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15)화 (15/164)
  • 15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2020.04.23.

    "겨울이 오기 전에 슈바르한으로 떠나신다고 들었어요."

    "내가 겨울이 오기 전에 슈바르한으로 떠나는 건 맞아. 하지만 왜, 그대가 내가 없는 순간을 대비해야 하는 거지?"

    "그야, 당연히 전하께서 떠나시면 저는 노이슈타인에서-."

    "날 따라오지 않을 셈인가?"

    카벨레누스가 보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알리시아는 애꿎은 치맛자락만 꽉 쥔 채 겨우 입술을 뗐다.

    "……제겐 결정권이 없는 걸요."

    "그래서, 내가 떠나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겠다고?"

    카벨레누스가 이를 악물었다. 알리시아와 함께 떠나는 건 그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는데, 그녀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카벨레누스와 떨어지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떠나시는 건 전하의 마음이시니-."

    "그대도 떠날 거야."

    카벨레누스가 성급하게 알리시아의 말을 가로챘다.

    "네?"

    놀라서 커진 알리시아의 두 눈은 정말로 함께 떠나는 것을 염두해두지 않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 사실이 카벨레누스의 신경을 벌레처럼 야금야금 갈아먹었다.

    "그대도 슈바르한에 갈 거라고."

    "정말 저도 가는 건가요?"

    "그럼 이곳에 혼자 남으려고 했나?"

    나 없이? 카벨레누스는 그 뒷말을 겨우 삼키며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와의 관계는 항상 도돌이표 같았다. 나름대로 가까워졌다고 생각해도 막상 확인해보면 너무나 멀게만 느껴졌다. 항상 초조하고 불안한 건 자신뿐이었고, 알리시아는 항상 덤덤하게만 보였다.

    "슈바르한으로 떠나는 마차가 준비되자마자, 나는 가장 먼저 그대를 마차에 태울 거야. 그 말이 무슨 뜻인 줄 알아? 그대가 좋든, 싫든 간에 그대는 나와 슈바르한에 가야 한다는 소리야."

    "……."

    "……왜 울지?"

    "……."

    "그게 울 정도로 싫은 일인가?"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알리시아는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아내기 위해 고개를 푹 숙였다. 당연히 두고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겨울이 와도 계속해서 카벨레누스의 옆에 있을 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서 견딜 수 없었다.

    "울지 마. 운다고 해서 봐주지 않아."

    "……."

    "그리고, 내 앞에서 고개 숙이지 마. 나는 당신이 고개를 숙이고 감정을 숨기려고 할 때면, 아주 미쳐버릴 것만 같으니까."

    카벨레누스의 커다란 손이 알리시아의 얼굴을 쥐고 고개를 들게 했다. 그의 손에서는 여전히 싸한 쇠 냄새가 났고 무엇이든 부숴버릴 수 있을 것처럼 단단했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더는 그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짐승 같은 사내의 시선이 닿는 것이 기꺼웠다.

    "기뻐서 그랬어요."

    알리시아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욕심은 감추는 것이라고 평생 배웠는데, 이 사내 앞에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포기하고 도망치려고 해도 끊임없이 그녀를 붙잡고, 감추지 말라고 말하는 사내는 단 한 번도 알리시아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싫어한 적이 없었다.

    "……뭐가 기쁘다는 거지?"

    언젠간 이 선택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자신은 가진 것이 하나도 없고, 그는 반대로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니까. 서로의 다름을 분명하게 깨닫는 날이 되면 분명 오늘이 후회될 것이었다. 그럼에도 말하고 싶었다.

    "……전하와 함께 있을 수 있어서요."

    "……."

    "사실, 계속 생각했거든요. 전하와 함께 슈바르한에 가고 싶다고."

    알리시아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만약, 카벨레누스가 턱을 잡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곧장 고개를 숙였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진작 말하지 않았지?"

    "절 원하는 사람은 없는 걸요."

    "……그댈 원하는 사람이 없어?"

    카벨레누스가 미간을 찡그리며 거친 숨을 뱉었다.

    "네.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알리시아는 입술을 우물거리며 카벨레누스의 눈치를 살폈다. 당연하게 재촉 당할 줄 알았는데 정작 그는 가만히 그녀의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결국 알리시아는 주먹에 힘을 꽉 준 채, 조심스럽게 멈췄던 말을 이었다.

    "……항상 불행을 몰고 오니까요."

    모두가 알리시아를 꺼려했다. 그녀는 불행의 별 아래에서 태어난 게 틀림없다고 수군거렸다. 모친의 힘이 사라지고, 끝끝내 죽은 것도, 전부 알리시아가 재수없는 탓이라고 그랬다.

    "불행이라고?"

    "지금껏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전하께서도 웬만하면 절 가까이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거예요."

    "불행이라는 게 정확히 뭐지?"

    "네?"

    "그대가 불러오는 불행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거냐고."

