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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0)화 (10/164)
  • 10화. 내 눈에 보이는 곳에 있어

    2020.04.06.

    버려지고 싶지 않다. 알리시아는 불안한 눈으로 카벨레누스를 바라봤다. 살겠다고 다짐했지만 아직은 너무 막막했다.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삶의 목표도 명확하지 않았다. 그나마 기대될 수 있는 건 눈앞의 사내뿐이었다. 어떻게서든 그의 곁에 머물고 싶었다.

    "가치를 따졌으면 그대를 살려두지도 않았겠지."

    "……."

    "나는 한 번도 그대의 가치를 따져본 적이 없어. 그저……."

    카벨레누스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이렇게 뻗기만 하면 손에 닿는데, 왜 뱃속이 허한지 모를 노릇이다. 끌어안고 만지고 있어도 조금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왜, 제게 이러시는 거예요?"

    "의미는 없어. 그냥 흥미일 뿐이야."

    그래, 이건 단순한 흥미다. 그래야만 한다. 카벨레누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팔에 힘을 줘 알리시아를 좀 더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끌어안고도 품이 남을 정도로 작고 마른 여자인데도 안고 있으면 꽉 찬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잠깐일 뿐이었다. 그녀를 안고 흡족해하다가도 그녀가 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순간, 모든 게 다 허무해졌다. 꽉 찼던 감각이 컸던 만큼 그것이 사라졌을 때의 공허함도 컸다.

    "……그럼, 전하의 흥미가 식으면요?"

    알리시아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지만 카벨레누스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때가 되면 얼마든지 보내주지."

    과연 이 흥미가 식을 수 있는 것일까.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음에도 카벨레누스는 기계적으로 답했다. 카벨레누스 폰 슈바르한 블랑셰. 그는 태어나서 지금껏 자신의 이름이 가진 무게를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도 그 이름의 무게보다 우선될 수 없었다. 그래야만 했다.

    "……그렇다면, 하나만 약속해주실 수 있나요?"

    "약속?"

    "흥미가 식는다면, 가장 먼저 제게 알려주시겠다고."

    버리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 카벨레누스는 잡으려 한다고 해서 잡을 수 있는 사내가 아니었다. 그의 눈은 항상 곧았고 자신이 목표한 바를 분명하게 알았다. 그런 사내가 알리시아가 매달린다 해서 동정을 베풀 리 없었다. 오히려 괜히 우는소리를 했다가 자신을 경멸하고 더 빨리 내치지 않을까 걱정될 뿐이었다.

    "……날 떠나고 싶나?"

    "……."

    "왜 대답하지 않지?"

    잠깐의 텀이었지만, 날 선 사내에겐 그마저도 불쾌하게 여겨졌다.

    "그게-"

    "아니. 말하지 마. 아무것도 하지 마."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모든 것이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엉망이었지만 그것을 풀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것은 분명해져선 안 되는 것이었다. 그가 카벨레누스 폰 슈바르한 블랑셰인 이상, 절대.

    "내 흥미가 식을 때까지 그대는 어디에도 못 가. 그러니 허튼 생각하지 말고 내 눈에 보이는 곳에 있어."

    물론 그걸 알면서도 품에 안은 여자를 놓지 못하는 건 모순이었지만. 카벨레누스는 입을 꾹 다문 채, 보다 단단하게 알리시아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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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알리시아는 꽃병에 꽂힌 장미를 멍하니 바라봤다. 가시 하나 없이 손질된 장미는 오늘 아침 하인이 들고 온 것이었다. 그날 이후, 카벨레누스는 매일 같이 알리시아에게 꽃을 보냈다.

    '정말로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알리시아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장미를 톡 건드렸다. 장미에 맺힌 아침 이슬이 투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들 카벨레누스가 알리시아에게 푹 빠졌다고 수군거렸다. 무슨 요망한 수를 부린 건지 몰라도 그 험악한 사내가 치마폭에 싸여 헤어나오지 못한다고. 하지만 현실은 소문과는 전혀 달랐다.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를 안지 않았다. 몇 번의 밤을 보내니 흥미가 식어버린 모양인지 그는 덤덤해졌고 최근 들어서는 그녀를 아예 만지려고 들지도 않았다. 만지지 않는다는 것 외에 다른 건 변하지 않았다 해도 초조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에게 가치를 따지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건 모순이었다. 카벨레누스는 모든 것들에 가치를 매기고 그걸 따지면서 계산했다. 알리시아만 그 법칙에서 제외시킨 건 이상했다.

    "향이 무척 좋아요. 역시, 전하께서는 아가씨를 많이 사랑하시나 봐요."

