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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23)화 (23/164)

23화. 아름다운 사내였다

2020.05.21.

"오늘 화가가 찾아왔다고 들었는데, 어때. 마음에 들었나? 가제프에게 듣기론 초상화에 특히 일가견이 있다고 하던데."

"네. 굉장히 솜씨가 좋으신 분이었어요. 그런데……."

"그런데?"

"제가 실수를 해버렸어요."

알리시아의 어깨가 축 처졌다.

"실수? 무슨 실수?"

"그림을 배워서 직접 그려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는데, 그만 하겠다고 해버렸어요."

"그게 무슨 실수라고."

카벨레누스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전하의 허락을 받고 했어야 했었잖아요. 제 독단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었는 걸요."

이래서 좋은 것을 누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조금만 방심하면 욕심이 비집고 나와 실수를 하게 되니까. 알리시아는 얼굴을 찡그린 채로 가냘픈 한숨을 뱉었다. 카벨레누스는 풀 죽은 알리시아에 혀를 차며 그녀의 앞에 섰다.

"그 정도는 그대 선에서 승인해도 상관없어. 죄인 같은 얼굴 하지 마."

"하지만……."

"더 큰 일을 하게 될 텐데, 그 정도로 겁 먹으면 곤란해."

"더 큰 일이요?"

알리시아는 고개를 든 채 카벨레누스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그래. 아주 큰 일."

카벨레누스의 손이 알리시아의 어깨를 감쌌다.

"뭐든 할게요."

"내가 뭘 시킬 줄 알고."

"저는 전하를 위해선 뭐든 할 수 있어요."

알리시아의 성마른 손이 카벨레누스의 손등을 쥐었다. 진심이었다. 단순히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를 위해 뭐든 할 수 있었다.

"말만 들어도 황송하군."

카벨레누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알리시아는 그 미소를 따라 웃으며 뺨을 붉게 물들었다.

"모르코 부인을 괜히 붙여놓은 게 아니야. 문제가 된다면 그녀 선에서 알아서 정리해줄 테니, 그대 혼자 골머리를 앓지 말고 편하게 생각해."

카벨레누스의 엄지가 부드럽게 알리시아의 눈가를 매만졌다. 알리시아는 살짝 눈을 내리깐 채로 그 손끝에 집중했다. 느릿하게 살갗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마치 그녀를 달래기 위한 위로처럼 느껴졌으니까.

"게다가 당분간 시끄러워질 테니, 집중할거리가 있으면 훨씬 낫겠지."

"시끄러워진다고요? 뭐가요?"

"그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차피 금방 끝낼 문제니까."

카벨레누스가 짧게 알리시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알리시아는 끌어당기는 카벨레누스의 손을 거부하지 않으며 그의 가슴에 기댔다. 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가, 얇은 천 너머로 느껴지는 온기가 좋았다. 이 순간, 이대로 시간이 멎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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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아무래도 재능이 있으신가봅니다."

제임스의 칭찬에 알리시아는 뺨을 붉히며 캔버스를 바라봤다. 제임스와 순차적으로 그려나간 어머니의 초상화는 어느덧 완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감을 다 말리고 한 번만 덧칠하면 정말로 끝이었다.

"제임스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거야."

울고 싶지 않았는데, 웃고 있는 초상화 속 모친을 보자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잠겼다. 그림 속에서 아름다운 드레스와 보석들로 치창한 어머니는 모두가 손가락질하던 괴물이 아닌, 우아한 귀부인으로만 보였다. 그 사실이 못내 기뻐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지금이나 제가 도울 뿐이지, 나중에는 혼자서도 충분히 그리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혼자서 할 자신은 없어서……."

"너무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초상화뿐만 아니라, 풍경화나, 정물화 뭐든 좋습니다. 아가씨께서 마음에 드시는 걸 그리시면 되는 거니까요. 그림은 결국 기록이거든요."

"기록?"

알리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이 죽어도 그림은 남습니다. 그리고, 화폭에 담아낸 순간을 영원하게끔 만들죠. 제가 그림을 좋아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저는 그림이야말로 영원히 기록되는 마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

"그리면 그릴수록 실력은 늘 겁니다. 그러니, 너무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아무거나 마음 가는대로 그려보세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결국, 마음이 담긴 것이니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임스는 가져온 화구에서 스케치북을 하나 꺼냈다. 알리시아는 얼떨결에 제임스가 내민 스케치북을 건네받았다.

"제가 예비로 가지고 다니는 스케치북입니다."

"스케치북?"

"저는 뭔가 떠오르거나 그리고 싶을 때마다 간단하게 스케치해서 기록으로 담겨놓거든요. 아가씨께도 하나 드릴 테니, 뭐든 한번 채워보세요. 분명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고마워."