    카벨레누스가 손을 움직여 알리시아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게 했다. 오롯이 그녀를 담은 채 빛나는 금안은 오만했지만 그만큼 당당했다.

    "제가 태어나던 날에 큰 화재가 났었고-."

    "그대가 태어난 날, 일어났던 화재는 방화였어. 누군가 일을 벌이고 수습하기 위해 낸 거였지. 그대 때문이 아니었어."

    "……."

    "그 불행은 됐으니, 다음 불행을 말해보지 그래?"

    카벨레누스가 고개를 거만하게 까닥거렸다. 알리시아는 물기 어린 눈을 한 채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 그게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대의 모친은 맞아 죽었지. 다름 아닌, 노이슈타인 왕의 명령으로. 그걸 알기에 그대도 그자를 죽이려고 했던 거잖아."

    "결과적으로는 왕이 죽인 거지만, 그 이유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카벨레누스의 손아귀에 좀 더 힘이 들어갔다. 알리시아는 가까워진 사내의 얼굴에 반사적으로 숨을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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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에 대해 알아봤지만, 내가 보기엔 그대가 불행을 몰고 왔다고 볼만 한 기록은 없었어."

    "하지만……."

    "그 무엇도 그대의 탓이 아니었어. 그대는 그냥 당했을 뿐이야.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내가 보기엔 그래. 카벨레누스의 마지막 말은 작았지만 알리시아의 귀에는 무엇보다 분명히 들렸다. 알리시아는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것만 같은 울음을 참아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사실 제 탓이 아니라는 거 알고 있었어요."

    "거봐, 그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잖아."

    "하지만, 다들 그렇게 말했어요. 제 탓이라고, 저만 아니었으면 괜찮았을 거라고요."

    덜덜 떨리는 알리시아의 손이 카벨레누스의 옷깃을 잡았다. 울어선 안 된다는 거 알고 있었지만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자신도 제 탓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한결같이 입을 모아 네 탓이라고 말하는 걸 듣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언제나 다수가 믿는 것이 진실이었고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다는 아니지. 나는 지금 그대 탓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

    "그리고, 설령 그대가 정말로 불행을 몰고 온다고 해도 상관없어. 아니. 정말 할 수 있다면, 어디 그 대단하다는 불행을 내 앞에 데려와 보도록 해."

    "……어째서요?"

    알리시아가 울먹거리며 중얼거렸다.

    "고작 운 따위에 흔들릴 정도라면, 슈바르한의 주인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턱을 추켜세운 사내는 지독하리만큼 오만함으로 그득 차 있었으나, 그것이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었다.

    "……전하께서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으신가요?"

    "두려움이 무서웠다면, 애초부터 검을 배우지 않았겠지."

    "……."

    "나는 행운도, 불행도 알지 못해. 뭔가를 이루는 데에 있어서 단 한번도 운 따위에 매달려 요행을 바라본 적 없고,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야. 불행 따위가 끼어들 자리 따윈 없어."

    "……그, 그럼 따라가도 되나요?"

    알리시아는 눈물로 뿌예진 시선 속에서 겨우 카벨레누스의 옷깃을 잡았다.

    "정말로 제가 전하와 함께 슈바르한에 가도 되는 건가요?"

    "따라오지 않겠다고 말해도 따라가게 될 거야."

    "다행이네요."

    알리시아의 잇새로 울음에 가까운 숨이 흘러나왔다. 왜 그에게서 계속 시선을 뗄 수 없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는 강했다. 언제나 알리시아의 뒤를 따르며 그녀의 숨통을 조이던 불행의 얼룩조차 하찮게 만들 정도로. 새삼스레 그 사실이 선명해져 알리시아는 더욱 크게 울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 * *

    "오늘은 아가씨와 동행하지 않으셨나봅니다."

    "어제 좀 일이 있어서. 오늘 수업은 빼도록 해."

    카벨레누스는 어제 엉엉 울던 알리시아를 떠올리며 턱을 괬다. 뭐가 그렇게도 서러웠던 건지, 울다 지쳐서 잠이 든 알리시아는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을 찌우고 기력을 보충시켰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약하기만 했다.

    "발만이라도 잡아서 먹여야 하나."

    "발만이요?"

    "아니. 혼잣말이다. 신경 쓰지 마."

    카벨레누스는 짤막하게 대답한 후, 서류에 눈을 돌렸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선 이미 발만을 비롯한 보양식 재료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가뜩이나 약해빠진 알리시아였다. 험준한 설원의 땅에서 잘 버틸 수 있을지 슬슬 걱정이 되는 건 당연했다.

    "아가씨가 오늘은 자리를 비우셔서 다행이군요. 안 그래도 전하께만 긴밀히 전해드릴 게 있었거든요."

    "전할 것?"

    "전에 명령하셨던 아가씨에 대한 조사 건입니다."

    가제프는 재빨리 카벨레누스의 곁으로 다가섰다. 유능한 부관이 찾은 건 서류로 남기는 것도 조심스러워서 일부러 기록도 작성하지 않은 정보였다.