    "사랑이라고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것들을 내려주실 리 없잖아요?"

    함을 열어 빗을 꺼내 보이는 하녀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를 리 없었다. 상아를 손수 깎아 만들었다는 빗은 무척 비쌌다. 부친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엘레나도 부친을 졸라 겨우 하나 얻었을 정도였다. 그런 귀한 것을 함 가득 채워줄 정도면 대단한 총애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게 정말로 사랑일까?'

    엘레나도 제 인형에게는 그렇게 했다. 공주들 중 유일하게 도자기 인형을 가졌던 그녀는 매일 같이 인형의 머리를 빗겼다. 예쁜 옷과 악세사리로 인형을 꾸미는 것에 흡족해했다. 카벨레누스가 하는 건 사랑보다는 엘레나의 행동과 흡사해 보였다. 사랑한다면, 아니 적어도 알리시아를 여자로 여긴다면 안고 싶은 게 당연할 테니까. 특히 상대가 인간으로서 대접받지도 못하는 노예라면, 더더욱. 노예에게 배려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취하고 싶다면 취하고, 아니면 버리면 그만이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무참히 안기는 편이 나을 거야.'

    좋은 대접이 싫은 건 아니다. 그렇지만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다 보면 착각하기 마련이었고 언젠간 선을 넘을 수밖에 없다. 알리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무엇보다 카벨레누스는 영영 남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슈바르한의 주인이었다. 지금이야 전쟁 후의 수습을 위해 노이슈타인에 잠시 머물고 있을 뿐, 결국 그는 떠나야 했다.

    '역시, 마음 정리를 해두는 편이 좋겠지.'

    카벨레누스가 떠난 후 새로운 지배자가 올 테고 알리시아는 그에 맞춰서 생활해야 할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현재의 대우에 익숙해졌다간 노예로서 살아가기 어려울 것이었다. 절대 긴장을 풀지 말고 다가올 미래에 순응할 준비를 해야만 했다. 똑똑-

    "재봉사가 도착했습니다."

    상념을 깨는 노크 소리에 흐릿해졌던 알리시아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오늘은 재봉사가 오는 날이었다.

    "벌써 그렇게 시간이 지났나보네요. 바로 들어오라고 할까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알리시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매주 한 번씩 옷을 맞추는 건 연례행사가 되어버렸다.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가 한 번이라도 같은 옷을 입도록 두질 않았다.

    "또, 새로운 재봉사네요."

    하녀가 알리시아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알리시아는 멋쩍게 웃었다. 재봉사가 바뀌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카벨레누스가 집권한 후, 노이슈타인은 블랑셰에 맞춰서 돌아가기 시작했다. 노이슈타인 왕의 폭정에 지쳤던 백성들은 카벨레누스를 영웅처럼 여겼고 그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재료 본연의 멋을 살리는 데에 치중했던 노이슈타인의 기존 디자인 대신, 블랑셰의 옷을 입길 바랐다. 하지만 더 다양한 장신구와 천, 그리고 많은 바느질을 요구하는 블랑셰의 옷들은 상당한 숙련도를 요구했고 재봉사들은 옷 한 벌에도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카벨레누스의 요구를 따라가기 위해선 많은 재봉사가 필요했다.

    "안녕하십니까, 공주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예를 갖추지 마세요. 저는 공주가 아닙니다."

    알리시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노이슈타인은 멸망했기에 알리시아는 더는 공주라고 불릴 수 없었다. 하녀가 알리시아를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도 그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저는 공주님을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

    "아가씨 정도면 될 것 같군요."

    노예에게는 그런 호칭도 과분하다는 걸 알았지만 그것 외에는 부를 만한 표현이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아가씨. 그럼 바로 체형부터 재봐도 되겠습니까?"

    재봉사가 싱긋 웃으며 다가왔다. 옷을 맞출 때마다 치수를 재는 건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할 수 없었다. 늘어난 식사에 점점 살이 붙고 있어서 체형도 자주 달라졌다.

    "일어나 있으면 되나요?"

    "네, 팔을 들고 계시면 제 조수가 알아서 잴 겁니다."

    재봉사의 손짓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조수가 움직였다. 알리시아는 별생각 없이 팔을 들고 재봉사의 조수에게 등을 맡겼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옷을 맞추는 건 참 번거로웠다.

    "왜 아직도 진전이 없는 거죠?"

    "……."

    등 뒤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알리시아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움직이지 마세요. 그리고 긴장한 티도 내지 마시고 조용히 저 하녀를 내보내세요."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천 너머로 뭔가 뾰족한 감각이 느껴졌다. 칼날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케리, 미안하지만 물 좀 가져다줄래요?"

