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2)화 (2/164)
  • 2화. 첫 생존자

    2020.03.09.

    “그 외 다른 요구사항은?”

    “없습니다.”

    알리시아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게 끝인가?”

    카벨레누스의 손가락이 가볍게 탁탁, 팔걸이를 쳤다. 알리시아는 흘끔 그의 눈치를 살피고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거렸다.

    “어설프게 선량함을 흉내내는 건 멍청한 짓이지. 아니면, 노이슈타인의 공주는 자신이 고귀한 성직자라도 되는 양 착각하는 건가. 아비의 목숨을 제 손으로 저버린 주제에?”

    “선량한 척 구는 게 아니라,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뿐이에요.”

    “내가 더 많은 것을 해줄 수 있다고 말해도?”

    타고난 정복자로 태어나고 자라난 사내는 쉽게 자비를 운운하는 법이 없었으나, 그렇기에 그가 하는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카벨레누스는 말이 가진 무게를 알았고 자신이 한 말의 대가를 늘 치러왔다. 알리시아가 뭘 요구하든, 웬만한 것들은 대부분 들어줄 생각이었지만 정작 알리시아의 입술은 도무지 열릴 줄 몰랐다. 결국 기다림을 이기지 못한 카벨레누스가 먼저 입을 뗐다.

    “보통 자비를 베풀어준다고 하면 더 많은 걸 요구해도 될 텐데.”

    “자비를 베풀어준다고 한다고 했지, 명확하게 뭔가를 해준다고 확답을 받은 게 아니잖아요. 헛된 기대는 하고 싶진 않아요.”

    트다 못해 갈라져 피딱지가 앉은 알리시아의 입술에서 얕은 숨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벨레누스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에 힘을 줬다.

    “왜 아비를 고발한 거지?”

    카벨레누스는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턱을 괬다. 그의 상체는 아까보다 좀 더 앞으로 나와 있었다.

    “그 사람이 죽어야 끝나잖아요.”

    “끝까지 투쟁할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면, 차라리 빨리 끝나서 한 명이라도 덜 죽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알리시아의 눈매가 아주 잠깐이지만 일그러졌다.

    “그리고?”

    카벨레누스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저 눈이 인상 깊었다. 아비를 고발하는 딸의 것이 아닌, 좀 더 처절하고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이 느껴지는 눈. 사내는 그것이 궁금했다.

    “……죽었으면 했어요.”

    알리시아는 짧게 심호흡을 하고는 도로 말을 이었다.

    “죽어도 마땅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죽어도 마땅하다?”

    카벨레누스가 다시금 알리시아의 대답을 재촉했다. 한데 이번에는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고개를 떨군 채 침묵하는 그녀는 더는 어떤 말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감도는 침묵을 이기지 못한 기사들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카벨레누스는 나서려는 부하들을 제지했다. 그의 시선은 변함없이 한곳에 꽂혀있었다. 멋대로 헝클어진 머리카락, 하녀라 착각하게 만든 변변치 않은 옷차림, 생활의 고단함이 묻어나는 두 손. 카벨레누스는 자신이 가진 것들에 비하면 지나치게 초라한 여자를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올렸다. 그가 노이슈타인 성을 정복한 이래, 첫 생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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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따뜻한 물은 오래간만이다. 알리시아는 몽롱한 눈으로 욕실 안을 채우고 있는 수증기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다가 파리한 피부 위로 보이는 핏줄을 가만히 보기도 했고, 눈을 감고 쿵쿵 뛰는 심장 박동을 가만히 듣기도 했다. 살아 있다. 그렇게 살기 위해 발버둥치던 혈육들은 전부 죽었는데 죽어야 하는 그녀 혼자 살아남았다. 더럽게도 질린 목숨 같으니라고. 알리시아의 고개가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장미 꽃잎이 둥둥 떠다니는 수면 위로 적갈색 머리의 여자가 비쳤다.

    ‘취향도 독특하지. 이런 비루한 몸을 가져서 뭘 하겠다고.’

    왕좌에 거만하게 앉아서 손 하나로 모든 것을 총괄하던 사내를 떠올리며 알리시아는 바람 빠진 웃음을 뱉었다. 모두들 망국의 공주가 살인마의 침대를 데울 것이라고 벌써부터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냥 이대로 혀라도 콱 깨물고 죽어버리는 편이 나을지도.’

    언제 죽어도 무관한 목숨이니 차라리 지금 끊어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리시아의 눈 초점이 흐릿해졌다. 이럴 거면 그런 약속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오래된 약속은 자신의 삶을 끝내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잠들어 영영 깨어나지 않는다면 좋을 텐데.’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숨소리 속에 알리시아는 좀 더 몸을 웅크렸다. 자꾸만 많은 생각과 감정이 들었지만 그녀는 애써 그것을 외면했다. 애초부터 망국의 공주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 * *

    “이제 움직이셔도 됩니다.”

