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4)화 (4/164)
  • 4화. 착각이었다

    2020.03.16.

    모친은 항상 알리시아에게 루베르타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우리 모녀는 언젠간 루베르타인에 갈 거라고.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 거라고. 알리시아는 그런 건 전부 헛된 희망이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죽음의 순간에 알리시아의 손을 꽉 잡고 루베르타인에서 다시 만나자고 속삭이던 어머니의 간절한 눈을 잊을 수 없었다. 알리시아는 항상 어머니가 미치도록 그리웠다. 믿지도 않는 미신에 매달려 적국의 사내에게 죽음을 구걸할 정도로.

    “제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전하의 마음을 흔들었다면 지금 제 목숨을 끝내주세요.”

    알리시아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카벨레누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을 모으고 야수 같은 사내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가냘픈 목소리로 자비를 구했다.

    “……나는 그대를 죽일 생각이 없어.”

    카벨레누스는 허탈한 숨을 뱉으며 다소 거친 손길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왜죠?”

    알리시아의 잿빛 동공이 흔들렸다. 카벨레누스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고 싶지 않으니까.”

    죽고 싶어 하는 여자 따위 그냥 죽어버리면 그만이었다. 죽음을 운운하고 있는 것치곤 여자는 너무 작고 연약했다. 저렇게 가는 목이라면 굳이 검을 뽑지 않아도 한 손으로도 꺾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항상 저 눈이 문제였다. 빛바랜, 칙칙하기 짝이 없는 여자의 눈동자는 항상 그의 신경을 거슬렀다.

    “볼품없다고 해도 저 역시 노이슈타인의 왕족입니다.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저를 죽이시는 편이 후환이 없으실 거예요. ”

    “……후환?”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놀랄 틈도 없이 알리시아는 훅 숨을 삼켰다.

    “뭔가 착각하나 본데, 판단을 내리는 건 내 몫이야. 한낱 노예 따위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라.”

    순식간에 그의 숨이 입술에 닿았다. 놀란 알리시아는 상황을 판단할 수 없어 느릿하게 눈을 껌벅거렸다. 도망칠 새도 없이 카벨레누스의 얼굴이 바로 알리시아의 코앞에 있었다. 태양을 담아놓은 듯 진한 금색 눈동자가 지나치게 가까워 보였다. 코가 닿을 듯 말 듯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거리에, 작은 숨조차 서로에게 곧장 닿았다.

    “저는 그저…….”

    뭔가 말을 하려고 했는데, 마치 타오를 듯 날이 선 눈동자를 보니 온몸에 소름이 쫙 돋다 못해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눈앞의 사내는 ‘진짜’였다. 그저 왕족이라는 이름에 취해 떵떵거리기만 하던 제 아비와는 전혀 달랐다. 금방이라도 모든 걸 베어버릴 듯 잔뜩 날이 선 사내는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쓴 한 마리의 맹수 같았다. 황족으로 태어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제 손으로 직접 모든 영광을 이룩해낸 사내는 진짜 지배자였다.

    “고작 이 정도에 겁을 먹고 움츠러드는 주제에 잘도 목소리를 내는군.”

    ‘……웃었다?’

    착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순간 카벨레누스의 눈매가 약간이나마 호선을 그리는 것을 보았다. 돌처럼 굳어 있던 알리시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허튼 생각은 하지 마. 나는 결정을 번복하지 않아.”

    카벨레누스는 느릿하게 숨을 뱉으며 고개를 삐딱하게 세웠다.

    “번복하지 않으신다고요?”

    알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움직임을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지배자는 어떤 식이든 상대를 매혹하는 힘이 있다고 했다. 본능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산란케 하고 사람들을 따르게 한다고. 얼핏 들었던 이야기가 사실인지, 그냥 나온 말인지는 모르나 단 한 가지는 확실했다. 눈앞의 사내야말로 그런 사람이라는 걸.

    “나는 그대를 죽이지 않을 거야.”

    “자비를 베풀어줄 수도 있다고 말했잖아요.”

    “베풀어줄 수도 있다고 한 거지. 나는 이뤄주겠다고 한 확답을 준 적은 없거든.”

    재판장에서 자신이 했던 말이다. 알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뱉었다.

    “그럼 저는 평생 이러고 살아야 하나요?”

    “썩 나쁜 삶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적어도 하녀인지, 공주인지 모를 꼴로 사는 것보단 낫지.”

    알리시아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수치 같은 건 예전에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저를 탐색하기 위해 움직이는 눈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속이 뒤틀렸다.

    “……전하께서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시겠죠. 제가 어떤 마음으로 자비를 바랐던 건지.”

    알리시아는 생명줄처럼 시트를 쥐고 있던 손을 놨다.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었던 몸에 힘을 풀고 힘없는 눈동자로 카벨레누스를 올려다봤다. 조금만, 정말로 조금만 고개를 움직이면 입술이 닿겠지. 만약 여기서 먼저 입을 맞추면 사내가 저를 죽여줄까. 충동에 가까웠지만, 알리시아는 그것이야말로 저 오만한 지배자를 흔들리게 할 방법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행동은 생각보다 빨랐다. 촉.

