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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6)화 (6/164)
  • 6화. 후회해도 소용없어

    2020.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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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카벨레누스가 몸을 돌리면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엉켰다. 알리시아는 절 보는 차가운 사내의 눈빛에 애써 덤덤한 척 입꼬리를 올렸으나, 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까지는 어떻게 하지 못했다. 함께 침대를 쓰고, 계속해서 밤을 보내도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가 두려웠다.

    "말 그대로예요. 절 죽이지 않으시겠다면 여자로서 안아주세요.“

    "왜, 갑자기 심경에 변화가 생긴 거지?“

    "현실에 순응하려고요.“

    "현실?“

    "어차피 죽지도 못할 거라면, 전하의 여자로서 사는 편이 이득이잖아요? 저는 이왕 살아야 한다면 좋은 것들을 누리고 싶어요.“

    도망치지 않고 카벨레누스의 시선을 그대로 받아내는 것까진 겨우 성공했지만, 알리시아는 자신의 실패를 예견했다. 어설픈 유혹에 넘어갔다고 보기엔 저를 내려다보는 카벨레누스의 시선은 무미건조할 뿐이었으니까.

    "노이슈타인의 공주는 거짓말에는 영 소질이 없군.“

    "거짓말이라뇨.“

    "다 죽어가는 얼굴로 그딴 소리를 해봤자 전혀 신용이 가지 않는다는 소리야.“

    "…….“

    "게다가 나는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달달 떨고 있는 여자까지 안을 정도로 여자가 부족하지 않지.“

    사내의 맨살에 얼굴을 붉히는 여자라면 더더욱. 카벨레누스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마저 단추를 풀고 셔츠를 벗었다. 알리시아는 발갛게 물든 얼굴로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좋은 것들을 원한다면 괜한 짓을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주지. 보석? 드레스? 뭐가 좋지?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

    "…….“

    "날이 밝으면 사람을 보내지. 옷을 몇 벌 맞추고 보석도 사도록 해. 그 정도면 좋은 것이라 불릴 수 있지 않은가?“

    "…….“

    "정작 그대는 그런 건 조금도 원치 않을 테지만 말이야.“

    전부 다 안다는 눈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훑어내린다. 알리시아는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식은땀의 감각에 몸을 움츠렸다.

    "허튼 생각은 그만해.“

    그대가 굳이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나는 이미 충분히 혼란스러우니까. 카벨레누스는 뒷말을 삼킨 채 이마를 짚었다. 물기 어린 여자의 눈동자가 자꾸만 눈에 거슬린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부정할 수도 없었다.

    "내일부터 별궁으로 거취를 옮기도록 해. 더는 밤마다 날 기다릴 필요도 없어.“

    눈에 보이지 않으면 괜찮아질지도 모른다. 카벨레누스는 무심히 명령을 뱉다가 새하얗게 질린 알리시아를 마주하곤 미간을 구겼다. 그녀의 얼굴은 원래부터 창백한 편이었지만 지금은 그 정도가 심했다.

    "노이슈타인 공주.“

    "…….“

    "알리시아 노이슈타인.“

    카벨레누스가 재차 알리시아를 불렀다. 그제야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를 다시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왜 그러지?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뇨. 없어요.“

    알리시아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지만 카벨레누스의 눈을 피하진 못했다. 그녀의 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뭔가를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카벨레누스는 무의식적으로 알리시아 쪽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뭘 두려워하는 거지?“

    카벨레누스와 알리시아의 거리가 좁혀졌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알리시아는 곤란한 표정으로 그의 눈을 피했다. 카벨레누스는 좀 더 캐묻기 위해 입을 떼려다가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질문을 던지는 것부터가 우스운 일이었다. 노예로 전락한 공주의 사정 따위 알 필요도 없었고 설령 알고 싶다 해도 명령하면 그만이었다. 명령이 아닌, 질문을 할 생각을 했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에게 품은 의문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알리시아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했다. 다리를 쩔뚝거리면서도 이를 악문 채 제 아비 뒤를 쫓고 있던 여자. 그녀는 성을 침입한 카벨레누스 대신, 저를 낳아준 아버지를 죽이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만약, 카벨레누스가 노이슈타인의 왕을 죽이지 않았다면 왕을 죽인 건 그의 딸이었을지도 몰랐다. 처절한 알리시아의 눈동자를 보며 카벨레누스는 문득 그렇게 생각했고, 이내 그것은 호기심이 되었다. 카벨레누스는 웅크린 알리시아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모른 척하고 싶었지만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내는 여자가 궁금했다.

