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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22)화 (22/164)
  • 22화. 그러고 싶지 않았다

    2020.05.18.

    "제임스."

    "네. 아가씨."

    다행히 이번에는 틀리지 않게 불렀다. 알리시아는 겨우 한숨을 돌린 다음, 얼른 제 목적을 드러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림을 새로이 그려줄 거라고 들었는데, 실제로 보지 않고도 초상화를 그릴 수 있어?"

    "작가마다 화풍이 달라서 실제 본 것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가능은 합니다."

    "그럼, 이런 낙서 같은 것으로도?"

    알리시아는 하녀가 가져온 상자 속 그림을 꺼내 제임스에게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초라한 그림이었지만, 알리시아가 묘사할 수 있는 수준은 딱 그 정도라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초상화 속 인물의 외형을 설명해주실 수 있는 분이 계시다면 가능합니다. 이 스케치는 무엇보다 채색이 없어서 설명이 없다면 아무런 색도 입히지 못할 테니까요."

    "내가 설명할 수 있어."

    "아가씨께서요?"

    "사실, 이분은 내 어머니시거든."

    알리시아의 얼굴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번졌다.

    "아, 그러시군요. 어쩐지 아가씨와 많이 닮았다 생각했습니다."

    제임스는 잔뜩 기대 어린 눈으로 절 보는 알리시아를 보며 따라 미소를 지었다.

    "많이 닮아 보여?"

    "네. 그래서 아가씨께서 모델로서 도와줄 수 있다면 수월하게 작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뭐든 도울게. 그림만 완성될 수 있다면 뭐든 좋아."

    알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성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가 얼굴에 쏟아지는 눈초리에 슬쩍 모르코 부인을 올려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모르코 부인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알리시아는 서둘러 들뜬 기색을 억누르며 기품있는 미소를 지으려 애썼다. 어떤 순간에서도 입꼬리를 약간만 올린 채 우아하게 웃어 보이는 미소를 완성하기 위해서 알리시아는 입에 수십 번 경련이 이는 걸 참아왔다.

    "아가씨. 그렇게까지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물론, 노력과 별개로 아직까지 모르코 부인의 엄격한 선은 넘지 못했지만. 알리시아는 귓가에 조용히 속삭이는 모르코 부인의 목소리에 아쉬워하며 입가에 힘을 풀었다가 문득 마주친 시선에 반사적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유리 구슬을 연상시키는 은색 눈동자가 오롯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아름다우셔서요."

    "네?"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경어가 튀어나왔다. 알리시아는 미간을 찡그렸다.

    "괜히 칭찬은 하지 않아도 돼."

    "괜한 칭찬이 아닙니다."

    제임스가 한 번 더 웃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알리시아의 신임을 얻지 못했다. 숲속에 산다는 요정 이야기가 진짜인 게 아닌가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아름다운 사내는 웬만한 미녀에 비견되어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사내에게 아름답단 소리를 들어봤자, 으레 예의상 하는 말이라 생각하게 될 뿐이었다.

    "이 그림, 아가씨께서 그린 것이지요?"

    "……그걸 어떻게 알았어?."

    "그림에는 그린 사람의 마음이 담기기 마련이니까요. 많이 그리우셨나 봅니다."

    "……."

    프로의 눈에는 그런 감정도 보이는 걸까. 알리시아는 낡은 초상화를 바라보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다 안다는 시선에 속내가 그대로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특징이 잘 잡혀 있는데다가, 아가씨께서 모델까지 되어주신다고 했으니 그림을 그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다만?"

    "아가씨께서 직접 그려보시는 건 어떨까요?"

    "내가 직접?"

    알리시아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랗게 커졌다.

    "네."

    "원하신다면, 제가 그릴 수도 있지만, 이 그림만큼은 아가씨께서 훨씬 잘 그리실 테니까요."

    "나는 따로 그림을 배워본 적도 없고……."

    "배우신 적도 없는데, 이 정도 해내실 정도면 재능이 없으신 것도 아니니 충분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아서……."

    갑작스러운 제안에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모르코 부인의 눈치를 살폈다.

    "아가씨만 괜찮으시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긴 합니다. 예술 역시, 귀부인의 소양 중 하나이니까요."

    안 된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모르코 부인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알리시아는 더욱 황망스러운 기분으로 제임스를 바라봤다.

    "정 부담스러우시다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

    "하지만, 그림이라는 건 정말로 그리고 싶은 사람이 그려야 되는 것이니까요. 분명 시간은 더 걸리더라도 아름다운 그림이 나올 겁니다."

