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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4)화 (14/164)

14화. 나에 대한 거라면, 뭐든

2020.04.20.

"그나저나 가제프에게 글은 문제없이 잘 배우고 있는 거겠지?"

"아, 네. 경께서 굉장히 잘 가르쳐주세요."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너무 무리하진 마. 침대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괜히 무리하다가 기껏 회복한 몸이 상하면 그게 더 곤란하니까."

"하지만 초조한걸요."

"시간은 충분하니까, 천천히 해. 나는 적당히 기본만 익혀도 만족하니까."

카벨레누스는 입버릇처럼 시간이 많다는 말을 반복했지만 알리시아에게는 딱히 닿진 않았다. 알리시아는 분위기에 맞춰 웃으면서도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시간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울적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카벨레누스 일행이 노이슈타인에 머문 지도 벌써 반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슬슬 그들이 떠날 시기가 다가온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저 사람이 떠난 후의 나는 과연 어떻게 될까.'

알리시아는 짤막하게 숨을 뱉었다. 처음 봤을 때의 카벨레누스는 그저 두려운 존재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가 아예 무섭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이제는 그의 존재가 익숙했다.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 그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생각보다 많이 외로울 것 같은데…….'

일상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카벨레누스가 자신의 일상 깊숙이 침투해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울적해졌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표정이 그렇게 수시로 바뀌는 거지?"

"네, 네?"

"날 앞에 두고도 다른 생각을 할 만큼 내가 많이 편해졌나 보군."

어쩐지 목소리에서 심술이 묻어나는 것 같은 건 단지 기분 탓일까. 알리시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고개를 저어 부정의 뜻을 표했다.

"아뇨, 그럴 리가요!"

"아니면 아닌 거지, 그렇게 표정을 굳힐 필요까진 없지 않나."

"그게, 아무래도 전하께서는 특별한 분이니까요."

"특별? 뭐가 특별하다는 거지?"

카벨레누스가 턱을 괸 채로 삐딱하게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평가 내용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저 평가를 하기 위해서는 한 번이라도 더 상대를 떠올리고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 그 사실이 마음에 들었을 뿐이었다.

"그야, 슈바르한의 주인이시잖아요."

"그게 다인가?"

"블랑셰 제국의 황태제이기도 하시죠."

"또 뭐가 있지? 모두가 아는 뻔한 사실 말고, 좀 더 제대로 된 것으로 말해봐"

카벨레누스의 시선이 집요하게 알리시아의 얼굴을 탐했다. 알리시아는 뜨거운 시선 속, 도대체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카벨레누스가 만족할 만한 대답을 꺼내려 애썼다.

"……다정하시다고 생각해요."

"다정? 내가?"

카벨레누스가 반사적으로 헛웃음을 뱉었다.

"물론 세간에서 말하는 다정함과는 다소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제가 느끼기엔 그랬어요."

알리시아도 슈바르한의 늑대와 다정함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다정하다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지만 가끔씩, 카벨레누스가 절 보는 시선을 정의 내린다면 다정함일 거라고 알리시아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무심한 듯 보이면서도 그녀의 생채기 하나에도 얼굴을 찌푸리는 사내의 행동을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

"솔직히 나는 다정하다는 소리를 썩 좋아하지 않아."

"아, 그러면-"

"그래도 생각보단 나쁘진 않군."

다정함은 곧 나약함이라 여겼기에 썩 좋아하지 않았는데, 알리시아가 내려준 평가는 불쾌하게 들리지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그녀의 존재 자체가 그랬으니 그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밖에 다른 평가는 없나."

카벨레누스가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움직였다. 그렇지만 알리시아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미묘하게 아까보다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게, 아직은……."

"좋아. 그럼 다음에 또 물어볼 테니 더 생각해보도록 해."

"뭐를 생각하라는 말씀이세요?"

"나에 대한 거라면, 뭐든."

카벨레누스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 * * 카벨레누스는 집무실에 앉아 서류를 읽었다. 아니, 정확히는 읽고 있다는 건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불과했다. 그의 신경은 집무실 한편에 앉아 있는 두 남녀에게 향해 있었다.

"말리우나."

"아뇨. 그건 마리아우나라고 읽어야 합니다. 다시 한번 따라해보십시오."

"마리우나요?"

"아뇨. 마리아우나입니다."

가제프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알리시아의 발음을 지적했다. 알리시아는 양 뺨을 발갛게 물들인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뭐가 죄송하십니까?"

"열심히 가르쳐주시고 계신데, 제가 따라잡지 못하고 있어서요."

알리시아의 양어깨가 힘없이 쳐졌다.

