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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7)화 (17/164)
  • 17화. 안쓰러웠다

    2020.04.30.

    "그럼에도 그림을 그렸다는 건 그만큼 간절했다는 거겠지."

    "……."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물어도 되나?"

    "그저 어머니의 얼굴을 잊고 싶지 않았던 뿐이었어요. 그림을 그리면 그 사람의 생김새를 계속해서 떠올리게 되어서 얼굴을 기억하는 게 쉽거든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기록이 남죠."

    알리시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런 이야기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카벨레누스에겐 이제 숨길 것도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다들 어머니의 흔적을 지우려고 혈안이 되었어요.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사람처럼 어머니의 물건들을 모조리 불태워서 없애는 것도 모자라,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만 나와도 피바람이 불었죠."

    "그렇다면, 어째서 이 그림들은 남아 있는 거지?"

    "정확히 말하자면 남아 있는 게 아니라, 아직 처리되지 않은 것일 뿐이에요."

    알리시아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처리되지 않았다?"

    카벨레누스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노이슈타인 왕비의 취미였거든요."

    "취미라고?"

    "왕비는 저를 앞에 두고 어머니의 초상화를 농락하면서 기분을 풀곤 했어요. 어머니를 닮은 얼굴이 일그러진 걸 보면 그나마 기분이 나아진다면서요."

    알리시아는 덤덤하게 말했으나 그녀의 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제 손으로 그린 초상화 때문에 죽은 모친이 농락당하는 걸 무력하게 바라봐야만 했던 기억은 정말로 끔찍했었다.

    "왕을 이길 순 없으니까, 그 대신, 감정을 쏟아낼 상대를 찾았던 거죠."

    알리시아가 힘 빠진 웃음을 흘려보냈다. 왕비가 화가 났던 건, 남편의 외도 탓이 아니었다. 손에 쥐고 있던 권력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왕비뿐만이 아니었어요. 다들 그랬어요. 제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왕을 사랑하지 않았고 심지어 노이슈타인 성으로 들어온 것도 어머니의 의지가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다들 어머니의 탓을 하기 바빴죠."

    정작 노이슈타인 왕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서요. 알리시아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이미 지난 일이었다. 카벨레누스에게 이런 말을 한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한 번쯤은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다.

    "제 어머니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저 피해자였을 뿐이에요."

    물기 어린 알리시아의 시선이 초상화에 닿았다. 낡아 선이 흐릿해진 초상화 속 어머니는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알리시아가 바라던 모습, 그대로.

    "……그래. 그랬을 것 같군."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을 한 주제에 꿋꿋하게 서 있는 알리시아를 보며 카벨레누스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살면서 누군가를 보고 안타깝다고 여긴 적 없었는데 여자의 파리한 낯이 안쓰러웠다. 파르르 떨리는 여자의 둥근 어깨가, 품에 다 차지 않는 마른 몸이, 그리고 습관처럼 울음을 삼키는 목소리가 가여워 미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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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아가씨, 괜찮으신가요?"

    "네. 괜찮아요."

    알리시아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를 타는 게 처음이라 낯설었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불편한 점이 있으시다면 바로 말씀해주세요. 슈바르한의 마차는 몸체가 무거워 흔들림이 덜한 편이지만, 장거리 여행이 익숙하지 않은 분들께는 그마저도 힘들 수 있으니까요."

    "참을 만해요."

    알리시아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제프가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받으세요."

    "이게 뭐죠?"

    알리시아는 살짝 커진 눈으로 가제프와 약병을 번갈아 바라봤다.

    "수면제입니다."

    "수면제요?"

    "정 속이 좋지 않으시다 싶으면 그 약을 드시고 한숨 주무시는 것도 괜찮으실 겁니다."

    "경께서는 다정하시네요."

    알리시아가 싱긋 웃었다.

    "수면제는 제가 준비하긴 했지만, 명령하신 건 전하십니다. 전하께서 아가씨가 그런 소리를 하면, 괜찮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따로 조치를 취하라 하셨거든요."

    "전하께서요?"

    "네. 전하께서 많이 신경 써주셨습니다."

    "그렇군요."

    알리시아는 무의식적으로 손끝으로 매끄러운 유리병의 표면을 만졌다. 고작 유리병을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안심이 됐다.

    "전하와의 합류 지점까지 가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아가씨가 편하신 대로 하셔도 됩니다. 아가씨가 주무시는 동안, 저는 일을 처리하면 그만입니다."

    가제프는 서류뭉치를 보란 듯 내보이면서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많이 바쁘신가요?"

    "아뇨. 그저 개인적으로 일은 미리 처리해두는 편을 선호해서 그렇습니다."

    "……."

