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1)화 (1/164)
  • 1화. 눈이 마주쳤다

    2020.03.05.

    눈이 마주쳤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알리시아는 반사적으로 두 팔을 벌려 아이를 끌어안았다. 쿵쿵.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이 제 것인지, 뜀박질을 하다 온 아이의 것인지 그녀로선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아이를 안은 알리시아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역시 그대의 아이였나.”

    사형선고처럼 떨어진 목소리에 알리시아는 일순간 눈앞이 아찔거림을 느꼈다.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땀방울의 감각이 유독 섬찟해 자꾸만 몸이 움츠러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무작정 달려서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하나, 제 품에는 아이가 있었다.

    “뭐, 상관없지.”

    사내가 성큼성큼 알리시아를 향해 걸어왔다. 알리시아는 무의미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사내에게 보이지 않도록 어설프게 아이의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붉은 기가 감도는 갈색 머리와 잿빛 눈동자를 물려받았음에도 아이는 그녀가 아닌, 다른 이를 더 닮아 있었다. 사내가 그 사실을 알아차릴까 두려웠다.

    “알리시아.”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도 두 뺨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 같아 알리시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과거의 알리시아는 사내가 저런 식으로 제 이름을 불러주는 걸 좋아했다. 그럴 때마다 무심한 사내의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미소가 감돈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제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더라도 웃어주지 않겠지만.

    “내 앞에서 고개 숙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단단한 손이 알리시아의 턱을 들어 올렸다. 피부에 닿은 타인의 체온에 알리시아는 괜히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눈가가 시큰거려 눈에 힘을 주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명령이 익숙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그녀에게 닿았던 사내의 손길은 예나, 지금에나 변함없이 조심스러웠다. 그 사실에 자꾸만 목이 메어왔다.

    “아이 앞이에요.”

    이제 잊을 만도 하건만, 익숙해진 손길은 너무도 쉽게 과거의 기억을 되살린다. 알리시아는 억지로 사내의 손을 밀어냈다.

    “내가 뭘 했다고.”

    진짜 하고 싶은 건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사내의 입매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돌아가세요. 이제와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어요.”

    알리시아는 사내의 시선을 피했다. 그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곳에 꽂혀있었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녀는 더욱 목이 탔다.

    “달라질 게 없다?”

    사내가 웃었다.

    “하, 그래. 맞아,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지.”

    사내의 양손이 알리시아의 어깨를 꽉 쥐었다. 알리시아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녀의 얼굴에 쏟아지는 시선은 지독하리만큼 집요했다.

    “그대만 돌아오면.”

    사내의 입술이 그를 밀어내려는 알리시아의 손등에 닿았다. 알리시아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돌리려고 했으나 소용없었다. 그녀는 그 입술이 선사했던 온기 또한, 여전히 잊질 못했다.

    “돌아가자, 알리시아.”

    사내의 손이 알리시아의 뺨을 어루만졌다. 오랫동안 검을 잡아 검의 손잡이 모양대로 못 박힌 손은 그의 신분과 어울리지 않게 거칠었고, 희미하게나마 쇠 냄새가 났다.

    “그럴 수 없어요.”

    “왜지.”

    “아이가 있어요.”

    “아이 따위가 신경 쓰였으면 이렇게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사내의 눈동자가 아이를 향했다. 서슬이 퍼런 시선에 알리시아는 좀 더 아이를 제 쪽으로 끌어안았다.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저는 아이에게 부끄러운 부모가 되고 싶지 않아요. 전하께는 이미 부인이 있으실 테고…….”

    “부인?”

    알리시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내가 이를 으드득 갈며 그녀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입술에 닿은 타인의 숨결에 일리시아는 반사적으로 숨을 삼켰다. 입술을 쓸어내리는 사내의 숨이 유난히도 뜨겁게 느껴졌다.

    “하! 그래. 오늘부터 부인이 생길 예정이긴 하지.”

    사내는 입매를 일그러트린 채로 알리시아를 노려봤다.

    “가제프.”

    “네, 주군.”

    “아이를 데려가.”

    알리시아가 사내의 말뜻을 이해하기 전에 그가 먼저 한 손을 올렸다.

    “엄마!”

    “미카엘!”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아이가 울먹거리며 어미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알리시아는 멀어지는 아이를 쫓으려 했지만, 이내 단단한 팔에 막혀야 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돌려줘요! 내 아이예요! 내 아들이라고요!”

    “걱정하지 마. 죽이진 않을 테니. 이제부터 고귀한 핏줄이 될 아이를 함부로 할 수 있나.”

    “카벨레누스!”

    “……나는 이런 상황이 되어야만 그대에게 내 이름을 들을 수 있는 모양이군.”

    사내는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삐딱하게 세웠다. 알리시아는 입술 꽉 깨문 채로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나는 결정을 번복하지 않아. 아이를 되찾고 싶으면 내 아내가 돼. 그대가 내게서 아이를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야.”

