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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6)화 (16/164)
  • 16화. 그대가 원한다면야

    2020.04.27.

    "바뀌는 건 없어. 나는 그녀를 대공비로 맞이할 거다."

    불안한 가제프의 시선을 알아차린 카벨레누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일어나지도 않은 문제로 절절 매는 건 슈바르한의 주인답지 않은 일이지."

    "송구합니다. 미욱한 제가 감히 주군을 걱정했군요."

    상관의 오만한 미소에 가제프는 실수를 깨닫고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걱정했지만 사실 그것부터가 우스운 일이었다. 가제프가 지금껏 봐왔던 카벨레누스는 언제나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사내였다. 그에게 두려움 같은 건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귀찮은 일은 최대한 배제하는 게 좋겠지."

    괜히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도 알리시아는 쓸데없는 생각이 많았다. 시끄러워질 만한 일들이 벌어질 만한 여지는 남겨두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알리시아의 흔적을 지워야겠어."

    "지운다는 것은?"

    "노이슈타인 공주는 이곳에서 죽은 걸로 한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정보도 모두 지워버려."

    카벨레누스의 두 눈이 사냥감의 목덜미를 문 짐승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그렇다면 아가씨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알리시아는 노이슈타인의 외형을 가지고 있지 않지."

    "눈에 띈다는 건 그만큼 소문을 내기 좋다는 거겠죠."

    "할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가제프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카벨레누스가 말한 순간부터 이미 가제프의 머릿속에는 완벽한 계획이 서 있었다.

    "아가씨와 관련된 모든 정보들을 삭제한 후, 아가씨가 죽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죠. 그리고 그걸 사용인들에게 목격하게 해서 목격자들을 만들고 소문을 퍼트리면 됩니다."

    알리시아는 노이슈타인 내의 유명인사였다. 무조건 그녀의 존재를 지우려고 하는 것보다 유명세를 이용해서 일을 처리하는 편이 더 안전했다.

    "그렇게 되면 꽤나 주변이 시끄러워질 텐데."

    "그만큼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을 겁니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이 흐르게 되면 사람들은 아가씨에 대해 잊을 테고 결국엔 단편적인 기억만이 존재하겠죠."

    가제프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벨레누스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애당초 노예라는 신분 자체가 흠이었다. 노예의 꼬리표를 뗄 수 있다면 떼는 편이 오히려 알리시아가 대공비가 되는 데에 유리했으니 신분을 속이게 된 건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나쁘지 않군."

    "다만 그렇게 되면 아가씨의 신분이 애매해지긴 합니다."

    알리시아를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킨 후엔 적당한 가문에 입적시켜 혼인할 계획이었으나, 그건 제르페누스가 내건 조건을 충족했을 때였다. 제르페누스에게 결혼 승낙을 받기 전까지는 알리시아의 신분은 노예로 있는 편이 나았다. 슈바르한의 대공비 자리를 노리고 있는 자들이 많은 만큼 견제 역시 심했으니까. 굳이 그녀를 주목 받게 해 위험에 빠트릴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이 문제로 길게 끌 생각은 없으니 괜찮을 거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가제프가 말끝을 흐리며 카벨레누스의 심기를 살폈다. 월권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충직한 신하인 가제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군의 안위였다.

    "무슨 할 말이 있나?"

    "폐하께 아가씨에 대해 알리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만약, 폐하께서 아가씨의 힘에 대해 아신다면, 전하께 그런 제안 같은 건-."

    "폐하니까, 더 안 되는 거다."

    카벨레누스가 단호하게 가제프의 말을 잘랐다. 제르페누스는 제 이복동생인 카벨레누스를 진심으로 아꼈다. 그 마음이 거짓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카벨레누스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알리시아의 정체를 제르페누스에게 들켜선 안 되는 것이기도 했다. 알리시아에게 정말로 특별한 힘이 있고, 그걸 제르페누스가 알게 된다면 그가 할 선택은 뻔했으니까. 카벨레누스는 눈을 내려깐 채로 짧은 숨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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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일이 생겨서 그대 먼저 떠나게 될 거야."

    "저 혼자서요?"

    "가제프를 함께 보낼 테니 너무 걱정하진 마."

    "클라우드 경이 함께 가주신다면 걱정할 게 없겠지만, 그래도……."

    "말끝을 흐리는 버릇을 고치라고 했을 텐데."

    카벨레누스가 짧게 혀를 찼다. 제법 자기 주장을 하는 게 익숙해졌다고 생각해도 알리시아는 습관처럼 말을 속으로 삼키는 버릇이 있었다.

