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18)화 (18/164)
  • 18화. 입 맞추셔도 돼요

    202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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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춥진 않나?"

    "괜찮아요."

    "파리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말은 잘하지."

    카벨레누스는 혀를 차며 알리시아를 끌어안았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겨울을 경험해보지 않았다고 말했을 때부터 예상했어야 했는데, 알리시아는 추위에 무척 약했다. 본격적으로 슈바르한의 영토로 들어선 후부터는 두툼한 모피 외투를 입고도 바들바들 떨기 일쑤였다.

    "전하께서는 춥지 않으세요?"

    "슈바르한에서 이 정도는 추운 것도 아니니까."

    이것보다 더 추워질 수 있다고? 사형 선고를 받은 것처럼 알리시아의 얼굴이 더욱 새하얗게 질렀다. 모피 외투를 처음 봤을 때는 과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절대 아니었다. 아무리 옷을 껴입어도 파고드는 한기에 온몸이 꽁꽁 얼어붙을까 덜컥 겁이 날 정도였다.

    "조금만 참아. 성으로 가면 훨씬 나아질 테니까."

    "네, 네."

    서둘러 대답하긴 했어도 괜찮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알리시아는 추위를 참아내기 위해 카벨레누스를 쥔 손에 보다 힘을 줬다.

    "달달 떠는 게 갓 태어난 사슴 같군."

    "……놀리지 마세요."

    "이젠 그런 말도 할 수 있는 건가."

    "그야 전하께서 이 편이 좋다고 하셨으니까……."

    "맞아. 좋아."

    카벨레누스는 옅은 미소를 띄운 채 알리시아를 좀 더 자신의 외투 안으로 끌어안았다.

    "……."

    창백하기만 하던 알리시아의 뺨이 붉어졌다.

    "성으로 가면 따뜻한 펠레를 주지."

    "펠레요?"

    "끓인 술을 말하는 거야."

    "저, 술은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는데 괜찮을까요?"

    "말이 술이지, 와인에 이것저것을 넣고 끓인 거라 마셔도 취하진 않을 거야."

    "그런 술도 있나요?"

    알리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질레와 함께 손꼽히는 슈바르한의 음료지."

    "질레는 뭐예요?"

    "도수가 높은 술이야. 추위를 이기기 위해 마시는 거지."

    "얼마나 도수가 높은데요?"

    이제 막 말문을 뗀 아이처럼 알리시아는 질문이 많아졌지만, 카벨레누스는 그것을 귀찮다 여기지 않았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그녀가 한 뼘 더 성장한 것 같아 뿌듯할 뿐이었다.

    "불을 붙이면 붙을 정도지. 마시면 목구멍이 화상 입은 것처럼 뜨겁기도 하고. 아, 얼핏 들은 이야기지만 희석되지 않은 질레를 마시고 죽은 사람이 있다고도 들었어."

    "사람을 죽이는 술이라고요?"

    "왜? 마셔보고 싶나?"

    "아뇨. 저는 그런 건 싫어요."

    급하게 고개를 젓는 알리시아에 카벨레누스의 미소가 한층 진해졌다.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온기가 퍽 마음에 든 참이었다.

    "슈바르한에 도착하면 한동안은 적응하느라고 힘들 거야."

    "걱정해주시는 거예요?"

    "그런 거로 타박하지 않을 테니, 움츠리지 말라고 미리 말해두는 거야."

    알리시아가 문제없이 슈바르한에 적응하길 바라지만, 추위부터 견디기 어려워하는 그녀를 보니 문득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낯선 땅에서, 다른 사람, 문화를 겪으며 익숙해지는 건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그러지 않을 거예요."

    "믿어도 되는 건가."

    "네. 전하께서 옆에 계셔주셔서 괜찮을 것 같아요."

    "……."

    알리시아의 등을 두들기던 카벨레누스의 손이 멈췄다. 여자에겐 아무렇지 않게 사내의 신경을 흔드는 구석이 있었다.

    "물론 계속 제 옆에 있어주실 순 없다는 거 알지만, 그래도 전하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안심이 되거든요."

    "계속 옆에 있을 거야."

    "그렇다면 좋겠네요."

    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는 과연 누구의 것이었을까. 알리시아는 화끈 달아오르는 얼굴을 모른 채 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전하께서는 확실히 다른 사람보다 체온이 높으신 것 같아요."

    "다른 사람, 누구."

    "어, 음. 보편적으로요."

    "가제프?"

    "저는 클라우드 경의 체온을 몰라서 말씀드리기가……."

    왜 갑자기 가제프의 이야기가 나오는 거지? 알리시아는 순간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그렇다면 계속 모르도록 해."

    "네?"

    "가제프의 체온 따위 그대가 알 바 아니라는 소리야."

    "물론 제가 알 필요는 없는 문제이긴 하죠."

