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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9)화 (9/164)
  • 9화. 눈치 보지 마

    2020.04.02.

    "오셨어요?"

    침실로 들어오는 카벨레누스를 발견한 알리시아가 급하게 일어났다. 카벨레누스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눈으로 빠르게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그녀는 더는 죽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무엇도 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여자는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그건 무슨 상처지?"

    카벨리누스의 시선이 알리시아의 손끝을 향했다.

    "아, 이건 가시에 찔려서……."

    알리시아는 말하다가 초조한 시선으로 카벨레누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에게 피 한 방울이라도 나면 다른 사람들을 죽이겠다던 카벨레누스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가시?"

    "정원에 장미가 예쁘게 피었길래 만지다가 그만……."

    "그런 거라면 하인에게 부탁해."

    다행히 카벨레누스는 딱히 그 말을 기억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알리시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조심스럽게 카벨레누스에게 다가갔다.

    "저는 노예잖아요. 하인에게 부탁해선 안 돼요."

    "그런 건 또 어디서 들은 거지?"

    "왕국에는 노예가 없어서, 블랑셰 제국의 노예에 대해 따로 알아봤어요."

    알리시아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미약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엿보였다.

    "쓸데없는 일을 하는군. 그딴 건 누가 알려준 거지?"

    카벨레누스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 그게 제가 따로 책을 통해서……."

    거짓말. 우물쭈물하는 알리시아에 카벨레누스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묻지 않아도 뻔했다. 알리시아가 정보를 얻을 만한 곳은 한정되어 있다. 카벨레누스가 자리를 비운 동안, 그녀를 지키는 하인들이 알려준 것이었다.

    "내일부터 다른 하인들을 들이도록 하지."

    "하, 하지만……."

    거짓말을 알아차린 게 틀림없다. 알리시아는 불안한 시선으로 카벨레누스를 올려다봤다. 카벨레누스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기 위해 공부했던 거지,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이 곤경에 처하는 걸 원했던 게 아니었다.

    "왜? 싫은가?"

    "아, 아뇨."

    노예는 주인의 말을 거역해선 안 된다. 순응은 노예의 미덕이다. 며칠간 열심히 외운 노예의 덕목을 떠올리며 알리시아는 고개를 숙였다.

    "하아……."

    카벨레누스는 여자의 둥근 머리를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철저하게 자신의 위치를 지키려는 여자는 좋은 노예였다. 하지만 카벨레누스가 바라는 건 노예로서의 그녀가 아니었다.

    "하인은 그대로 두지."

    "진심, 아……. 아니, 아니 그러니까, 제가 전하의 의견에 토를 달고자 했던 건 아니고……."

    말을 하면 할수록 이상해진다. 알리시아는 인상을 쓰다가 결국 또 한 번 고개를 푹 숙였다. 카벨레누스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직 어설픈 노예군."

    "죄송해요."

    "아니, 됐어. 차라리 그편이 나아."

    알리시아가 노예의 삶에 익숙해질 필요는 없었다. 카벨레누스는 계속 그녀를 노예로 머물게 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이야 전쟁이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녀의 신분은 복귀될 것이었다.

    "하지만, 제가 이 정도도 해내지 못하면 제게 많은 걸 해주신 전하께 폐를 끼치니까요."

    "내가 그대에게 많은 걸 해줬다고?"

    카벨레누스의 입매가 삐뚜름해졌다. 그녀에게 솔직하게 노예로 살 필요 없다고 말하기엔 심술이 돋았다. 자신이 준 건 뭐 하나 기쁘게 받은 적 없던 주제에 아무렇지 않게 저런 말을 하는 알리시아가 괘씸했다.

    "그야, 제 복수도 대신 해주셨고, 옷이랑 보석도 주시고……."

    "복수를 대신 해준 적 없어. 그저 내가 정복해야 할 대상이 이 땅이었을 뿐이지. 노이슈타인 왕을 죽인 것도 그대를 위해서 아니라, 내 형을 위해서였을 뿐이야."

    황좌에 앉는 데에 성공했다 해도 제르페누스의 위치는 아직 불안했다. 반쪽 피를 이은 제르페누스는 태생부터가 귀족들이 원하는 결점 없는 후계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불안한 그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선 더 많은 힘과 업적이 필요했다. 그걸 위해서 카벨레누스는 기꺼이 검을 들었을 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저는 기뻤는 걸요."

    "기뻐?"

    "전하께서 그날 오지 않으셨다면, 제 운명은 뻔했을 테니까요."

    알리시아의 미소는 너무도 처연해 카벨레누스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대는 정말로 내가 원망스럽지 않나?"

