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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20)화 (20/164)
  • 20화. 누구나 아름다운 부분이 있죠

    20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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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떠세요? 온천욕은 만족스러우셨나요?"

    "네. 굉장히 좋았어요. 온천욕을 하면서 먹었던 펠레도 무척 맛있었고요."

    거울에 비친 알리시아의 뺨은 열기에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모르코 부인은 그런 알리시아가 귀엽다는 듯 쿡쿡 웃으며 그녀의 드레스를 정돈했다. 실내용임을 고려해도 장식이 거의 배제된 드레스는 무척 단조로웠지만 그렇다고 초라해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몸선을 따라 드레스가 움직일 때마다 우아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을 따름이었다.

    "모르코 부인께서는 마법사 같으세요."

    "제가요?"

    알리시아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드레스를 입어봤지만, 제 옷 같다고 생각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카벨레누스가 선물한 드레스들은 전부 예뻤지만 막상 입고나면 얼굴만 동동 뜬 것 같은 모양새였으니까. 드레스 같은 건 처음부터 제게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예쁜 드레스는 처음 입어봐요."

    "드레스가 예쁜 건 아니에요. 그저 아가씨께서 아름다우신 거죠."

    "그럴 리가요. 저는 예쁘게 생긴 편이 아닌 걸요."

    "미인의 기준이 있긴 하지만, 그 기준에 적합하지 않다고 해서 아름답지 않은 건 아니거든요. 사람은 누구나 아름다운 부분이 있죠. 예를 들면, 아가씨께서는 몸선이 굉장히 예쁘시죠."

    모르코 부인이 검지로 알리시아의 드러난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몸선이요?"

    "네. 아가씨께선 붓으로 그려놓은 것 같이 유려한 몸선을 가지고 계시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몸선이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으시면 훨씬 매력적으로 보이는 거예요."

    "……그런 건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어요."

    "보통 알아차리긴 어렵죠. 사람들은 보통 장점보단 단점에 치중하기 마련이니까요. 이상한 건 아니에요. 다들 그래요."

    축 처진 알리시아의 어깨를 알아차린 모르코 부인이 다정하게 그녀를 달랬다.

    "그런가요?"

    "무엇보다 아가씨께는 이제 제가 있잖아요. 앞으로 제가 아가씨가 모르는 매력들을 전부 찾아내드릴 테니, 아가씨께서는 신경쓰시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모르코 부인은 능숙하게 알리시아의 머리를 하나로 모아 틀어 올렸다.

    "자, 보세요. 아가씨께서는 이렇게 머리를 틀어 올리셔도 잘 어울리시잖아요. 이게 다 아가씨께 사슴처럼 가늘고 긴 목을 가지고 계신 덕분이죠. 게다가 피부도 희어서 웬만한 보석은 전부 잘 어울릴 거예요."

    "……."

    "마침 아가씨의 보석함이 무척 훌륭하더라고요. 시간 날 때마다 이것저것 시도해보면서 아가씨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보석이 무엇인지 함께 찾아봐요. 아, 물론 그 말도 안 되는 드레스들은 전부 처분해야겠지만요."

    "저어, 드레스들을 꼭 처분해야하나요?"

    "처분하고 싶지 않으신가요?"

    모르코 부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그것들은 전부 전하께서 선물해주신 거라서요……."

    좀 더 붉은 기가 감돈 알리시아의 얼굴에 모르코 부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조카에게 듣기론 대공이 훨씬 안달이 나 있다고 들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수선해서 디자인만 바꿔보는 건 어떨까요?"

    "그래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아가씨께서 명령만 내려주시면 제가 모든 걸 가능케 해드릴 겁니다."

    "그렇다면 부탁드릴게요."

    "영광입니다."

    모르코 부인은 간단한 인사를 하며 알리시아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잠깐 만지작거렸을 뿐인데, 말끔하게 완성된 머리는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모르코 부인께서는 정말로 마법사 같으세요."

    "간단한 기술일 뿐입니다. 오늘은 굳이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어서 가볍게 연출해도 되니까요."

    "그래도 너무 예뻐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다음에는 더 예쁜 머리로 해드리겠습니다."

    모르코 부인이 물러나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즈나가 들고 있던 외투를 건넸다. 마차에서 입었던 것보다 모피 외투보다 훨씬 얇고 가벼운 천 외투였다.

    "그러고 보니, 신기한 게 성 안은 전혀 춥지 않네요."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외투를 걸친 알리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슈바르한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살을 에는 한기에 괴로웠는데, 성 안으로 들어온 후부턴 추위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슈바르한 성 곳곳에는 마정석이 있어서 언제나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거든요."

    "마정석이라는 건 처음 들어봐요."

