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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21)화 (21/164)
  • 21화. 보고 싶으니까

    2020.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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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도착했군."

    카벨레누스가 식당에 앉아 있는 알리시아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오셨어요?"

    알리시아는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처럼 벌떡 일어났다. 오래 떨어져 있었던 건 아니지만 계속 함께하다가 멀어지니 어쩐지 허전했다. 게다가 모르코 부인의 도움으로 알리시아는 멋을 낸 상태였다. 카벨레누스의 반응을 은근히 기대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시장할 텐데, 바로 식사를 하도록 하지."

    알리시아의 기대와 달리, 카벨레누스는 무심한 얼굴로 자리에 앉을 뿐이었다. 알리시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카벨레누스를 따라앉았다. 음식이 차려지는 와중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열심히 곁눈질을 해도 카벨레누스는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슈바르한의 음식이 입에 맞을진 모르겠군."

    "괜찮아요."

    "남부와 달리, 북부 지역은 향신료를 다양하게 쓰지 않아서 그대의 입맛에는 다소 밋밋하게 느껴질 수도 있거든."

    "그렇군요."

    "알리시아."

    "네, 네…… 아."

    의무적으로 대답을 뱉던 알리시아가 얼굴에 느껴지는 시선에 어색하게 웃었다. 턱을 삐딱하게 세운 카벨레누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그게……."

    알리시아의 창백한 뺨에 붉은 물이 들었다. 칭찬을 기대했다고 말하기엔 역시 부끄러웠다.

    "말해."

    "……꼭 말해야 하나요?"

    "내가 그대 생각을 멋대로 판단하길 바란다면 얼마든지."

    카벨레누스가 가볍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알리시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거리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달라진 것 같다고 말씀해주실 줄 알았거든요."

    "……."

    "부끄럽지만, 사실 조금은 예뻐졌다고 생각해서……."

    역시, 이런 말을 하는 건 수치스럽다. 알리시아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애꿎은 채소만 포크로 괴롭혔다.

    "나는 살면서 예쁘단 말 같은 건 해본 적 없어."

    "네, 그러시겠죠."

    알리시아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오히려 그 점이 카벨레누스의 신경을 긁었다. 카벨레누스는 살짝 미간을 찡그리다가 입을 뗐다.

    "정말로."

    "네."

    "……."

    "……."

    하지만 그건 썩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좀 더 숙여든 알리시아의 고개를 보는 카벨레누스의 미간에 더욱 깊은 주름이 졌다. 카벨레누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입을 맞추고 싶다곤 생각했어."

    "네?"

    알리시아의 포크질이 멈췄다. 여전히 카벨레누스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리고, 불쾌했지."

    카벨레누스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움직임에 맞춰서 부드럽게 드러나는 몸선의 드레스는 알리시아와 잘 어울렸지만, 다른 이들도 같은 생각을 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가라앉았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녀는 아무도 시선을 두지 않을 만큼 초라한 여자였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그 사실이 기꺼우면서도 달갑지 않은 건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었다.

    "그, 그럼 다음부터는 입지 말까요?"

    열기가 훅 솟았다가 바로 가라앉는다. 알리시아는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니. 입고 싶으면 입어. 그것까진 내가 뭐라 할 부분은 아니니까."

    "하지만, 불쾌하셨다고 하셨잖아요."

    "불쾌했어. 하지만 이건 내 생각이지. 그대 생각이 아니지."

    "저는 전하께서 불쾌해하시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미움 받고 싶지 않다. 이대로 머물고 싶다. 알리시아는 애타는 시선으로 카벨레누스를 바라봤다.

    "나는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이 그대를 보는 걸 좋아하지 않아."

    "네?"

    "그대를 가둬놓고 나만 보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해."

    "……."

    "그런데도 내가 불쾌하다는 이유로 따를 수 있나?"

    카벨레누스가 턱끝을 살짝 추켜올렸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에서 빛나는 눈동자는 날 선 짐승처럼 위협적이었다.

    "저는 그저……."

    "그대에게 명령하는 건 쉬운 일이야. 그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지. 나는 그대가 좀 더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

    "어째서요?"

    "보고 싶으니까."

    카벨레누스는 슬쩍 감춰두었던 속내를 드러내며 턱을 매만졌다. 그가 원하는 건 말 잘 듣는 노예가 아닌, 동등한 위치에 선 아내였다. 모두가 우러러보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고귀한 자리의 주인.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를 자신이 있는 자리까지 끌어올릴 셈이었다.

