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7)화 (7/164)
  • 7화. 잡아먹힌다

    2020.03.26.

    알리시아는 장신구를 생명줄처럼 쥔 채로 카벨레누스를 똑바로 응시했다. 함께 하룻밤을 보내고, 그가 방심한 사이 암살을 시도하는 건 이미 물 건너갔다. 굳이 카벨레누스에게 안길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알리시아는 그를 거절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스스로가 무의미한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카벨레누스만 궁금했던 것이 아니었다. 알리시아 역시, 그가 궁금했다. 저를 죽이지 않는 이국의 사내는 항상 그녀에게 의문을 안겼다.

    "후회 같은 거 하지 않아요."

    어차피 죽을 거라면 그것까지만 확인하고 죽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알리시아가 조심스럽게 떨리는 목소리를 낸 순간, 그대로 입술이 삼켜졌다.

    "흣."

    잡아먹힌다. 그 순간,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알리시아는 다급하게 사내의 옷자락을 쥐며 그에게 매달렸다. 여린 입술이 씹히고 파헤쳐지는 감각이 버거웠지만 물러날 구석은 없었다. 머리카락을 파고든 단단한 손끝은 도망치는 걸 용납지 않았다. 알리시아는 열기에 취해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 본능적으로 두 팔을 사내의 목을 감싸 안았다. 등줄기를 훑어내리는 섬뜩한 감각에 파르르 온몸이 떨렸다. * * * 알리시아가 눈을 떴을 때는 새벽이었다. 알리시아는 몸을 짓누르고 있는 단단한 팔에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제 앞에서 자고 있는 사내는 여전히 현실감이 없었다. 하지만 착각은 아니었다. 자신은 분명 저 사내와 하룻밤을 보냈다. 수도 없이 한계로 내몰리던 어젯밤의 기억이 너무도 생경해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아파.'

    알리시아는 슬쩍 몸을 빼려다가 이내 버거운 숨을 토해냈다. 예전에는 이 정도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오래간만에 느끼는 통증에 반사적으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나 우습다, 진짜.'

    알리시아는 짧게 한숨을 뱉은 후, 조심스럽게 카벨레누스의 품에서 벗어났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뻐근했지만 그에게 계속 안겨 있는 것보단 나았다. 보통 사람보다 체온이 높은 사내의 품은 너무나 크고 안락했으니까. 알리시아는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카벨레누스를 내려다봤다. 얼굴은 본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그를 자세히 관찰한 건 처음이었다.

    '다들 슈바르한의 늑대는 괴물이라고 했는데…….'

    달빛에 비친 사내는 너무 아름다워 현실감이 없었다. 이름만 들어도 사람들을 벌벌 떨게 하는 괴물이라는 슈바르한의 늑대라는 게 믿기 어려웠다.

    '솔직히 괴물치곤 너무 예쁘긴 해.'

    알리시아의 손이 조심스럽게 카벨레누스의 얼굴을 향했다. 물론 직접 만질 자신은 없었어 한 뼘의 거리를 둔 채였다. 방금 전까지 저 품에 안겨 있었음에도 그녀는 아직 그와 맨살이 닿는 게 부끄러웠다.

    "카벨레누스 폰 슈바르한 블랑셰."

    알리시아는 숨소리에도 날아갈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원래는 노예 따위가 불러선 안 되는 이름이었지만, 한 번 정도는 그의 얼굴을 보고 불러보고 싶었다. 이름을 불렀을 때, 그가 어떤 얼굴을 할지 궁금해져 버렸으니까. 일정한 거리를 두고 카벨레누스의 눈을, 코를, 입술을 어루만지던 알리시아의 손이 멈췄다. 죽어도 아쉬울 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왠지 저 얼굴만큼은 떠오를 것 같아 괜히 목이 멨다. 알리시아는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삼키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이상했다. 죽기로 다짐한 후부터 어떤 미련도 남지 않은 줄 알았는데 저 사내와 있으면 자꾸만 욕심이 생겼다. 그토록 그리웠던 온기를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조국을 멸망케 한 사내가 주고 있었다. 알리시아는 치미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아무리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도 한 번 터진 눈물은 자꾸만 흘러나왔다.

    '더는 안 돼. 정말로 안 돼. 이러면 헛된 욕심만 생기고 말 거야.'

    알리시아는 축축하게 젖은 손바닥으로 거칠게 눈물을 닦아냈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어제 사용하지 못한 암기가 있었다. 알리시아는 주춤거리는 걸음으로 바닥에 떨어진 장신구를 주웠다. 이제는 확실하게 안다. 저 사내는 저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도 저 사내를 거역하지 않을 거다. 정말로 이 생을 끝내고 싶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했다.

