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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9)화 (19/164)
  • 19화. 귀여우시네요

    2020.05.07.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전하."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성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나."

    카벨레누스는 짤막하게 대답하고 바로 걸음을 옮겼다. 성 밖에서부터 안까지 그의 복귀를 반기는 행렬이 쭉 이어져 있었지만 정작 그는 딱히 감흥 없었다. 예정보다 슈바르한에 이르게 도착하면서 방해 받았던 시간이 불쾌했을 뿐이었다.

    "전하의 복귀를 축하하기 위해 주요 귀족가의 수장들이 찾아왔습니다."

    "쓸데없는 일을 하는군."

    "다들 이 김에 전하의 얼굴을 뵙고 안위를 확인하고 싶은 걸 겁니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셨으니까요."

    카벨레누스의 불편한 심기를 읽은 시종장이 눈치껏 가제프에게 눈빛을 보냈다.

    "북부의 수장들은 다들 한 고집을 하는 자들이라서 전하께서 만나주실 때까지 성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얼른 만나고 그들을 쫓아내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

    "어쨌거나, 그들은 북부를 지탱하는 가문의 수장들이니 무시할 순 없는 법이고, 그렇다고 그들을 괜히 이곳에 두었다간 괜한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요."

    알리시아를 어디에 감춰두지 않는 한, 그녀의 존재가 들키지 않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카벨레누스와 함께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에게 관심이 쏠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굳이 그 시기를 앞당길 이유는 없었다. 알리시아가 슈바르한에 익숙해질 때까지만이라도 그녀의 존재는 쉬쉬하는 편이 나았다.

    "그 영감들은 쓸데없이 말들이 많지."

    "다들 전하를 사위 삼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으니까요."

    카벨레누스는 결혼 적령기의 나이였음에도 아직 약혼자 하나 없었다. 슈바르한들의 유력가들이 미혼의 대공과 가족의 연을 맺기 위해서 공들이고 있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알리시아의 존재가 부각되는 건 좋지 않았다.

    "……할 수 없군."

    카벨레누스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전하께서 가문의 수장들을 만나고 있는 동안, 전 이모님을 뵙고 오겠습니다."

    "그래. 나도 최대한 서둘러 끝내고 가도록 하지."

    카벨레누스의 걱정을 눈치챈 가제프가 싱긋 웃었다. 지금으로선 굳이 알리시아를 많은 사람들에게 선보일 필요가 없었기에 그녀는 미리 준비된 방에 가 있었다. 그녀의 옆에 붙여둔 이들은 전부 믿을 만한 자들이었지만, 낯선 환경에 긴장하고 있을 그녀를 생각하면 익숙한 사람이 자리를 지키는 게 좋을 터였다. 가제프는 카벨레누스에게 짧게 묵례한 후, 곧장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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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안녕하세요, 아가씨. 오늘부터 아가씨의 시중을 맡게 된 시녀 라일렛 모르코 남작 부인이라고 합니다. 편하게 모르코 부인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리고, 이 아이의 이름들은 시즈나와 시린입니다. 아가씨의 전속 하녀로서 저와 함께 아가씨를 보필하게 될 겁니다."

    "부족한 점이 많겠지만, 모쪼록 잘 부탁드릴게요."

    알리시아가 두 손을 깍지낀 채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모르코 부인이라 소개한 중년의 여성을 비롯한 사용인들은 모두 알리시아에게 호의적이지만, 알리시아는 자신의 신분을 잊지 않고 있었다. 슈바르한에는 노예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어도 이 상황이 낯선 건 어쩔 수 없었다.

    "아가씨. 아랫사람에게는 말을 낮추셔야 합니다."

    "아랫사람이라뇨."

    "가제프에게 전부 이야기를 들었으니,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신이 노예라는 걸 이야기 들었다는 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알리시아를 보며 모르코 부인은 쿡쿡 웃었다. 비웃기보다는 딸아이를 보듯 다정한 눈빛이었다.

    "클라우드 경을 아시나요?"

    "제 조카 아이입니다."

    알고 있는 사람과 아는 사이라고 하니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 알리시아는 좀 더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절 바라보는 시선에 화답했다.

    "지금 보니, 클라우드 경과 많이 닮으신 것 같아요."

    "가제프의 모친은 저와 쌍둥이 자매였거든요. 그래서 가제프 역시, 제게는 아들이나 다름없답니다."

    "그렇군요."

    "가제프도, 저도 아가씨 편이니, 그리 겁먹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게……, 아직은 좀 낯설어서요."

    알리시아가 봐왔던 건 노이슈타인, 그것도 성 내부가 전부였다. 끝없이 펼쳐진 설원의 풍경도, 자칫하면 길을 잃을 듯 거대한 성을 보고 있자니 거인들의 왕국에 뚝 떨어진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가씨께서는 여행이 처음이라고 하셨죠? 그 먼 곳에서 슈바르한까지 오시느냐 많이 힘드셨겠군요."