    "……아직도 내게 안기고 싶나?“

    사내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가라앉아 있었지만 잔뜩 긴장한 알리시아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갑자기 던져진 낯선 물음을 이해할 수 없어 입술만 뻐끔거릴 따름이었다.

    "내게 안기고 싶은지 물었어."

    카벨레누스가 재차 말했다.

    "……저를 안으실 건가요?“

    알리시아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며 물었다. 물기 어린 눈동자가 조명에 반짝거린다. 그걸 바라보는 카벨레누스의 턱근육이 도드라졌다.

    ‘무릇 사내란 관심 없는 여자에게 콩알만큼의 신경도 쓰지 않는 법이거든.’

    왜 그 순간, 제르페누스의 말이 떠올랐을까. 카벨레누스는 얄궂게 웃던 이복형을 떠올리며 한숨에 가까운 숨을 뱉었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

    사실 알리시아에 대한 감정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여태껏 다른 사람들의 사정에 관심을 둬본 적이 없었다. 알리시아에게만 호기심을 갖는다는 건 모순이었다.

    "확인이요?“

    카벨레누스는 대답 대신, 손을 뻗었다.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리게만 느껴졌다. 닿았다. 뺨에 닿은 촉감에 알리시아는 황급히 눈을 떴다. 카벨레누스의 손이 알리시아의 뺨을 감싸 쥐고 있었다. 꿀꺽.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침을 삼켰다. 칼의 손잡이 모양대로 굳은살이 박힌 손바닥의 감촉은 거칠었다. 하지만 그 손길은 알리시아가 생각했던 것보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마치 얼마 전 닿았던, 그의 입술처럼.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알리시아의 뺨에 홍조가 돌았다.

    "나쁘지 않군.“

    카벨레누스는 옅게 물든 알리시아의 뺨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한 번도 타인의 존재를 달갑다고 여겨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손안에 들어온 온기는 거슬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상대가 조금만 힘을 줘도 꺾일 듯 나약한 존재라는 걸 알기에 제대로 힘을 주지도 못했다. 오히려 저 가냘픈 생명을 꺼트릴까 봐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그럼에도 놓고 싶지 않았다. 알리시아의 뺨을 쥔 카벨레누스의 손이 천천히 내려와 목을 스쳤다. 간질거리는 감각에 알리시아는 파르르 떨며 몸을 움츠렸다. 닿은 사내의 시선이 집요해 자꾸만 입안이 바싹 말라 갔다.

    "화장을 했군.“

    "이왕이면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누누이 말하지만, 그대는 거짓말이 서툴러.“

    "…….“

    "나는 그대에게서 입에 발린 말을 기대하지 않아. 그대가 아니라도 내겐 그런 소리를 해주는 인간들이 꽤 많거든.“

    "그럼 전하께서 제게 원하시는 건 뭐죠?“

    카벨레누스는 대답 대신, 알리시아를 가만히 응시했다. 잿빛 눈동자에 비친 그는 스스로도 정의 내릴 수 없을 만큼 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대가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어.“

    "속셈이라뇨.“

    "여전히 그대는 죽음 외에는 내게 진심으로 바라는 게 없어. 굳이 내게 안아달라고 조를 필요도 없단 소리야. 뻔할 정도로 수상하지.“

    카벨레누스의 손가락이 알리시아의 머리 장신구에 닿았다. 알리시아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초조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설마 알고 있는 걸까?‘

    무기는 겉보기엔 완벽한 장신구였지만 상대는 오랫동안 전장을 떠돌던 무장이었다. 이런 일에 뼈가 굵은 그라면 알아차릴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대는 무슨 속셈인 거지?“

    "저는…….“

    변명을 하려고 했지만 정작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알리시아는 힘없이 말끝을 흐렸다. 역시, 이런 일은 익숙지 않았다.

    "대답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진심이세요?“

    "그래.“

    알리시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카벨레누스의 무미건조한 대답은 배려도, 자비도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신경 쓰고 있지 않을 뿐이었다. 알리시아가 어떤 일을 벌인다고 한들, 그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으니까. 작은 벌레가 윙윙 맴도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사소한 일일 뿐이니까. 패배를 모르는 오만한 지배자는 단 한 번도 스스로가 무너질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대의 속셈이 어떻든 간에 상관없어. 내가 확인하고 싶은 건 단 하나야.“

    장신구가 뽑히면서 곱게 틀어 올린 알리시아의 머리카락이 그대로 후두둑 아래로 떨어졌다. 알리시아는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의 기묘한 감각에 몸을 움츠리다가 이내 마주친 광경에 마른 침을 삼켰다. 카벨레누스의 엄지는 보란 듯 장신구의 보석에 닿아있었다. 그는 전부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장신구의 보석이 돌아가면서 그 안에 감춰졌던 날이 튀어나왔다. 알리시아는 빼앗긴 장신구를 멍한 눈으로 바라본 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암살도구를 들켰으니 꼼짝없이 처분을 기다릴 일만 남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카벨레누스는 덤덤하게 장신구의 칼날을 도로 집어넣을 뿐이었다.