    "내가 그 드레스를 좋아하지 않는 건, 이젠 그대가 다른 사람 눈에도 예쁘겠구나 했기 때문이야."

    "하, 하지만 분명 예쁘다는 말은 해본 적 없으시다고……."

    가라앉은 줄 알았던 열이 다시금 치민다. 알리시아는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말을 더듬었다.

    "해본 적 없다고 했지, 안 한다곤 안 했어."

    "……."

    이대로라면 심장이 터져버리는 게 아닐까. 알리시아는 멍하니 카벨레누스를 보고만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러지 않고선 더는 새빨개질 수 없을 정도로 달아오른 얼굴을 감출 수 없을 것 같았다. 알리시아는 그렇게 한참 테이블 아래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래요."

    그 짧은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알리시아는 겨우 가라앉은 얼굴을 조심히 들며 카벨레누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불쾌할 법한 말을 뱉었음에도 그는 기분이 나빠보이지 않았다.

    "그래. 그대 뜻대로 해."

    그저 태연히 대답하며 고기를 썰었을 뿐이었다. 알리시아는 흘끔 카벨레누스를 몇 번이고 곁눈질하고서야 그를 따라 식기를 쥐었다. 주어진 식기는 많았지만 그걸 어떻게 사용할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먼저 식사를 시작한 카벨레누스의 움직임은 느릿해서 따라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 * *

    "이렇게 하면 될까요?"

    "답은 맞추셨지만, 방금 아가씨께서는 또 제게 경어를 쓰셨습니다."

    "아, 죄송합, 아니, 미안해."

    "괜찮습니다. 갑자기 많은 것을 한번에 바꾸는 것은 어려우니까요. 잘하고 계시니 너무 주눅들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르코 부인이 싱긋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래도 이왕하는 거 잘하고 싶어."

    알리시아는 멋쩍게 웃으면서 그녀를 따라 찻잔을 내려놨다. 아직은 모르코 부인처럼 소리 없이 찻잔을 내려놓는 것도, 그녀에게 하대하는 것도 어려웠다. 하지만 뭔가를 배우는 건 언제나 신기하고 재미있어 뭐든 하다보면 괜히 기분이 들떴다.

    "조급해서 될 일은 아니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경어가 정 불편하시면 나중에 다시 하셔도 되고요."

    "……그래도 될까?"

    계속 써야 입에 붙을 거라는 걸 알았지만, 모로코 부인은 귀족에다가 알리시아보다 한참 나이 많은 연장자였다. 하대하란 말을 들어도 자신의 신분을 자각하고 있는 알리시아로선 역시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물론입니다. 정 마음이 편치 않으시다면 좀 더 마음이 편해지실 때하셔도 됩니다. 특히나, 아가씨께서는 슈바르한에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는 걸요. 낯선 환경에 익숙해지는 것만으로도 힘드실 거라는 거 압니다.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감사해요."

    "아닙니다. 아가씨의 안위를 지키는 것이 제 일인 걸요."

    모르코 부인은 가볍게 대답한 후, 시린에게 사탕통을 가져오라 시켰다. 수업이 모두 끝나면, 모르코 부인은 항상 알리시아에게 사탕을 하나씩 물리곤 했다.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입니다."

    "오늘도 사탕을 주시는 거예요?"

    "달콤한 뇌물이자, 보상이죠."

    모르코 부인이 작은 집게를 사용해 유리병 속 사탕을 꺼냈다. 모르코 저택 요리사가 만들었다는 사탕은 새콤달콤하니 맛있었다. 그 맛에 익숙해지니 어느 순간부터는 사탕통만 봐도 자연스럽게 입에 침이 고였다.

    "뇌물이요?"

    "노력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서 실망하기 쉽지만, 입안에 퍼지는 달콤함은 금방 느낄 수 있잖아요."

    모르코 부인이 웃으면서 알리시아에게 사탕을 물려줬다. 사탕 하나를 물자, 입안에 단맛이 훅 퍼졌다.

    "그렇네요."

    "아가씨께서도 배우는 게 어렵다 싶으면 지금의 달콤함을 떠올리세요. 힘든 순간이 있다해도 결국 원하는 걸 손에 넣게 되면, 그것은 지금의 사탕보다 더 달콤할 테니까요."

    원하는 것. 알리시아는 혀끝에서 사르르 녹는 단맛을 느끼며 지금쯤 서류를 넘기고 있을 사내를 떠올렸다. 단지 노력만으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가 원하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아, 그리고 저번에 미리 언급 드린대로, 오늘은 손님이 한 분 방문할 예정이에요."