    "아뇨. 그렇게 힘들진 않았어요."

    모르코 부인의 손짓에 하녀들이 알리시아가 외투를 벗는 것을 도왔다. 알리시아는 어색하게 그녀들의 시중을 받았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여행의 여독은 긴장이 풀린 후 나타나는 법이니까요. 하인들이 짐을 푸는 동안, 온천욕이라도 하시는 건 어떠신가요? 슈바르한의 온천물은 무척 유명해서 황제 폐하께서도 극찬하실 정도랍니다. 목욕물에 따뜻하게 몸을 녹이시고, 펠레 한 잔을 곁들이시면 피로가 쫙 풀리실 거예요."

    "온천이요? 그게 뭐죠?"

    "아, 외지에서 오셨으니 온천에 대해 모르실 수 있겠군요. 온천은 땅 속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을 말한답니다."

    "땅 속에서 뜨거운 물이 나온다고요?"

    "저는 지질학자가 아니라, 원리는 모르지만 온천욕은 슈바르한의 귀부인들이 사랑하는 문화랍니다. 온천욕을 하고 나면 피부가 백옥보다 고와지거든요. 아가씨께서도 한 번 경험해보시면 분명 그 매력에 푹 빠지실 거예요."

    모르코 부인은 사람 좋게 웃어 보이며 알리시아를 향해 다가갔다. 멀리 있을 때는 몰랐는데, 갈색 머리를 부드럽게 틀어 올린 중년의 귀부인은 알리시아보다 머리 하나가 컸다.

    "모르코 부인께서는 키가 무척 크시네요."

    "그런 소리는 처음 듣네요. 슈바르한 여자들은 대부분 키가 저 정도이거든요."

    "그런가요?"

    "혹한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만큼 강해져야 하니까요. 대부분의 슈바르한 사람들은 체격들이 좋은 편이에요. 그들은 여자 남자, 아이 노인 할 것 없이 활만 손에 쥐어주면 사냥감 하나씩은 들고 올 수 있는 전사들이랍니다."

    모르코 부인은 호탕하게 웃어보이고는 알리시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웃고 있음에도 날카로움을 잃지 않는 모르코 부인의 눈은 분명 전사의 것이었다.

    "덕분에 저는 아가씨의 시녀인 동시에 호위도 맡게 되었죠."

    "제 호위를 맡아주신다고요?"

    "네. 그리고, 그건 저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을 마주친 하녀들이 싱긋 웃었다. 알리시아의 또래로 보이는 그녀들은 모르코 부인과 마찬가지로 장신에 날렵한 몸이었다.

    "호위가 필요할 정도로 이곳이 위험한 곳인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 오히려 대공 전하가 계신 이곳이야말로 대륙의 어느 곳보다 안전한 곳일 겁니다. 간단히 말해,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난다기보다는 혹시 모를 만약에 대응하는 것뿐이라고 이해해주시면 됩니다."

    모르코 부인은 부드럽게 알리시아의 어깨를 쓸어내린 다음, 그녀의 손을 잡았다. 모르코 부인의 손 역시도 무척 커 알리시아의 손과 사뭇 대비가 되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있는 한, 아가씨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신경써주셔서 감사해요."

    검 손잡이 모양대로 굳은살이 박힌 손은 한 사내를 떠올리게 한다. 알리시아는 문득 떠오른 카벨레누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똑똑-.

    "아가씨, 이모님. 괜찮으시다면 들어가도 될까요?"

    "가제프가 온 모양입니다, 아가씨. 그를 안으로 들어오라고 해도 될까요?"

    모르코 부인이 부드러운 어조로 알리시아의 의사를 물었다.

    "아, 네. 물론이에요."

    알리시아가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이자, 하녀들이 곧장 문을 열었다.

    "불편한 점은 없으신지 확인하러 왔습니다, 아가씨."

    "전 괜찮아요."

    알리시아가 긴장이 누그러진 얼굴로 조곤조곤하게 대답했다. 기대했던 얼굴은 아니지만, 그래도 계속 보던 얼굴이라고 반가웠다.

    "저희 이모님과는 이미 인사하셨겠군요. 계속 아가씨를 보필해주실 테니, 앞으로 불편하시거나 필요한 게 있다면 이모님께 말씀드리면 깔끔히 처리해주실 겁니다."

    "아가씨를 모시는 것부터가 제겐 영광이니, 가제프의 말대로 편히 대해주세요. 절 아가씨의 손과 발이라 여기셔도 됩니다."

    모르코 부인이 우아한 몸짓으로 다시 한 번 알리시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뇨. 모르코 부인처럼 아름다운 분과 함께할 수 있어서 제가 더 영광이에요."

    "어머나, 아가씨께서는 듣기 좋은 소리도 잘하시는군요. 조금만 배우시면 사교 활동에도 능하시겠어요."