    알리시아는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모르나, 카벨레누스는 종종 뜬금없이 가제프의 이야기를 꺼낼 때가 있었다.

    "가제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다른 사람이요?"

    "그대를 안을 수 있는 건 나뿐이야. 그러니, 다른 사람의 체온 같은 거 확인할 필요도 없지."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숨을 참으며 카벨레누스의 옷자락을 잡았다. 사내의 숨이 간질간질 목덜미를 훑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하루라도 빨리 내기를 끝내든 해야지."

    "네?"

    "아냐, 혼잣말이야."

    카벨레누스가 말할 때마다 여린 살에 입술이 닿았다. 알리시아는 더욱 붉어진 얼굴로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저어……."

    "잠시만 가만히 있지."

    "전하?"

    "조금 초조해져서 그래. 잠시만, 잠시만 이대로 있어."

    카벨레누스의 손이 알리시아의 등을 훑었다. 두툼한 외투를 입고 있어 그녀의 몸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지만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의 몸이 얼마나 마르고 작았는지 기억했다. 단, 하룻밤이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그 어떤 것보다 선명해 쉽게 지워지는 법이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카벨레누스는 그날 이후로 알리시아를 안지 않았다. 그는 얼룩덜룩하게 물든 알리시아의 몸을 보고 후회했고 며칠 동안 고열에 시달렸던 그녀를 보며 냉정을 되찾았다. 제 손으로 알리시아를 망가트릴 수 있다는 가능성은 그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왜, 그대는 이렇게 작은지 모르겠어."

    "제가 작다기보단 전하께서 크신 거예요."

    카벨레누스는 입버릇처럼 알리시아가 작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녀는 키가 작은 편이 아니었다. 그저 카벨레누스가 유독 큰 장신이라, 알리시아가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는 것뿐이었다.

    "아니, 작아. 그리고 너무 약해."

    "그렇게 제가 약해 보이나요?"

    "무척."

    망설임없는 카벨레누스의 대답에 알리시아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서렸다.

    "그 정도로 약하다곤 생각하지 않는데요."

    "추위 하나도 이기지 못하잖아."

    "익숙하지 않으니까요.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예요."

    "익숙해지지 않아도 돼. 그대가 약해도, 내가 지키면 그만이니까."

    카벨레누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알리시아는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카벨레누스를 올려다봤다.

    "저는 보호만 받고 싶지 않아요."

    "어째서?"

    "할 수 있다면 저도 전하를 지킬 수 있으면 하니까요."

    "나는 그대가 지킬 정도로 약하지 않아."

    "알아요. 하지만, 그래도 짐만 되고 싶진 않아요. 좀 더 제 가치를 분명하게 증명하고 싶어요."

    정말로 힘이 돌아온다면 좋을 텐데. 그렇다면, 카벨레누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들어주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다는 게 아쉬워 알리시아는 손에 힘을 주었다.

    "괜한 생각하지 마. 내가 원하는 건 지금처럼 그대를 안고 있는 것뿐이야."

    "……정말 그걸로 되는 걸까요?"

    카벨레누스의 시선이 알리시아의 입술에 닿았다. 사실 알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걸. 이성적으로 억누르고 있을 뿐이지, 결국 제 본능이 원하고 있는 건 뻔하다는 걸. 그렇지 않고서야 저 희고 가는 목을 보며 갈증이 치밀 일은 없을 테니까.

    "전하께서는 제가 가치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지만, 저는 그것만으론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어째서?"

    "가치 있다면, 전하의 흥미가 사라져도 옆을 지킬 수 있잖아요."

    "……."

    살기로 다짐했던 것도 결국 카벨레누스 때문이었다. 그가 없다면 알리시아의 삶 목표 역시, 사라질 것이었다.

    "만약, 내 흥미가 식는다고 해도 그대는 내 옆을 지킬 건가."

    "허락만 해주신다면요."

    "……."

    "저는 계속 전하의 옆에 있고 싶어요."

    카벨레누스의 두 손이 알리시아의 뺨을 쥐었다. 입을 맞추고 싶었다. 아니, 그보다는 좀 더 그녀와 깊게 닿고 싶었다.

    "제가 사는 이유는 결국 전하 때문이니까요."

    "……그럼 내가 없으면?"

    카벨레누스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알리시아의 반응이 제 것과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녀의 행동은 갓 알을 깨고 나온 아기새처럼 각인된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어른이 된 새가 훌쩍 둥지를 떠나는 것처럼 언젠가는 그녀도 자유를 원하게 될 것이었다.

    "……모르겠어요."

    "몰라?"

    "전하께선 제 죽음을 바라지 않으셨으니까요. 전하께서 더는 저를 옆에 두지 않는다고 해도 제가 죽을 순 없을 거예요."

