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3)화 (3/164)
  • 3화. 왜, 저를 안지 않으세요

    2020.03.12.

    “…….”

    “…….”

    또다시 침묵. 숨을 삼킨 알리시아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카벨레누스는 잠자코 그녀의 표정과 행동을 눈에 담았다. 어느샌가 알리시아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보이지 않았다.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떨리는 손으로 제 어깨를 감싼 여자는 무언가 각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 각오한 표정이었다.

    “알리시아 노이슈타인.”

    알리시아의 행동이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카벨레누스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렸다. 절 보는 사내와 시선이 마주친 알리시아의 눈동자는 흔들렸지만 그녀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툭. 화려한 금핀이 바닥을 굴렀다. 그와 동시에 카벨레누스의 매끄러운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노이슈타인의 옷은 바느질을 하지 않는다. 통짜로 된 천을 양어깨의 옷핀이나, 허리의 띠를 사용해 주름을 잡아가면서 고정해 멋을 낸다. 덕분에 고작 한 겹의 얇은 천옷을 입은 여자의 살갗이 드러나는 건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카벨레누스는 반쯤 흘러내린 천 사이로 살짝 비치는 살갗에 반사적으로 이를 악다물었다.

    “뭐 하는 거지.”

    “취하실 거잖아요.”

    알리시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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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해?”

    카벨레누스의 눈매가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당장이라도 옷을 껴입으라 외치고 싶었으나 어떤 경계 하나 없이 제 약점을 드러낸 존재에 말문이 턱 막혔다. 단 한 번도 여인이 부족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많은 여자들이 그를 유혹하고자 했고 심지어 알몸으로 제 침대에 뛰어든 여자까지 있었으나 그는 단 한 번도 동해본 적이 없었다. 육체적인 욕망보다 나신의 타인과 닿아야 한다는 혐오감이 항상 더 컸던 탓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초라한 여자에게서는 도무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사내를 모르는 몸이라 원하는 바를 얻으실 수 없으실지도 모르나 반항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뜻대로 하셔도 됩니다.”

    “노이슈타인의 공주는 제 땅을 더럽힌 침략자가 끔찍하지도 않은가 보군.”

    “포기하는 법을 알고 있을 뿐이에요.”

    알리시아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덤덤한 척 굴었지만 사내의 앞에 무릎 꿇고 있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의지와 상관없이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잔뜩 겁에 질려있는 주제에 말은 잘하는군.”

    “제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니까요.”

    “그렇다면 그 잘난 세 치 혀로 내게 다시 소원을 빌지 그래? 재판장에서 내뱉었던 어설픈 동정 대신 그대의 안위를 빌어봐.”

    카벨레누스가 비아냥거리면서 알리시아를 오만한 시선으로 내려봤다. 쏟아진 붉은 머리카락과 대비된 알리시아의 얼굴은 새하얗다 못해 창백해 보였다.

    “제가 빌고 싶은 건, 무고하게 죽는 이가 없길 바라는 것뿐이에요.”

    “진심인가?”

    “살고 싶어하지 않는 자보다, 살고 싶어하는 자가 사는 게 맞잖아요.”

    알리시아의 잇새로 가냘픈 숨이 새어 나왔다. 카벨레누스는 애써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로 망토를 여민 브로치에 힘을 줬다. 그제야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가 왜 저런 눈을 하고 있는 건지 알았다. 그녀에겐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다.

    “정 죽고 싶으면 그냥 목숨을 끊으면 그만일 텐데.”

    일부러 혀를 차며 조롱조로 말했음에도 알리시아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카벨레누스의 매끄러운 미간이 좀 더 구겨졌다. 잔뜩 겁에 질린 얼굴을 한 주제에 목소리를 내는 꼴이 같잖은데, 그보다 그녀의 나신 곳곳에 있는 흉터들이 거슬린다는 사실이 그의 신경을 긁고 있었다.

    “……재미없군.”

    카벨레누스는 한겨울의 폭풍우보다 매서운 얼굴로 알리시아를 노려보다가 휙 몸을 돌려 방을 떠났다. 그가 머물던 자리에는 형태가 뭉개져 처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브로치만이 바닥을 나뒹굴었을 뿐이다. * * * 그 사내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알리시아는 멍하니 눈만 껌벅거리길 반복했다. 성이 점령당한 후,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벌써 많은 것이 달라졌고 앞으로 더 많은 것이 달라질 건 어린아이도 알 법한 이야기였다. 한때 노이슈타인 성이라 불리던 성은 이젠 바이젠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고, 그에 맞춰 새로운 사람들과 물건들이 채워지고 있었다. 나날이 정세는 안정되었고 피비린내가 가득하던 성안에는 새 지배자를 맞이할 준비로 다들 분주했다. 이제 성안에 남은 옛것이라곤 알리시아 뿐이었다.

    “흉터가 예전보다 많이 나아지셨군요. 새로운 약을 처방해야겠습니다.”

