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5)화 (5/164)
  • 5화. 안아주세요.

    2020.03.19.

    <그래. 잘 생각했어. 형님과 어울려주는 것이야말로 아우의 도리잖나.>

    “저는 질 생각 없습니다.”

    이건 승부욕일까, 아니면 오기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확실한 건 항상 저 여자는 거슬렸다. 그녀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조차 낯설어 불쾌했다. 그래서 이유를 찾아야만 했다. 그러지 않고선 이 거슬리는 감각을 떨쳐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무릇 사내란 관심 없는 여자에게 콩알만큼의 신경도 쓰지 않는 법이거든.>

    제르페누스는 싱글벙글 웃으며 잔에 와인을 따랐다. 교활한 황제의 시선은 무의식적으로 제 입술을 매만지는 카벨레누스의 엄지에 닿아있었다. * * * 볕이 좋은 날,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일은 아주 쉽고 간단했다.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든 아무도 알리시아를 신경 쓰지 않았다. 알리시아는 공공연하게 카벨레누스의 여자였고, 별개의 존재였다. 예전에 비해서 훨씬 나은 삶을 산다고 해도 여전히 그녀가 노이슈타인 성의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물과 기름이 섞일 수 없는 것처럼 알리시아는 보통 사람들의 무리에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그 사실이 딱히 슬프지 않았다. 그녀에게 그런 건 익숙한 일상의 일이었다. 그 증거로 지금 알리시아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건 슬픔이 아닌 놀라움이었다. 알리시아는 멍한 눈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이었음에도 처음으로 닿았던 타인의 온기는 지나치게 생생했다.

    ‘의외로 따뜻했지.’

    살아 있는 자에게 온기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인데 신기했다.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사내이기에 차가울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답지 않게 당황했던 눈동자가 박제라도 된 것처럼 머릿속에 콱 박혀 자꾸만 생각이 났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알리시아는 도무지 잊히지 않는 기억을 참지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겪고 있는 모든 일들이 생각 밖의 일이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꽤 잘 지내고 계신 모양입니다.”

    불쑥 내밀어진 모포에 알리시아는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해를 등진 하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가 익숙했다.

    “그러는 당신도 잘만 살아 있네.”

    알리시아가 아쉽다는 투로 피식 웃었다. 평소 알리시아의 시중을 들던 하녀가 아니었으나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한때 노이슈타인 왕가의 왕비를 모시다가 은퇴한 노기사, 벨리타였다.

    “공주님의 도움이 필요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당신이 날 공주로 생각했는지 오늘에야 처음 알았네.”

    알리시아의 입술이 뒤틀렸다. 아직도 알리시아의 허벅지에는 왕비가 쏟은 뜨거운 찻물에 데인 화상 자국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벨리타는 찻물을 뒤집어쓴 알리시아를 비웃던 인물 중 하나였다. 알리시아는 벨리타가 자신을 부를 때에는 공주님보다 버러지라는 표현을 쓸 때가 더 많았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침략자에게 빌빌거리며 더럽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는 공주라고 해도 노이슈타인의 피를 이은 이상, 제 몫을 다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게 그동안 당신을 먹이고 입혀준 왕비님에 대한 보답이자, 공주님 몸에 흐르는 고결한 피에 대한 감사가 아니겠습니까.”

    “쓸데없는 소리를 할 거라면 지금 당장 내 앞에서 사라져.”

    알리시아는 지친 얼굴로 시선을 회피했다. 왕비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손끝이 달달 떨렸다. 모두가 사생아로 태어난 공주를 받아들인 왕비를 자애롭다 말했지만, 왕비가 알리시아에게 베푼 건 자비가 아닌 자비의 가면을 뒤집어쓴 학대였다. 하지만 벨리타에게 그 사실을 이해시킬 수 있을 리 없었다. 차라리 괜한 소란에 대비해 어떤 반응도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저 역시 긴 말로 시간 끌 생각 없습니다. 어차피 제가 말씀드릴 본론은 아주 간단한 것이거든요.”

    벨리타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당신을 낳아준 여자, 저희가 데리고 있습니다.”

    “거짓말하지 마.”

    알리시아가 빠르게 대답했다.

    “믿지 못하겠나 보군요.”

    “내 어머니는 죽었어.”