    힘없이 흔들리는 알리시아의 고개를 바라보는 카벨레누스의 목울대가 울렸다. 제 생각을 입밖으로 내는 것이 아직도 어색한지, 뺨을 살짝 붉히며 웃는 여자가 예뻤다. 초라한 머리색도, 빛 바란 눈동자,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도 예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데, 그냥 어여뻐서 도무지 눈을 뗄 수 없었다.

    "……입을 맞춰도 되나?"

    "네?"

    "그대에게 키스해도 되냐고 물었어."

    "제, 제게요?"

    흥미가 식은 게 아니었나? 당황한 알리시아가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싫은가?"

    카벨레누스의 고개가 옆으로 비틀어졌다. 알리시아는 가늘고 새까만 머리카락이 사르르 부드럽게 이마를 훑는 모습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 건 제게, 굳이, 허락 받지 않으셔도-."

    "허락 받고 싶어."

    "……."

    길고 마디 굵은 손가락이 알리시아의 뺨에 닿았다. 말랑말랑한 뺨을 스친 사내의 손끝은 단단하고도 거칠었다.

    "그래야지, 그나마 죄책감이 덜할 것 같거든."

    "죄책감이요?"

    "이런 건 진작 사라진 줄 알았는데."

    카벨레누스의 손에 핏줄이 불거졌다. 알리시아가 품고 있는 게 어설픈 감정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저를 향한 맹목적인 시선이 사라진다 해도 그녀는 카벨레누스의 이미 손아귀에 떨어졌다. 그녀가 더 많은 자유를 맛보고, 제 감정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깨닫기 전에 완벽하게 옭아내면 그만이었다. 제 아비가 그러하고, 블랑셰의 핏줄들이 그러했듯이. 그런데 왜일까. 저 눈을 마주치고 있을 때면 그 당연함이 잘못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카벨레누스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무서울 게 없던 사내는 여자가 무서웠다. 서슬 퍼런 칼날이 목에 닿는 것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눈동자가 두려웠다.

    ‘죽어도 마땅한 사람이었으니까요.’

    호의를 담고 반짝이던 두 눈이 제게 주어진 것이 자유 아닌, 속박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경멸하는 시선으로 뒤바뀔 것만 같아서.

    "괜찮아요."

    "……."

    빤히 바라보는 카벨레누스의 시선에 알리시아의 얼굴이 불그스름해졌다.

    "……입 맞추셔도 돼요."

    알리시아가 작은 목소리로 수줍게 중얼거렸다. 스스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으나, 이대로 머뭇거린다면 끝이었다. 부끄럽다는 이유로 침묵을 지키면 카벨레누스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을 테니까.

    "싫어하지 않아요."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리는 알리시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건 무척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언제나 쉽게 잠들지 못했고 조그마한 기척에도 잘 깨곤 했는데, 카벨레누스와 잘 때는 그런 적이 없었다. 타인의 온기는 눈물 날 정도로 따스하고 좋은 것이었다. 카벨레누스는 죽은 모친 이후, 처음으로 알리시아에게 그 사실을 알려준 사람이었다.

    "정말이에요."

    여전히 반응 없는 카벨레누스에 알리시아가 한 번 더 말을 뱉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자신이 생각보다 더 초조해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모든 것이 한 순간의 꿈처럼 전부 물거품이 되어버릴까 봐.

    "고개 들어."

    "……."

    "입을 맞추려면 얼굴을 봐야지."

    "아……."

    그건 정말로 찰나였다. 타의에 의해 고개가 들렸다고 생각한 순간, 그대로 입술이 겹쳐졌다. 촉. 그것은 아이에게 하듯 짧고 다정한 입맞춤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알리시아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알리시아가 카벨레누스에게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었다.

    "왜, 그러지?"

    "제, 제대로 해주세요."

    "뭐?"

    무슨 용기로 그런 소리를 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엎지른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었다. 알리시아는 좀 더 카벨레누스를 향해 얼굴을 내밀었다.

    "예전처럼 해주세요."

    "……."

    "……그날 밤처럼요."

    알리시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칠게 입술이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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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손에 닿는 것을 쥐었다. 사내의 셔츠가 희고 마른 손에 멋대로 구겨지고 목까지 채웠던 단추가 그대로 투두둑 풀어졌다.

    "죄, 죄송해-".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설프게 사과하려던 알리시아의 목소리는 사내의 입술에 금세 막혔다. 알리시아는 버거운 숨을 헐떡이며 흐린 눈으로 카벨레누스를 바라봤다. 우악스럽게 밀려드는 사내의 존재가 버거웠음에도 그를 잡은 손을 놓고 싶진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이 사람이 날 여자로 봐주길 바라고 있으니까.'

    알리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욕심을 감추고 숨기기에는 너무 많이 와버렸다. 어떤 말을 하고, 핑계를 댄다고 해도 더는 감출 수 없었다. 알리시아가 적응해버린 건, 단순히 환경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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