"아닙니다. 원래 처음에는 다 헷갈리는 발음입니다. 오히려 처음치곤 잘하고 계시는 겁니다."

"……정말인가요?"

처졌던 알리시아의 어깨가 미약하게나마 위로 올라왔다.

"네. 잘 하고 계십니다."

가제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노이슈타인 공주에게 블랑셰의 예법을 가르치라는 상관의 명령에 처음에는 당혹스러웠지만 하다 보니 썩 나쁘지 않았다. 알리시아는 많은 것이 미숙했다. 노이슈타인의 문화조차 가제프보다 모르는 게 많았다. 그럼에도 가르치는 맛이 있었던 건, 그녀가 노력가이기 때문이었다. 처음 알리시아를 가르칠 때만 해도 그녀는 물음조차 던지지 못할 정도로 잔뜩 움츠려 있을 뿐이었지만, 그렇다고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가제프는 알리시아가 오늘 알려준 발음도 조만간 완벽하게 구사해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괜찮으시다면, 다시 해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어떤 언어를 배우든, 많이 발음해보는 편이 좋으니까요."

가제프의 허락에 알리시아는 바로 연이어 발음을 반복해봤다. 여전히 발음은 어설펐지만 몇 번 발음했다고 처음보다는 훨씬 나았다.

"잘하시는군요. 조만간 익숙해지실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아뇨. 저는 있는 그대로를 말한 것뿐입니다. 아가씨께서는 재능이 있으십니다."

"재능이라고 하기엔 미숙해요."

"배움에 있어서 최고의 재능은 노력이니, 충분히 재능이 있으십니다."

연이은 칭찬에 알리시아의 뺨엔 홍조가 더욱 짙어졌고, 가제프의 미소도 진해졌다. 가제프는 칭찬 자체를 즐겨 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알리시아에게는 언제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가제프는 카벨레누스의 부관이 되지 않았더라면 아카데미 교수가 되었을 인재였다. 그는 교육에 익숙했고 어떻게 가르쳐야만 상대의 재능을 최대한으로 살릴 수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알리시아에게는 칭찬이 필요했다.

"경께서는 다정하시네요."

"이래 봬도 슈바르한에서는 손꼽히는 신랑감이었습니다."

"네. 정말로 그러실 것 같아요."

"그럴 것 같다가 아니라 정말로 그렇습니다. 나중에 슈바르한에 가면 보여드리죠."

가제프가 일부러 농을 던지며 책장을 넘겼다. 잦은 칭찬과 분위기를 풀기 좋은 가벼운 농담은 효과적이었다. 처음에는 잔뜩 움츠려서 물음조차 던지지 못했던 알리시아는 어느덧 가제프에게 모르는 것을 먼저 물어볼 정도로 성장해있었다. 알리시아에게 가제프는 훌륭한 스승이 되어주고 있었다. 다만, 그 훌륭한 스승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내의 시선을 간과하고 있었지만.

"가제프."

"네, 전하. 부르셨습니까?"

"이 공문은 내용이 이상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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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실수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가제프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벨레누스가 저렇게 얼굴을 찡그릴 정도면 문제가 크단 의미였다. 지체한다는 건 말도 되지 않았다.

"직접 가서 확인해보고 내게 다시 보고해."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아가씨는-."

"내가 보고 있지. 궁금한 게 있으면 내게 물어보도록 해."

카벨레누스가 재빨리 가제프의 말을 가로챘다. 그는 여전히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뇨. 그냥, 제가 알아서 하고 있을게요. 어차피 오늘 배울 건 거의 다 한 거라서 복습하면 돼요."

"……."

알리시아는 수줍게 웃으며 보던 책을 매만졌다. 공부를 하게 된 것만으로도 기쁜 일이었다. 카벨레누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게다가…….'

알리시아는 지난날을 떠올리며 멋쩍게 웃었다. 사실 알리시아를 가르치던 첫 스승은 카벨레누스였다. 하지만 그는 가르치는 데에는 전혀 소질이 없었다. 문제를 보면 바로 답을 안다 해도 그걸 풀어 설명해주지 못하는 그는 글을 읽을 줄도 모르던 알리시아에게는 좋은 스승이 아니었다. 카벨레누스가 책을 노려보고 알리시아가 그 모습으로 불안하게 바라보는 것으로 끝나고서야 가제프가 알리시아의 스승이 되었고, 제대로 진도를 나갈 수 있었다. 당연히 카벨레누스에게 물어봤자, 제대로 된 풀이를 얻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가제프와의 공부가 굉장히 마음에 든 모양이군."