    "……."

    제임스의 아름다운 미소를 바라보며 알리시아는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알리시아에게 있어서 그림은 망각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하나라도 어머니를 더 기억하기 위한 발악이었다. 막상 그림을 배우라는 제안을 받아도 말도 안 되는 소식을 들은 양 기분이 멍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알리시아는 주먹을 꽉 쥔 채로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 * *

    "웬일이십니까“

    <이미 서신으로 소식을 들었을 텐데도 내게 연락 한 번 하지 않는 아우가 괘씸해서 말이다.>

    제르페누스는 짓궂게 말끝을 올리며 팔짱을 꼈다. 언제나 통신할 수 있게 채비를 해두었음에도 무심한 동생은 항상 먼저 연락을 하게 만들었다.

    "사절단이 온다는 건 이미 들었고, 그에 맞게 무사히 준비도 하고 있으니 괜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사절단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도 그렇게 덤덤한 거냐.>

    "어떤 의미를 담았던 간에 제가 그 의미를 느끼지 못하면 무의미할 뿐입니다.“

    <어울리지 않게 혓바닥을 놀리는 걸로 봐선 아직도 네 말도 안 되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모양이구나. 귀여운 구석이 전혀 없는 아우 녀석아.>

    제르페누스가 턱을 괸 채로 대놓고 혀를 찼다. 단시간에 카벨레누스가 변심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약간의 틈이라도 있지 않을까 했는데 고집 센 아우에게선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카벨레누스는 진심이었다. 오랫동안 동생을 봐온 제르페누스에게는 그 점이 너무 분명하게 보여 그만큼 곤란해졌다.

    "그건 논의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미 결정을 내렸고 번복할 생각이 없으니까요.“

    <혹시나 했지만,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 역시 할 수 없지.>

    제르페누스는 말이 통하지 않은 동생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핏줄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블랑셰 혈통은 다들 대대로 고집이 셌다. 한번 결심한 바를 꺾기 위해선 웬만한 노력으론 어려웠다.

    <사절단이 출발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르면 다음 주, 늦어도 그 다음 주 정도면, 사절단이 슈바르한에 도착할 거다.>

    "최선을 다해 대접하겠습니다."

    무미건조한 얼굴로 대답하는 카벨레누스에게선 딱 그어진 선이 분명하게 보였다. 제르페누스는 속으로 혀를 차며 의자에 상체를 기댔다.

    <그리고, 사절단에는 내가 눈 여겨본 아가씨 하나가 동행할 거다. 우리의 내기대로 말이야.>

    "…….”

    <이름은 벨로아 크리스티. 크리스티 왕국의 막내 왕녀다. 이제는 이름도 찾아볼 수 없는 망국의 공주가 아니라, 뭐 하나 부족함 없는 제대로 된 왕국의 공주지. 게다가 엄청난 미인이야. 볼 것도 없는 그 노예 여자와는 여러모로 차원이 다르다고 보면 돼.>

    "저속한 표현은 좋지 않습니다."

    카벨레누스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네가 불쾌해하는 이유가 단지 내가 저속한 표현을 썼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여자를 깔봤기 때문인지 헷갈리는구나.>

    "…….“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둘 다 같거든. 게다가, 후자 때문에 더 기분 나빠 보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말이야.>

    "…….“

    <아우야. 이왕이면, 좀 더 확실하게 감정을 감추는 편을 배우는 게 좋을 거다. 네가 그런 식으로 계속 티를 내니, 이 형님의 심기도 덩달아 불쾌해지지 않니. 자꾸만 그 여자의 존재가 거슬리게 돼.>

    제르페누스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지만, 휘어진 눈매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동자는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나는 널 믿는다. 네가 아직까지는 이성적이고, 제대로 된 판단이 무엇인지 알 정도의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그래서 크리스티 왕국인 겁니까?“

    <그래. 크리스티 왕국과 연을 맺어두는 게 슈바르한에 어떤 의미인지 정도는 너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다.>

    제르페누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는 동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카벨레누스에게 약간이라도 이성이 남아 있다면 그는 제르페누스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단지, 아름답거나 지위가 높은 여자로 해결될 문제였다면 좋겠지만 너는 그런 녀석이 아니지. 네가 그런 것에 홀렸다면 오래 전에 여색 놀음에 빠졌을 테니 말이다.>

    "…….“

    <내가 고른 여자는 네가 원하던 것을 가진 사람이다. 지금의 슈바르한에 가장 필요한 사람이지. 뭐,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테지만 말이다.>

