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11)화 (11/164)
  • 11화. 살고 싶어요

    2020.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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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로 찢겨 죽고 싶지 않으면 지금 당장 꺼져."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예전에 힘이 남았을 때, 모조리 죽여버렸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날 이후, 힘은 사라졌고 알리시아는 아무런 힘 없는 가냘픈 여자가 되었다. 누군가를 죽일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으로선 몸집을 부풀린 고양이처럼 힘이 돌아온 척 자신을 과시하며 안전을 도모해야 할 뿐이다.

    "이해할 수 없어요. 왜, 하필 당신에게 그런 힘이 주어진 건지. 힘이란 응당 그걸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져야 하는 법인데……."

    "여태껏 도망가지 않고 내 앞에서 떠들다니 당신은 목숨이 아깝지 않나 보지?"

    알리시아는 떨어진 단검을 주워 보란 듯 벨리타에게 내보였다. 꽉 쥔 손에 상처가 눌려 피가 뚝뚝 떨어졌지만 알리시아는 애써 고통을 참아냈다. 일부러 요란스럽게 소란을 피웠음에도 아무도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왕궁에는 벨리타의 손이 더 많이 닿아있는 듯했다.

    '도망칠 수 있을까?'

    은퇴하긴 했어도 벨리타는 한때 기사였고, 방에는 그녀 외에 두 사람이나 더 있었다. 그들이 퇴로를 막고 있는 이상, 도망칠 수 있는 확률은 낮았다. 그저 시간을 끌며 하녀가 빨리 와주길 바랄 뿐이다. 자신에게 아무런 힘이 없다는 걸 벨리타가 눈치채면 모든 게 끝이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공주님. 당신은 노이슈타인의 유일한 핏줄이고-"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은 그만둬. 나만 살아있는 게 아니잖아."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인정하긴 싫지만, 내 혈육은 어머니만이 아니야."

    하지만 정말로 모두 죽었던 걸까?

    "내 몸에는 더러운 노이슈타인 왕족의 피도 흐르지. 다시 말해, 그들 중 하나라도 살아남았다면 그깟 목걸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단 소리야."

    어머니가 살아있는 것보단 왕족 중 누군가가 살아있을 확률이 더 높았다. 카벨레누스를 비롯한 제국군은 왕족들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헛소리하지 마세요. 다른 분들이 살아남았다면 제가 왜 당신을 찾겠습니까."

    "헛소리인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그래서 누가 살아남은 거지? 페르토? 크리스타? 아니면……, 엘레나?"

    마지막 이름을 뱉는 순간, 짧게나마 벨리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알리시아는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역시, 엘레나가 살아있는 거구나."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엘레나 공주님은-."

    "엘레나의 시녀는 그녀의 사촌이었지. 그리고, 두 사람은 아주 닮았어. 얼핏 보면 착각할 만큼."

    엘레나는 형제들 중 가장 아름답고 머리회전이 빨랐다. 그녀라면 그 짧은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빠져나갈 궁리를 했을 것이었다.

    "괴상한 망상은 그만두세요. 엘레나 공주님은 이미 돌아가셨어요."

    "그녀가 죽었다면, 왜 내게 암살을 시킨 거지?"

    "노이슈타인 왕족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라는 뜻이었을 뿐이에요."

    "아니, 그건 변명이 될 수 없어. 당신 혼자선 사람들을 결집시킬 수 없었을 테니 말이야."

    벨리타가 아무리 왕비의 측근이었다 하더라도 그녀로는 카벨레누스에게 대적할 명분이 부족했다. 반란군들을 결집시키기 위해서는 좀 더 분명한 명분이 필요했다. 예를 들면, 몰락한 왕국의 왕족 같은 것. 알리시아는 현재 알려진 유일의 노이슈타인 왕족이었다. 그녀만큼 명분으로 내세우기 좋은 인물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벨리타는 알리시아에게 위험한 암살을 시켰다. 그렇다면 답은 뻔했다. 알리시아가 아니더라도, 반란군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줄 다른 존재가 있다는 소리였다.

    "당신이 인정하든, 안 하든 상관없어. 엘레나의 생사 따위 내가 알 바 아니니까."

    알리시아는 저를 짐승보다 못하게 바라보던 이복자매를 여전히 기억했다. 하지만 겨우 목숨을 건진 그녀를 억지로 끄집어내 죽일 생각까진 없었다. 이제야 겨우 정세가 안정되어가고 있었다. 이 와중에 반란군이 드러난다면, 또다시 피바람이 불 뿐이었다. 노이슈타인은 이미 충분한 피를 흘렸다. 더 이상 피를 흘릴 필요는 없었다.

    "대신, 그녀에게 이 말만 전해. 모든 것이 네 마음대로 다 이루어지던 나날은 이제 끝났다고. 괜한 생각하지 말고 목숨이라도 건진 것에 감사하며 조용히 살라고 말이야."