    "마나의 정수를 부르는 말이에요. 슈바르한의 보물이죠."

    모르코 부인은 테이블에 늘어놓은 구두에 시선을 떼지 않으며 대답했다. 대화를 하고 있긴 하지만, 사실 모르코 부인의 온 신경은 알리시아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구두를 고르는 것에 꽂혀있었다.

    "슈바르한의 보물이요?"

    "가공한 마정석은 마법사가 아닌 사람들도 쓸 수 있거든요. 그래서 슈바르한에선 마정석을 여러 방식으로 가공해서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고 있답니다. 성 내부가 따뜻한 것도 전부 마정석 덕분이죠."

    모르코 부인은 꺼내놓은 구두에서 고르는 걸 포기하고 시린을 재촉해 다른 구두 상자를 열었다. 알리시아가 가진 구두는 전부 원래 드레스와 한 쌍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라 전부 화려했다. 지금 알리시아가 입고 있는 드레스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신기하네요."

    "그렇죠. 저도 그렇답니다. 매일 같이 마정석의 혜택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매번 신기하고 고마울 따름이죠. 만약, 전하께서 마정석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셨다면 이곳은 여전히 신이 버린 땅이었을 거예요."

    "신이 버린 땅이 아니라, 신의 축복이 닿지 않는 땅이 아닌가요?"

    "가제프에게 슈바르한의 이명을 들으신 거죠?"

    모르코 부인이 들고 있던 구두를 내려놓고 알리시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 아이는 체면 차리는 걸 좋아하거든요. 이왕이면 좀 더 고상한 표현을 쓰려고 애쓰죠."

    "……."

    "솔직히 말씀드리면, 슈바르한의 이명은 신이 버린 땅이 맞습니다. 혹한도 혹한이지만, 죄인들의 땅으로 자주 쓰였기에 붙여진 이름이었죠."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나마 무난한 구두를 골라낸 모르코 부인이 다시 알리시아에게 다가왔다.

    "죄인들의 땅이라는 건 무슨 뜻이죠?"

    "지금이야 전하의 눈치를 보고 있어 시도하지 않곤 있지만, 원래 프라임 신전에서 이단을 처리할 때, 슈바르한으로 보내곤 했거든요."

    "처리라고요?"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혹한의 추위 속에서 맨몸으로 버티는 사람이 있을 리 없고, 무엇보다 순백의 눈은 모든 걸 지워버리기에 좋으니까요. 추방이라고 말하긴 했어도 사실상 사형과 다를 바가 없었던 셈이죠."

    "……."

    "신의 종을 자처하는 입장에서 직접 손을 더럽힐 순 없는 노릇이니, 그들 나름대로는 깔끔한 해결책을 찾은 셈이죠"

    덤덤하게 할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정작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르코 부인은 여전히 구두 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보였다. 알리시아는 모르코 부인이 신겨준 구두를 가만히 바라보며 미약한 숨을 뱉었다. 구두 앞에 장식된 레이스 리본은 알리시아의 작은 움직임에도 살랑거리며 시선을 끌었다.

    "잔인한 이야기네요."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모르코 부인께선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나요?"

    "지금 아이들은 모르겠지만, 당시 슈바르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대단한 게 아니거든요.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친구나, 가족의 시신을 보는 일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죠. 그래서,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도 감흥이 없었어요. 어차피 죽음의 땅인데, 거기에 생명 몇이 더 해진다고 해서 문제될 건 없다고 생각했죠."

    "모르코 부인께서는 무덤덤해지셨던 거군요."

    인상을 찡그리던 모르코 부인은 결국 알리시아의 구두를 도로 벗겼다. 단정한 드레스와 나풀거리는 레이스 구두는 좋게 보려고 해도 썩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었다.

    "죽음에 일일이 감정을 갖기엔 너무 많은 죽음을 겪었으니까요. 덤덤해지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었죠. 물론, 쌍둥이 여동생이 죽었을 때는 하루 종일 울긴 했지만요."

    "쌍둥이 여동생이라고 하면, 클라우드 경의……."

    "마음 쓰지 않으셔도 돼요. 이젠 다 지난 일인 걸요. 솔직히 저는 이제 그 아이의 얼굴도 가물거려서 제 얼굴을 보면서 그 아이가 살아 있다면 이랬을 것 같다 생각할 뿐이거든요."

    결국 구두의 툭 튀어나온 장신구를 제거하고서야 모르코 부인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알리시아의 발에 도로 구두를 신겨준 다음, 뿌듯한 얼굴을 해보였다. 그녀의 등 뒤로는 선택 받지 못한 구두들이 멋대로 놓여 있었다.

