

    보통의 슈바르한 사람들처럼. 알리시아는 뒷말을 꿀꺽 삼키며 웃었다. 그녀는 아직 자신이 슈바르한에 익숙해지지 않았다는 걸 카벨레누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건 익숙해지지 않아도 돼."

    "그래도 계속 밖에 있어서 그런지 제법 익숙해진 것 같아요."

    "익숙해진 게 아니라, 몸이 언 거겠지."

    보다 못한 카벨레누스가 제 외투를 벗어 알리시아에게 입혔다. 신장 차이가 있어 외투 끝이 바닥에 끌렸지만 카벨레누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보다 단단하게 외투를 여며줬다. 덕분에 얼떨결에 옷 속에 파묻힌 꼴이 된 알리시아가 두 눈을 깜박거렸다.

    "훨씬 낫군."

    당황한 알리시아와 달리, 카벨레누스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러면 전하께서 추우시잖아요."

    알리시아는 황급히 외투를 벗으려고 했지만, 이내 카벨레누스에게 막혔다.

    "둘 중 하나만 선택해. 실내에 들어갈 건지, 아니면 그거라도 입고 있을지."

    사내의 단호한 시선은 물러설 생각이 추호도 없다. 결국 알리시아는 포기하고 제임스를 돌아봤다.

    "괜찮다면, 실내로 돌아가서 수업을 진행해도 될까?"

    "……."

    "제임스?"

    "아, 물론입니다."

    제임스가 알리시아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알리시아와 카벨레누스가 몸을 돌린 후부터 제임스는 더는 웃지 않았다. 그저 점점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 * *

    "이게 완성된 그림인가. 잘 그렸군. 그대는 이쪽에 소질이 있는 모양이야."

    "사실 제임스가 거의 다 그린 거나 마찬가지라서, 제가 한 건 크게 없어요."

    "……또, 제임스군.."

    잊을만 하면 튀어나오는 이름에 카벨레누스는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고작 이름이었다. 부르기 위해 존재하는 이름을 부르는 건 잘못이 아니었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는데, 감정은 그렇지 못했다.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알리시아가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의 손을 끌어와 손목 안쪽 여린 살에 살짝 입을 맞췄다. 알리시아의 두 뺨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림 수업은 재미있나."

    "사실, 그 문제로 이야기 드릴 게 있어요."

    "무슨 이야기?"

    "어머니의 초상화가 완성되었으니, 제임스와의 수업도 끝이잖아요."

    "……."

    카벨레누스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스스로가 꽤 유치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불쾌했다. 작은 입술로 오물오물 뱉어낸 다른 사내의 이름이.

    "제임스는 정말로 잘 가르쳐줘요. 다정하고, 아는 것도 많고, 그래서……."

    "그래서?"

    빤히 이어지는 카벨레누스의 시선에 알리시아의 초점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음에도 입술을 멈추지 않았다. 카벨레누스는 재촉하지 않은 채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제임스에게 계속 수업을 받고 싶어요."

    물론 각하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요. 뒤에 짧게 덧붙여진 알리시아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그렇지만 카벨레누스의 귀에는 분명하게 들렸다.

    "……안 될까요?"

    카벨레누스의 침묵에 알리시아는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카벨레누스는 대답 대신, 알리시아의 입술을 엄지로 눌렀다.

    "깨물지 마."

    "……."

    "긴장할 필요도 없고."

    "……."

    "나는 지금 꽤 기분이 좋으니까."

    알리시아의 눈이 느릿하게 깜박였다. 착각이 아니었다. 카벨레누스의 입꼬리는 분명하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원하는 게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

    "좋은 일이라고요?"

    "욕심이 생겼다는 뜻이고, 결국 욕망하게 된다는 뜻이니까."

    원하는 게 많은 사람은, 그리고 많은 걸 갖게 된 사람은 쉽게 떠날 수 없는 법이었다. 카벨레누스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알리시아의 뺨을 쓸었다.

    "원하는 게 있다면 더 말해도 좋아.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다 들어주지."