    “당신이 믿고, 안 믿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벨리타가 보란 듯 옷 속에서 펜던트 하나를 꺼내 알리시아에게 던졌다. 알리시아는 떨떠름한 얼굴로 무릎에 떨어진 펜던트를 집었다. 그때였다. 떨어진 충격으로 틈이 벌어진 펜던트에 알리시아의 손이 닿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알리시아는 초점이 엇나간 눈으로 벨리타를 올려다봤다. 벨리타는 이미 제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당신을 낳아준 여자의 피로 만든 펜던트에요. 그래서 같은 피를 타고난 당신이 만져야만 반응하죠. 당신도 예전에 이미 경험해봤잖아요? 혈육의 피에 반응하는 목걸이. 왕국에서는 혈통을 확인할 때, 이런 방법을 쓴다는 거.”

    “…….”

    “이런 시국에 귀한 마도구를 만들기까지 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당신 반응을 보니 헛수고는 아닌가 봐요.”

    벨리타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알리시아의 턱을 쥐었다.

    “다시 한번 말할게요. 당신이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당신은 내 말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내 말을 거역하면 피를 보는 건 당신이 아니라, 그 여자일 테니까요.”

    “……뭘 원하는 거지?”

    “카벨레누스. 그 작자를 죽여요.”

    벨리타의 주름진 눈매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불빛 아래 번들거렸다. 그 눈동자에는 미처 지우지 못한 광기가 엿보였다.

    “……뭐?”

    “그 여자 피를 물려받은 덕분인지 당신은 남자를 꼬여내는 데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으니 그걸 활용해보자고요.”

    “나는 못 해.”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를 안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설령 안는다고 해도 상황이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카벨레누스는 노련한 전사였다. 그는 휴식을 취하는 와중에도 늘 날이 선 경계를 풀 줄 몰랐고 그의 침대 옆에는 항상 무기가 있었다. 그런 사내를 암살하려고 시도하는 건 화를 돋우는 일에 불과했다.

    “아뇨. 당신은 해야 해요. 그 여자를 살리고 싶잖아요.”

    “내가 실패하면 어쩌려고.”

    “말했잖아요. 피를 볼 거라고. 그러니 좋은 말할 때 그 악마를 죽여요.”

    “그자를 죽인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아뇨. 그 살인마 자식만 죽으면 다 끝날 거예요. 노이슈타인 왕국은 아직 죽지 않았어요.”

    벨리타가 거칠게 알리시아의 두 어깨를 쥔 채로 이를 빠드득 갈았다 알리시아는 벨리타를 설득하기 위해 입술을 열었다가 이내 꾹 다물어버렸다. 과거의 영광에 취해있는 노기사는 예나 지금이나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다. 노이슈타인 왕족은 사랑받는 자들이 아니었다. 증오와 원망, 그리고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왕이 참수형을 당할 때, 대다수의 노이슈타인인들이 흘린 눈물은 슬픔이 아니었다. * * * 알리시아는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고작 펜던트 하나로 제 모친이 살아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애당초 알리시아는 어머니의 죽음을 제 앞에서 목도한 바가 있었다.

    ‘무엇보다 이런 건 생전에 만들어놓으면 그만이잖아. 이런 걸론 어머니가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되진 못해. 날 이용하려는 개수작에 불과해.’

    알리시아는 애써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쉽게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저들이 꼭 수상한 것만은 아니었다. 왕비와 그 무리들은 걸핏하면 알리시아가 왕족임을 밝히기 위해 드는 수고가 얼마나 아까운 것인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했었다. 그 덕분에 알리시아는 혈육을 확인하는 펜던트를 만드는 데에 얼마나 많은 돈과 노력이 들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저들이 천대하던 어머니를 위해 미리 그런 값비싼 물건을 만들어놓았을 리 없었다.

    ‘어쩌면, 정말로 어머니가 살아 계실지도 몰라.’

    알리시아는 슬쩍 손을 올려 머리에 꽂힌 장신구를 매만졌다. 겉보기에는 그저 머리를 틀어 올리는 장신구처럼 보였지만 보석 부분을 돌리면 날카로운 날붙이가 튀어나오는 무기였다.

    ‘만약 내가 그자를 죽이려고 하면…….’