    아무리 미워했다고 한들, 노이슈타인 왕은 알리시아의 부모였다. 그를 죽이고, 그의 목을 성밖에 효시한 살인자를 그녀가 원망한다고 해도 카벨레누스는 할 말이 없었다.

    "모든 부모가 좋은 부모는 아니죠. 그뿐이에요."

    "내 부친은 어머니 대신, 다른 여자를 사랑했어. 그리고 사랑하는 여자에게서 낳은 아들을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 설령 그게 자신의 다른 아들이라 할지라도 말이야."

    "……."

    "그런 아버지라도 죽었을 때, 나는 울음을 터트렸지."

    카벨레누스의 목소리는 덤덤했으나, 그는 말을 하면서도 알리시아의 표정을 끊임없이 살폈다. 지난날을 들춰서 좋을 게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차라리 원망이라도 좋으니, 그녀가 제게 한 점의 감정이라도 갖고 있기를.

    "정말로, 나를 원망하지 않나?"

    "네. 그러지 않아요."

    카벨레누스의 바람과 달리, 알리시아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알리시아에게 있어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랐다. 그녀는 성에 효시된 노이슈타인 왕을 보면서도 울었지만, 그건 슬픔이 아니었다. 이제 모든 게 끝났구나, 하는 후련함이었다.

    "……그대는 항상 변함이 없군."

    어떻게 하면 무너트릴 수 있을까. 카벨레누스는 손을 뻗어 알리시아의 뺨을 쥐었다. 얼굴이 한 손에 다 차버릴 정도로 작은 여자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데, 왜 덤덤한 저 눈을 볼 때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전하의 눈에 제가 그렇게 보이나요?"

    "그래. 그렇게 보여. 그대는 늘 평온해 보이지."

    초조한 건 항상 자신뿐이다. 카벨레누스의 얼굴이 알리시아 쪽으로 기울어졌다. 입을 맞추는 건 쉬운 일이었다. 그녀는 부끄러워할 뿐 거절하진 않으니까. 하지만,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카벨레누스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그의 입맞춤을 기다리는 여자를 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미 수도 없이 맞췄던 입술이 멀게만 느껴지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고. * * *

    "뭐해. 앉아."

    카벨레누스의 명령에도 알리시아는 머뭇거리며 벤치를 맴돌았다. 일자 모양의 의자에서 앉을 만한 곳은 카벨레누스의 옆자리뿐이었다.

    "어서."

    카벨레누스의 재촉에 알리시아는 뻣뻣한 몸짓으로 그의 옆에 앉았다.

    "……."

    "……."

    "향이 좋네요."

    계속되는 침묵 속 알리시아가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사내가 뭘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정원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는 건 이상했다.

    "그대는 정말로 이런 게 좋나?"

    카벨레누스는 활짝 만개한 장미를 보며 고개를 삐딱하게 세웠다. 바람결에 살랑거리며 흔들리는 꽃들은 분명 화려하고 예뻤지만, 그의 눈에는 영 차지 않았다. 그는 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약한 것들은 전부 싫어했다.

    "전하께선 별로이신가요?"

    "냄새가 너무 진해."

    눈살을 찌푸린 카벨레누스에 알리시아는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잘생긴 사내는 어디에 있어도 잘 어울렸지만, 꽃으로 뒤덮인 벤치에 앉은 모습은 확실히 낯설었다. 카벨레누스에게서 나는 향은 서늘한 쇠향이었지, 코를 가득 채우는 장미향이 아니었다.

    "그럼 다른 곳으로 갈까요?"

    눈치를 살피던 알리시아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의견은 노예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점점 구겨지는 카벨레누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무슨 사달이 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대는 좋다면서."

    "네?"

    "됐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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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벨레누스는 인상을 쓴 채로 벤치에 상체를 기댔다. 제르페누스가 지금 제 꼴을 봤다면 20년은 더 놀려먹었을 거란 생각이 들 만큼 자신이 우스운 모양새를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무리 값진 것을 안겨줘도 흔들리지 않는 알리시아를 무너트리기 위해선 뭐든 해볼 참이었다.

    "……."

    "……."

    다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맴돌았다.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를 눈치를 한참 살피고서야 그에게 겨우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사내는 정말로 그냥 앉아 있기만 할 참인 듯했다.

    '무슨 생각인 거지?'

    알리시아가 지금껏 지켜본 카벨레누스는 시간 낭비를 싫어했다. 지금처럼 서류 한 장 들지 않고 가만히 벤치에 앉아 시간을 때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저어……."

    알리시아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웬만하면 질문 같은 건 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의 카벨레누스는 이상했다.

    "왜 그러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아니. 없어, 그런 거."

    "그런가요……."

    알리시아의 두 어깨가 축 처졌다. 카벨레누스의 대답을 듣긴 했지만, 여전히 의문을 해소하기엔 부족했다.