    치장을 끝낸 알리시아를 보면서 하녀는 웃었다. 알리시아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성의 없이 거울을 바라봤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귀에 달린 알 굵은 귀걸이가 찰랑거렸다. 귀걸이와 한 쌍을 이루는 목걸이는 가는 목을 강조하고 손에 닿으면 녹을 것처럼 부드러운 천은 몸선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눈길을 끌었다. 하녀인지, 공주인지 모를 꼴에 비하면 확실히 나아진 모습이었다.

    “정말로 아름다우세요.”

    거짓말. 알리시아는 으레 칭찬을 덧붙이는 하녀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알리시아는 자신의 주제를 너무도 잘 알았다. 아무리 꾸민다고 해도 고단한 세월의 흔적은 하루 이틀 정도로 지워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향유를 발라도 알리시아의 머리는 여전히 푸석거렸고, 두 손 역시 마찬가지였다. 똑똑- 침묵 속 노크 소리가 연이어 들렸고 연이어 문이 열렸다. 알리시아는 예의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안으로 들어선 건 서넛의 무장한 병사였다.

    “다 준비되었소?”

    돼지 털처럼 빳빳한 수염을 가진 병사가 물었다. 대놓고 알리시아를 내려다보는 사내들의 시선은 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짐승을 품평하는 자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하나 지금의 자신과 짐승이 뭐 다를까. 알리시아의 입매가 미세하게 비틀렸다. 애초부터 불쾌할 이유도 없다. 그저 몸의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는 옷의 의도가 너무 빤히 보여서 헛웃음만 날 뿐이었다. * * * 방안은 을씨년스러울 만큼 고즈넉했다. 알리시아는 굳게 닫힌 방문을 흘끔 돌아봤다. 그녀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방문은 굳게 닫혔다. 이제 도망칠 구석도 사라졌다. 알리시아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방 안에 인기척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걸음을 뗐다. 설마 이 방을 쓸 줄이야. 알리시아는 긴장 어린 눈으로 방을 살폈다. 왕국에서 가장 크고 좋은 방. 혀를 내두를 정도로 사치스러운 것들로 그득 차 있는 공간은 본디 노이슈타인의 왕좌를 가진 자만 누릴 수 있는 영광이었으나, 이제 그 영광은 타국에서 온 지배자의 것이 되어버렸다. 알리시아는 조심스럽게 침대에 걸터앉았다. 값비싼 솜을 듬뿍 채운 침대는 푹신했다. 숨 죽은 짚을 넣어 만든 그녀의 침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급품이었다. 알리시아는 몇 번 침대에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다가 낯선 감각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바닥에 주저앉았다. 침대 몸체에 등을 기댄 채, 창유리에 비치는 제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몸을 웅크렸다. 유독 새빨갛게 물든 노을을 보고 있자니, 열린 창문 틈새로 부는 서늘한 바람에서조차 피비린내가 나는 듯했다. 도대체 왜 자신이었던 걸까. 노이슈타인 공주들의 미모는 이국에서도 소문이 자자하던 정도로 유명한 미인들이었다. 단지 여자가 필요했다면, 제 위의 언니들을 살려두는 편이 나았을 거다. 공주들 중에서도 제일 가는 미인이었던 엘레나라면 모를까, 노이슈타인의 공주라는 이름이 부끄러울 정도로 초라한 알리시아를 선택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카벨리누스는 그 아름답던 엘레나를 단두대에 세웠고 알리시아를 침대로 불렀다.

    ‘하긴, 내가 살인마의 생각을 어떻게 알겠어.’

    알리시아는 눈을 감았다. 등에 느껴지는 침대 몸체는 딱딱하고도 차가웠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그녀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 * *

    “전하, 그 여자 말입니다…….”

    “그 여자?”

    카벨레우스가 턱을 괸 채로 서류에 서명했다. 대규모의 숙청 이후, 많은 이들이 고분고분해졌다. 애당초 모든 이들을 죽일 수 없는 노릇이니 이제부터는 슬슬 타협을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노이슈타인의 공주요.”

    가제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명하던 카벨레우스의 손이 멈췄다.

    “그녀가 왜.”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가제프는 절 바라보는 금색 눈동자에 어색하게 웃었다. 카벨레우스를 모신 지 제법 시간이 흘렀음에도 상관을 상대하는 건 썩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제든 사냥감을 물 준비가 되어있는 짐승의 눈을 한 사내가 카벨레우스 폰 슈바르한 블랑셰였다. 블랑셰 제국에서 그 이름의 의미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슈바르한의 늑대, 북부의 지배자, 피에 미친 살육귀. 무수한 별명이 붙는다고 한들, 그 이름이 카벨레우스의 혈통을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카벨레우스는 혹한의 땅이라 불리는 슈바르한의 지배자인 동시에, 블랑셰였다. 선황제의 둘째 아들이었고, 현 황제의 하나뿐인 형제였다. 그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고귀한 혈통은 변치 않는 법이었다.

