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8)화 (8/164)
  • 8화. 그걸론 부족했다

    2020.03.30.

    "하긴, 그대가 내게 원하는 건 죽음밖에 없겠지."

    카벨레누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그는 알리시아를 노려보듯 응시하다가 결국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렸다. 모든 게 완벽한데, 저 여자만 그러지 않았다.

    "……그대는 정말로 죽음 외에는 내게 바라는 게 없나?"

    꽉 다문 잇새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선 초조한 기색이 묻어났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저는 정말로 괜찮아요."

    하지만 돌아오는 건 아무런 욕망 없는 답변일 뿐이었다.

    "……차라리 그대가 사람들이 말하는 요부였으면 나았을 것 같군."

    카벨레누스는 이마를 짚은 채 힘없이 중얼거렸다. 정말로 알리시아가 사람들이 말하는 악녀였다면 이렇게 초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돈과 권력에 눈이 멀어 제 부모 형제도 버린 그런 여자였다면, 그런 것으로 충분히 잡아둘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알리시아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그녀에겐 가진 것도, 원하는 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부터 살려두지 말았어……, 아니. 아니야.'

    알리시아를 죽인다는 가정은 더 이상 불가능했다. 일상이 엉망으로 꼬여버린 것이 불쾌했으면서도 정작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를 살려둔 것을 후회하지 못했다. 카벨레누스는 빛바랜 회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뱉었다.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아무리 알리시아의 몸에 맞게 옷을 만들어 입힌다고 될 문제가 아니었다. 목이 뻐근할 정도로 알 굵은 목걸이에, 귀걸이, 반지, 할 수 있는 건 뭐든 끌어모아서 그녀를 꾸며도 그녀는 언제나 어색해 보였다. 분명 그녀의 것인데도 도무지 편해 보이지 않았다. 남의 옷을 훔쳐 입은 사람처럼 언제나 초조하고 불안해 보였다. 아무리 욕망이 없다 해도 자꾸만 좋은 것들을 보고 갖게 되면 욕망이라는 게 생길 법도 한데 알리시아는 달랐다. 그녀는 지나칠 정도로 스스로를 절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언제든 떠날 수 있는 법이니까. 똑똑- 순간, 울린 노크 소리가 상념을 깨웠다. 카벨레누스는 살짝 미간을 찡그린 채 문 쪽을 바라봤다.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전하?"

    "들어와."

    "전하께서 요청하신 목록표를 가져왔습니다."

    가제프는 알리시아 쪽으로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카벨레누스 쪽으로 곧장 걸어왔다. 함께 식사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가제프에게 있어선 이제 익숙한 광경이었다.

    "슈바르한에서 출발한 마차는 어떻게 되었지?"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내일쯤이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군."

    카벨레누스는 가제프에게서 받아든 서류를 확인한 후,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떠나려다가 도로 몸을 돌려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뭐 해, 따라오지 않고."

    혹시 그냥 두고 가지 않을까 했는데 아니었다. 알리시아는 조심스럽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딱, 세 걸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한 채로 카벨레누스의 뒤를 쫓았다.

    "생각보다 빈민들이 많아. 물품들을 한 번 더 수송해야 할 테니 최대한 빨리 마차를 정리해서 돌려보내. 물론 마차 안에 있는 물건과 목록들을 제대로 확인하는 거 잊지 말고."

    "바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물품을 배급할 때에는 아무런 대가 없이 줘선 안 돼. 크든 작든 간에 값을 치르도록 해."

    "물론입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카벨레누스의 뒤를 쫓고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대화에 알리시아가 끼어들 틈이 없어 결국 그녀는 그것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주변 풍경을 구경하게 될 뿐이었다. 노이슈타인의 기후는 무척 따뜻해서 정원에 사계절 내내 꽃이 피기 때문에 가만히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알리시아 노이슈타인."

    풍경에 빠진 알리시아의 걸음이 느려져 둘 사이 거리가 멀어지면, 카벨레누스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높낮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아 무미건조했지만 묘하게 중독성이 있어 그녀는 가끔씩 일부러 걸음을 늦췄다.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가 원하는 게 없다고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그녀는 그저 원할 필요가 없을 뿐이었다.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의 걸음을 따라 걷는 게 좋았다. 카벨레누스에겐 그저 이동하는 시간일 뿐이겠지만 알리시아에겐 의미가 남달랐다. 그 시간만큼은 그를 마음껏 지켜봐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커다란 그의 등을 보고, 그가 밟은 걸음을 따라 밟고, 종종 들리는 그가 불러주는 이름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그저 좋을 뿐이었다.