    "그대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상관없어. 그러니 괜히 머릿속으로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솔직하게 말해."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의 눈치만 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건 그녀에겐 여전히 낯설고 어려운 일이었지만 카벨레누스의 앞에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집요한 사내는 자신이 원하는 걸 얻을 때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전하가 없다고 생각하니 섭섭해져서요."

    "듣기 좋은 말이군."

    "네?"

    일순간 알리시아의 창백한 뺨에 붉은 기가 확 번졌다.

    "이리와."

    알리시아는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카벨레누스의 품에 안겼다.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허리를 감싸는 사내의 팔은 무척이나 단단했다.

    "그대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바로 합류할 거야. 그러니, 괜히 다른 곳에 눈 돌리지 마."

    "눈을 돌린다고요?"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라는 거지. 그대는 언제나 생각이 많으니까."

    카벨레누스가 천천히 알리시아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투박한 손과 달리, 사내의 손길은 퍽 다정하고 조심스러워 언제나 신기할 따름이었다.

    "못해도 이번 달 안으로는 출발하게 될 테니, 챙겨갈 짐이 있다면 미리 가제프에게 맡겨놔."

    "제게 챙겨갈 짐 같은 건……."

    "또, 말끝을 흐리는군."

    카벨레누스가 짧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알리시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괜찮다면 하나만 가져가도 될까요?"

    "그게 뭐지?"

    "클라우드 경에게 듣기론 왕족들의 물건들은 따로 보관한다고 들어서요. 혹시 제 물건도 보관 중이라면 그걸 가져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알리시아의 목소리는 말하면 할수록 점점 더 작아들어 마지막쯤에는 겨우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카벨레누스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서렸다. 알리시아가 요구를 한다는 건 의외의 일이었다.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평범한 종이 몇 장이에요."

    카벨레누스의 침묵을 오해한 알리시아가 다급하게 뒷말을 덧붙였다.

    "진정해. 그대 말대로 평범한 종이 몇 장이라면 대단할 거 없잖아.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그대가 원한다면 구해다주도록 할 테니까."

    카벨레누스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여자의 등을 손바닥으로 다독였다. 알리시아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카벨레누스를 바라봤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그게 뭐 어렵다고."

    카벨레누스의 눈이 재빠르게 알리시아의 표정을 훑었다. 알리시아의 얼굴엔 이례적으로 기대감이 엿보였다. 그게 신기해서 카벨레누스는 곧장 다음 말을 이어 붙였다.

    "아니면, 지금 바로 찾으러 가는 건 어때?"

    "지금이요?"

    "종이 몇 장이 아니라, 필요한 게 있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챙겨가. 슈바르한으로 떠나면 이곳으로 돌아올 일은 거의 없을 테니까."

    카벨레누스의 호의에 알리시아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정말로 지금 찾으러 가도 되나요?"

    "그대가 원한다면야."

    카벨레누스의 입가에 옅게 미소가 번졌다. 알리시아가 뭔가를 요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기분이 꽤 좋았다.

    "많은 걸 바라진 않아요. 저는 그저-."

    "그럼 앞으로는 많은 걸 바라도록 해."

    "……."

    "그대가 원한다면 종이 몇 장이 아니라, 그 이상도 해줄 수 있으니까."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를 안은 채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마르고 가벼운 몸을 안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당황해 제 목을 감싸 안는 여자의 팔이 기꺼웠을 뿐이었다.

    "저, 저 혼자서도 걸을 수……."

    "제대로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대가 뭘 말하는지 몰라."

    "……."

    "누누이 말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그냥 말해. 속으로만 삼키고 있으면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법이야."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걸어나가는 카벨레누스에 알리시아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이대로라면 카벨레누스에게 안긴 채 복도로 나가게 될 것이었다. 알리시아는 점점 더 가까워지는 문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내, 내려주세요."

    그것은 무척 작은 목소리였지만, 카벨레누스의 걸음을 멈추게 하기엔 충분했다.

    "봐, 막상해보면 쉽잖아."

    카벨레누스는 가볍게 알리시아를 놔주었다. 사라진 온기가 아쉽긴 해도 성과가 나쁘진 않았다.

    "뒤 말고, 내 옆으로 와."

    물론 자연스레 뒤로 물러나 걷는 저 걸음은 개선의 여지가 있지만.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가 그럴싸한 대공비가 되려면 얼마의 시간이 걸릴까 상상하며 천천히 걸음을 늦췄다. 누군가와의 걸음에 맞춰서 걸어본 적 없었는데, 제 걸음을 쫓아오는 것도 버거워 보이는 알리시아를 보니 자연스럽게 걸음이 느려졌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고요 속 잔잔히 울려퍼졌다.