    “뭐 하는 거지.”

    눈 깜짝할 새 알리시아의 양어깨를 쥐고 그녀를 떨어뜨린 카벨레누스가 으르렁거렸다. 금방이라도 제 손안의 생명을 집어삼킬 듯 형형한 사내의 눈빛은,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칠 정도로 섬뜩했다.

    “천한 노예가 귀한 핏줄을 허락도 없이 건드렸으니 이제 절 죽여주실 마음이 드셨나 해서요.”

    그럼에도 알리시아는 억지로 양 입술을 끌어올리며 미소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착각이라 여길 정도로 아주 잠깐의 순간이었지만 분명 닿았다. 입술에 옅게나마 남은 온기가 무엇보다 선명하게 그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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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차라리 그때 끝내버리는 편이 나았을까. 카벨레누스는 정원의 산책로를 걷는 알리시아를 보며 주름 잡힌 미간을 검지로 살살 폈다. 단지 그녀의 눈이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제는 며칠 전의 표정까지 잊히지 않았다.

    “우스운 꼴이군.”

    카벨레누스는 허탈한 숨을 뱉었다. 그날 이후, 그는 침실이 아닌 집무실에서 밤을 보내고 있었다. 겉으로는 일을 핑계로 댔지만 사실 알리시아와 마주치는 게 거북했다. 그리고 보통 이런 경우에는 썩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카벨레누스는 잘 알고 있었다. 전장에서 제가 살아온 시간의 반평생을 보낸 사내의 직감은 짐승의 것과 다를 바 없이 예민했다.

    “전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염없이 정원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규칙적인 노크 소리가 들렸다. 부관, 가제프였다.

    “무슨 일이지.”

    “폐하의 연락입니다.”

    가제프가 어색하게 웃으며 통신 거울을 내보였다. 그의 상관은 황제와의 연락을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들어오도록.”

    카벨레누스는 짧은 한숨과 함께 가제프를 향해 손짓했다. 황제와 연락하는 건 썩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어차피 한 번은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런. 이런. 역시 그 유명한 북부의 대공답게 얼굴 한 번 보기가 어렵군.>

    통신이 되자마자, 거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황제가 비아냥거렸다. 얼핏 봐도 카벨레누스를 연상시키는 황제의 모습은 두 사람이 혈육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왜 연락하신 겁니까.”

    <이쯤 되면 보고가 들어올 줄 알았는데 통 연락이 없어서 말이야.>

    “조만간 연락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런 거라면 좀 더 기다릴 걸 그랬군. 나는 이 무뚝뚝한 아우 녀석이 얼마나 나를 애태울지 궁금해서 버텨본 건데, 아니나 달라. 네 놈은 항상 먼저 연락을 한 적이 없어.>

    “보고서는 착실하게 작성해 올렸습니다.”

    <그깟 보고서가 뭐라고. 하나뿐인 혈육이 전장에서 무사하게 살아남았는지 얼굴을 확인하는 게 우선이지.>

    제르페누스는 황제의 체면이 무색하게 거울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며 이가 드러날 정도로 웃었다.

    “확인만 하시려는 건 아니실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본론만 말하면 네 놈이 용건만 짧게 말하고 통신을 끊을 테니까, 바로 말할 수야 없지.>

    “그럼 지금 바로 끊도록 하죠.”

    <잠깐! 잠깐!>

    제르페누스가 통신 거울 너머로 다급하게 손을 저었다. 약간의 장난을 치고 싶을 뿐인데, 매정한 동생 놈은 도무지 장단 맞추는 법을 몰랐다.

    “본론만 말씀하십시오. 저는 폐하와 달리, 매우 바쁩니다.”

    <편하게 형님이라고 부르래도 너는 그놈의 폐하 소리를 버릴 줄 모르지.>

    “통신, 끊어도 됩니까?”

    <카벨레누스. 이 매정한 아우 녀석아. 너는 오래간만에 이 형님을 봐도 매정하기 짝이 없구나. 하여간 귀여움이라곤 하나도 없는 녀석이야.>

    제르페누스는 혀를 차며 황좌에 등을 기댔다. 조금이라도 말꼬리를 잡아 통신 시간을 늘려볼 셈이었는데 무심한 동생에겐 영 통할 기세가 아니었다.

    “본론만 듣고 싶습니다.”

    <노이슈타인의 공주를 살려두었다고 들었다만.>

    “…….”

    <혹시나 했는데 사실이구나!>

    제르페누스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진 대신, 카벨레누스의 매끄러운 이마엔 깊은 주름이 잡혔다.

    <나는 네가 하도 여자라고 하면 목석보다 못하게 바라보길래 남색가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네 놈이 여자를 침실에 들이다니! 아버지가 들었다면 관에서라도 뛰쳐나오셨을 거다.>

    소문을 들었을 때만 해도 혹시나 했는데 사실이었을 줄이야. 제르페누스는 입꼬리를 올리며 얄궂은 미소를 지었다.