    16638392156468.jpg

    물론 그녀가 뒤쫓는 사내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를 뿐이었지만. * * *

    "알아보라는 건 알아봤나."

    "네, 전하께서 시키신 대로 알아봤습니다."

    가제프는 들고 있던 지통을 카벨레누스에게 내밀었다. 카벨레누스는 바로 통을 열어 안에 들어있던 종이를 확인했다. 종이에는 노이슈타인의 막내 공주, 알리시아에 대한 정보가 적혀있었다.

    "생각한 것보다 정보가 적군."

    종이를 읽어내려다가 카벨레누스의 시선이 멈췄다. 오래 읽을 필요도 없었다. 조사할 시간이 짧았다는 걸 고려해도 자료의 양이 너무 적었다.

    "죄송합니다. 최대한 정보를 끌어모으려 했지만 현재로선 여기까지가 한계였습니다."

    상관의 지적에 가제프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볼품없는 정보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가제프에게도 불명예였다.

    "그녀에 대한 정보가 그렇게 극비였다고 생각지 않는데."

    "다른 공주들은 그렇지만, 그 노, 아니……, 노이슈타인의 막내 공주는 좀 특별합니다."

    가제프가 곤란한 표정으로 카벨레누스의 눈치를 살폈다. 노예는 물건과 같이 취급되고 있으니 호칭을 제대로 해줄 필요가 없었지만, 알리시아는 공공연하게 여겨지는 상관의 여자였다. 상관이 얼마나 그녀에게 신경 쓰고 있는지를 아는 이상, 조심할 필요가 있을듯했다.

    "특별하다는 건 무슨 뜻이지?"

    "공주는 순수 노이슈타인인이 아닌, 혼혈입니다."

    "그 정도는 그녀의 외형만 봐도 유추가 가능할 텐데?"

    카벨레누스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노이슈타인 왕국은 폐쇄적인 국가였다. 노이슈타인인들은 그들은 순혈을 중시했고 자신들과 다른 외형을 한 민족들은 박해했다. 대부분 비슷하게 생긴 노이슈타인인의 외형을 지니지 않은 알리시아는 확실히 이질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순수 혈통의 노이슈타인인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단지 그것 때문에 말씀드린 건 아닙니다. 제가 굳이 공주의 혈통에 대해 말씀드린 건 그것이 수상하기 때문이니까요."

    "뭐가 수상하다는 거지? 왕가의 사생아는 흔한 문제잖나."

    "사생아가 아니라, 공주의 모친이 문제입니다,"

    가제프는 빠르게 심호흡을 한 후, 바로 말을 이었다.

    "노이슈타인 국왕이 젊은 시절 타지에서 데리고 온 이민족. 그게 막내 공주의 친모라는 건 잘 알려져 있지만, 막상 조사를 해보니 그녀에 대해 그것 외에는 아는 이가 없더군요. 길거리에서 몸을 파는 여자라거나, 용병, 무희 등 다양한 이야기가 있으나 그건 정말로 소문일 뿐입니다. 게다가……."

    가제프의 미간이 좁혀졌다. 카벨레누스가 알리시아에 대해 알아오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만 해도 금방 끝낼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망국의 공주에 대한 조사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진척이 더뎠다. 그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는 아니었다.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공주라는 걸 감안해도 알리시아에 대한 정보는 이상하리만큼 적었고, 특히 그녀의 모친 쪽은 아예 정보가 없었다. 마치 누군가 그녀의 존재를 삭제해버린 것처럼.

    "내 흥미를 끌만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나?“

    카벨레누스가 삐딱하게 턱을 괬다.

    "공주가 태어나던 날, 그녀의 모친과 관련된 인물들이 전부 몰살당했습니다."

    "그건 좀 흥미로운데. 좀 더 자세히 말해봐. 그건 타살이었나?"

    "얼핏 봐선 자살로 보이긴 하지만, 정황상으론 타살일 것 같습니다."

    공주답지 않은 몰골을 하고 있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을까. 평범하지 않은 첫인상만큼이나 노이슈타인의 막내 공주는 수상했다. 그녀에 대해 파내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얻을 수 없는 정보가 그러하듯이.

    "자살처럼 보이는 타살이라. 그럼 누군가 일부러 은폐했다는 거군."

    "네.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가제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이슈타인 왕비 쪽인가?"