    "눈치 보실 필요 없이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편히 하시면 됩니다. 아가씨께서 제 눈치를 볼 이유가 없으십니다."

    "전하와 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속내를 들킨 기분이다. 알리시아는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그렇다면 영광이로군요."

    가제프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번졌다. 알리시아는 유리병을 만지작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사실, 계속 묻고 싶었던 게 있었어요."

    "그게 뭐죠?"

    "슈바르한에서는 원래 노예를 이렇게 대우하나요?"

    카벨레누스가 알리시아에게 하는 모든 것들을 노예에게 할 만한 것들이 아니었다. 그 정도는 노예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해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해버리면 카벨레누스의 행동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대우한다는 게 어떤 뜻이죠?"

    어떻게 말해야 자신의 의도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알리시아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제가 받고 있는 대우처럼요."

    "솔직히 말하면, 일반적이진 않습니다."

    "역시, 그렇겠죠."

    "애당초 슈바르한에는 노예가 없으니까요."

    "슈바르한에 노예가 없다고요?"

    "제국에는 여전히 노예 제도가 남아 있고 수도만하더라도 노예 거래가 쉽게 이루어지긴 합니다만, 슈바르한에선 아닙니다."

    가제프는 들고 있던 서류를 옆에 내려놓고 차분히 다음 말을 이었다.

    "슈바르한처럼 가난한 땅에서 노예는 사치였죠. 있던 입 하나를 줄여서라도 식량을 아껴야 하는 땅에선 노예를 들이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것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전하께서는 분명……."

    카벨레누스는 유독 씀씀이가 컸고, 그것은 슈바르한의 부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슈바르한이 가난한 땅이라는 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 물론 이건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과거요?"

    "전하께서 슈바르한의 주인이 되신 이후부터는 많은 게 달라졌으니까요. 씨앗 하나 틔우지 못했던 혹한의 땅은 이제 모든 영주들이 고개를 숙이는 영광의 땅이 되었죠."

    가제프의 두 눈에선 카벨레누스를 향한 존경이 그득했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상관을 따르고 있었다.

    "경께선 전하를 많이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슈바르한 사람들이라면 다 그럴 겁니다. 만약, 전하께서 없으셨다면 저희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렇군요."

    "그래서 저는 아가씨를 좋아합니다."

    가제프가 다정한 눈으로 알리시아를 응시했다.

    "……네?"

    "아가씨께선 앞으로 전하의 옆을 지켜주실 테니까요."

    객관적으로 보면 알리시아는 썩 좋은 조건의 여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가 가진 비밀은 카벨레누스를 위협하는 요인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가제프는 카벨레누스의 선택을 믿었다. 알리시아가 어떤 인물이든 간에 카벨레누스가 그녀를 대공비로 들이기로 결정한 이상, 그 뜻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지금이야 겁 많은 아가씨정도로 보이는 그녀가 언젠가는 카벨레누스의 옆에 당당히 선 대공비가 될 거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가씨께선 좀 더 당당하게 구셔도 됩니다."

    "하지만 제 신분은……."

    "슈바르한에는 노예는 없습니다. 그리고, 설령 있다 해도 누구도 아가씨를 노예라 여기지 않을 겁니다."

    "그런 건 이상해요."

    "이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이 늦어지게 되어 죄송할 따름입니다."

    가제프가 단호하게 말했다.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의 하나 뿐인 아내이자, 슈바르한의 안주인이 될 몸이었다. 가제프의 입장에선 그녀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주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래도 되는 걸까요? 전하께 제 존재가 폐가 되지 않을까요?"

    "전하께서 황제 폐하께 받았던 명령은 원래 모든 노이슈타인 왕족을 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가씨만큼은 죽이지 못하시고 노예로서 목숨을 부지하게 하셨습니다."

    "보세요, 처음부터 저는 전하께 폐가 되고 있잖아요."

    황제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아무리 카벨레누스가 황제의 이복동생이라 해도 황제의 뜻을 거스르면 눈 밖에 나고야 말 것이었다. 특히나 적자인 동생을 견제한 나머지, 카벨레누스를 변방의 슈바르한으로 내몰았다는 황제에 대한 소문은 알리시아를 불안케 하기엔 충분했다.

    "전하께서 폐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면, 그건 폐가 아닙니다."

    "……."

    "아가씨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게 오히려 전하께는 폐가 될 겁니다."

    "저는 단지 불안해서……."

    우물쭈물하는 알리시아에 가제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예전보다 나아지긴 했어도 확실히 단시간에 사람이 바뀌긴 어려웠다. 알리시아에겐 좀 더 자신감을 북돋아줄 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전하께서 가치 없는 것에는 눈을 두지 않으십니다."

    "가치 없는 것이요?"