    “지금 어딨지.”

    “일단 전하의 침실로 올려보냈습니다.”

    “침실?”

    카벨레누스의 목소리가 다소 낮아졌다. 하나 그것은 아주 미세한 차이라서 충직한 부관조차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취하실 게 아닙니까.”

    가제프가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아름답던 노이슈타인의 공주들을 표정 변화 없이 전부 단두대에 올렸던 카벨레누스였다. 그가 초라한 여자에 흥미를 갖는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카벨레누스였다. 타고난 지배자는 원하는 것은 전부 손에 쥘 자격이 있었다.

    “그럴 생각은 없었다만.”

    “죄송합니다, 전하.”

    딱 잘라 말하는 카벨레누스에 가제프는 재빨리 허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미욱한 제가 너무 앞서나간 모양입니다. 그럼 지금이라도 침실을 정리하게끔 하지요”

    카벨레누스는 두 번 이상 말하는 걸 싫어한다. 기껏 준비한 게 물거품으로 돌아갔다는 것에 아쉬움을 느끼기보다는 서둘러 노이슈타인의 공주를 치우는 편이 낫다. 가제프는 하인을 부르기 위해 몸을 돌렸다.

    “잠깐.”

    그 순간, 침묵을 유지하던 카벨레누스가 고개를 까닥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가제프는 주군의 심기를 파악할 수 없어 잠자코 자리에 서 있었다.

    “여기로 데려와.”

    카벨레누스가 입을 뗀 건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이곳으로 말입니까?”

    “아니.”

    카벨레누스는 잠시 턱을 매만지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직접 가지.”

    북부의 주인이 망국의 공주 따위를 보러 직접 움직인다고? 가제프는 반사적으로 미간을 좁히며 카벨레누스의 눈치를 살폈지만 굳은 사내의 얼굴에선 도무지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 * * 침대를 두고 왜 저런 꼴로 자고 있는 거지? 카벨레누스는 침대 바닥에 웅크린 채 잠이 든 알리시아를 발견하고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쌕쌕 잠이 든 알리시아가 입고 있는 건, 속이 다 비치는 얇은 침의가 전부였다. 누가 봐도 하룻밤을 위한 준비된 여자였다.

    ‘이 여자는 단 한 번도 평범한 꼴을 못 보여주는군.’

    이런 치장을 한다는 게 무슨 뜻인 줄 금세 눈치챘을 텐데, 여자는 태평하게 제 조국을 멸망시킨 사내의 침실에서 잠들었다. 첫 만남 때부터 느꼈으나 눈앞의 여자는 확실히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알리시아 노이슈타인.”

    아마도 그 이름이었던 것 같다. 카벨레누스는 가제프에게 들었던 이름을 떠올리면서 삐딱하게 턱을 괬다. 그 순간, 감겨있던 알리시아의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잠에 취한 채 몽롱한 여자의 눈동자는 여전히 예쁜 구석이라곤 없었다. 녹슨 쇠처럼 초라하고 볼품없는 색이었다. 그렇지만 목소리는 제법 나쁘지 않다. 잠결에 목이 잠겨 낮게 울렸음에도 웅얼거리는 알리시아의 목소리는 종이 울리는 것처럼 맑게 사내의 귀에 꽂혔다. 그래서였다, 카벨레누스가 말없이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던 건.

    “…….”

    “…….”

    알리시아는 절 향한 따가운 시선에도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몇 번이고 눈을 껌벅거리다가 번뜩 두 눈을 떴다. 가는 동공이 돋보이는 황금색 눈동자의 기이한 색은 여전히 낯설게만 느껴졌으나, 그것을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흡.”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려던 알리시아는 등에 닿은 침대 몸체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재빨리 입을 다물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언제 왔, 아니, 아니,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몇 번이고 달싹거리던 알리시아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거칠게 박은 등이 욱신거렸지만 절 내려다보는 시선에 온 정신을 빼앗겨 아픔을 느낄 새도 없었다.

    “잘 자더군.”

    카벨레누스는 눈으로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고 있는 알리시아를 보면서 고개를 삐딱하게 세웠다. 알리시아는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사내를 어찌 대할지 몰라 괜한 입술만 잘근거리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는 숨을 삼켰다. 보고 있다. 두 개의 태양을 품은 듯한 눈동자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인지한 순간, 알리시아의 두 뺨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카벨레누스의 시선은 알리시아의 입술에 닿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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