    "또, 옷을 맞춰야 하는 건가요?"

    "옷이요? 아뇨. 오늘 아가씨를 방문할 손님은 재봉사가 아니라, 화가입니다."

    "화가요?"

    알리시아의 두 눈이 커졌다.

    "네. 그것도 최근 슈바르한에서 가장 유명한 신진 화가랍니다. 아무래도 전달하면서 약간의 오해가 생겼나봐요."

    "화가가 절 찾아온다고요?"

    "아가씨께서 가진 그림을 새로이 그릴 거라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순간 알리시아의 몸이 굳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그림은 하나밖에 없었다.

    "저도 아직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그 화가가 초상화를 그렇게 잘 그린다고 들었어요."

    초상화 이야기가 나오니 더욱 확신이 선다.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를 떠올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슈바르한으로 돌아온 후, 그는 정말 바빴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티를 메꾸기 위해 밤낮 없이 일을 하고, 또 했다. 자주 함께 식사하기 어려운 건 물론, 겨우 밤에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화가라니.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던 것이기에 알리시아는 더욱 목이 멨다.

    "신진화가라 해서 믿음직스럽지 못할 순 있지만, 솜씨는 확실하다 하니 너무 심려치 마세요."

    "……."

    "초상화라는 게 참 어렵잖아요.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다르고, 특히나 초상화의 주인공들은 이왕이면 자신이 좀 더 잘나 보이길 원하지만 정작 너무 미화시키면 닮지 않았다고 불쾌해 하니까요. 그럼에도 그 화가에게 그림을 맡긴 사람들은 다들 하나같이 호평일색이었다고 들었어요."

    알리시아의 표정을 오해한 모르코 부인이 재빨리 화가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다른 생각에 푹 빠져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새가 아니었다.

    "정 불편하시면, 그냥 부르지 말까요?"

    "네?"

    "아가씨께서 화가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아뇨!"

    정신 차린 알리시아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리고, 재빨리 침을 한 번 삼킨 다음 바로 다음 말을 이었다.

    "아니에요! 절대로 마음에 들지 않은 게 아니에요!"

    화가가 그린 것과 제 것이 비교할 수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잘 그린 화가가 그린 그림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익히 들었으니까. 어머니를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다급하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아가씨께서 원치 않는 일은 하지 않을 테니, 긴장 푸세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아가씨께서 제게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명령하시면 될 뿐이죠. 화가를 데려와라. 그렇게요."

    모르코 부인은 다정한 듯 보였지만,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구분이 명확했다. 알리시아는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는 모르코 부인을 보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화가를 데려와줘요. 그리고, 제 그림도."

    "네, 알겠습니다."

    모르코 부인은 싱긋 웃은 다음, 시즈나와 시린을 불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구를 든 젊은 사내가 방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화가 제임스 닉슨이라고 합니다."

    은발의 사내가 알리시아를 향해 예의를 갖췄다. 그리고 그 순간, 방 안에는 정적이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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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넋을 잃고 볼 정도로 아름다운 사내였다. 단조롭게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하며, 소매 끝이 낡은 셔츠에선 꾸민 기색은 전혀 볼 수 없었는데도 미형의 얼굴은 흠 없이 완벽하다는 말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는 것이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만나서 반가워요."

    알리시아가 먼저 제임스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그녀는 유일하게 제임스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았다.

    "저도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아가씨라고 칭해도 되겠습니까?"

    제임스가 화구들을 바닥에 데려놓고서야 모르코 부인와 하녀들은 정신을 차렸다. 다들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표정을 관리했지만, 정작 그녀들의 귓불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네. 다들 그렇게 불러주시니 경께서도 그렇게 불러주시면 돼요."

    "……."

    "왜 그러시죠?"

    "아가씨. 그는 귀족이 아닙니다."

    모르코 부인이 알리시아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저는 경을 뭐라고 불러야……."

    "그냥 이름이나, 성을 부르시면 됩니다. 그리고, 경어도 필요없습니다."

    "아, 네. 알겠어요, 아니. 알겠어."

    알리시아는 마음을 굳건히 다 잡은 후 해보인 다음, 다시 제임스를 바라봤다. 그리고, 한껏 긴장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지금껏 그녀가 만나온 건 카벨레누스의 사람들이었지만 제임스는 아니었다. 괜히 조심스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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