    “……그 아이가 누군 줄 알고요?”

    “그딴 게 중요했으면 이렇게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카벨레누스.”

    알리시아가 물기 어린 눈으로 사내의 팔을 잡았다. 그가 보내는 싸늘한 시선은 익숙하지 않았으나 아이를 생각하면 피할 수 없었다.

    “다른 사내의 아이라도 상관없어. 피가 섞이지 않았더라도, 설령 역적의 자식이라도 내 아이로 키워주지.”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를 전하의 핏줄로 키우시겠다고요?”

    “그래.”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 알리시아는 숨 쉬는 것도 잊고 눈앞 사내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 순간에도 그녀를 오롯이 담아낸 황금색 눈동자는 여전히 태양처럼 눈부셨다. 그 찬란함에 눈이 멀어버린 지난 세월처럼.

    “더는 아이 핑계를 대며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

    알리시아의 어깨를 움켜쥔 사내가 굶주린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나는 지금도 내게서 그대를 앗아간 저 작은 생명체를 으스러트리고 싶은 걸 겨우 참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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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리시아는 밀려드는 울음을 삼켜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 굳은살이 징처럼 박힌 커다란 손에 잡힌 살갗이 덴 듯 뜨거웠다. * * * 그 해는 유난히도 붉은 것들이 많았다. 활활 타오르는 횃불과 함께 찾아든 기마부대를 시작으로 가물다 못해 쩍쩍 금이 간 대지에는 빗줄기 대신 핏물이 흘렀다. 챙챙 울리는 날카로운 날붙이 소리에 등골이 서늘하다가도 뒤섞인 비명과 함성에 정신이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부랴부랴 갑옷을 챙겨입은 노이슈타인의 기사들은 적들과 맞서 싸웠으나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이미 알고 있었다. 반항은 무의미했다. 날붙이를 맞댈수록 실력 차는 확실했고 승패는 더욱 그랬다. 철갑옷을 뒤집어쓴 말을 탄 기마부대를 이끄는 건 슈바르한의 늑대, 카벨레누스 폰 슈바르한 블랑셰였다. 그는 단 한 번도 지는 싸움을 한 적이 없었다. 카벨레누스가 하늘을 향해 검을 번쩍 들어 올렸다. 검신이 태양 아래 금빛으로 빛났다. 지금껏 수도 없이 휘둘렀음에도 그의 검에는 핏방울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병사들의 함성이 높아졌다. 카벨레누스가 지나간 자리에는 더는 적이라 불릴 만한 존재가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핏물이 끝없이 흘렀지만, 무감각해진 후각에선 아무것도 느껴지 지 않았다. 쌓이는 시신만이 시간의 흐름을 말할 뿐이었다. 싸움이라기보단 학살에 가까운 전쟁이었다. 노이슈타인의 왕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제 병사들을 보며 절망했고, 금은보화를 품에 안은 채 가신과 식솔들을 모두 버리고 홀로 도망치다가 얼마 못 가 하녀의 고발에 꼬리를 잡혔다. 슈바르한의 늑대는 오직 저만은 살려달라 매달리던 왕의 목을 베고 그것을 성 꼭대기에 매달았다. 한 나라를 다스리던 왕의 마지막치곤 허무한 결말이었지만, 역사는 승자의 것이었다. 오백 년의 명맥을 자랑하던 노이슈타인 왕가는 단 하루 만에 역사 속에서 지워졌고, 몰락한 왕가의 성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사형 집행을 알리는 종소리가 퍼졌다.

    “집행-!”

    사형집행인의 외침이 들릴 때마다 단두대 밑으로는 미처 수습하지 못한 시신들이 목과 몸이 잘린 채 나뒹굴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죽음의 공포에 침묵했다. 그들은 내일 단두대를 구를 시신이 제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왕궁을 점령한 이국의 사내에겐 자비라곤 없었다. 그는 손 하나로 모든 일을 정리하는 법을 알았다. 왕좌에 오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카벨레누스의 손이 들렸다 내렸다 할 때마다 삶과 죽음이 극명하게 갈렸다.

    “다음.”

    툭 하고 내뱉어진 목소리는 무미건조했으나, 일부러 언성을 높이며 욕설을 퍼붓는 것보다 훨씬 위협적이었다. 병사들은 재빨리 다음 차례의 포로들을 끌고 와 카벨레누스의 앞에 무릎 꿇게 했다. 꽥꽥 소리를 지르던 포로들은 처형을 알리는 종소리 횟수를 들을 때마다 말수가 없어져 어느 순간부터는 털을 다 뽑아놓은 닭처럼 고분고분해졌다. 카벨레누스는 표정 없는 얼굴로 쭉 포로들을 살폈다. 왕좌 옆에 서 있던 그의 보좌관, 가제프는 포로들의 신분과 죄목을 차분한 목소리로 읽어나갔다. 은근히 눈알을 굴리며 분위기를 살피는 포로들에겐 아직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엿보였다. 그들은 앞선 포로들이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 알지 못했다. 숙청이 시작된 이래, 카벨레누스의 손은 단 한 번도 들린 적이 없었다. 병사들 사이에선 그가 왕성의 모든 씨를 말리고서야 축배주를 마시기 위해 손을 올릴 거라는 우스갯소리가 알게 모르게 퍼지고 있었다.