    "전하, 여긴 어떻게-."

    "문을 열도록."

    카벨레누스의 손짓에 경비를 서던 병사가 재빨리 닫힌 문을 열고 방 안의 등불을 밝혔다. 불이 들어오고서야 비로소 방의 상태가 제대로 보였다 짐들을 대충 옮겨서 쌓아놓기만 한 건지, 내부는 썩 깨끗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카벨레누스는 바로 후회했다. 감정이 앞서서 생각이 너무 짧았다. 알리시아가 아무리 덤덤하다 해도 노이슈타인 왕족들은 그녀의 혈족이었고, 방에 있는 물건들은 그들의 유품이었다.

    "이 상태로 찾는 건 무리일 것 같군. 내일 날이 밝으면 사람을 시켜……."

    카벨레누스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방에 들어온 후부터 알리시아는 넋 나간 표정으로 한곳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카벨레누스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이미 그녀의 발은 움직였다. 탁, 탁, 탁-. 말릴 새도 없이 알리시아의 손이 성급하게 가구함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그녀는 뭔가를 찾고 있었다.

    "알리시아."

    "죄, 죄송해요……."

    카벨레누스의 부름에 겨우 정신을 차린 알리시아가 겁먹은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그녀의 손에는 구겨진 종이 몇 장이 들려 있었다. 카벨레누스는 미간을 찡그린 채로 알리시아 쪽으로 다가섰다.

    "그게 뭐지."

    "……."

    "알리시아."

    카벨레누스가 재차 부르자, 알리시아는 겨우 그를 올려다봤다. 괜찮아진 것 같다가도 불쑥 튀어나오는 끔찍한 기억들은 그녀를 두렵게 해 반사적으로 몸이 긴장됐다. 하지만 그녀의 눈앞에 선 건 노이슈타인 왕비가 아닌, 카벨레누스였다.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알리시아는 심호흡을 한 후에 떨리는 손으로 들고 있던 종이를 카벨레누스에게 내밀었다.

    "……어머니의 초상화예요."

    "그림? 하지만 이건……."

    카벨레누스는 낡은 양피지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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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리시아가 내민 종이는 그림이 아닌, 글이 적혀 있었다.

    "그림은 뒷면에 있어요."

    알리시아의 말대로 종이를 뒤집어보니, 여자 그림이 있었다. 카벨레누스는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림 속 여자를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망설이는 건 그답지 않은 일이었지만 붉게 물든 알리시아의 눈가를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대와 무척 닮았군."

    결국 카벨레누스가 꺼낼 수 있는 답은 그 정도였다. 알리시아는 한 번 더 카벨레누스의 반응을 살핀 후, 천천히 몸의 긴장을 풀었다.

    "어머니가 훨씬 미인이에요."

    "그런가?"

    "네. 굉장한 미인이셨거든요."

    알리시아는 물기 어린 눈으로 어머니의 초상화를 바라봤다.

    "그런데 왜, 이런 곳에 초상화가 있는 거지? 누가 그린 건가?"

    "부끄럽지만, 제가 그린 거예요."

    "그대가?"

    카벨레누스의 시선이 다시 초상화에 닿았다. 알리시아가 직접 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림이 좀 더 다르게 보이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림을 못 그린 지는 몇 년이 흘렀지만요."

    "그 표현은 누군가 그대가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제가 뭔가를 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알리시아는 어설프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절대 잊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니 얼굴은 흐릿해져만 갔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도, 어머니의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버려진 종이에 다 닳은 펜촉으로 그리기 시작한 그림은 어설프긴 했어도 모친의 눈, 코, 입을 하나하나 떠올려가며 그리는 것만큼 그녀를 기억할 수 있는 건 없었으니까. 하지만 누구도 알리시아가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림을 그린다는 걸 들킨 날, 그녀는 비싼 종이와 펜을 도둑질을 했다고 누명을 쓰고 흠씬 두들겨 맞았고, 그림 그리는 것을 금지당했던 건 물론, 지금껏 그리던 초상화들도 모조리 빼앗겼다. 알리시아가 빼앗긴 자신의 그림을 볼 수 있었던 건 노이슈타인 왕비의 기분이 상했을 때만이었다. 노이슈타인 왕비는 기분이 좋지 않을 때마다 자신의 발밑에 알리시아를 무릎 꿇게 한 채, 보란 듯이 그녀가 그린 초상화를 한 장씩 태우곤 했다. 불에 타 사라져가는 어머니의 초상화를 보며 절규하는 알리시아의 모습은 노이슈타인 왕비에게 있어선 즐거운 유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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