    "감사라고요? 당신은 정말로 뻔뻔하군요. 왜, 엘레나 공주님이 그런 꼴이 되셨는데요? 전부 당신 때문이잖아요."

    "그게 왜, 나 때문이지?"

    "당신이 그분을 지켜주지 않았기 때문이니까요."

    앵무새처럼 했던 말을 반복하는 벨리타에 알리시아는 깊게 탄식했다.

    "내겐 그녀를 지켜야 할 의무가 없어."

    "의무가 없긴 왜 없나요. 당신이 그동안 누렸던 걸 생각하면 그 정도 의무는 당연한 거죠."

    "망상에 빠진 건 당신이지. 존재하지도 않은 과거의 영광에 취해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날뛰는 꼴이 정말로 같잖을 뿐이야."

    "말조심하세요. 자꾸 그런 못된 말씀을 입에 담으시면, 공주님께서도 그 여자처럼 될 수 있으니까요."

    벨리타가 만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로 알리시아에게로 다가섰다. 알리시아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뭐라고?"

    "저는 아직도 그 여자를 기억한답니다. 개처럼 빌빌 기며 용서를 구하던 그 꼴을 떠올리면 자꾸 웃음이 나서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너어……."

    "아, 이런 농담은 별로신가요? 그게 아니면, 그때가 생각나서 부끄러우실 수도 있겠네요. 그때, 그 여자뿐만 아니라 공주님도 그랬잖아요. 누가 모녀 아니랄까 봐, 똑같이 네 발로, 후우……."

    얄밉게 입술을 이죽거리던 벨리타는 말을 멈추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벨리타의 표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공주님께선 아직 힘이 돌아오지 않으셨군요."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지?"

    알리시아는 눈에 잔뜩 힘을 준 채 반문했다. 곤란했다. 시간을 오래 끌 수 없을 거라곤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들키는 게 빨랐다.

    "일부러 공주님의 속을 긁는 소리를 많이 해드렸는데도 당신은 제게 덤비지 못하잖아요."

    정말로 힘이 돌아왔다면, 분명 날 가만두지 않았을 텐데. 승리를 예견한 듯 벨리타의 입꼬리가 길게 호선을 그렸다. 알리시아는 검을 꽉 쥐었다.

    "앙큼하게도 절 속였군요, 잡종 공주님?"

    "죽고 싶다면 바로 죽여주지."

    "허세 부리지 마세요. 금방이라도 잡아먹힐 것 같은 초식 동물 같은 꼴로 목소리를 높여봤자 조금도 무섭지 않으니까요."

    벨리타가 입술을 이죽거리며 알리시아를 향해 점점 더 다가왔다. 알리시아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덤덤한 척하고 싶었는데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식은땀의 감각이 오싹했다.

    "당신이 힘을 찾았다면 좋았을 텐데 아니라니 정말 아쉽네요."

    "……."

    "웬만하면 저도 큰 소란은 내고 싶지 않지만 안타깝게도 당신은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려서요. 혹시라도 당신이 그 악마한테 고귀한 혈통에 대한 이야기를 흘리기라도 하면 곤란해지잖아요."

    "날 죽이기라도 하려고?"

    "노이슈타인 왕족을 제 손으로 죽이는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쩌겠습니까. 당신이 못난 탓인걸. 고귀한 혈통께 누가 되지 않도록 처리할 수밖에 없겠죠."

    "내가 죽게 된 후의 후폭풍을 감당하지 자신이 있어?"

    노예인 그녀는 카벨레누스의 소유물이었다. 그녀를 건드리는 건 카벨레누스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질 것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공주님 시신은 잘 처리해드릴 테니까요. 외롭지 않게 아까 나간 하녀와 함께 묻어드릴게요."

    물론, 그 악마 자식은 공주님이 죽었는지도 모르고 도망갔다고만 생각하겠지만. 벨리타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품에서 여분의 검을 꺼냈다. 알리시아는 이를 악 깨문 채, 그대로 벨리타에게서 몸을 돌려 문 쪽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반항은 그리 길지 않았다. 퍽! 얼마 도망가지 못하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대로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넘어지면서 바닥에 맞부딪힌 몸이 둔통에 욱신거렸지만 아픔을 느낄 새는 없었다. 등 뒤에서 뒷목을 누르는 벨리타의 손이 우악스럽게 알리시아의 숨통을 조였다.

    "어쩜 이 순간에도 신음 한 번 내지 않으시는 건지. 늘 생각하지만 공주님은 참 독하네요. 하긴 그러니까, 폐하를 고발하고 그 악마에게 목숨을 빌 수 있었던 거겠죠?"

    "……."