"네. 좋아요. 경께서는 무척 다정하시고, 똑똑하셔서 잘 알려주시는걸요."

"다정해?"

카벨레누스의 매끄러운 이마에 옅게 주름이 잡혔다. 그 역시 가제프를 칭할 때 유능한 부관이라고 평가하곤 하지만, 다정하다는 점은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가제프는 카벨레누스의 부관인 동시에 참모였다. 극악무도하다고 평가되는 전술을 구상할 때에는 항상 가제프가 함께였다. 게다가……

‘다정하시다고 생각해요’

알리시아는 자신에게도 같은 말을 했었다. 카벨레누스의 미간에 더욱 깊은 골이 파였다.

"네. 무척요. 만약 군에 입대하지 않으셨다면 교수가 되셨을지도 모른다고 하셨는데, 그것도 잘 어울리셨을 것 같아요."

"그깟 교수가 뭐 대단하다고."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아카데미라던 걸요. 게다가 만약 경께서 교수가 되었다면 아카데미 최연소의……."

종달새처럼 재잘재잘 떠들던 알리시아가 무심코 카벨레누스의 표정을 발견하고 말끝을 흐렸다. 카벨레누스는 더는 서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대신, 삐딱하게 턱을 괸 채 알리시아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공부하라고 했지, 수다를 떨라고 했던 것 같진 않은데."

알리시아의 얼굴에 초조함이 맴돌았다. 그동안 카벨레누스의 눈치를 수도 없이 살핀 덕분에 알고 있었다. 지금 그는 심기가 불편했다, 그것도 무척.

"공부는 문제없이 했어요. 다만……."

"다만?"

"경께서 제 긴장을 풀어주신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가끔씩 해주시거든요. 그게 너무 재미있어서 저도 모르게 자꾸 조르게 되어서요."

알리시아의 뺨이 불그스레하게 물드는 걸 바라보는 카벨레누스의 한쪽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다른 사내를 입에 담으면서 저렇게 웃는 건 반칙이었다.

"내겐 바라는 것도 없더니."

"네?"

"아냐. 처음부터 그대는 내게 그랬지."

카벨레누스의 잇새에서 탄식에 가까운 숨이 흘러나왔다. 알리시아가 점차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하나씩 해내기 시작하면, 자연스레 자신감도 붙기 마련이니까. 물 먹은 스펀지처럼 하나둘, 지식을 흡수해나가는 알리시아의 모습은 기특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이제 그녀에게선 죽음의 그늘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역시, 저 얼굴은 거슬렸다. 가제프가 뭘 해줬다고 저렇게 갓 태어난 아기새처럼 그를 따른단 말인가. 심지어 공부를 배우기 전까진 아예 말 한 번 섞지 않았던 사이지 않았던가.

"가제프가 마음에 드나?"

카벨레누스는 그 말을 뱉자마자 스스로가 부끄러워져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질문을 취소하고 싶진 않았다. 분명 그때 물어봤을 때 알리시아는 마음에 드는 사내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갈대보다도 쉽게 변하는 것이었다.

"경께서는 좋으신 분이죠."

"아니, 그보다는 사내로서 말이야."

"사내요? 그 말씀은……."

알리시아는 테이블 아래로 꽉 쥐고 있는 주먹을 감췄다. 카벨레누스는 여전히 그녀를 안지 않았고, 무수한 선물 공세를 하는 것도 멈춰버렸다. 그저 글을 공부하라는 명목으로 가제프와 그녀를 가까이 있게 하는 게 전부였다. 어쩌면, 카벨레누스는 가제프에게 자신의 소유권을 넘길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노예는 소유물이었고, 상관이 부하들에게 자신의 노예를 하사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가제프는 안 돼."

카벨레누스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알리시아를 가제프에게 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딴 멍청한 짓을 할 거라면 애당초 일을 여기까지 벌이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안 된다고요?"

"지금이야 상황이 이렇게 되어 임시로 가제프에게 교육을 맡기고 있을 뿐이지, 슈바르한으로 떠난 후에는 어림도 없어."

"네. 물론 잘 알고 있어요."

카벨레누스의 말 한 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고 간다. 알리시아는 더욱 주먹에 힘을 줬다.

"아쉽지 않나 보군."

딱히 감정이 깊은 건 아닌가. 덤덤한 알리시아의 표정에 카벨레누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미 충분히 각오하고 있는걸요."

"각오?"

"전하께서는 언젠가는 슈바르한으로 가셔야 하잖아요. 그러니, 저 역시도 전하께서 없는 순간을 대비하는 게 맞는 거죠."

"……없는 순간? 그게 무슨 소리지?"

카벨레누스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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