알리시아의 미소에 제임스도 따라 웃었다.

"벌써 오늘 수업 시간이 끝나가는군요."

둘 사이의 묘한 기류를 눈치챈 모르코 부인이 재빨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알리시아가 카벨레누스를 좋아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젊은 화가는 노련한 모르코 부인조차 괜히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한창 때인 알리시아라면 충분히 마음이 흔들려도 이상할 게 없었다.

"매번 수업이 왜 이렇게 일찍 끝나는지 모르겠어."

알리시아가 아쉬움을 여과없이 드러내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녀는 배우는 게 좋았다. 모든 것들이 낯설면서도 신기했고, 또 그만큼 설렜다. 새로운 세상을 맛볼 때마다 잊고 있던 감각들이 살아났다. 그녀가 정말로 살아 있다는 걸 분명하게 느끼게 했다.

"정 아쉬우시다면, 좀 더 배워보시겠습니까?"

"응?"

"아가씨만 괜찮으시다면, 스케치하는 걸 좀 더 봐드릴 순 있습니다."

"그래도 될까?"

어린아이처럼 반짝이는 알리시아의 두 눈에 제임스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단단히 입단속을 명 받았기에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궁금하면서도 두려웠다. 그런데 막상 마주한 건 말간 눈을 한 여자일 뿐이었고, 제임스는 뭐든 최선을 다해 배우려고 하는 순진무구한 아가씨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호감에 가까웠다. 그녀는 여느 귀족들과는 사뭇 다른 구석이 있었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그릴 게 많거든요. 그냥 볼 때와 뭔가 그려야겠다고 생각할 때의 시각은 분명 다를 겁니다. 뭘 그려야할지 감이 오지 않으실 수도 있으니, 오늘은 제가 봐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거절하지 않을게."

알리시아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은 이제 제법 익숙하게 느껴졌다. * * *

"많이 추우십니까?"

제임스가 걱정 어린 눈으로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두툼한 외투로 꽁꽁 싸맸음에도 달달 떨고 있는 여자는 안쓰러워 보였다.

"아냐. 참을 만해."

알리시아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지독한 추위만큼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알리시아는 추위에 움츠리기보단 허리를 곧게 피려고 애썼다. 지금껏 그녀가 만나온 슈바르한 사람들은 추위를 타지 않았다. 그래서 알리시아는 부디 하루라도 빨리 자신도 슈바르한의 추위에 익숙해졌으면 했다. 다르다는 건, 돋보인다는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어디에도 어울리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알리시아는 더는 이방인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추위를 많이 타시나보군요."

"나는 겨울이 없는 곳에서 왔거든. 사실 눈을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야."

얼어붙은 숨결이 하얗게 부서져진다. 알리시아는 스케치를 하다 말고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노이슈타인에서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했지만, 지금으로선 어느 방향에 노이슈타인이 있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다.

"겨울이 없다면, 혹시 남부 지방 출신이신가요?"

"응. 맞아."

"고향이 그리우시겠군요."

"그립다라……."

알리시아는 멍하니 흩어지는 새하얀 입김을 바라봤다. 이곳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대단하게 여겨질 정도로 잔혹한 추위였다. 사계절 내내, 따뜻하던 노이슈타인의 기후와 비교하면, 슈바르한의 혹한은 모르코 부인이 말한 '신이 버린 땅'이라는 이명이 절로 떠오르게 했다. 그럼에도 알리시아는 이 얼어붙은 땅이 좋았다. 살을 에이는 한기는 고통이었지만, 그만큼 새삼스레 살아 있다는 걸 느끼게 했다.

"잊고 지내다가도 생각나는 게 고향이니까요. 언젠가는 그리워지실지도 모르죠."

"정말로 그럴까."

알리시아는 의미없는 대답을 뱉으면서 제임스의 시선을 피하며 다시 멈췄던 손을 움직였다. 제게 있어서 고향이 어떤 의미인지, 깊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저도 그래서 이곳으로 돌아왔는걸요."

"제임스도 다른 지역에서 왔어?"

"이곳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사실 저는 슈바르한보다는 수도에 더 오래 살았죠."

"블랑셰의 수도라면, 알로거스트 맞지?"

대부분의 시간을 책을 보며 보내는 터라, 이런저런 지식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었다. 알리시아는 책에서 봤던 화려하던 수도의 그림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저는 그곳에서 그림 공부를 한 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슈바르한으로 돌아왔습니다. 좀 더 넓은 세상이 궁금했거든요."

"여행을 오래 했나봐."

알리시아의 얼굴에 호기심이 서렸다. 제임스의 미소가 좀 더 진해졌다.

"연어 구이가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도 세상을 떠돌았을 겁니다."