    “잠깐.”

    포로들을 내려다보던 카벨레누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왜 그러십니까.”

    종이에 적힌 포로의 이름 옆에 당연하게 ‘사형’을 적으려던 가제프는 손을 멈추고, 제 주군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카벨레누스의 시선 끝에는 여자가 있었다.

    “거기, 너. 이름이 뭐지?”

    여자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달달 떨리는 손을 감추려는 듯 억지로 손에 힘을 줬다. 품이 넉넉한 옷을 입었음에도 감춰지지 않은 앙상한 그녀의 몸은 가여워 보일 지경이었다.

    “이름을 물었을 텐데.”

    주군의 기색을 눈치껏 살핀 가제프가 재빨리 여자의 이름을 확인해 카벨레누스에게 언질을 줬다. 그럼에도 카벨레누스는 부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여자에게 시선을 뗄 줄 몰랐다. 가제프는 상관의 낯선 행동에 남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미인들의 유혹에도 무심했던 카벨레누스가 관심을 가진 것치고 여자는 평범했다. 흐릿한 이목구비는 전형적인 미인상과는 달랐고, 붉은 기가 감도는 갈색 머리나, 잿빛 눈동자 역시 볼품 없어 특별히 눈에 띄는 구석도 없었다.

    “노이슈타인의 공주는 입이 없나 보군.”

    남다른 게 있다면 여자가 성벽에 효시된 왕의 막내딸이라는 사실뿐이다. 가제프는 여자에 관한 내용이 적힌 종이 끝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알리시아 노이슈타인. 초라한 몰골 탓에 하녀로 분류되었다가 나중에야 신분이 드러나 뒤늦게 재판에 오른 공주. 화려하게 치장한 형제들과 다른 모습을 한 여자는 어찌 지금껏 목숨을 부지했으나, 이제 그 운도 끝이었다. 그녀에 주어진 미래는 제 아비나,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형장의 이슬이 되는 것뿐이었다.

    “없어요. 그런 거.”

    카벨레누스의 집요한 시선에 한참을 망설이던 알리시아가 짜내듯 목소리를 냈다.

    “없다?”

    카벨레누스가 고개를 삐딱하게 세웠다. 알리시아는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죽일 거잖아요.”

    잔뜩 겁에 질린 창백한 낯을 한 채로 할 말은 아니었으나, 알리시아는 목소리를 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떨고 있음에도 카벨레누스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카벨레누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착각이 아니었다. 그는 여자를 알고 있었다.

    “왜, 내가 죽일 거라고 생각하지?”

    카벨레누스는 힘줄이 바싹 선 알리시아의 손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의 손은 공주라는 체면에 맞지 않게 거칠었다.

    “그야…….”

    알리시아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한참 말을 고르다가 짧은 숨과 함께 겨우 말을 이었다.

    “전부 죽였잖아요.”

    “전부는 아니지.”

    아직은. 자신만만하다 못해 오만한 시선이 알리시아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었다.

    “살고 싶나?”

    “그렇다고 하면 살려줄 건가요?”

    알리시아의 눈동자에 미약하게나마 생기가 돌았다.

    “그대 덕분에 왕을 잡은 건 사실이니, 아비를 고발한 비정한 딸에게 내릴 자비 정도는 있지.”

    제 목숨이 아무리 귀해도 아비를 팔아먹을 줄이야. 도망친 노이슈타인의 왕을 고발한 하녀가 다름 아닌 공주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가제프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렇다면 성에 있는 하인들을 살려주세요.”

    “하인?”

    “왕족도, 귀족도, 심지어 무력적으로 대항할 힘도 없는 하인들에게 인질로서의 가치는 없죠. 왕궁에 있는 노이슈타인인들을 전부 죽일 게 아니라면, 그들만은 살려주셨으면 해요.”

    “나는 그대의 목숨에 대해 말한 것 같은데.”

    “망국의 왕족을 살려봤자, 후환만 될 뿐이죠.”

    웃어? 알리시아의 입가에 옅게 돈 미소에 카벨레누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대의 목숨과 하인들의 목숨을 바꾸라고 하면 바꿀 건가.”

    “그럴 수 있다면요.”

    알리시아가 카벨레누스에게 겁먹지 않는 건 아니었다. 다른 포로들이 그렇듯, 그녀 역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한데 눈앞의 공주에게는 다른 이들과 좀 다른 구석이 있었다. 그 점이 카벨레누스의 심기를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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