    모르코 부인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사교 활동이요?"

    "전하께서는 사교 활동은 할 필요가 없다 하셨지만, 아무래도 지위가 지위이니까요. 기본적인 예의범절 정도는 배워두는 게 좋을 것입니다. 앞으로 제가 아가씨께 귀부인의 소양을 알려드릴 예정이랍니다."

    "저는 귀부인이 아닌 걸요."

    알리시아가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지만 정작 모르코 부인은 크게 신경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래도 미리 배워두시는 게 좋을 거예요. 진짜 귀부인이 되시면, 할 일이 많으셔서 기초 교육을 배울 시간도 없으실 테니까요."

    "하지만……."

    알리시아는 말끝을 흘렸다. 최하위 천민인 노예가 귀부인이 될 수 있을 리 없었다. 귀부인의 소양을 배워봤자, 의미 없는 일일 뿐이었다.

    "혹시, 배우기 싫으신가요?"

    "아뇨. 뭔가를 배우는 건 좋아해요. 하지만 아시잖아요. 제 입장이 어떤 건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입이 아주 무거운 사람이니까요."

    "……."

    "아니면 한 번만 배워보시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말씀해주세요. 처음부터 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건 너무 아쉽잖아요."

    알리시아는 머뭇거리다가 응원하듯 손등을 다정하게 다독이는 모르코 부인의 손길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이제 막 배우는 즐거움을 알게 된 알리시아에게 있어서 모르코 부인의 제안은 유혹적이었다.

    "잘 생각하셨어요. 이래 보여도 저는 슈바르한에서 사교 수업 선생님으로도 유명하거든요. 제게 배우신 걸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클라우드 경이 누굴 닮아 다정한가 했더니, 모르코 부인을 닮으셨나봐요."

    "저 녀석이 다정하다고요?"

    모르코 부인이 이해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계속 클라우드 경께 수업을 받았거든요. 그때마다 너무 잘 가르쳐주시고 친절하게 말씀해주셨죠."

    "그건 아마 저 녀석이 권력의 개이기 때문일 거예요."

    "이모님. 아가씨 앞에서 표현이 저속합니다."

    가제프가 끙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그의 이모는 사교계에서도 손꼽히는 우아한 귀부인이었지만, 한때 전장을 휘젓던 기사 출신이었다. 험난한 전장을 겪은 탓인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험한 말을 뱉을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맞는 말이지 않니."

    "그건……."

    가제프가 반사적으로 알리시아를 곁눈질했다. 강한 표현에 당황했는지 알리시아는 살짝 입만 벌린 채 눈만 껌벅거리고 있었다.

    "이모님 때문에 아가씨께서 놀라시지 않았습니까."

    "이 정도로 놀라시다니, 아가씨는 정말로 귀여우시네요."

    "네?"

    "이모님."

    가제프가 다급하게 모르코 부인을 불렀다.

    "알았다. 알았어. 그러니 뱁새눈은 그만하고 온 김에 내 심부름이나 하렴."

    "무슨 심부름 말입니까."

    "나 대신, 모르코 저택 좀 다녀오렴. 리린이 아직 입지 않은 옷 몇 벌을 챙겨와야겠다."

    "리린의 옷을 왜 찾으시는 겁니까."

    "설마설마했는데, 사내놈들 사이에서 껴서 아가씨 꼴이 말이 아니지 않니. 슈바르한에 걸맞게 제대로 준비해야지. 아가씨가 온천욕을 하시는 동안 얼른 다녀오렴."

    알리시아가 입고 있는 드레스는 수도에서 유행하는 디자인이었지만 깐깐한 모르코 부인의 눈에는 뭐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귀한 보석들을 잔뜩 달고, 금박 자수를 넣어 멋을 살렸다 해도 알리시아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가뜩이나 수수한 얼굴에 화려한 드레스로 치장해봤자, 예쁘긴커녕 남의 옷을 빌려 입은 양 어색해 보일 뿐이었다.

    "……제 꼴이 그렇게 별로인가요?"

    누구도 지금껏 차림새로 지적하진 않았는데. 알리시아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모르코 부인을 바라봤지만, 정작 모르코 부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줄 뿐이었다.

    "아뇨. 아가씨는 전혀 문제없답니다."

    "하지만 방금 제 꼴이 말이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문제는 아가씨가 아니라 사내들의 덜떨어진 심미안이니까요. 옷은 입는 사람의 특성에 맞춰서 입어야 매력이 사는 법이라는 걸 모르는 거죠."

    "덜떨어진……."

    무의식적으로 모르코 부인의 말을 따라하던 알리시아가 말을 멈추고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아가씨의 시녀가 된 이상 더는 그런 불상사는 없을 테니까요."

    모르코 부인은 우아한 미소와 함께 턱을 추켜세웠다. 드디어 슈바르한의 안주인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그녀를 들뜨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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