    알리시아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벨리타는 무기에 맹독이 발라져 있어 약간의 상처만 내도 살인마를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알리시아에게는 그 짧은 틈조차 만들 능력이 없을뿐더러 설령 카벨레누스를 죽인다 해도 문제였다. 카벨레누스는 황제의 동생이었고, 이미 한 번 침공 당한 노이슈타인 왕국에는 제국을 이길 만한 힘이 존재하지 않았다. 벨리타는 저와 뜻을 함께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고 대단한지 자랑하기 바빴지만, 정말로 그들이 대단했으면 애당초 왕국이 함락될 일 따위는 없었다. 카벨레누스의 죽음은 기껏 살아남은 왕국인들을 전부 몰살해버리는 결과만 낳을 게 분명했다. 알리시아는 긴 한숨과 함께 두 눈을 감았다. 애당초 자신은 어머니가 살아 있음을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렇다면, 결국 알리시아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알리시아는 동공이 풀린 눈으로 힘없이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봤다. 하녀들은 항상 그녀를 최대한 아름답게 꾸미려고 애썼지만 우울함으로 물든 표정까지는 어찌하지 못했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에는 항상 짙은 고단함이 그득했고 알리시아는 그 사실을 다 알면서도 굳이 감추려 들지도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뭔가 슬퍼졌다. 갑자기 분에 넘치는 좋은 것들을 맛보다 보니 이대로 떠나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몰랐다. 알리시아는 화장대에 놓인 립스틱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어색한 손길로 조심스레 입술선을 따라 색을 입혔다.

    “하나도 안 어울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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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설픈 화장은 안 하느니 못했다. 입술선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 삐뚤삐뚤한 모양에다가 과하게 덧바른 입술은 지나치게 붉었다. 가뜩이나 새하얀 얼굴이라 입술만 동동 떠다니는 끔찍한 몰골이었다. 그렇지만 알리시아는 그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다. 우스꽝스러운 꼴이라도 보고 있어야 빳빳하게 서린 긴장이 그나마 풀릴 것 같아서. * * *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그래.”

    그날 밤도 별반 다를 바 없이 서로 간에 딱딱한 인사가 오고 갔다. 아무 일이 없었다 해도 같이 밤을 새운 게 한두 날이 아닌데 둘 사이에는 언제나 침묵이 존재했다. 알리시아는 여전히 별다른 표정 없는 사내의 얼굴을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카벨레누스가 여지껏 절 살린 이유가 호기심인지, 자비인지는 몰랐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었다. 아무리 여유로운 사내라 해도 제 목숨을 노린 암살자를 두고 보지는 않을 테니까.

    “오늘은 뭘 했지?”

    “볕이 좋아서 그냥 산책을 좀 했어요.”

    “노이슈타인의 공주는 산책을 좋아하나 보지?”

    “지금껏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에 뭘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있었던 거예요.”

    알리시아는 두 다리를 웅크려 모은 채 카벨레누스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사내의 등은 아주 크고 넓었고, 알리시아는 그것이 퍽 부러웠다. 자신도 저렇게 강했으면 지금처럼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지쳐 죽음만 바라는 꼴은 아니었을 것 같았다.

    “아직도 죽고 싶나?”

    “그렇다면 죽여주실 건가요?”

    “아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단호한 대답에 알리시아의 입매가 꿈틀거렸다.

    “죽여주지도 않으실 거면서 왜 매일 밤 죽고 싶냐고 물어보시는 거예요?”

    “……”

    대답을 듣고 싶었는데 돌아온 건 침묵뿐이었다. 알리시아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두 다리를 제 몸쪽으로 붙이며 입술만 우물거렸다.

    “할 말이 있으면 해.”

    알리시아의 시선을 느낀 건지 카벨레누스가 무심하게 말을 건넸다. 예민한 사내는 등을 돌리고 있음에도 쉽게 타인의 시선에 반응했다.

    “정말로 절 죽이실 생각이 없으신가요?”

    “그래.”

    “그럼 다른 걸 해주실 생각은요?”

    알리시아는 무의식적으로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가 오히려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태연하게 굴어야 하는데 벌써부터 손 안에 땀이 찼다.

    “죽는 것 말고 내게 원하는 게 있나?”

    “있다고 하면 들어주실 건가요?”

    겉옷을 벗던 카벨레누스의 손이 잠시였지만 멈췄다.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의 미세한 반응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떨리는 몸을 달래며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벅찬 일이었다. 절 죽이지 않겠다고 선언했음에도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가 언제나 무서웠다. 괜찮은 것 같다가도 저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볼 때면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의 앞에만 서면 머리털이 쭈뼛 서고 다리가 오글오글 떨려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리고 싶단 생각마저 들곤 했다. 동공이 도드라지는 금색 눈동자는 무심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을 좀 더 들여다보면 맹수 특유의 사냥 본능이 깊게 박혀있었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선이라면, 어느 정도는.”

    카벨레누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음성은 아까보다 좀 더 낮아져 있었다.

    “안아주세요.”

    “…….”

    힘겹게 꺼낸 말임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카벨레누스를 보며 알리시아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호흡이 가라앉자마자 바로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절 죽이지 않으실 거라면…… 차라리 안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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