    "전에 말한 수상한 점은 찾았나?"

    "그 부분은 아직입니다. 하지만, 정보를 찾는 도중 긴말하게 전해드려야 할 것 같아서 급히 약식으로나마 보고 드립니다."

    "그렇게 중요한 정보인 건가?"

    "경우에 따라선 그럴 것 같습니다."

    가제프는 대답을 끝내자마자, 손목에 찬 방음 팔찌를 조작했다. 혹시 몰라 챙겨온 마법도구를 여기서 쓸진 몰랐지만, 그만큼 이번 정보는 중요했다.

    "마법도구의 지속시간이 끝나기 전에 바로 요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일단, 아가씨의 모친은 노이트라이라 족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노이트라이라 족?"

    "남부의 소수 민족입니다. 기록상으로는 오래 전에 멸족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가제프가 짧게 심호흡을 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이슈타인 왕의 말도 안 되는 행적을 떠올리면 이것 외에는 확실한 답이 없었다.

    "그런 게 중요한 건가?"

    "노이트라이라 족은 신의 후손으로서, 육신이 단단해 대대로 신의 그릇으로 쓰였다는 신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건 다들 하나씩 가지고 있는 이야기 아닌가? 제국에도 그런 건 수두룩하지."

    카벨레누스가 삐딱하게 다리를 꼰 채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블랑셰 제국 사람들은 누구나 어려서부터 신앙을 교육받으면서 자라지만, 정작 그는 신을 믿지 않았다. 신의 이름 아래 행해지는 일들을 보고 있자면, 그것이 정말로 신의 뜻인지 의심되곤 했으니까. 카벨레누스에게 있어서 신은 권력을 유지하는 도구일 뿐이었고, 신화 역시 다르게 들리지 않았다. 신화란, 권력자들에게 특별함을 부여하기 위한 명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저 그런 신화라면, 노이슈타인 왕이 굳이 아가씨의 모친을 성에 들일 일도 없었을 겁니다."

    "신화가 사실이라는 건가?"

    "네. 노이트라이라 족의 힘은 진짜일 확률이 큽니다."

    "진짜라는 게 어떤 의미지?"

    카벨레누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간단히 말하면, 노이트라이라 족에겐 소원을 이루는 힘이 있다는 겁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군."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신화란 본디 과장되거나, 구전되면서 변질되기 마련이니까요. 완벽하게 같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만약 그 신화가 사실이라면 여러모로 곤란해질 겁니다."

    가제프는 방음 마법의 유효시간을 확인한 후, 곧장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겠지만, 제국에서 모시고 있는 신 플라임은 무엇이든 이루어줄 수 있는 전능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그래서, 대대로 플라임 신전은 누구든 신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충실히 따른다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 말하며 그들의 교리를 완성해왔습니다. 그런데, 만약 소원을 이뤄줄 수 있는 특별한 존재가 실제로 나타나게 된다면-"

    "둘 중 하나겠지. 취하려고 들거나, 이단으로 몰거나."

    신전은 순수하게 신앙을 추구하는 곳이 아니었다. 제국의 건국을 함께하고, 국교로서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해온 플라임 신전은 황제와는 별개의 절대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신의 종을 자처하는 그들이 신의 뜻이라는 명분 아래, 희생을 강요하며 권력을 공고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건 알만한 이들은 다 아는 이야기였다.

    "저는 솔직히 노이트라이라 족의 이야기가 여전히 신빙성 있게 들리진 않습니다. 제가 본 아가씨는 솔직히 평범해 보일 뿐이니까요. 하지만 다른 이들의 입장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알리시아의 이야기가 퍼진다면, 플라임 신전만 움직이진 않겠지. 다들 소원을 이루어주는 보물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될 거야. 그리고, 거기서 더 꼬인다면 진위 여부 자체가 중요해지지 않게 될 수도 있지."

    "거기까진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가능하긴 하죠. 아가씨에 대한 소문이 세상을 뜨겁게 달구고 난 후라면, 아가씨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권력의 상징이 될 테니까요. 그때쯤이면 진위 여부는 필요하지 않죠."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움직이는 게 좋을까."

    "사실 가장 좋은 방법은……."

    가제프는 차마 말을 잊지 못하고 말을 흐렸다. 설령 알리시아에게 소원을 이뤄주는 힘이 있다 해도 카벨레누스에게는 그런 힘은 필요하지 않다. 카벨레누스는 소원 따위에 의지하기보단 스스로의 힘으로 얻어내는 사내였으니까. 하지만 그건 카벨레누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그를 제외한 다른 권력자들도 그럴 거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알리시아의 힘이 진짜든, 아니든 간에 분쟁이 일어날 소지가 있는 한, 괜히 그녀가 그들의 손에 넘어가는 불상사가 생기기 전에 정리하는 편이 가장 깔끔했다. 원인을 제거하면 문제는 생기지 않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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