    "왜, 아무것도 추궁하지 않으세요?“

    "말했잖아. 그대의 속셈이 어떻든 상관없다고.“

    "저는 전하를 죽이려고 했어요.“

    제 앞에 내밀어진 장신구에 알리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죽여? 그대가 나를?“

    차라리 그가 비웃었으면 그게 더 나았을 것이다.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로 덤덤히 되묻는 카벨레누스에 알리시아의 귓불에 열감이 맴돌았다.

    "이 가는 팔에 죽을 거면 여태껏 살아남을 수 없었겠지.“

    카벨레누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 식사를 제대로 하고 있을 텐데도 여자는 여전히 지나치게 말랐다.

    "날에 독이 발려있어요. 날에 그대로 베였다면 치명상이 되었을 거예요.“

    "블랑셰의 황족은 어릴 때부터 미량의 독을 먹으며 내성을 기르지. 대부분의 독은 의미가 없어. 특히 내 경우에는 더욱.“

    카벨레누스는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까닥거렸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른다. 한계까지 넘어선 몸은 어느 순간부터 보통 인간의 것을 넘어섰다. 모두가 죽을 것이라고 예견했던 무수한 전장에서 꿋꿋하게 살아남은 사내에게 있어서 죽음은 아득하고도 먼일에 불과했다. 제대로 칼을 쥘 줄도 모르는 어설픈 암살자에게 끝날 목숨이 아니었다.

    "…….“

    "암살이라도 시도하면 내가 순순히 그대를 죽여줄 거라고 생각했나?“

    카벨레누스의 목소리가 보다 낮아졌다. 눈에 뻔히 보이는 승패를 저 여자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암살을 시도할 생각을 했다는 건 다른 목적이 있어서였다. 죽음. 그 단어를 떠올린 카벨레누스의 미간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여자는 그의 신경을 자극하는 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말씀드렸잖아요. 망국의 왕족을 살려둬봤자 후환이 될 거라고.“

    "나도 말했지. 그건 그대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카벨레누스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자의 텅 빈 눈동자도, 우울한 표정도, 습관처럼 움츠린 몸도, 전부.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그 불쾌함이 카벨레누스를 자극했다.

    "찌르고 싶으면 찔러.“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에게 무기를 쥐여준 채로 그대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녀의 손을 제 가슴에 가져갔다.

    "저는-“

    "못 죽이겠지.“

    "…….“

    "암살? 웃기지 마. 그대는 처음부터 날 죽일 생각이 없었어. 그저 자신을 죽이고 싶어서 안달 났을 뿐이지.“

    카벨레누스의 눈이 번뜩였다. 그렇게 죽고 싶다면 죽여버리면 그만인데, 그럴 수 없었다. 죽이고 싶다기보단 오히려 초조했다. 어떻게 해야 저 여자 눈에서 생기가 돌까. 도대체 뭘 해야만 죽음만을 바라는 여자가 살고 싶다는 말을 뱉을까.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그것만이 머릿속을 빙빙 맴돌아 미칠 지경이었다.

    "……기회를 주지.“

    카벨레누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맞닿아있던 피부가 더욱 밀착되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열기에 몸이 뜨거웠다. 손에 닿은 온기에 알리시아의 얼굴에 붉은 기가 퍼졌다. 살갗을 통해 쿵쿵 전해지는 타인의 심장 소리가 생경해 자꾸만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알리시아 노이슈타인.”

    “……네. 말씀하세요.”

    날 선 본능은 더는 저 여자와 엮이면 안 된다고 경고음을 울렸다. 그럼에도 카벨레누스는 꽉 쥔 여자의 손을 놓지 못했다. 그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제 손에 쥔 것을 한 번도 놓아본 적이 없었다. 원하면 가지면 된다, 그뿐이었다. 카벨레누스의 입가에 오만한 미소가 번졌다. 내려진 결론이 퍽 마음에 들었다.

    "정말로 내게 안기길 원하나?“

    거리가 가까워졌다.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다가오는 사내의 눈동자에는 오롯이 그녀만이 비치고 있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지. 대신-“

    "…….“

    "이번에도 같은 대답이라면 후회해도 소용없어.“

    얼굴이 다가왔다. 닿을락 말락 한 아슬한 거리, 입술을 맴도는 숨이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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