    "……제가 어디까지 욕심낼 줄 알고 그런 소리를 하세요."

    알리시아의 잇새로 짧은 숨이 흘러나왔다.

    "그런 말을 들으니, 그대가 어디까지 욕심 낼 수 있을지 기대되는군."

    "……."

    "뭐든 좋아. 내게 끊임없이 요구해봐. 나는 그대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많은 것들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니까."

    오만하게 웃는 사내는 자신만만했다.

    "농담한 거예요. 저는 이대로도 충분해요."

    "그건 두고봐야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거든."

    "과욕은 항상 화를 부를 뿐이에요."

    시간이 흐를수록 알리시아는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았다. 하지만 그건 과욕이었다. 제가 품은 감정은 결코 입밖으로 낼 수 없는 것이었다.

    "참 이상한 일이지."

    카벨레누스의 손끝이 천천히 내려와 알리시아의 턱을 쓸었다.

    "뭐가요?"

    알리시아는 두 주먹에 힘을 줬다. 차라리 냉담한 시선이면 마음 잡기가 수월했을 텐데, 관대한 태도는 자꾸만 여지를 남기곤 했다.

    "나는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사고 방식을 좋아하지만, 그대의 그런 모습을 보는 건 썩 마음에 들지 않아."

    "……."

    "좀 더 풀어져도 좋을 텐데."

    동공이 도드라지는 금색 눈동자가 재빨리 알리시아의 안색을 살폈다. 예전에 비하면 훨씬 나아졌지만, 여전히 그녀를 제대로 쥐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림 수업을 계속하고 싶다면 계속해도 좋아."

    하지만 그것도 결국엔 시간 문제겠지. 카벨레누스는 느리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는 기다림을 아는 사냥꾼이었고, 동시에 한 번 먹이를 물면 놓지 않는 사냥개이기도 했다. 카벨레누스는 자신이 원하는 걸 손에 넣지 못할 거라는 걸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되나요?"

    "그래.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조건이요?"

    알리시아가 꿀꺽 참았던 숨을 겨우 삼켰다.

    "제임스. 그 사내 이름은 그만 불렀으면 해."

    "제임스요?"

    뜻밖의 조건에 알리시아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대 입에서 다른 사내 이름이 나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카벨레누스의 대답에 알리시아의 얼굴이 더욱 달아올랐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사내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 사실에 기뻐해선 안 되는데, 알리시아는 제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하는 사내가 좋았다. 왜, 그녀가 다른 사내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카벨레누스를 불쾌하게 하는 일인지 묻고 싶을 만큼. 하지만 그래선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눈에 빤히 보이는 감정이라도 때론 보이지 않는 척 눈을 감아야만 했다. 알리시아는 애써 질문을 삼킨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원하지 않으신다면 하지 않을게요."

    "……."

    "왜 그러세요?"

    "그대가 더는 그자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족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라서."

    카벨레누스가 살짝 인상을 썼다. 알리시아가 제임스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 불쾌함이 어느 정도는 가셨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족되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건 좀 더 다른 것이었다.

    "……이름."

    "네?"

    "내 이름을 불러봐."

    카벨레누스의 시선이 알리시아를 향해 곧게 꽂혔다.

    "제, 제가 어떻게 전하의 이름을……."

    당황한 나머지, 손사레를 치던 알리시아의 손이 그대로 꽉 잡혔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오물거리는 입술을 보자, 카벨레누스는 그것이 정답임을 확신했다.

    "카벨레누스 폰 슈바르한 블랑셰."

    "……."

    "한 번 불러봐."

    카벨레누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16638392752444.jpg

    고작 이름 하나로 이렇게 초조한 기분이 들 수 있다는 걸 그는 처음 알았다. 황족으로 태어난 사내는 대부분 이름보다는 직위에 맞는 호칭으로 불렸고,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던 몇 안 되는 사람들은 이제 거의 사라져 유일한 혈육인 제르페누스 한 사람만 남았으니까. 카벨레누스에게 있어서 이름이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저, 저는……."