    "아가씨를 살려두신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가씨껜 충분한 가치가 있고 전하께서는 그것을 보신 거니까요. 아가씨는 절대 전하께 폐가 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이죠."

    "가치……."

    알리시아의 표정이 좀 더 어두워졌다. 하지만 가제프는 고개 숙인 알리시아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아가씨가 굳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모든 일은 순리에 맞게 돌아갈 테니까요."

    "네, 알겠어요."

    도로 고개를 든 알리시아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제프는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으며 알리시아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더 궁금한 이야기는 없으신가요? 다른 이야기도 좋습니다."

    "다른 이야기요?"

    알리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무시지 않으실 거라면,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때우는 것도 좋으니까요. 궁금한 게 있으면 편히 물어보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슈바르한이 어떤 곳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음, 그 질문은 꽤나 포괄적이라서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하지만 흔히 슈바르한을 부를 때에는 신의 축복이 닿지 않는 곳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곤 합니다."

    가제프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신의 축복이 닿지 않는 곳이라. 꽤 추상적인 표현이네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 말보다 슈바르한을 잘 표현하는 말은 없으니까요."

    "어째서죠?"

    "사계절 내내 계속되는 겨울 때문에 얼어붙은 땅은 농사에는 적합하지 않고, 야생동물들도 극한의 환경에 맞춰서 더욱 강하고 매서워졌으며, 심지어 마물까지 나오곤 하니. 신의 축복이 닿지 않는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과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끔찍한지 가제프의 매끄러운 이마에 무의식적으로 깊은 주름이 잡혔다.

    "하지만 이제는 제국에서 손꼽히는 영지잖아요."

    "다 전하의 덕분이죠. 슈바르한 사람들이 괜히 프라임 신보다 대공 전하를 더 따르는 게 아닙니다."

    "프라임 신이라면, 분명……."

    알리시아는 아름다운 사제 나탈리를 떠올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는 자신을 프라임 신전의 사제라고 소개했었다.

    "블랑셰 제국의 국교입니다. 제국과 건국을 함께한 만큼 아주 오래된 종교죠. 개인적으로는 그 역사에 비해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고 생각하지만요."

    "국교를 그렇게 말씀하셔도 되나요?"

    "충실한 신도인 수도 사람들에게 말하면 이단이라고 한 소리를 듣겠지만, 지금은 저희밖에 없으니까요."

    "경께서는 프라임 교를 썩 좋아하지 않으시나봐요."

    "그들의 교리는 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거든요."

    "전에 뵈었던 사제님은 그렇게 보이지 않으셨는데요."

    신 앞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말하던 나탈리는 고결한 사제, 그 자체였다. 그녀가 가진 것에 따라 사람을 차별할 거라곤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나탈리님은 특별한 분이시니까요."

    "……."

    "아가씨께서는 어떠십니까?"

    "저요?"

    "아가씨께서는 신을 믿으시나요?"

    휘어진 눈매 사이로 가제프의 두 눈이 일순간 반짝였다. 알리시아가 어떤 인물인지는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힘에 대한 비밀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건 사실이었다.

    "아뇨."

    알리시아는 숨도 쉬지 않고 곧장 대답했다.

    "대답이 빠르시군요."

    "신을 믿는 것만으로 모든 일이 괜찮아질 수 있다면, 얼마든지 믿었겠죠. 하지만 신은 단지 들어줄 뿐이에요."

    "들어준다고요?"

    "돌아가신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에요. 신은 어디서나 우리를 보고 있고,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귀 기울인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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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한 이야기군요."

    가제프가 재빨리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썼다. 유리알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는 처음보다 더 짙은 호기심이 엿보였다.

    "그렇지도 않아요. 그냥 그저 그런 미신에 불과할 뿐이죠. 그리고, 설령 신이 있다 해도 아무것도 해주지 않고 듣고만 있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괜한 희망을 품게 되고 그만큼 절망하게 될 뿐이죠."

    "아가씨께서는 신을 원망하시는군요."

    "원망할 필요도 없죠. 그런 건 애초부터 없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니까요."

    알리시아는 쓰게 웃었다. 모친은 죽는 그 순간까지 신을 믿었지만, 정작 신은 그 믿음에 답해주지 않았다. 신을 믿을만한 이유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제가 너무 비관적으로 굴었나요?"

    "아닙니다. 저도 신을 믿진 않으니까요."

    가제프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리곤 애꿎은 서류를 만졌다. 알리시아의 비밀이 궁금했던 건 사실이지만, 더는 캐물을 순 없었다. 가벼운 호기심으로 건드리기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을 한 주제에 오기로 버티고 있는 여자는 충분히 많은 감정을 짊어지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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