    "……미안해요."

    그건 누굴 위한 사과였을까. 알리시아는 물기 어린 눈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장신구의 보석 부분을 돌렸다. 그리고 날카로운 칼끝을 제 목에 댄 채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칼에는 독이 발라져 있으니 죽는 건 아주 쉬울 것이었다. 그런데, 도저히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죽는 게 겁이 났다. 더는 그녀는 죽음에 덤덤해질 수 없었다. 칼날을 마주하고서야 그녀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거야. 이렇게 살아봤다 뭐가 달라진다고.'

    조금 더 지체하면 그동안 꽁꽁 감춰왔던 속내가 전부 들통날 것 같아 두렵다. 알리시아는 무기를 쥔 손에 꽉 힘을 주었다. 금방이라도 칼날이 제게 닿을까 온몸이 덜덜 떨렸음에도 오기로 손을 움직였다. 휙- 그때였다. 그대로 몸이 뒤로 넘어갔다. 얼떨결에 침대에 눕게 된 알리시아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잠든 줄 알았던 카벨레누스가 그녀의 위에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진짜 죽으려고 한 건가."

    저를 내려다보며 이를 으드득 가는 카벨레누스에 알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모순이라는 걸 알면서도 죽지 않아서 기뻤다.

    "웃어?"

    알리시아의 미소를 오해한 카벨레누스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흉흉한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그는 한 마리의 짐승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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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알리시아는 그 순간만큼은 그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달가웠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그대는 절대 못 죽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제 목숨을 붙잡고 있는 사내가. 알리시아는 웃는지, 우는지 모를 얼굴로 카벨레누스를 올려다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다시금 저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멎은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은 사실 죽고 싶지 않았다는 걸. * * *

    "더 먹어."

    무심한 명령조의 목소리에 알리시아는 내려놓았던 수저를 도로 집었다. 그녀 쪽을 보지 않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귀신같이 알리시아가 식사를 마치려고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충분히 배불러요."

    "한 입 정도는 더 먹을 수 있잖아. 먹어."

    "하지만……."

    "의사가 그러더군. 먹는 양이 너무 적다고. 조금씩 식사량을 늘려야 살이 붙을 거라고."

    카벨레누스는 여전히 알리시아를 보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알리시아는 그의 눈치를 흘끔 보며 겨우 수프를 한 입 더 먹었다. 자살 소동 이후부터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를 대동하고 다니는 일이 잦아졌다.

    "다신 그러지 않을게요."

    "뭐가 말이지?"

    "죽겠다고……."

    알리시아는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푹 숙였다. 죽는다는 소리만 나와도 카벨레누스의 눈총이 매서워져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대가 버린 목숨을 내가 살렸어. 그러니, 응당 그대 목숨은 내 것이지."

    나는 내 것이라 여긴 걸 절대 빼앗기지 않아. 카벨레누스의 두 눈이 번뜩였다. 그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저는……."

    어떻게 하면 그의 분노를 풀 수 있을까. 알리시아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죽지 않을 거라고 말해도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를 믿지 않았다. 그녀의 방에선 더는 날붙이를 볼 수 없었고 카벨레누스와 함께하지 않으면 항상 다른 사람이 붙어 그녀를 감시했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마. 그대의 몸에서 피 한 방울이라도 흐르는 꼴을 보면 그대가 지키고 싶어 했던 자들도 피를 보게 될 테니까."

    낮게 깔린 목소리에 절로 등골이 오싹했다. 사내의 경고는 진심이었다. 그는 자비로운 구원자가 아니었다. 알리시아는 묵묵히 남은 수프를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와 식사를 한 후부터 이젠 음식에서 무슨 맛이 나는지도 알지 못했다. 아니, 애초부터 식사 시간이라 해도 정식으로 음식을 먹는 건 알리시아뿐이었다.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 앞에는 호화로운 식사를 차려놓고 정작 본인은 간단한 샌드위치를 먹으며 업무를 보기 일쑤였다. 알리시아는 애꿎은 수프만 수저로 휘휘 저었다. 차라리 같이 먹으면 좀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서류만 바라보는 사내를 앞에 두고 하는 식사는 썩 맛있지 않았다.

    "오늘은 보석상이 올 거야."

    "하지만 보석은 저번에도 샀는걸요."