    “폐하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내가 신경 쓰지 않으면 누가 신경을 쓸까. 어디 한번 말해봐라. 어떤 여자지?>

    카벨레누스는 싫은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눈매를 찡그렸지만 제르페누스의 반짝이는 두 눈에는 이미 흥미가 그득했다.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나는 노이슈타인의 핏줄은 하나도 남김없이 정리하라고 말한 것 같은데.>

    제르페누스의 두 눈이 얄밉게도 호선을 그렸다.

    “…….”

    카벨레누스의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

    <내 명령을 거역하고 살아남은 자는 드물지만, 내가 어떻게 내 귀한 아우님에게 칼을 겨눌 수 있겠어.>

    “이렇게 나오실 겁니까.”

    <내 못된 동생 놈은 항상 권위를 써야지만 말을 들어서 말이야. 억울하면 네가 황제가 되렴. 지금이라도 황위를 넘겨줄까. 너라면 얼마든지 황제 자리를 넘겨줄 수 있는데 말이지.>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 안에는 진심이 섞여 있었다. 카벨레누스는 애써 그 사실을 외면하며 한 손으로 애꿎은 이마를 짚었다.

    “평범한 여자입니다.”

    아무리 좋은 걸 해줘도 자신에게 바라는 게 죽는 것밖에 없는 여자를 평범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카벨레누스의 시선이 다시 창문 밖으로 살짝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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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리시아는 여전히 가만히 정원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햇빛 한 점 없이 구름이 낀 날씨 덕분에 그녀의 적갈색 머리는 더욱 우중충하고 초라하게만 보였다. 다시 생각해봐도 그녀에겐 특별하다고 말할 구석이 없었다.

    <평범한 여자가 내 아우를 꼬셨다고?>

    “꼬신 건 아닙니다.”

    <그럼 네가 꼬셨냐? 네 놈이 혹할 정도의 미인이야? 예뻐?>

    “한 나라의 황제께서 천박한 말을 입에 올리시면 안 됩니다.”

    <깐깐하긴. 뭐, 그래. 좋아.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지.>

    제르페누스가 흡족하게 웃으며 턱을 매만졌다.

    “말했지만 폐하께서 신경 쓸 일은 아닙니다.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그건 두고 봐야 할 일이지.>

    “두고 볼 것도 없습니다.”

    <그럼 우리 내기 하나 할까? 네가 노이슈타인의 공주에게 넘어갈지, 안 넘어갈지.>

    “저는 내기를 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습니다.”

    카벨레누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에이, 그러지 말고. 한 번 해보자. 제법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참고로 나는 네가 노이슈타인의 공주에게 넘어간다 쪽에 거는 걸로 하마.>

    “싫습니다.”

    <왜? 질 것 같아서?>

    제르페누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사람 좋은 척, 너그러운 척 굴어도 그는 황제였다. 카벨레누스가 사냥개라면, 제르페누스는 그 개를 다루는 사냥꾼이었다.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 만무했다.

    “저는 쓸데없는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네가 이기면 황궁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 해도?>

    “…….”

    <1년. 아니지. 한 특별히 인심 써서 10년은 돌아오지 않아도 용납해줄게.>

    카벨레누스의 눈썹이 미약하게 꿈틀거렸다. 사실 방금 전의 말은 좀 유혹적이긴 했다.

    <네 말대로 아무 일이 없으면 되는 거잖아. 네게도 나쁜 기회는 아니니, 황실 놀음에 지친 형님에게 유흥 하나만 선사해주는 게 어때?>

    제르페누스가 은근하게 목소리를 깔며 키득거렸다. 그는 유일하게 카벨레누스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였다.

    “괜한 소리는 그만하시고 일이나 하십시오. 더 할 말이 없으면 저는 이만 끊겠습니다.”

    제르페누스는 한 번 마음 먹은 일은 끝까지 하는 인간이었다. 괜히 그의 놀이에 어울려봤자 성가신 일만 늘 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카벨레누스는 다시금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생각을 멈췄다. 산책이 끝난 건지 알리시아가 정원 벤치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 순간, 구름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비췄다.

    “…….”

    아, 눈이 마주쳤다. 카벨레누스의 목울대가 울렸다. 단지 착각이었다.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건 카벨레누스 혼자뿐이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카벨레누스는 도무지 알리시아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언제나 녹슨 쇠처럼 초라하다고만 여겼던 알리시아의 붉은 머리가 아주 잠깐이지만, 햇빛에 반사되면서 강렬한 노을처럼 보인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또 그 눈동자가 떠올랐다. 찰나의 순간, 저 여자의 눈동자는 과연 무슨 색으로 빛났을지 궁금해져 버렸다.

    <아, 설마 말로는 아무 일도 없다 했으면서 속으로는 아닌 거 아냐? 그래서 이길 자신이 없는 거지.>

    “……좋습니다. 하죠.”

    제르페누스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비로소 정신을 차린 카벨레누스는 이를 악문 채 중얼거렸다. 다시금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바라본 알리시아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녹슨 쇠처럼 초라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현실을 곱씹어 삼키면서도 어쩐지 뱃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기분을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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