    "그런 건 제가 선택할 문제입니다.“

    <선택은 네 몫이지만, 선택지는 내가 줄 수 있는 거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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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르페누스가 교활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결혼은 다른 것도 아닌, 카벨레누스의 인생을 건 문제였다. 이 문제에서만큼은 제르페누스는 너그러운 형처럼 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너는 책임감이 강하지. 한 번 제 사람이라고 생각한 자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려고 할 거야. 너의 사람들이 널 신처럼 따르는 것도 결국, 네가 그런 사람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거든.>

    "…….“

    <그런 네가 과연, 내가 준 기회를 놓칠 수 있을까?>

    운 좋게 마정석이 발견되면서 수명이 길어지긴 했지만, 슈바르한의 고질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카벨레누스는 선택을 해야 했고 제르페누스는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죽음의 땅따위 버리면 그만이지만, 카벨레누스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제르페누스는 항상 그 점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지금은 그 사실에 감사했다. 지킬 게 많은 사람은 그만큼 틈도 많이 생기는 법이었다.

    <아우야, 잠시 열은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해보렴. 감정은 한때고, 이득은 오래 남는다. 그 여자를 선택해봤자, 네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아무것도 없단다.>

    "이득을 얻기 위해 내린 결정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더 재고해볼 필요가 있겠구나.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결혼은 귀족에게 있어선 멍청한 선택일 뿐이니까.>

    "…….“

    <평범한 결혼을 하렴. 아우야. 한순간의 감정에 휩쓸려 네 핏줄을 더럽히지 말도록 해.>

    제르페누스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카벨레누스를 똑바로 응시했다. 흠 없는 핏줄로 태어난 이복동생은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 동생에게 현실을 깨우쳐주는 것이야말로 연장자의 미덕이었다.

    "평범한 결혼은 뭡니까.“

    <적당히 그럴싸한 조건의 여자와 적당한 값을 주고 받는, 일반적인 귀족들의 결혼이지.>

    "…….“

    <정 그 여자가 좋다면 옆에 두거라. 그것까지는 말리지 않으마. 애첩 하나 둔다고 해서 권위가 무너질 정도로 내 동생은 하찮은 녀석이 아니니까. 그 정도는 얼마든지 눈 감아줄 수 있지.>

    "폐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군요.“

    <나라서 할 수 있는 거지.>

    제르페누스는 태연하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선황제의 애첩으로 살던 모친의 삶을 동정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는 황제였다. 선택에 있어선 감정이 아닌, 이성에 입각한 결정을 내리는 게 옳았다.

    "저는 선황제 폐하와 같은 삶을 살지 않을 겁니다.“

    <너는 아직도 과거에 얽매여 있구나.>

    "그건 피차 마찬가지 아닙니까.“

    <…….>

    결혼 장사를 하고, 알리시아를 애첩으로 들이는 건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부친과 같은 길을 가는 것이었다. 카벨레누스는 방 안에서 아무도 모르게 홀로 울음을 삼키던 모친을 기억했다. 그 모습을 기억하는 이상, 그런 짓을 할 수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카벨레누스가 모친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존중이었다.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폐하께서는 저와 내기하셨고, 저는 질 생각이 없으니까요. 모든 건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시간문제라고?>

    제르페누스가 거칠게 숨을 뱉었다.

    "이미 슈바르한의 안주인은 정해져 있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이것뿐입니다."

    카벨레누스는 제르페누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덤덤한 표정을 지켰다. 제르페누스는 일 년 동안 자신이 직접 고른 여자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흔들리지 않으면, 알리시아와의 결혼을 인정해주겠다고 말했다. 젊은 황제는 가치를 따지는 일에 능숙했다. 그리고 카벨레누스에게 필요한 조건을 갖춘 아내가 어떤 여자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제르페누스의 중매로 이루어질 결혼은 분명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카벨레누스를 잘 알고 있는 형제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괜찮은 제안이었고, 예전의 카벨레누스라면 충분히 넘어갈 만한 이야기였다. 과거, 카벨레누스가 생각하던 결혼이란 필요한 조건들이 맞는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결혼 하나로 슈바르한의 오랜 골칫거리를 해결할 수 있다면 분명 남는 장사였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카벨레누스는 더는 알리시아를 놓을 수 없었다. 품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온기가 이제는 너무도 당연해 그것이 사라지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말하지 않았니. 질 생각이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어떤 수를 쓰더라도. 제르페누스는 속내를 감추며 느긋하게 웃었다. 그는 동생을 잘 알고 있었지만, 동생은 아직 제 형이 어디까지 바닥을 칠 수 있을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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