    카벨레누스의 손에서 엉망으로 구겨진 종이가 툭 떨어졌다. 기껏 알아보게 한 정보치고 손에 주어진 정보는 별 것 없었다. 알리시아에 대해 알아봤다기보단, 노이슈타인의 왕비가 그녀에게 저질렀던 만행들에 대한 기록에 가까웠다. 예를 들면 알리시아의 허벅지 흉터가 왜 생겼는지, 그녀가 왜 별궁이라는 단어에 넋이 나갈 수밖에 없었는지, 대충 그런 것들. 카벨레누스는 그 순간에도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날 선 그의 시선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만약 노이슈타인의 왕비가 단두대에 올라서지 않았다면, 카벨레누스는 오늘 그녀를 제 손으로 찢어버렸을지도 몰랐다.

    "저도 왕비가 수상해 따로 확인해봤는데, 그건 아니었습니다."

    카벨레누스의 불편한 심기를 알아차린 가제프가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최근의 주군은 감정이 도드라져 있었다. 괜히 그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게 없었다.

    "그럼 감춘 인물은 누구지?"

    "아무래도 노이슈타인 왕인 것 같습니다."

    "노이슈타인 왕?"

    카벨레누스는 노이슈타인 왕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애썼다가 포기했다. 그는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하는 편이 아니었다. 왕국이든, 보물이든, 딸이든 다 내줄 테니 제 목숨만은 살려달라 울부짖었던 것만 어렴풋이 기억날 뿐이었다.

    "노이슈타인 왕은 정통 왕족이 아닌, 데릴사위였습니다. 당시 공주였던 왕비와 결혼해 왕위를 이었을 뿐이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왕비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위축되었던 것 같습니다."

    "제 자리도 지키지 못하는 왕이라, 한심한 꼴이군."

    카벨레누스는 혀를 찼다.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건 노이슈타인 왕에 대한 행적이 한 기점을 시작으로 완전히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달라졌다면 어떤 식으로지?"

    "원래라면 노이슈타인 왕이 왕비의 눈치를 봤습니다. 왕가나 주요 귀족들 모두, 왕비의 편이었으니 기를 펴지 못했던 건 당연한 일이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반대가 되었습니다. 왕비가 아닌, 왕이 왕국을 주도적으로 이끌게 된 겁니다."

    가제프는 따로 챙겨온 노이슈타인 왕조의 역사서를 마저 카벨레누스에게 내밀었다. 아직은 조사가 더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수상한 점들을 연결한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추측은 가능했다.

    "그 기점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같나?"

    카벨레누스의 눈이 어둠 속에서 먹잇감을 발견한 짐승처럼 번뜩였다.

    "네. 노이슈타인 왕이 권력을 쥐게 된 건, 막내 공주의 모친이 성에 들어온 후부터입니다."

    "우연으로 넘기기엔 확실히 꺼림칙하군."

    "그래서 좀 더 알아볼까 합니다."

    가제프는 따로 챙겨온 책 한 권을 마저 카벨레누스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지?"

    "노이슈타인 왕조의 역사가 서술된 역사서입니다."

    "여기에 답이 있다는 건가?"

    카벨레누스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공주에 대한 다른 정보를 얻을 때마다 노이슈타인 왕의 이력과 비교해볼 참입니다. 정보가 부족해 모두 맞춰보진 못했지만, 추측대로라면 노이슈타인의 공주는 저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인물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르다면 어떤 걸 말하는 거지?"

    "그건, 모든 게 분명해지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제프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망국의 공주를 조사하는 거라고만 생각했을 때는 그저 업무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꽁꽁 싸매져 있는 그녀에 대한 비밀은 가제프의 흥미를 돋우기에 충분했다.

    "그럼 그 외 다른 정보는 없나?"

    "……죄송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부분을 제외한 다른 정보는 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가제프는 더욱 고개를 푹 숙였다. 실마리를 얻었다고 해도 진상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건 의미 없는 짓이었다. 아직 그는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카벨레누스는 부하를 타박하는 것 대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제프는 제 손으로 직접 뽑아 오랫동안 옆에 둘 정도로 유능한 부하였다. 그가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낼 정도면 이번 일이 꽤나 어려웠다는 뜻이었다. 알리시아에겐 카벨레누스가 생각한 것보다 큰 비밀이 있을지도 몰랐다.

    "뭐, 괜찮아.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대신, 다음번에는 날 실망시키지 마."

    "네. 물론입니다."

    "돈과 시간은 얼마든지 들어도 좋아.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상관없어."

    그저 내가 원하는 걸 가져오면 돼, 그뿐이야. 카벨레누스는 오만한 표정을 지은 채 천천히 턱을 매만졌다. 알리시아의 태도만 봐도 그녀가 썩 평탄지 않은 삶을 살았다는 건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그가 원하는 건 알리시아의 정체도, 그녀의 모친이 어떤 사람이냐도 아니었다. 알리시아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선 좀 더 그녀에 대해 알 필요가 있었다.

    16638392156473.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