    재촉하듯 쏟아지는 시선에 얼굴이 따갑다. 알리시아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카벨레누스의 시선을 피하려 애썼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미 잡혀있었다.

    "예전에 불렀잖아."

    "제가 언제……."

    문득 떠오르는 알리시아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침만 꼴깍 삼켰다. 딱 한 번이었지만, 사내의 이름을 부른 적이 있었다.

    "……다 듣고 계셨어요?"

    알리시아가 울상이 된 얼굴로 카벨레누스를 올려다봤다.

    "그래."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의 찡그려진 눈가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죄송해요."

    "왜, 죄송하지?"

    "불러선 안 되는 이름을 불렀으니까요."

    알리시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허락했으니 상관없어."

    "……."

    "무엇보다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했거든. 그대가 부르는 내 이름."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침을 삼켰다. 계속 모른 척하고 싶었는데 무리였다.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사내의 시선이 뭘 말하고 있는지 눈에 빤히 보였으니까. 그것은 여자를 보는 눈이었다. 알리시아가 쭉 바라던 모습, 그대로. 그럼에도 그녀는 그 사실에 기꺼워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른 채 눈을 찡그렸다. 항상 현실을 잊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카벨레누스와의 관계는 단순히 좋아한다는 감정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그는 너무 많은 걸 가지고 있었고, 반대로 알리시아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 반대로 말하면, 알리시아는 잃을 게 없는 반면, 카벨레누스는 그만큼 잃을 게 많다는 뜻이었다. 그런 카벨레누스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뻔했다. 카벨레누스는 그 누구보다 자신의 위치를 잘 아는 사내였다. 그가 귀족인 이상, 알리시아에게 베풀 수 있는 최대는 정부 자리 정도일 것이었다. 그것이야말로 그 무엇도 잃지 않고, 감정을 풀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었으니까.

    '옆에만 머물 수 있다면 뭐든 상관없지만…….'

    지금 이상의 것을 바라는 것부터 과욕이었다. 애당초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에게 많은 걸 요구할 생각이 없었다. 솔직히 그가 그녀가 첩으로 남길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었다. 어떤 식이든 간에 그녀는 그의 옆에 있고 싶었으니까. 그것이 노예의 입장이든, 첩의 입장이든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카벨레누스가 미혼일 때의 이야기였다. 그에게 아내가 생긴다면, 알리시아는 더는 그의 곁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귀족의 결혼에 필요한 건 감정이 아닌 조건이라 해도, 부부 간의 존중과 의무는 존재했다. 정부는 부부 간의 존중과 의무에 위배되는, 부끄러운 존재였다. 아무리 쉬쉬한다 해도 기혼자에게 정부의 존재는 흠이었고, 특히 사생아는 더욱 그랬다.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의 흠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완벽한 사내를 망가트리고 싶지 않았다.

    "……역시, 못 부르겠어요."

    "왜?"

    이름까지 부르면 겨우 눌렀던 감정이 터져나올 것 같으니까. 알리시아는 끊임없이 자신의 처지를 곱씹으며 차마 할 수 없는 대답을 남몰래 삼켰다.

    "저는 전하의 이름을 부르고 싶지 않아요.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인 걸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카벨레누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저는 제 신분을 잊지 않아요."

    "신분은 상관없어. 어차피 그대는-."

    그때였다. 갑자기 들린 노크 소리에 카벨레누스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당장 꺼지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아직은 이성이 남아 있었다. 카벨레누스는 이를 꽉 다문 채로 긴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들어와."

    "전하, 쉬시는 도중 죄송합니다. 잠시 말씀 드릴 게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온 가제프가 급하게 카벨레누스에게 예의를 차렸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그게……."

    가제프의 시선이 흘끔 알리시아를 향했다.

    "잠시 나갔다오지. 먼저 자도록 해."

    카벨레누스는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리시아의 앞에서 할 수 없는 이야기는 하나뿐이었다.

    16638392752449.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