    알리시아는 하녀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물이요?"

    "목이 말라서요. 부탁 좀 할게요."

    "알겠습니다. 금방 가져올게요."

    아무것도 모르는 하녀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섰다. 알리시아를 절대 혼자 둬선 안 된다는 명이 있긴 했지만, 방에는 재봉사와 그녀의 조수들도 있었다. 잠깐 자리를 비운다고 해서 별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하녀는 알리시아의 호감을 사기 위해 안달이 나 있었다.

    "드디어 편히 말할 수 있게 되었군요."

    등 뒤에서 깔깔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여전히 알리시아의 등 뒤에는 칼이 있어서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알리시아는 이를 악문 채 재봉사를 노려봤다. 조금도 놀라지 않는 걸로 봐선 재봉사도 벨리타와 한 패인 듯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인 걸요? 왜 아직까지 그 악마가 살아있는 거죠?"

    언제 웃었냐는 듯 벨리타의 목소리가 음습하게 낮아졌다.

    "내가 암살을 시도할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어."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고요?"

    칼끝이 더욱 허리를 강하게 압박했다. 알리시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머니가 네 손아귀에 있다는데 내가 어떻게 그러겠어."

    "거짓말."

    "거짓말을 한 건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무슨 소리예요."

    "그 목걸이. 내 어머니의 피로 만든 게 아니었지?"

    그때는 당황해서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을 들여 생각해보니 답은 뻔했다. 그녀의 모친은 살아있지 않았다.

    "그럴 리가요."

    벨리타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선 당황한 티가 났다.

    "어머니는 내 눈앞에서 돌아가셨어. 절대 살아 돌아올 수 없어."

    알리시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피투성이가 된 채로 애타게 빌던 그 모습을. 넝마처럼 너덜너덜해진 몸을 이끌고 짐승처럼 울부짖으면서도 제 딸아이만큼은 살려달라고 빌던 모친을.

    "살아있어요. 그 여자가 얼마나 특별한데, 그렇게 쉽게 죽일 수 있었겠어요?"

    "내가 있으니까."

    "……."

    "내가 태어나면서 어머니의 힘이 사라졌으니까."

    만약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괜찮았을까. 그랬다면, 모친은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었을 테고 그렇게 죽지도 않았을 텐데. 알리시아는 치미는 울음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당신들은 항상 가치가 없어지면 버리지. 그래서 어머니도, 나도 그렇게 버렸던 거잖아."

    "……당신, 처음부터 그자를 죽일 생각이 없었군요.“

    벨리타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암살은 포기해. 그 사람은-"

    "사람? 지금 장난해? 그자는 당신 부모를 죽였어! 그런 건 사람이 아니라, 괴물일 뿐이야! 악마라고!"

    벨리타가 격노하며 소리쳤다.

    "부모? 누가 내 부모인데? 내게 있어서 부모는 날 낳아준 모친뿐이야. 노이슈타인 왕도, 왕비도 내겐 다 똑같아."

    "아무리 천한 피가 섞여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소리-"

    "그런 소리가 뭐 어때서!"

    찌이익- 알리시아가 거칠게 몸을 돌리면서 칼날에 걸린 옷이 찢어졌다. 드러난 살에 상처가 났지만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진짜로 아픈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이 더러운 잡종이-!"

    "닥쳐. 한 번만 더 내게 그런 소리하면 그 입을 찢어버릴 테니까."

    알리시아는 망설임 없이 벨리타가 들고 있는 단검을 칼날째 잡아 그대로 바닥에 던져버렸다. 칼날에 베인 손에서 피가 뚝뚝 흘렀지만 상관없었다. 허리에 난 상처도, 손에 난 상처도 무엇 하나 아프지 않았다.

    "설마 당신 힘이……."

    벨리타가 다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창백하게 질린 그녀의 얼굴은 공포로 물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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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게 지금 중요해?"

    알리시아는 허탈하게 웃었다. 힘 같은 건 예전에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애당초 힘이 있었다면 어머니를 그렇게 죽게 두지 않았을 테니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 힘을 되찾고도 노이슈타인이 그렇게 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거죠? 공주님이라면 충분히 그 악마를 죽일 수 있었잖아요?"

    "내가 왜?"

    "왜라뇨? 이유가 어딨습니다. 당신은 노이슈타인의 공주인 걸요."

    필요할 때는 공주님이 되었다가 가치가 떨어지면 더러운 잡종이 된다. 알리시아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당연하다는 듯한 시선에 구역질이 치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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