    노의사가 다정하게 웃으며 마저 알리시아의 등에 약을 발라줬다. 알리시아는 등줄기를 간지럽히는 손길에 튀어오려는 웃음을 참아내며 괜히 발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노이슈타인의 왕족에서 노예로 신분이 격하되었지만, 모순적이게도 알리시아의 생활은 뭐 하나 할 것 없이 모든 게 예전보다 나았다.

    “치료가 끝났으면 식사를 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치료가 끝날 때까지 옆을 지키던 하녀가 공손하게 물어왔다. ‘대공의 여자’로 낙인 찍힌 후부터 성의 누구도 알리시아에게 함부로 하지 않았다.

    ‘정작 그 남자는 나한테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는데 말이지.’

    카벨레누스는 매일 같이 알리시아를 제 침소에 들였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밤이 되면 찾아왔고, 또 아침이 되면 떠났다. 그게 전부였다.

    “잘 챙겨 드셔야 합니다.”

    알리시아가 제대로 먹지 않고 수저로 수프만 휘적거리자 하녀가 한소리를 덧붙였다. 그녀는 알리시아의 식사에 특히나 예민하게 굴었다.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가 아무것도 먹지 않고 버티자, 식사를 하지 않는 날에는 성 안의 모두의 목을 베어버리겠노라고 선언한 바가 있었다. 알리시아는 하녀의 눈치를 살피며 수프를 겨우 입에 넣었다.

    “다른 것도 한 번 드셔보세요. 여기 있는 것들 전부 요리사가 특별히 신경 써서 만든 요리랍니다.”

    하녀가 요리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것들이 얼마나 특별한 음식인지 설명하며 알리시아의 식욕을 돋우기 위해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왕국 최고 요리사가 각종 재료를 듬뿍 넣어 끓인 수프는 알리시아가 그간 먹어온 수프 중에서 가장 맛있었지만, 갑자기 식사량을 늘리고 있어 썩 입맛이 돌진 않았다. 하녀의 겁에 질린 시선이 아니었다면 한 그릇을 전부 비우지도 못했을 거다.

    “입맛에 맞지 않으신가요? 혹시 드시고 싶은 음식이 있으시면 괜찮으니 편히 말해주세요.”

    먹고 싶은 것이라는 말에 떠오른 게 하나 있긴 했다. 풍족한 재료 대신 이름을 알 수 없는 풀과 양을 늘리기 위해 물을 잔뜩 넣어서 끓인, 더럽게도 맛없었던 모친의 수프. 그거라면 몇 그릇이라도 비울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수프를 끓여줄 모친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뇨. 이걸로 충분해요.”

    알리시아는 고개를 숙인 채 묵묵하게 수프를 떠먹었다. 하지만 아무리 수프를 먹어도 그뿐이었다. 속이 텅 빈 듯 허한 감각은 아무리 수저질을 해도 사라질 줄 몰랐다. * * * 오늘도 역시나다. 알리시아는 당연하게 방으로 들어오는 카벨레누스를 보면서 두 손을 가지런하게 모았다. 솔직히 겁이 났다. 무표정한 얼굴을 한 사내는 차분한 태도를 일관했지만, 동공이 도드라져 보이는 금색 눈동자는 짐승의 것을 빼닮아 있었다. 언제 불현듯 이빨을 드러내며 짐승으로 변할지 모를 노릇이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이대로라면 같은 나날의 반복이겠지. 어떤 쪽이든 간에 깔끔한 끝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하다. 알리시아는 떨리는 눈으로 침대에 걸터앉은 사내의 등을 응시했다. 카벨레누스는 잠시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다가 찬찬히 알리시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가 궁금하지?”

    의외로 사내는 순순히 입을 뗐다.

    “왜, 저를 안지 않으세요?”

    “그대가 내게 안기고 싶어하는 줄 몰랐는데.”

    일순간 방안에 침묵이 맴돌았다. 가볍게 나온 카벨레누스의 말에도 알리시아의 입안은 바싹 말라만 갔다.

    “그게 아니라면 절 살려둘 이유가 없잖아요.”

    “내가 여자가 부족해 보이나?”

    카벨레누스가 고개를 까닥거렸다. 예상과 달리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이 반듯한 이마를 스치면서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매 사이로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돋보였다. 제 가치를 아는 사내는 거만했지만, 그 모습마저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우습게도 슈바르한의 살인마는 피로 물든 악명이 무색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날렵하게 깎아놓은 턱선 아래로 보이는 단단한 근육질의 목, 그리고 그 밑으로 얇은 셔츠 천 너머로 엿보이는 다부진 근육의 윤곽까지. 실제로 카벨레누스를 보지 못했다면 그 누구도 피비린내 나는 검은 투구 아래 저런 얼굴이 있으리라곤 감히 상상조차 못 했을 게 분명했다.

    “그 외에는 절 살려둘 만한 이유가 없으니까요.”

    “고작 그런 이유였다면, 그대가 아닌 다른 공주들을 살렸겠지. 누가 봐도 공주보다 하녀라고 생각할 법한 꼴을 한 여자 대신 말이야.”