    "살짝 아쉽긴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아가씨에 발에 맞는 구두를 맞출 순 없는 노릇이니까요. 오늘은 이걸로 만족하죠."

    "……."

    "지루하지 마시라고 이야기를 해드린 건데, 제가 너무 어두운 이야기를 한 모양이에요. 죄송합니다."

    "아뇨. 모르코 부인께서 죄송할 문제는 아니죠."

    알리시아가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그렇다면,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해드린 걸 가제프에게는 비밀로 해주세요."

    "비밀이요?"

    "그 아이는 저와는 다르니까요. 아직 젊고, 그만큼 감정에 예민하죠. 그래요. 현재 슈바르한의 젊은이들의 표본 같죠. 그들은 프라임 신전의 만행에 분노하고, 슈바르한을 바꿔놓기 위해 안달이 나 있거든요."

    모르토 부인이 혀를 쯧쯧 차며 팔짱을 꼈다.

    "클라우드 경이라면 슈바르한을 나쁘게 바꿀 것 같진 않은 걸요."

    "가제프가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다만, 좋은 의도가 꼭 좋은 결과를 내는 법은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아이가 맹신하는 대공 전하 역시,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결국엔 사람이죠."

    "……."

    "게다가 아무리 마정석이 있다 해도 슈바르한 자체가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슈바르한은 여전히 얼어붙은 죽음의 땅이고, 더 많은 생명들을 빼앗기 위해 안달이 나 있죠. 그 사실이 달라지지 않는 한, 크게 바뀌는 건 없을 거예요. 차라리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는 게 효율적일 뿐이죠."

    모르코 부인은 툴툴거리다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것을 이야기했다는 걸 깨닫고 멋쩍게 웃었다.

    "제가 너무 쓸데없는 소리까지 다 해버린 것 같군요.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그냥 늙은이의 푸념 정도로 여겨주세요."

    "아니에요. 제가 모르는 것들을 알게 되어서 좋은 시간이었어요."

    알리시아가 서둘러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알리시아는 항상 슈바르한이 궁금했다.

    "다음에는 좀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똑똑-.

    "아가씨의 준비가 끝났습니까?"

    "이런. 드래곤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저 녀석도 크게 다를 바는 없군요. 괜찮으시다면 저 녀석을 들어오게 해도 될까요, 아가씨?"

    모르코 부인은 피식 웃고는 이번에도 알리시아에게 동의를 구했다. 알리시아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제 이모님과 좋은 시간을 보내셨는진 모르겠군요. 이젠 아시겠지만 저희 이모님께서는 존경 받는 귀부인이시지만, 종종 무례한 표현을 입에 담는 경우가 있어……."

    유려하게 말을 늘어놓던 가제프가 알리시아를 발견하고 무의식적으로 말을 멈췄다. 솔직히 겁먹고 움츠린 알리시아의 모습이 작은 동물 같다곤 생각해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녀가 아름답다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카벨레누스가 어째서 그녀에게 끌린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알리시아는 평범하고 밋밋한 인상이었고, 그 평가는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알리시아를 보니 생각이 좀 달라질 것만 같았다. 특별히 얼굴이 달라진 건 아닌데도 지금의 알리시아는 예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한결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머리를 틀어 올린 알리시아는 우아하고도 기품이 묻어나 어느 가문의 귀족 영애라 해도 손색없을 정도였다. 더는 그녀에게선 망국의 공주라든지, 노예라든지 하는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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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괜히 아가씨의 심기가 불편해지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가제프는 뒤늦게 원래 하려던 말을 이으며 짧게 헛기침을 반복했다. 아무리 놀랐다 해도 미래의 대공비를 넋 놓고 보는 건 불충이었다. 지금 모습을 카벨레누스에게 보였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아뇨. 불편하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전하께서는 식당으로 바로 오시기로 하셨으니, 아가씨께서도 식당으로 이동해주시면 됩니다."

    가제프는 평소처럼 싱긋 웃으려다가 마주친 시선에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덤덤히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역시, 지금의 알리시아의 모습은 지나치게 낯설었다. 아예 다른 여자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슈바르한에서도 전하와 함께 식사를 해도 되는 건가요?"

    고대하던 카벨레누스의 소식에 알리시아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모두가 잘해주긴 했지만 역시, 그녀는 카벨레누스가 보고 싶었다.

    "그야 물론입니다. 시장하실 테니 얼른 식당으로 가시죠. 슈바르한 성의 요리사가 만드는 요리는 무척 맛있거든요. 분명 아가씨의 마음에도 들 겁니다."

    "기대되네요."

    수줍게 뺨을 붉히는 건 가제프가 알고 있던 알리시아가 맞다. 가제프는 그제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알리시아의 시중을 자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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