    "마음에 들지 않나?"

    "네?"

    "늘 여기 앉아 있었잖아. 그대가 매번 이곳에 앉아 있길래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이것도 아닌가. 카벨레누스는 힘없이 처진 알리시아의 어깨를 보며 짧게 혀를 찼다. 그는 누군가의 취향을 맞추는 게 꽤 까다로운 일이라는 걸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아, 그게 이곳이 가장 햇빛이 잘 들거든요."

    "햇빛? 그게 뭐 어떻다는 거지?"

    "따뜻하잖아요."

    알리시아의 시선이 햇살이 쏟아진 제 손에 닿았다. 매일 같이 받고 있는 관리에 그녀의 손은 제법 부드럽고 말랑해져 있었지만, 여전히 흉터가 남아 있었다.

    "하아?"

    "날이 좋은 날, 여기 앉아서 햇살을 쐬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져요. 햇살이 너무 포근하고 따뜻해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거든요."

    "……."

    알리시아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지하는 햇살이 들지 않았다. 컴컴한 어둠 속, 흐릿한 양초 불빛이 전부였고 그마저도 늘 주어지진 않았다. 알리시아에게 인색했던 가족들은 그녀에게 들어가는 양초 하나도 아까워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래서 그녀는 몸을 짓누르는 습기와 차가운 돌바닥에 잔뜩 웅크린 채 시간을 보내야 했다. 잊으려 해도 자꾸만 떠오르는 우울한 생각들을 잊으려고 끊임없이 발악하면서.

    "음, 역시 이건 좀 이상한가요?"

    따가울 정도로 강렬하게 쏟아지는 시선에 알리시아가 멋쩍게 웃었다. 그녀가 살아온 세월은 여러모로 평범과 멀었기에 그만큼 그녀의 사고나 행동도 일반적이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 다름이 카벨레누스의 심기를 거스른다 해도 그것이 잘못된 건지 그녀 스스로는 알 수 없으니, 끊임없이 그의 반응을 살피며 실수하지 않았는지 돌이켜봐야 했다.

    "……다시 웃어봐."

    "네?"

    "방금처럼 웃어보라고."

    카벨레누스가 초조하게 알리시아를 재촉했다. 알리시아의 얼굴에서 미소가 돈 건 아주 찰나였지만, 카벨레누스는 그 순간을 잊지 못했다.

    "이, 이렇게요?"

    갑작스러운 요구에 알리시아가 억지로 양 입꼬리를 올렸다.

    "그게 아니었잖아."

    카벨레누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방금의 미소는 저런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보다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것이었다. 쏟아지는 햇살에 마치 노을처럼 빛나는 붉은 머리카락이 그러하듯. 카벨레누스는 손을 뻗어 알리시아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관리한 머리카락은 예전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부드러워졌지만, 노을에 비견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럼 이렇게는요?"

    "아냐."

    "아, 아닌가요?"

    나름 최선을 다한 거였는데. 있는 힘껏 올라갔던 알리시아의 입꼬리가 다시 힘없이 아래로 처졌다. 카벨레누스는 그런 알리시아를 빤히 지켜보다가 길게 한숨을 토했다. 잡혔던 붉은 머리카락이 스르륵 그의 손을 빠져나갔다.

    "눈치 보지 마."

    "네?"

    "내 말 하나, 하나에 그렇게 불안하게 반응하지 말라고."

    자길 죽여달라고 매번 무례하게 굴었던 주제에, 이제는 무슨 말만 해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니 말 한 마디 하는 것도 신경이 쓰인다. 카벨레누스는 구겨진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폈다.

    "죄송해요. 더 노력할게요."

    알리시아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무리였나보다.

    "그딴 말도 그만하고."

    "제가 잘못한 게 맞잖아요. 잘못을 비는 건 당연해요."

    "그대가 뭘 잘못했는데?"

    "어떻게 되었든 간에 주인의 심기를 거스른 건 노예의 잘못이니까요."

    "……한 번만 더, 그 말도 안 되는 노예 강령을 읊으면 혼날 줄 알아."

    역시, 알리시아에게 노예 강령을 알려준 하인을 잘랐어야 했다. 카벨레누스는 얼굴도 모르는 하인을 욕하며 알리시아의 어깨를 잡았다. 겁먹었다고 광고하듯 잔뜩 힘 빠진 어깨가 아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럼 다른 걸 알려주세요. 말씀해주시면 전하께서 하라는 걸 할게요."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내가 언제 그대에게 그런 걸 요구한 적 있나."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가치가 없잖아요."

    알리시아의 몸이 희미하게 떨렸다. 어느 순간부터 카벨레누스는 더는 그녀를 안지 않았다. 그는 점점 제게서 흥미를 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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