    카벨레누스는 턱을 괸 채로 알리시아의 얼굴을 살폈다. 꾸준한 식사와 관리로 알리시아는 예전의 거지꼴 대신, 제법 그럴싸한 모습을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의 눈에는 예뻐 보이는 구석이 없었다. 제국의 내로라하는 여자들과 비교하면 녹슨 쇠 같은 머리카락에 칙칙한 잿빛 눈동자를 가진 여자는 정말로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잠깐의 변덕일지도.”

    “…….”

    “아니면, 동정일 수도 있고.”

    카벨레누스의 고개가 살짝 까닥거렸다. 가늘게 뜬 사내의 눈은 알리시아를 여지없이 탐색 중이었지만, 아직도 그는 답을 찾고 있지 못했다. 볼품없는 여자라는 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눈동자가 잊히지 않았다. 저렇게 다 죽어가는 눈이 아닌, 좀 더 확실하게 감정을 드리운 얼굴을 다시 보고 싶었다. 그걸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확신이 들 것만 같았다.

    “망국의 공주 따위에게 동정을 품으실 분이라고 생각하진 않는걸요.”

    정작 알리시아는 항상 저런 얼굴이었다. 언제 죽어도 무관하다는 듯, 초월한 방관자의 눈으로 카벨레누스를 바라봤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걸.”

    완연하게 알리시아 쪽으로 몸을 돌린 카벨레누스가 피식 웃었다. 동정과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누구보다 그가 잘 알았다. 그런데도 그런 소리를 입에 담는 건 혹시나 하는 기대 쪽이 컸다. 언제쯤 저 여자가 사람다운 눈을 하고 저를 바라볼지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없는 기대.

    “저는 반항하지 않을 거예요.”

    “내겐 통나무를 안는 취미 같은 건 없어.”

    “그럼 죽이세요.”

    알리시아는 제 가슴 위로 손을 올린 채 심호흡을 했다. 죽음을 입에 담았던 것과 달리,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쿵쿵 뛰는 심장 박동은 그녀가 살아 있음을 강하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절 살려봤자 좋을 게 없잖아요. 쓸모없는 건 치우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스스로가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군.”

    “노예는 물건이죠.”

    아무리 대접을 받는다고 해도 알리시아는 항상 자신의 처지를 알았다. 국왕의 사생아, 망국의 공주, 그리고 쓰임이 불분명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노예. 알리시아가 살아온 삶 중 무엇도 그녀에게 희망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노이슈타인에는 노예가 없는 걸로 아는데.”

    “노이슈타인에는 없지만, 블랑셰에는 있죠.”

    알리시아의 곧은 시선은 꺾일 줄 몰랐다. 노이슈타인에는 벌써부터 블랑셰의 문화가 섞여 들어오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이 땅에는 노이슈타인보다 블랑셰의 이름이 더 어울리게 될 거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럼 내가 그대를 나이 많고 괴팍한 사내에게 넘긴다 해도 순순히 따르겠군.”

    “원하신다면요.”

    알리시아의 대답은 쉽게 나왔지만, 반대로 카벨레누스의 입매는 삐뚤어졌다.

    “그대는 왜 그렇게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난 거지?”

    “그것까지 말해야 하나요?”

    “혹시 모르지. 그대의 이야기가 마음에 차면 내가 자비로운 죽음을 선사해줄지. 어차피 스스로의 손으로 죽을 생각은 없지 않나.”

    알리시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카벨레누스가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는 모르나 그가 말하는 죽음이란 단어는 유혹적이었다.

    “……지쳐서요.”

    “지쳐?”

    “어떻게든 발버둥을 쳐보려고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을 수백 번씩 겪다 보면 가장 먼저 포기를 배우게 돼요. 어차피 안 될 거라고 생각하고 먼저 움츠러들죠.”

    “…….”

    “그리고, 어느 순간이 되면 포기조차 지칠 때가 와요. 그뿐이에요.”

    “지쳤다면서 왜 스스로 죽진 않는 거지?”

    알리시아는 흘끔 카벨레누스의 눈치를 살폈다. 사내는 여전히 표정 변화가 미약했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감추지 않은 흥미가 서려 있었다. 어쩌면 이번에는 죽을 수 있지 않을까. 알리시아는 무의식적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노이슈타인에는 자살하면 루베르타인으로 갈 수 없다는 미신이 있어요.”

    “루베르타인?”

    “생전에 좋은 일을 많이 하거나, 명예롭게 산 이들, 한 번도 남을 속이거나 상처 입혀본 적 없는 이들 같이 고결하게 살다 죽은 사람들이 산다는 땅이에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은 감히 발조차 들일 수 없죠.”

    “설마 그런 미신을 믿을 줄은 몰랐는데.”

    “……믿진 않아요.”

    알리시아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미신이라는 건 오래되었다는 것 외에는 대단할 게 없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항상 그런 것을 믿고 의지하려는 건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왜 지키려는 거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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