    "상관없어. 더 사도록 해. 사다 보면 그중에 그대의 마음에 드는 것 하나 정도는 있겠지."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에게 베푸는 것에 관대했다.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그녀의 옷을 맞추고 그녀를 위한 보석을 사들였다.

    "……노이슈타인은 가난한 땅이에요."

    알리시아에게 보석을 보는 눈은 없었지만, 보석들의 가격이 어느 정도일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입지도 않을 옷과 보석들에 그런 거금을 붓는 건 사치였다.

    "알아. 연이은 흉작에 국고는 황폐하고 수도를 조금만 벗어나도 굶어 죽은 자들이 수두룩하지. 이번 전쟁은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더 커. 노이슈타인의 재건을 위해 슈바르한에서 들여오고 있는 돈과 물품들만 생각해도 손해지."

    카벨레누스는 덤덤히 대답하며 서류를 넘겼다.

    "그렇다면 더욱 보석으로 낭비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가난한 건 노이슈타인이지, 내가 아냐."

    카벨레누스는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듯 단호하게 알리시아의 말을 잘랐다. 그가 다스리는 슈바르한은 제국의 영토로 분류되지만, 어느 국가보다 부유했다. 지도에서 겨우 이름만 유지해왔던 노이슈타인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보석 몇 개로 전전긍긍하는 건 말도 되지 않았다.

    "전하께서는……."

    알리시아는 다시 말을 하려고 입술을 뗐다가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순간, 실수할 뻔했다. 주인에게 말대답을 하는 노예는 세상에 없었다.

    "더는 할 말 없으면 마저 식사나 해. 아무리 떠들어도 그 수프 다 먹기 전까지 그 자리에서 일어나게 할 생각 없으니까"

    "……네."

    알리시아는 더 이상의 반항은 포기하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대하는 카벨레누스의 태도가 특별하다고 해도 그녀는 착각할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포장한다고 한들, 둘의 관계는 동등해질 수 없었고 그만큼 결말도 뻔하게 정해져 있었다. 조금이라도 오래 이 평화를 누리고 싶다면, 조용히 입을 닫고 카벨레누스가 정해놓은 선에 맞춰 살아가는 편이 현명했다.

    "……역시, 보석은 별로인가?"

    알리시아의 그릇이 온전히 다 비워지고서야 카벨레누스가 침묵을 깼다.

    "네?"

    알리시아는 갑자기 던져진 질문을 이해할 수 없어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그 와중에도 카벨레누스는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어서 방금 그의 말을 제대로 들은 건지도 헷갈렸다.

    "보석, 싫어하냐고."

    "그게……."

    "얼버무리지 말고 제대로 대답해."

    "아뇨. 싫어하진 않아요. 다만……."

    "다만?"

    서류 너머로 빛나는 금색 눈동자와 시선이 닿았다. 알리시아는 목덜미가 뻣뻣해지는 걸 느끼며 마른 침만 삼켰다. 그저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냥 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어울리지 않아?"

    "물론 보석들은 예뻐요. 그렇지만, 저한테는 안 어울리니까……."

    집요한 시선에 말하는 것 하나하나가 눈치가 보여서 자꾸만 말끝을 흐리게 된다. 알리시아는 제발 이 말도 안 되는 식사 시간이 얼른 끝나길 바라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았음에도 절 바라보는 시선은 고스란히 느껴져 결국 그녀는 도로 눈을 떠야 했다.

    "그게 다인가?"

    "네?"

    "그대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해서 그런 얼굴을 한 거냐고."

    카벨레누스의 입매가 삐딱해졌다. 그는 뭔가 대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 투였다.

    "그게 사실이니까요."

    알리시아는 어설프게 웃었다.

    "아직도 거짓말은 서툴군."

    "……."

    "나는 빙빙 말을 돌리는 건 좋아하지 않아. 제대로 말해. 있는 그대로. 그냥 솔직하게."

    카벨레누스는 쉽게 요구했지만 알리시아로선 전혀 쉽지 않았다. 예전이야 죽음을 각오했기에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알리시아는 이제 죽고 싶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빤히 지켜보는 사내는 포기를 몰랐다. 결국 백기를 든 건 알리시아였다.

    "잘 모르겠어요."

    "모르겠다고?"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거든요."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의 시선을 피하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많은 것이 달라졌음에도 여전히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 같은 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알리시아는 자신의 입장을 잘 알았다. 함께 식사를 하고, 잠자리를 하고, 많은 것들을 받는다고 해도 그녀가 노예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카벨레누스의 흥미가 식으면 사라질 물거품 같은 것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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