"연어 구이?"

"갓 잡은 연어에 소금만 쳐서 통째로 구워먹는 요리입니다. 간단하지만 의외로 별미죠. 특히, 저는 연어 구이를 먹을 때면, 한 마리를 통으로 뜯어먹는 걸 좋아합니다. 얼굴이며, 손이며 그을음과 기름이 줄줄 흘러도 그렇게 먹어야 제대로 먹는 기분이 들거든요."

"……."

"의외죠?"

제임스가 다 안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보고, 그에 맞게 생각하죠. 하지만 그건 주관적인 시선일 뿐입니다. 실제로 그 사람에 대해 제대로 안다곤 할 수 없죠. 나쁜 버릇이죠. 그렇지만,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는 그런 주관이 필요합니다."

"……."

"단순히 본 것만을 솔직하게 그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되면 모두가 똑같은 그림을 그릴 뿐인 걸요."

제임스가 손으로 알리시아의 스케치를 가리켰다. 알리시아는 처음부터 실력이 나쁘지 않았다. 기초만 제대로 잡아준 것만으로도 실력이 눈에 띄게 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스케치는 정적인 느낌이 강했다. 모친의 초상화를 그리던 때와는 사뭇 달랐다.

"그림에 형식은 없습니다. 좀 더 마음을 편히 가지시고 그냥 아가씨께서 그리고 싶은 걸 그리시면 됩니다."

"내가 그리고 싶은 거라면……."

반사적으로 알리시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사실 어머니 말고 그리고 싶은 사람이 한 사람 더 있었다.

"알리시아."

순간,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알리시아는 느리게 두 눈을 깜박였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지만, 착각이 아니었다. 그녀의 등 뒤로 카벨레누스가 보였다.

"전하."

알리시아는 재빨리 몸을 돌려 카벨레누스를 반겼다. 그의 존재를 인지한 후부터 자연스럽게 만면에 미소가 번졌다.

"도대체 밖에서 뭘 하는 거지. 춥지도 않나?"

카벨레누스가 자연스럽게 알리시아를 제 쪽으로 당겼다. 얼마나 밖에 있었던 건지, 알리시아의 몸은 무척 찼다. 카벨레누스는 얼음장처럼 꽁꽁 언 알리시아의 손을 매만지며 짧게 혀를 찼다. 가뜩이나 몸이 약한데, 이러다가 감기라도 걸리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수업 중이라서요."

"오늘 수업은 이미 끝난 걸로 아는데."

알리시아의 수업 시간은 이미 전부 꿰고 있었다. 지금은 수업 시간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카벨레누스는 창문으로 본 풍경이 거슬렸다. 참다 참다, 결국엔 하던 일도 멈추고 이곳까지 걸음을 옮길 정도로. 카벨레누스는 집무실에 산처럼 쌓여 있던 서류를 떠올리며 짧게 헛웃음을 뱉었다. 슈바르한은 오랫동안 귀빈을 맞아본 적이 없었다. 생존만으로도 급급했던 시절 탓에, 파티 문화 역시 수도에 비하면 한참 떨어졌다. 자리를 비운 동안 밀린 일도 모자라서, 곧 찾아올 사절단 문제까지 더해지니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연장 수업이에요. 제가 수업이 끝나는 걸 아쉬워했더니, 제임스가 흔쾌히 추가 수업을 해준다고 했거든요."

이 시간에 카벨레누스를 보는 건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알리시아는 깜짝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잔뜩 신이나 종달새처럼 재잘거렸다. 하지만 들뜬 그녀와는 반대로 카벨레누스의 미간은 미세하게 좁힐 뿐이었다.

"제임스?"

"아, 전하께선 제임스와 만난 적이 없으신가요?"

또, 제임스다. 카벨레누스의 미간이 아까보다 훨씬 더 눈에 띄게 좁아졌지만, 알리시아는 여전히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화가인가?"

"네. 제임스 닉슨. 제게 그림을 가르쳐주고 있는 선생님이에요."

제임스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알리시아를 따라, 카벨레누스의 고개도 따라 움직였다. 오랫동안 타지 생활을 해 슈바르한에 별다른 인맥이 없는, 그러나 슈바르한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금세 주목 받을 정도로 실력도 갖춘 신진화가. 애당초 예술에는 별 관심이 없기도 했고, 무엇보다 부하가 정리해둔 조건만 보고 화가를 뽑았던 터라 카벨레누스는 실제로 제임스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저 이제는 거의 쓰지 않는 구식 이름을 들으며 나이가 있을 거라고 얼핏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제임스는 카벨레누스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젊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아름다운 사내였다, 그것도 무척. 뒤늦게야 그 사실을 깨달게 된 카벨레누스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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