    벨리타의 두 눈에 광기가 서렸다. 고대했던 기회에 자꾸만 참을 수 없는 미소가 흘러나왔다. 알리시아가 왕을 고발하고 슈바르한 대공의 여자 자리를 꿰찼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피가 거꾸로 솟았다. 노이슈타인을 지키지 못한 죄인 주제에 분에 넘치는 것들을 누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로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죽이지 않았다. 혹시라도 힘이 돌아올 수도 있었고, 카벨레누스와 가장 가까이 있으니 나름대로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여겼으니까. 참고, 또 참을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그녀의 오판이었다. 힘도 되찾지 못한 주제에 엘레나의 목숨을 쥐고 흔드는 알리시아는 고마움을 몰랐다. 고귀한 노이슈타인의 혈통이 아닌, 더러운 야만인의 핏줄일 뿐이었다. 더는 살려둘 이유가 없었다.

    "그 악마가 공주님에게 푹 빠져있다고 하던데, 이렇게 되니 문득 그자의 반응이 궁금해지네요. 공주님이 사라지게 되면, 그자는 과연 화를 낼까요? 아니면, 아무렇지 않을까요?"

    "……."

    "솔직히 저는 부디 그자가 괴로워하길 바라요. 하지만 그건 헛된 희망이겠죠. 아무리 좋은 옷을 걸치고, 정성껏 꾸민다고 한들 공주님은 더러운 잡종일 뿐이잖아요? 볼품없고 초라한 당신이 뭐가 예쁘다고 감정을 쏟아내겠어요."

    "……."

    "그저 유흥이겠죠. 독특한 건 쉽게 눈에 띄는 법이니까. 폐하께서 그러셨듯이 말이에요."

    벨리타의 손가락이 느긋하게 알리시아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었다. 적어도 이 머리카락이라도 금발이었다면 그렇게 눈에 거슬리지 않았을 텐데. 노이슈타인의 고귀한 혈통은 어디로 간 건지, 붉은 머리며, 잿빛 눈동자며 할 것 없이 전부 그 여자만을 빼닮았다. 누구보다 고귀하고 아름다웠던 제 주인을 나락으로 떨어트렸던 그 여자를. 벨리타는 그 여자를 안고 있는 남편을 보며 눈물짓던 왕비를 여전히 잊지 못했다.

    "그래도 공주님께서는 운이 좋으신 거예요. 더러운 제국 놈의 손이 아닌, 제 손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잖아요."

    벨리타는 다정하게 속삭이며 알리시아의 목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왕비를 생각하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맛보게 해줘야 하지만 더는 시간을 끌 수 없었다. 슬슬 지긋지긋한 악연을 그만 정리할 때였다.

    "잘 가세요, 잡종 공주님."

    벨리타의 검이 망설임 없이 위를 향했다. 그 여자는 제 손으로 죽이지 못했지만 그녀의 딸만큼은 제 손으로 끝낼 수 있다는 사실이 벨리타를 들뜨게 했다. 그때였다. 쾅. 굳게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열린 문으로 찬 바람이 불었다. 바람을 타고 흘러든 냄새는 지독하리만큼 비릿했다.

    "곤란하군, 여러모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알리시아는 부족한 숨에 희뿌옇게 물든 시야 속에서도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한눈에 알아봤다. 저런 눈을 한 사내는 결코 흔하지 않았다.

    "당신이 왜, 이곳에……."

    벨리타가 말을 더듬으면서 중얼거렸다. 카벨레누스의 일정을 모두 확인하고 침입했다. 지금 그가 이곳에 있는 건 잘못된 것이었다.

    '아니, 뭐가 잘못된 거지?'

    벨리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토록 죽이고 싶었던 악마가 제 앞에 나타나다니. 계획과 좀 다르긴 해도 나쁠 건 전혀 없었다. 벨리타는 거칠게 알리시아를 내동댕이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고 했다는 표현이 옳았다. 쿵. 벨리타의 몸은 미처 일어서지 못한 채 무방비하게 바닥을 굴렀다. 어느샌가 카벨레누스의 손에는 검이 들려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검은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죽을 수 있는 기회를 날려서 아쉽겠군."

    한 치의 흔들림 없는 곧은 시선이 알리시아를 향해 꽂혔다. 겉보기엔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길게 찢어진 눈매 사이로 보이는 사내의 두 눈은 날 선 짐승의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알리시아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봤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아무렇지 않았는데 사내의 얼굴을 보니 온몸이 욱신거렸다. 잊고 있던 통증이 못 견디게 아파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울어도 소용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죽게 하지 않을 거니까."

    다가온 카벨레누스가 당연하게 알리시아를 안아 올렸다. 피가 묻어 옷이 엉망이 될 텐데도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사실이 알리시아를 초초하게 했다. 욕심부리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그럴 수 없었다.

    "……아쉽지 않아요."

    긴장이 풀린 몸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럼에도 알리시아는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카벨레누스의 목에 매달렸다.

    "움직이지 마. 괜히 움직였다가 상처가 터지면 곤란해."

    "……죽고 싶지 않아요."

    "……."

    "살고 싶어요. 정말로,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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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벨레누스의 몸에 힘이 들어간다는 걸 알면서도 알리시아는 모른 척했다. 대신, 카벨레누스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끊임없이 반복해서 중얼거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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